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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성경본문 갈 2:1-10
성경본문내용 (1)십 사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2)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 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3)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4)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5)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6)유명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명한 이들은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7)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8)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9)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10)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강설날짜 2011-07-20

2011년 7월 20일 한결교회 수요강설
갈라디아서 제9강

 

우리의 가진 자유

 

말씀 : 갈 2:1-10

 

오늘은 “우리의 가진 자유”라는 제목으로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 자유가 무엇입니까? 자유란 외부로터 어떤 구속이나 얽매임 없이 자신의 마음의 원하는 대로 말하고 표현하고 행동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우리가 살면서 이 자유라는 것이 얼마나 필요하고 중요한 것인지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자유의 진영에 있는 우리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국민들은 이 자유에 대해 무관심합니다. 특히 오늘날 젊은 사람들이 더욱 그렇습니다. 그들은 자유가 얼마나 중요하고, 얼마나 필요한 것이며, 자유롭게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잘 모릅니다.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에 대해 감사함이 없고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이 자유라는 것이 없으면 얼마나 인간이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까? 옛날에 왕이 있을 때, 백성들은 왕이 무엇을 시키든 그 시키는 대로 해야 했습니다. 선한 왕이면 그래도 다행인데, 악한 왕이면, 온 국민이 고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왕정제도보다는 민주주의가 좋은 것입니다. 또한 얼마나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노예로, 노비나, 종으로 태어나서 자유 없이 고생하며 살다가 죽었습니까? 때로는 나라가 침략을 당해서, 우리나라가 일제치하에 있었을 때, 자유와 국권을 상실하고 식민지 생활을 하면서 얼마나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까? 그래서 많은 애국자들이 이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목숨 걸고 투쟁하고 희생했던 것 아닙니까? 한 유명한 미국의 독립 운동가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소원은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자유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며 싸웠고, 그 결과 자유 없는 삶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누리게 되었을 때 그들은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감격을 느꼈고 그 자유한 삶에 대해 감사함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의 가치를 아는 자들만이 계속해서 그 자유를 누리고 또 수호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투쟁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이 자유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자유로운 삶이 얼마나 기쁜 것이고 감사한 것인지 모릅니다. 옛날처럼 우리의 가진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서 목숨을 불태우려는 자들이 우리 젊은이들 가운데 과연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별로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이 자유는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의 투쟁과 희생을 통해서 지금 우리가 이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인데도, 그 자유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태어날 때부터 자유를 누려왔기 때문에 그러한 자유로운 삶을 당연시하고, 그것에 대한 감사함을 느끼지 못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것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고 싸워야겠다는 생각을 더더욱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제가 본문은 설명하지 않으면서 사설이 왜 이렇게 기냐 하면,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세상적인 자유의 가치나 그 행복에 대해서 사람들이 점점 무감각해지고 무관심해지고 소홀해지는 현상이 우리의 영적인 자유와 관련해서도 똑같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 정말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가 가진 영적인 자유에 대해서 얼마나 정확하게 바르게 인식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종에서 해방되어 자유하게 되었다고 말은 많이 하지만, 그리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예수님의 말씀도 잘 알지만, 그러나 정작 그 자유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무지한 것이 우리의 솔직한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우리가 어디서부터 자유를 얻게 되었고, 우리가 어떻게 이 자유를 얻었으며, 그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알고, 그 자유를 누림으로 인해서 감사하고 기쁨과 감격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까? 또 이 자유를 누리고 지속하기 위해 우리의 자유를 위협하는 세력들과 얼마나 투쟁하며 고군분투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이 세상 사람들이 자유에 무관심한 것처럼 우리도 솔직히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에 대해서 무감각하고 무관심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저도 오늘 본문 말씀을 연구하면서 저 자신이 얼마나 이 자유에 대해서 무지하고 무관심한 삶을 살았는지, 이 자유가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알지 못하고 지내왔는지 깨닫게 되었고, “내가 이 자유를 적극적으로 누리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이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했던 것보다 그 이상으로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자유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그 자유를 추구하며, 그것을 적극적으로 누리며, 그것을 위해 기꺼이 싸울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바로 이것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러한 영적인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서 바울이 얼마나 고군분투하며 수고하고 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바울은 자유의 복음을 위한 수고가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자신의 복음을 예루살렘 사도들에게 제출했습니다. 이 모습은 마치 직장 상사에게 보고서를 제출하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그러면 바울은 예루살렘 사도들보다 열등해서 그들에게 자신의 복음을 보고하고 허락받기 위해서 제출하는 것입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복음은 그리스도의 계시로 된 것으로서 그 누구로부터도 인정을 받거나 승인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바울의 복음이 하나님의 진리라는 것은 변함없이 그리고 확고히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사사로이 자신의 복음을 예루살렘 사도들에게 제출한 이유는 이 자유의 복음을 위한 자신의 달음질이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거짓교사들의 일관된 주장은 예루살렘 사도들의 복음과 바울의 복음이 다르다는 것이고, 또한 바울은 예루살렘 사도들보다 열등한 사도이고, 따라서 예루살렘 사도들의 복음을 따라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거짓교사들이 아무리 이렇게 거짓으로 속인다 해도 바울이 전한 복음에서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연약한 신자들은 바울의 복음과 예루살렘 사도들의 복음이 다르다는 말을 들으면 굉장히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고, 바울의 복음을 따라야 할지, 아니면 예루살렘 사도들의 복음을 따라야할지 고민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회를 사단은 결코 놓치지 않고, 거짓교사들을 통해서 교회를 뒤흔들었던 것이고, 그것이 갈라디아 교회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이방선교를 위한 모든 수고와 노력들이 물거품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복음과 예루살렘 사도들의 복음이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시켜줄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자신의 복음을 예루살렘 사도들에게 사사로이 제출했던 이유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루살렘 사도들은 바울과 교제의 악수를 나누었습니다. 바울의 복음과 자신들의 복음이 동일함을 확인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서로의 일치와 화합과 우정을 다짐했습니다. 이것은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의 모든 교회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그들이 자신들에게 아무것도 그에게 더해준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부탁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자들을 계속해서 생각해달라는 것뿐이었습니다. 더욱이 예루살렘 사도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유대인의 사도로 세우신 것과 동일한 권위와 동일한 방식으로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셨으며, 그에게 은혜를 주셨다는 것을 보고 깨달아 알았습니다. 자신들의 사도권과 마찬가지로 바울의 복음과 사도권의 권위 역시 하나님께 달려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영적인 시각으로 사도 바울을 봄으로써 그가 예루살렘 사도들과 동등한 사도임을 볼 수 있어야 하는데, 거짓교사들은 그것을 보지 못하고 인간적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사도들은 예수님의 공생애 시절 예수님과 함께 동거했던 특권적인 지위를 누렸던 진정한 사도이지만, 바울은 예수님을 보지도 못했고, 핍박자로 살다가 한참 뒤에 돌이킨 자이기 때문에 예루살렘 사도들보다 열등한 사도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순전히 외적인 조건이나 지위를 가지고서, 외모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6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명한 이들은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라고 하였습니다. (괄호부분의 “본래”라는 말은 “한때”, 또는 “과거에”로 바꾸어서 읽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 너희가 그렇게 자랑하고 내세우고 치켜세우면서 빙자하는 예루살렘 사도들이 그렇게 유명한 자냐? 그러나 그렇게 유명한 자로서 그들이 과거에 예수님과 함께 동거하는 그런 특권을 누렸다 하더라도 그것이 나의 사도됨과 복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하나님은 그런 외적인 조건(먼저 사도과 되었느냐, 나중에 사도가 되었느냐, 예수님과 함께 동거했느냐, 예수님을 보지 못했느냐 하는 조건들)과 지위를 가지고서 사람을 취급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이 사도로 쓰시고자 하시고 세우시면 누구든 세움 받아 쓰일 수가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사도권과 복음은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았기 때문에 예루살렘 사도들은 그저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수납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 그것을 자신들의 권위로 승인하고 자시고 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이들이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은 이 본문을 통해서 바로 자신의 사도권과 복음의 신적 기원을 다시금 증거함과 아울러 그것이 예루살렘 사도들로부터 지지를 받은 것임을 서술함으로써, 예루살렘 사도들의 복음과 바울의 복음이 다르다고 주장했던 거짓교사들의 주장을 완전히 무력화시킴과 동시에 자유의 복음이 훼방을 받지 않고 든든히 서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바울이 자유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 받게 아니한 모습에서 잘 나타납니다. 본문에 보면, 가만히 들어온 거짓형제 까닭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가만히 들어오다’, ‘엿보다’ 라는 단어는 스파이의 행동을 묘사할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즉 적진에 잠입하여 테러나 기습공격, 암살, 적군을 교란시키는 등의 임무를 수행하는 스파이의 행동을 묘사할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어떻게 보면 거짓교사들의 전형적인 특징이 바로 스파이 짓을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의 스파이냐 하면 사단 마귀의 스파이인 것입니다. 그들은 사단 마귀가 그들에게 맡긴 임무들을 수행합니다. 그들의 임무는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와서 아군인 것처럼 행동하여 성도들을 속이고, 궁극적으로는 성도들이 가진 자유를 빼앗아 그들을 자신들의 종으로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이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가진 ‘자유’가 무엇이고, 거짓형제들이 노리고 있는 목적인, ‘종으로 삼는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자유’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일관되게 의미하는 바는 바로 율법에서 해방되어 자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의 거짓교사들과 오늘 본문의 거짓형제들은 예수님도 믿어야 하지만, 사람이 할례를 받고 모세 율법을 지켜야 비로소 의롭다 함을 얻고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볼 때 그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했기 때문에, 율법의 온갖 일을 항상 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할례를 받고 모세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그 사람은 그 율법을 통해서 의롭게 되기는커녕 도리어 자신의 범죄만 더욱 드러나고 결국 율법의 저주 아래 있게 되어지고, 평생 율법 저주 아래서 신음하면서 율법의 종노릇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율법의 저주를 당하심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속하여 주셨기 때문에, 신자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율법으로 인해서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받고 하나님께 복을 받는 그런 책임과 의무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신자의 자유입니다. 이 자유는 그러나 율법을 지킬 필요 없으니 이제는 내 마음대로 살겠다 하는 자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율법의 종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됨으로써 누리는 자유입니다. 방탕과 방종의 자유가 아닌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가는 자유라는 말입니다.

 

(4)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5)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6)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7)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4:4-7)

 

그래서 바울이 말하는 신자가 가지게 된 자유란 율법의 종에서 해방되어 자유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자유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거짓형제들은 바로 이러한 자유를 빼앗고 그들을 종으로 삼고자 한 것입니다. 즉 디도에게 할례를 강요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모세율법을 지켜야 하는 의무와 책임 아래 있게 하고, 결국 그로 하여금 예수님 오시기 전의 유대인들의 종 된 상태로 되돌려 놓으려 한 것입니다. 구원받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서 끊임없이 행함에 매달려야 하는, 율법의 종이 되어서 종노릇해야 하는, 그러나 타락한 인간이기에 결국에는 율법의 저주를 당할 수밖에 없는 그런 비참한 상태 아래 있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짓형제들의 이러한 할례강요는 참으로 무서운 도전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일체 그들의 강요에 복종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복음의 진리란 한 마디로 하면 “자유”를 말합니다. 자유가 너희 가운데 계속해서 유지되도록 하기 위해서 바울은 거짓형제들의 강요에 맞서서 한 치도 양보하지 않고 그들을 대항하여 투쟁하였던 것입니다.

 

사실 바울이 할례 없는 복음, 율법 없는 복음을 전함으로 얼마나 많은 반대에 부딪치고 핍박을 받아야 했습니까? 갈라디아서 5장 11절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갈 5:11)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유를 위해서 기꺼이 그러한 반대와 핍박과 고난의 삶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는 많은 대적자들의 반대와 핍박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고, 그들과 맞서 싸웠습니다. 바울은 이 자유의 복음을 위해, 우리의 가진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서, 평생을 끊임없이 투쟁하며 헌신하고 희생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자유를 위해서 투쟁했지만, 바울은 진정한 자유를 위해서 목숨 바쳐 희생하고 헌신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런 바울의 삶을 본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이러한 우리의 자유를 엿보고 공격하는 무리가 우리 주변에 널려 있기 때문입니다. 사단 마귀가 우리를 공격할 때는 바로 이러한 거짓교리를 가지고서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처럼 영적으로 무장하여 그들과 맞서 싸워야 합니다. 그러면 그들과 싸워 이기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는 먼저 우리가 가진 자유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그 가치를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우리의 가진 자유에 대해서 무지하고, 그 자유에 대한 감사함이 없고, 감격이 없고, 그 자유의 소중함을 모르면, 우리는 그 자유를 누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서 싸우는 삶을 살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가진 자유에 대해 무지하고 그 소중함을 모르고 감사함 없이 지내온 불신앙의 죄를 회개하고, 다시금 말씀을 통해서 이 자유의 가치를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뭔가의 중요성을 잊고 살 때, 그것이 소중함을 다시 깨달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 없이 살아보는 것입니다. 공기가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이고, 필요한 것이고, 공기로 숨 쉬며 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우리는 잊고 살아가지만, 그러나 물속에 한번 빠져보면, 우리는 숨 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것인지를 절실하게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만 물 없이 살아도 우리는 너무 갈증이 심해서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밥 먹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같은 반찬 먹으면 지겨워서 입맛이 없어서 매번 다른 새로운 반찬을 찾지만, 그러나 삼일만 굶어보십시오. 맨밥에 김치만 주어도 맛있게 잘 먹습니다. 혹시 집에 밥 안 먹고, 반찬 맛있는 것만 먹으려고 하고, 편식이 심한 아이들이 있습니까? 딱 3일만 굶기면 다 해결됩니다. 그것의 소중함을 모를 때는 그것 없이 지내보는 것이 최선의 방책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유의 가치를 모르고 그 은혜를 모를 때는, 자유 없는 삶의 비참함과 고통과 고생을 체험하게 하면, 비로소 자유의 가치와 은혜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이 은혜를 깨닫기 위해서 다시 율법의 종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구약성경을 부지런히 살펴봄으로써 율법 아래 산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불행한 삶인가 하는 것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배워 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구약을 배워야만 하는 여러 가지 이유 가운데 중요한 것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율법의 절대성과 하나님의 공의의 철저함, 그리고 무섭고도 두려운 율법의 저주의 심판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율법 아래 산다는 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하고 두려운 것인지를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가 다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런 우리를 구원하시고 율법에서 해방시켜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특히 이 주님의 십자가 죽음은 저주의 죽음으로서 하나님의 무섭고도 두려운 공의가 가장 절정의 형태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에서 주님의 사랑만 보지 말고, 주님의 철저하고도 무서운 공의를 보아야 합니다.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고, 또 죄에는 얼마나 큰 책임이 따르는지를 이 십자가를 통해서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당하신 그 저주의 죽음은 사실 내가 당했어야 하는 죽음이라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십자가에 나타난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그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허락된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에게 다시 율법의 저주가 없고, 형벌이 없고,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은혜인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허락하시고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시고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허락하여주신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죄를 범하여 넘어지지만, 아버지의 사랑의 매는 있을지언정, 재판장의 무서운 형벌은 없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소망을 주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주신 그 자유의 가치를 깨닫게 될 때, 우리는 그 자유에 대한 소중함을 느끼며, 그 자유를 잃지 않기 위해 투쟁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대적자들과 맞서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진 자유를 적극적으로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다보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제대로 살지 못하고, 죄를 범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 우리는 자책하게 되고, 죄책감 속에서 절망과 좌절감을 느끼게 됩니다. 때로는 구원의 확신도 흔들립니다. 우리의 내면에는 이런 소리가 들립니다.

 

“니가 이런 생활을 하고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느냐? 하나님이 이런 삶을 살아가는 너를 사랑할까보냐? 하나님이 이런 믿음 없고, 이기적이고, 죄악된 너를 구원하실 줄 아느냐? 절대로 그렇지 않다. 너는 하나님을 배신했고, 너는 하나님을 떠나 타락했고, 죄를 사랑하여 죄를 범하는 삶을 살고 있다.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사랑을 받고 싶으면 죄 된 삶을 버리고 제대로 신앙생활 해라. 하나님께 응답받고 싶으면, 믿음으로 헌신하고 순종하는 삶이라는 조건을 갖추어라. 네가 희생하고 헌신하고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결국 너를 버리시고 심판하실 것이다.”

 

이것은 사단의 목소리로서 우리로 하여금 잃어버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다시 받는 자가 되기 위해서 내가 분발하고 노력하고 행함을 산출해서 나에게서 사랑받을만한 꼬투리를 만들려는 노력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시종일관 우리로 하여금 행함에 얽매이게 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율법의 종으로 삼는 사단 마귀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본문의 디도로 하여금 할례를 행하게 하려고 했던 거짓형제들의 강요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입니다. 우리가 자유의 삶을 살려고 하면, 거짓형제들이 바울을 공격했듯이 사단 마귀는 우리를 공격하여 자유를 빼앗고 율법의 멍에 아래로 사로잡으려고 합니다. 특히 우리 안에 있는 자신의 죄인됨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교만한 마음과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지 않고 자기 의를 주장하려는 교만한 마음을 이용하여, 거기에 불을 지름으로써 우리를 율법주의의 노예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무지와 교만과 연약함, 사단 마귀의 공격으로 인해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이 놀라운 자유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사장해 버리고, 끊임없이 자신의 행함에 매달리고 절망과 좌절에 빠지는 율법주의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쳇바퀴 속에서 빙글빙글 도는 삶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신앙의 힘으로 우리의 자유의 권리를 당당하게 행사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을 보겠습니다.

 

(21)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22)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23)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25)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1-25)

 

여기 보면 법이라고 나오는데, 번역이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은 노모스라는 단어인데, 바울이 이 단어를 쓸때는 거의 99%가 다 율법을 의미합니다. 이 본문을 읽으실 때는 법을 다 율법으로 고쳐서 읽으시기 바랍니다. 여기 보면 두 가지 율법이 나옵니다. 하나는 새언약의 약속의 성취로서 마음에 새겨진 율법, 곧 살리는 율법입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율법, 내 마음의 율법이라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8장1절에서는 생명의 성령의 율법이라고 표현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른 율법은 돌비에 새겨진 율법으로서 죽이는 일을 하는 죄의 율법입니다. (의문은 죽이고 영은 살린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죄를 범하게 되면, 바울과 같은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돌비에 새겨진 율법이 우리를 죄 아래로 사로잡습니다. 죄책감을 느끼고 정죄의식을 느끼게 됩니다. 사단은 이 죄의 율법을 가지고서 우리를 죄어 옵니다. 그때 바울은 좌절감과 절망을 느낍니다. 탄식하게 됩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면 바로 이러한 영적인 곤고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죄책감을 느끼고, 율법의 정죄의식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은 정상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정당한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바울처럼 탄식하고 곤고함을 느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은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곤고함과 절망 속에서 어디로 곧장 피해갔습니다. 25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탄식과 곤고함에서 즉시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도피하였습니다. 바울은 곤고함 가운데서도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을 바라보았고, 그 공로로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 권리를 당당하게 행사한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는 자유의 권리가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행사해야 하는 자유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이 우리의 죄를 가지고 송사할 때, 우리를 절망으로 죄어 올 때, 이렇게 당당하게 외치십시오. “맞다. 나는 죄인이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이다. 내 안에는 선한 것이 없고, 죄책감을 느끼며 영혼의 곤고함을 느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러한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 나는 율법의 정죄함과 저주에서 온전히 해방되어 자유함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를 징계하실지언정 나를 버리시지 아니하실 것이다.”라고 당당하게 말하십시오. 그렇게 하여 주님께서 주신 자유를 적극적으로 누려가시기 바랍니다. 물론 이것이 방종으로 나아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가진 자유가 육체의 기회로 삼아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자유를 누리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유를 알게 되면, 우리는 주님을 위해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자유는 방종이 아니라 오히려 새롭게 그리스도의 종이 되고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역설을 의미합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우리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서 맞서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우리는 영적으로 무장하여 거짓교사들의 가르침을 분별하여 대적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온갖 이단적인 가르침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행함을 강조하는 설교, 우리의 행함에 따라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조건 지워진 것처럼 주장하는 설교가 난무합니다. 이 세상의 적지 않은 목사들이 사단의 스파이가 되어서 교회를 부패시키고 타락시키는 일에 쓰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분명 정통 교단에 속해 있지만, 실상은 거짓구원교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저도 예외가 아닙니다. 저도 정신을 차리지 않을 때는 성경이 말하는 바와 다른 것을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참 구원의 도의 교리를 배우는데 힘씀으로써 복음의 진리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많은 가르침들을 분별하고, 거짓교사들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그들을 교회 내에서 쫓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교회는 복음을 순수하게 보존하며, 그 복음의 진리위에 굳게 서서 자유를 수호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자유의 가치를 알게 하시고, 자유에 대한 기쁨과 감격, 감사하는 마음을 허락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고 자유를 적극적으로 누려갈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자유를 위협하는 사단 마귀의 공격과, 거짓교사들의 공격과, 내 마음 안에 있는 자기 의를 주장하는 교만한 마음에 일시라도 복종하지 않고, 오직 복음의 진리가 항상 있도록 하기 위해서 투쟁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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