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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손재호
성경본문 유다서 1:17-23

2008년 유다서 공부
                                           사도들이 한 말을 기억하라
말씀:유다서 1:17-23

 

17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유다는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을 향하여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왜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부르는가 하면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로 인하여 한 형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랑은 우리가 평소에 사랑한다고 하는 말과 얼마나 대조적인지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한다는 말을 언제나 나를 중심으로 사랑의 밀도를 측정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사랑한다는 말은 나를 중심한 그런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확증이 되었습니다. 그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게 되는데 이것은 우리가 평소에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랑과는 전혀 다른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 안에는 신분이나 지위나 피부색으로 인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구약의 예를 들자면 다윗과 요나단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두 사람 다 여호와의 전쟁이 활과 칼에 있지 않음을 아는 사람들이기에 그 마음이 서로 연락되었습니다. 요나단이 죽었을 때에 다윗이 요나단을 위하여 시를 지었는데 사무엘하 1:26절을 보면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기이한 사랑이라고 합니다. 여인의 사랑보다 뛰어나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인간적으로 보면 서로 원수 사이, 서로 대적하는 사이였지만 그들의 사랑은 이런 관계를 뛰어 넘은 사랑으로 심히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 사랑은 단순히 인간적으로 서로 통하여 사랑한 그런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을 가운데 두고 한 사랑이었습니다.

 

유다는 이런 사랑으로 권면을 하는데, 그 첫 번째 내용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미리 경고한 내용들은 거짓 선생들이 나온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18절의 말씀은 베드로후서 3:3-4절의 내용과 너무 흡사합니다. 먼저 유다서 1:18절 말씀을 보면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치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후서 3:3-4절을 보면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소식이 어디에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유다서 1:18절과 베드로후서 3:3-4절 말씀이 흡사합니다. 아마 유다가 베드로후서 말씀을 인용한 것 같습니다. 하여튼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조롱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주님의 재림과 심판을 부정합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일부러 잊어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유다는 사도들이 미리 전한 말을 기억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거짓 선생들이 일어날 것을 사도들이 이미 말하여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은 우리들에게 거울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의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자신의 마음을 자꾸 비추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만이 아니라 바울 사도도 거짓 선생들에 대하여 여러 번 경고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0:29-31절을 보면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흉악한 이리가 외부에서도 오지만 내부에서도 나온다는 것입니다. 같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서도 거짓 선생들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도 사도행전에서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으로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유다는 이처럼 마지막 때에 기롱하는 자들, 즉 자기의 정욕대로 행하면서 예수님을 신실하게 믿는 자들을 조롱하는 자들이 나올 것이라고 합니다. 이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19절에 보면 “이 사람들은 당을 짓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기롱하는 자들의 특징은 당을 짓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들입니다. 당을 짓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자들을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무시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육에 속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당을 짓는다고 하는 것은 고린도 교회 안에서도 보면 여러 파당이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나는 베드로 파, 나는 바울 파, 나는 아볼로 파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파당에 대하여 바울은 한마디로 정리합니다. 누가 십자가를 졌느냐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3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를 지지도 않은 자들을 어떻게 자기중심의 자리에 두고서 그들을 따라 파당을 만들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서는 이보다 더한 모습입니다. 거짓 선생들이 자신들의 정욕대로 행하면서 자신들이 참으로 영에 속한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이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도 같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전 세계적으로 얼마나 많은 파당이 있는지 헤아릴 수조차 없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교단과 교파가 얼마나 많이 나누어져 있는지 수백 개가 넘습니다. 나누어질 때는 꼭 자기들이 진리라고 하고, 자기들이 정통성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신앙고백은 다 똑같이 합니다. 예를 들어 장로교회든, 감리교회든, 성결교회든, 순 복음이든 다 똑같은 사도신경을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나누어진 것입니까? 대부분 진리를 사수한다는 미명아래 자신들의 이해타산을 따라 나눠진 것입니다. 한국교회 분열사를 공부해 보면 우리나라 교회가 신학적인 문제 때문에 나누어진 것은 통합과 합동 딱 한번 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있는 것은 신학적인 문제라기보다는 다 자기 이해타산에 기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유다서의 말씀 앞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비추어 보면 회개할 일 뿐인 것입니다. 특히 오늘날은 신천지와 같이 자기들만 옳다고 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자기들만 복음을 바로 알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이단들 곧 거짓 선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들입니다.

 

20절을 보면 다시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라고 합니다. 거짓 선생들이 자신들이 영적인 지식을 가진 자라고 하지만 사실 그들은 육에 속한 자이며, 성령이 없는 자들이기에 자신의 정욕대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고 너희는 사도들의 말한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유다는 첫째로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라고 합니다. 거짓 선생들의 기초는 자기들의 지식이나 체험이나 감정들에 기초한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라고 합니다. 이 지극히 거룩한 믿음이란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믿음의 도가 단번에 주어졌다고 해서 그것이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1절을 다시 보면 부르심을 입고 하나님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극히 거룩한 믿음이란 거룩한 아버지, 거룩한 아들, 거룩한 영 곧 성령 하나님에 의하여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초란 바로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 위에 교회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기초란 없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12절에 보면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만이 우리의 믿음의 기초가 됩니다.

 

우리의 신앙이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지지 아니하면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은 것입니다. 반석 위에 세운 집은 무너지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모래 위에 세운 집은 그 무너짐이 심합니다. 건물의 기초가 부실하면 아무리 높고 멋있게 지은 건물이라고 하더라도 무너질 때는 그 무너짐이 심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7:24-27절에 보면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믿음의 기초가 어디입니까? 우리 자신의 믿음의 기초가 어디인지 오늘 말씀을 통해 다시 잘 점검해 보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단번에 주신 믿음의 되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우리 믿음의 기초를 굳게 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성령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꿈꾸는 자들이 자신들은 영적인 지식이 있다고 하면서 온갖 영적인 말을 한다 해도 사실 그들은 성령이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기도하라는 것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기도하는 것은 자기의 정욕대로 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3절에 보면 “너희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을 위하여 쓰려고 잘 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기도하는 것은 내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충만하심으로 기도하신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누가복음 22장에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 이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라고 합니다. 21a절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만 자기를 지킬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자기를 지키라고 한다면 자신을 스스로 지킬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얼마나 많은 유혹들이 있는지 헤아릴 수조차 없습니다. 그리고 그 유혹에 우리가 얼마나 취약한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 자기를 지킬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로마서 8:38-39절에 보면 이 세상의 그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 약속에 대한 믿음이 바로 우리가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는 것입니다.

 

넷째로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고 합니다. 21b절에 보면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영생에 이르는 길이 우리에게 달린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므로 영생에 이르도록 무엇을 바라보라는 것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스스로 지킬 수가 있고, 우리가 스스로 영생에 이를 수 있다면 결코 주님의 긍휼을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긍휼이란 불쌍히 여김인데 자신이 이루어낼 수 있다면 긍휼을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는 스스로 영생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긍휼을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22절에 보면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이 여기라”고 했습니다. 거짓 선생들의 유혹을 받아서 그들을 따라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의심이 일어나는 자들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자들을 볼 때 정죄하거나 판단하기 보다는 긍휼의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어떤 자들은 의심이 일어나지 않고 진리에 섰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실력으로 되었다면 그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아도 되겠지만 진리에 견고하게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 것도 주님의 긍휼로 인한 선물이기에 다른 연약한 자들에 대하여서도 긍휼로 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긍휼을 체험한 자들의 마땅함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형제를 대하는 태도는 어떻습니까? 나의 기준을 마련해 놓고서 도마 위에 많이 올립니다. 긍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아니 자기의 의를 가지고 천하를 다 심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자들은 야고보서 2:13절의 말씀을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자신이 긍휼을 입은 자라면 혹 의심이 있어 흔들리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그들을 긍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긍휼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우리는 의심하는 자들을 판단할 것이 아니라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도 의심하는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들을 긍휼히 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섯째로 또 어떤 자들은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고 합니다. 23절에 보면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이라도 싫어하여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고 했습니다. 지금 유혹을 받아서 넘어간 것입니다. 그러니 불에 타고 있는 것과 같은 자들입니다. 이들을 불에서라도 끌어내라는 것입니다. 이미 끝났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돌아올지 모르기에 불에서 끌어내는 심정으로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도 거짓 선생들에게 미혹되어 간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들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기도하며 불에서 끌어내어야 하겠습니다.

 

또 어떤 자는 그 육체로 더럽힌 옷이라도 싫어하여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이러한 영향력을 입을까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향하여서도 역시 긍휼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육체를 더럽힌 자를 그 옷이라도 싫어하여야 하지만 그러나 긍휼을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로마서 11:30-32절을 보면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에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고 했습니다. 구원 얻는 모든 사람이 긍휼로 구원을 얻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판단을 하려면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기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기도하고 무시로 깨어 기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들이 미리 전한 말씀을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유혹을 받고 있으면서도 유혹을 받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릅니다. 심지어 자신이 불에 타고 있으면서도 불에 타고 있는 줄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들이 전한 말씀을 늘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 말씀을 읽고 묵상 하여야 합니다.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사는 자들을 조롱하지만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누가 뭐라고 하여도 주님의 약속의 말씀대로 될 것을 기억하고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이와 같은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게 하여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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