[고린도전서 10장] 우리의 거울이 되어

by 손재호 posted Aug 07,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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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손재호
성경본문 고전 10:1-13
강설날짜 2013-08-07

2013년 고린도전서 공부

 

우리의 거울이 되어

 

말씀:고린도전서 10:1-13

 

오늘부터 우리는 고린도전서 10장 말씀을 공부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말씀은 8장에서부터 10장까지 계속되는 우상의 제물과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사도 바울의 권면의 말씀 중에 마지막 말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과 그 거룩하심을 아는 일에 힘써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과 그의 거룩하심을 알게 될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과 그 거룩하심을 아는 일은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알 수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자기들이 받은 은사 몇 가지를 가지고 모든 것을 다 받은 것처럼, 신앙에 있어서 다 아는 것처럼 교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12절에 보면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바울 사도는 그들의 교만을 지적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하나의 거울을 가져다줍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가져다주는 거울이 무엇입니까? 5-6절을 보면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가져다주는 거울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그들이 어떻게 실패하였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와 음행과 원망과 불신과 교만함의 거울을 들이대면서 이것이 바로 너희들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그들이 자기 자신들의 주제를 똑바로 알기를 원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 거울 앞에서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비추어 보기를 원합니다.

 

1-4절을 보면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고 합니다. 이 말은 이중 부정으로 아주 강한 긍정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너희가 꼭 알아야 한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곧 너희의 조상들이 어떠하였는가를 알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 조상들이 출애굽하기까지 얼마나 엄청난 기적과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습니까? 그들은 열 가지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애굽과 이스라엘을 구별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특히 마지막 장자 재앙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린양의 피를 바르고 살아남았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러한 출애굽의 내용들을 생략하면서 이미 출애굽 이후의 기적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출애굽도 기적이지만 출애굽 이후도 계속되는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의 역사입니다. 출애굽기 13장과 14장에 보면 그들은 구름 아래 있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났습니다. 우리는 흔히 홍해를 건너고 광야에서 구름기둥 불기둥이 이스라엘을 인도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성경에서는 홍해 바다를 건너기 전에 이미 구름 기둥 불기둥으로 그들을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애굽 군대의 추격을 구름과 흑암이 밤새도록 격리시켜 이스라엘을 보호하셨습니다. 그래서 애굽 지역은 흑암에 사로잡혀 있고, 이스라엘 진영은 밤이 낮처럼 밝았습니다. 그동안에 홍해바다가 갈라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갈라진 홍해바다를 육지 같이 건넜습니다. 이것을 지금 바울 사도가 “그들은 구름 아래 있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났다”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2절 말씀을 다시 보면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라고 합니다. 바울은 이 구름과 바다 속을 지난 것을 세례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 곧 이스라엘 민족 전체에게 한꺼번에 세례를 베푸신 것입니다. 그들로 다 함께 신령한 식물과 하늘로서 내리는 만나를 먹여 주셨습니다. 다 같은 신령한 반석에서 신령한 음료를 마시게 하셨습니다. 그 반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출애굽한 사람들은 모두 다 그 기적을 맛보고 체험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수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아니하신 것입니다. 출애굽할 때 장정만 60만 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자와 아이들을 합하면 적어도 2백만 명은 족히 넘었을 것으로 추산이 됩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은 단 두 명뿐이었습니다. 물론 가나안 정탐 시에 20세 이하는 예외가 되었습니다만 성인으로서 출애굽하여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 외에 다수를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 놀라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셔서 어떻게 하든지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천국에 들여보내시려고 하는 하나님입니다. 교회사를 보면 이단으로 정죄된 과거 알미니안들이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목사들이 이렇게 설교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수를 기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9장에서 우리가 본대로 바울은 한 명이라도 더 구원하려고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되었습니다(고전 9:19-23). 그리고 디모데전서 2:4절에서도 보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주의해서 이해해야 하는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모든 사람이란 새 언약 안에서 외적인 조건을 따지지 않는다는 면에서의 모든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든지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들으면 기절할 일입니다. 아브라함의 혈통이요, 할례를 받아야 하며,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을 하였는데 누구나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니 얼마나 싫은 것입니까?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노아 홍수 때도 구원받은 자가 단 8명뿐이었습니다. 가족 수로는 한 가족뿐입니다.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고향 회당에서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누가복음 4:16-21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 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61:1절 이하의 말씀을 읽으시고 “오늘날 너희에게 응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도무지 믿지 않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엘리야 때에 3년 6개월의 가뭄 속에 이스라엘의 수많은 과부들이 있었지만 시돈 지역의 사렙다 과부 한 사람에게만 보내심을 받았다는 말씀과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의 수많은 문둥병자가 있었지만 아람 군대의 나아만 한사람만 고침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눅 4:22-27). 누가복음 4:28-29절에 보면 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예수님을 언덕에서 밀어뜨려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그 말씀은 하나님께서 다수를 기뻐하지 아니하신다는 말씀과 같은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날 열심히 전도하여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구원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자고 하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은 얼마나 기분 나쁜 말씀으로 들리겠습니까? 그러면 전도하지 말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전도란 무엇을 전하여야 합니까? 복음을 전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다수를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말씀도 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천국문은 다수결로 가결하는 곳이 아닙니다. 민심이나 여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뜻만이 세워지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개인의 구원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많은 이런 말씀들은 단 한 말씀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도 취사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부담 되는 말씀은 넘어가고 좋은 것만 취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었고,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모습이었고,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수를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광야에서 다 엎드려지게 하였다고 말씀드리면 당장 마음에 생각하기를 그러면 광야에서 죽은 사람은 천국가지 못하고 다 지옥 갔습니까?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 자체가 무엇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고 싫어하시는가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구원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죽었다고 해서 다 지옥에 가지는 않습니다. 모세와 아론도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면 그들도 천국 가지 못 하였겠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모세가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은 것은 율법과 믿음의 차이를 보여주기 위함인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개인 구원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전체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이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거울과 경계로 기록되었으니 어떻게 하면 멸망하지 않고 천국에 들어갑니까? 7-13절을 보면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멸망치 않고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이 말씀처럼 ‘우상숭배하지 말자, 간음하지 말자, 주를 시험하지 말자, 원망하지 말자’라고 하기만 하면 됩니까? 만약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면 모세의 율법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게 어떻게 거울이 되고 경계가 되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세상에서의 거울과 경계는 과거의 역사를 보고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보고 고치고자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인간도, 어떤 국가도 과거의 역사를 보고 고친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나라와 나라가 싸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 자기들의 국익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거 그런 역사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오늘날 자신들의 국익을 버리는 나라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다른 나라는 망해도 우리나라는 잘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마음이 종교적인 욕구로 바뀌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른 사람은 구원 받지 못해도 나는 구원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울이 되고 경계가 된다는 것은 이런 의미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모세가 시내 산에서 40일간 하나님의 율법을 받고 있는 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산 아래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자기들을 구원한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금송아지를 만들 때 ‘우리를 위하여 신을 만들라’고 하였습니다. 출애굽기 32:1절에 보면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볼 때 결국 자기를 위하여 만들어지는 신이 우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어떤 형상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하여 하는 모든 것이 다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모든 것이 다 우상 아닌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우리가 종교를 왜 가집니까? 왜 예수를 믿습니까? 왜 하나님을 찾습니까? 다 나를 위해서가 아닙니까? 우리가 종교를 갖든, 예수를 믿든, 하나님을 찾든 그 모든 것이 다 나를 위하여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다 우상숭배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복이 되든지, 구원이 되든지, 사후의 천국이 되든지, 상급이 되든지 간에 모두가 다 우상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상이 아닌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6:22절에 보면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주께서 일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숭배 하는 자가 되지 말라”는 이 말씀은 우리가 우상을 숭배하지 말자가 아니라 내 자신이 바로 우상숭배자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고린도교회 교인들만을 두고 한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바로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간음도 마찬 가지입니다. 이방 여인의 미모에 끌려가자 그들의 신들을 제사하는 축제에 참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뒤는 먹고 마시고 뛰어노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거기서 먹고 마시고 뛰 논 것이 바로 음행입니다. 모든 우상숭배는 거의 다 음행과 연결이 됩니다. 우상숭배가 신을 자기들을 위하여 만드는 것이라면 음행이란 자기 몸의 쾌락을 위하기에 우상숭배와 음행은 결국 다 자기를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인 것입니다.

 

성도란 우리의 몸이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피로 값 주고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은 주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교회로 모였다고 하면서 자기 몸만 챙기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요, 음행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는 말씀 앞에서 어느 누가 자유로울 수가 있겠습니까? 우상숭배의 거울과 음행의 거울로 비추어 보면 그 안에 누가 나오겠습니까? 바로 내 자신의 얼굴이, 곧 우리 자신들이 그 안에서 춤추고 있는 것이 보이게 될 것입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주를 시험하고 원망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늘 하던 일이었습니다. 길이 좋지 않다고, 물이 없다고, 만나만 준다고, 고기가 없다고, 그들은 늘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그 원망과 불평은 결국 애굽이 좋았다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먹던 고기, 마늘, 파, 부추, 수박 등등 그런 것이 좋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가는 것이 참으로 생명의 길인데 그들은 늘 그 길이 싫은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원망과 불평이 어디에 있습니까? 애굽을 그리워하고, 애굽식으로 살려고 하니 원망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실력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갈 자는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감당치 못할 시험을 허락지 아니하십니다. 택하신 자에게는 피할 길을 주십니다. 어떻게 피할 길을 주시는 것입니까? 신명기 8:2-3절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주리게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십니다. 그 길이 피할 길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알게 하시는 길이 우리가 피할 길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감사하게 만드시고, 그만을 사랑하게 만드시는 것이 피할 길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늘 거울로 삼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만족하며, 감사하며, 오직 우리 주님만을 사랑하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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