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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손재호
성경본문 고전 15:29-34
성경본문내용 (29)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30)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31)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32)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33)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34)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강설날짜 2013-12-11

2013년 고린도전서 공부


나는 날마다 죽노라


말씀:고린도전서 15:29-34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인생의 목표는 세상의 영광이 아닙니다. 주님의 재림을 통해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 주님과 함께 영원토록 영광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영광을 누리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도리어 우리 주님과 함께 고난 받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 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하나님이 만유의 주가 되심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유의 주가 되신다는 사실은 오직 그를 믿는 자들만 아는 비밀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과 함께 모든 인생들이 다 부활하게 될 때에는 믿는 자나 믿지 아니하는 자나 다 예수님이 만유의 주가 되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 모두가 구원함을 받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을 믿는 자는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지만 주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주님의 주되심을 인정하고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 복입니다. 이것이 또한 하나님의 일이며, 하나님의 영광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에 이러한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제 다시 부활에 대하여 증거 하고 있는 것입니다. 29절 말씀에 보면 그 한 예로 죽은 자의 세례를 들고 있습니다. “너희가 죽은 자를 위하여 세례 받는 자들이 무엇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고 반문합니다.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이 아직도 분분 합니다. 죽은 자를 위하여 세례를 받는다는 말씀이 성경에서 이곳 한 곳에서만 나오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의 그 어떤 기록에도 죽은 자의 세례에 대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추정하기를 예수님을 믿다가 죽었는데 세례를 받을 기회가 없어서 죽은 자를 위하여 세례를 베풀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미신적이고, 이방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바울 사도가 나중에 그것을 바로 잡았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바로잡는 중에 어떤 문제들은 직접 가서 바로잡겠다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1:34절 말씀에 보면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 찌니. 이는 너희의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 남은 것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귀정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바울 사도는 그 남은 것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귀정하리라 곧 자신이 고린도교회에 직접 가서 그 남은 문제를 바로잡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에 기초해서 학자들은 바울이 직접 가서 바로 잡을 때 이 문제 곧 죽은 자의 세례도 바로 잡았을 것이라고 추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 근거로 그 뒤로는 죽은 자의 세례 문제가 전혀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바울 사도가 오늘 본문에서 죽은 자의 세례를 부활의 증거로 삼고자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들이 잘하고 있다고 이 말씀을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부활이 없다면 그런 행위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의미로 죽은 자의 세례를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에 나와 있는 말씀이라고 해서 무조건 그것은 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앞뒤 보지도 않고 성경에 있는 내용이라고 우기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욕망에 사로잡혀서 성경을 보기 때문에 그렇게 이용할 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이란 우리가 다시 살아서 영생을 얻는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지 우리의 마음을 좋게 하기 위하여 죽은 자를 위하여서도 세례를 받고, 기도도 하고, 헌금도 하고, 공적도 쌓으면 연옥에 있는 자들이 천국으로 올라간다는 그런 유혹에 넘어가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교리에 근거해서 교인들을 미혹한 것이 중세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것이며,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임을 우리는 어떤 성경을 보더라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를 좋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이 우선이 아닙니다. 우리가 편하고 기분 좋은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이란 창조주를 위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를 위하여 사용되어지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본분인 것입니다. 골로새서 1:16-18절 말씀을 보면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예수님을 위하여 만물이 창조 되었습니다. 그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이십니다. 즉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지금은 그의 몸된 교회만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가난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실패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죽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만물의 주가 되시는 분이 우리의 머리가 되신다는데 무엇이 부족합니까? 몸이란 머리에 종속 되어 있는 것입니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죠. 머리가 나쁘면 우리의 몸이 고생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머리가 좋으면 몸도 덜 고생합니다. 또한 머리가 영광스러우면 몸도 영광스럽게 됩니다. 그러나 머리가 없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죽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전부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만유의 주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0-31절 말씀을 보면 바울 사도는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부활의 주님, 곧 우리의 머리가 되신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때마다 위험을 무릅써도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합니다. 왜 날마다 죽는다고 합니까? 죽어도 상관이 없는 세계 곧 부활의 세계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에게 왜 사느냐고 물어보면 무어라고 대답합니까? 대부분 먹고 살기 위해서 산다고 합니다. 자기를 살리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태어나서 산다고 생각하니 자기를 살리는 방향이 진리 인양 여기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지 않아야 할일을 하였을 때 궁색한 변명이 무엇입니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생존권이 가장 중요한 권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죽는다는 말, 곧 끝이라는 말은 금기시 되고 터부시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전도서 7:1-4절 말씀을 보면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전도서 기자는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일은 축하 하는데 죽음에 대해서는 어떻게 합니까? 축하 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애통하며 슬퍼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든 사람이 어리석어서 그렇습니다.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가 있습니다. 왜 그것이 지혜로운 자 입니까? 모든 사람의 결국이 죽음임을 알고 있기에 지혜로운 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죽음에서 인생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 사도는 무엇을 자랑한다고 합니까? 31절을 다시 보면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한다고 합니다. 그 단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날마다 죽는 것을 자랑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죽는 것을 자랑하는 것입니까? 부활의 세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고 즐기자고 할 것입니다. 32절 말씀에 보면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33-34절 말씀에 보면 바울 사도는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하는 자들에게 속지 말라고 합니다.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고 합니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33-34).

 

그런데 ‘나는 날마다 죽는다’라는 이 말씀은 세상에서 말하는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요,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라’는 말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필사즉생(必死卽生) 필생즉사(必生卽死)’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죽고자 함이란 결국은 자기를 살리는 것으로서 죽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죽음은 비록 죽을지라도 나라가 기억하고 백성들이 기억하여 후세에 충신의 반열에 오르는 죽음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위하여 죽는 죽음이란 어떤 죽음입니까? 세상에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죽음입니다. 가족에게서도 외면당하고, 마을에서도 배척받고, 나라에서도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십자가에 처형시키라고 고함을 지른 그 죽음에 함께 죽임 당하는 것이 예수님을 위하여 죽는 죽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가족들이 이해하였습니까? 제자들이 이해하였습니까? 모두가 힘을 얻고자 따라 왔다가 아무런 힘을 주지 못하고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자 그 십자가 앞에서 모두가 주님을 부인하며 돌아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주를 위하여 사는 모습은 바로 세상에서 죽는 모습인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8-9절 말씀을 보면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되었다고 합니다. 또 고린도후서 4:10-15절 말씀을 보면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기록한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 두 곳의 말씀만 보아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어떤 모습입니까? 죽는 모습입니다. 비참한 모습입니다. 날마다 죽음에 넘겨지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날마다 죽음에 넘겨진다’는 말은 죽으려고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주님께서 넘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사도라면 능력이 나타나고 세상에서 보란 듯이 권세와 영광이 나타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죽는 자의 모습으로 나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십자가의 증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예수님에게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 모든 세상의 자랑거리라는 것은 헛된 영광이며, 허상인 것입니다. 죄인인 인간의 실상이 저주받아 죽은 그 십자가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자기를 시작하지 않으면 전부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갈라디아서 2:20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합니다. 이제 자신이 사는 것은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산다고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부활을 믿는 자의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나를 위하여 살지 않는다’는 것은 내 의지로 나를 위해서 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될 일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은 다 자기를 위해 곧 자기를 살리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말씀을 내가 주님을 위하여 목숨 바쳐 살면 영생을 얻는다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결국 나를 살리기 위하여 주를 위한다는 것이 됩니다. 마태복음 10:34-39절을 보면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우리가 노력해서 될 일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 자기백성을 오늘도 주님의 죽음에 합류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살려고 발버둥을 쳐도 결국은 죽음으로 끌려갈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부르는 십자가의 죽음은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사신분이 부르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날마다 죽음에 넘기십니다. 그러나 그 끝이 죽음이 아니라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부활의 세계로 이끌어 들이고 있는 것이 바로 날마다 죽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죽음에 넘기우는 일을 너무 큰 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주 사소하고 작은 일로서도 나타납니다. 전에는 죄인 줄도 몰랐는데 갈수록 자신의 죄의 깊이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다른 사람의 죄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죄로 인한 대신 죽으심임을 알고 믿게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생활 가운데서 날마다 자기 의와 자기 정당성을 가지고 분노하는 우리를 날마다 십자가에 넘기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앞에 서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 서게 하여 주시고, 날마다 주님의 죽으심에 넘기워지는 삶을 사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그 부활의 영광에 참예하는 복된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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