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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성경본문 갈 3:25-29
성경본문내용 (25)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26)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27)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28)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29)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강설날짜 2011-10-12

2011년 10월 12일 한결교회 수요강설
갈라디아서 제19강

 

믿음이 온 이후로

 

말씀 : 갈 3:25-29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착하고 선하게 살아서, 이를테면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면’ 하나님께서 보시고 그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아담이래로 다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사람이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의 저주를 대신하여 친히 담당하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여 주셨다는 사실을 믿는 마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길은 이 예수님을 믿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도록 하는데 있어서 율법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몽학선생의 역할이죠. 즉 우리 자신이 율법을 범한 죄인이라는 사실과,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서, 우리로 절망 속에서 구원의 비명을 지르게 하며, 오직 유일한 살길인 그리스도께로 나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바울이 하는 말은 우리로 하여금 이 그리스도를 믿도록 하기 위해서, 율법이 구속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역할은 한시적입니다. 그렇게 인도함을 받아 그리스도께로 왔으면,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않는 것이죠.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갈 3:25)

 

믿음이 왔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구속사역을 완성하심으로써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복음의 진리가 밝게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믿음이 온 후로 우리는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거짓 교사들은 율법을 영원한 신자의 규범으로 생각했지만,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주에 율법의 몽학선생의 역할은 오늘날 신자들에게 계속해서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럼 이게 무슨 말입니까? 몽학선생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말입니까? 필요 없다는 말입니까? 이것이 사실상 율법을 생각할 때 가장 어려운 부분입니다. 이를 위해서 성경 몇 구절을 살펴볼 것인데, 디모데후서 말씀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6)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17)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

 

여기서 성경은 구약성경을 말하는 것이고, 거기에는 율법도 포함됩니다. 이 율법을 통해서 신약의 성도들은 계속해서 교훈을 받고 책망을 받고 그래서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을 받는 것입니다. 책망한다는 것은 율법을 통해서 여전히 죄를 지적받고, 죄책감을 느끼게 해서, 그래서 회개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율법이 여전히 신자에게 유효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로마서 7장 후반부도 마찬가지입니다.

 

(21)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22)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23)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25)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1-25)

 

신자의 마음속에는 죄의 소욕이 여전히 남아있어서, 그 죄가 율법을 이용해 우리를 사망과 정죄 아래로 몰아갑니다. 그래서 죄책감과 영적인 곤고함을 느낍니다. 자신의 죄로 인해서 탄식하게 되고, 결국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와 율법의 관계입니다. 여전히 율법은 우리의 죄를 지적하고 깨닫게 하고 계속해서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가게 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율법은 신자에게 여전히 중요한 것이죠. 이것하고 몽학선생 아래 있다는 것하고는 구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신약의 성도들은 몽학선생 아래 있지는 않습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 6:14)

 

우리가 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아래 있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가 율법을 어겼을 때 우리에게 형벌이 주어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을 어겼을 때(하나님의 뜻을 어겼을 때), 우리의 구원이 취소되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과 사랑이 거두어지고 버려짐을 당합니까? 율법의 저주를 받아 지옥에 떨어지고 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죄에 대한 징계가 있고, 일시적으로 마음이 괴로움을 당하며, 때때로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지만, 그러나 신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버리시지 아니하시고 회개로 이끄시고 우리가 회개하면 다 용서해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율법을 범했을 때에는 죄에 대한 책임이 있고 형벌을 요구하는데, 이 형벌에서 우리가 해방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면에서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율법은 생의 규범이며, 주님을 경외하는 자리로 우리를 잡아 이끄는 고삐이며, 우리 육신의 나태함을 교정하기 위한 자극이 되는 한, 다시 말해서 모든 선한 행실을 하도록 인도하기에, 교훈과 바르게 함과 책망하기에 유익이 되는 한, 지난날과 같이 오늘날도 유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않지만, 그러나 여전히 우리에게는 율법의 몽학선생의 역할을 여전히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율법의 몽학선생 역할을 통해서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일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데,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처럼 아예 몽학선생 아래로 돌아가려는 일이 우리에게 일어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몽학선생 아래서 신앙생활 하는 것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생활 하는 것하고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26절에 보면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않는 참된 신자의 하나님과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갈 3:26)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예수님과 연합한 신자는 몽학선생에서 해방되어 자유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믿지 않는 자, 곧 여전히 몽학선생 아래 있는 자는 갈 4:6에 나오는 것처럼 주인과 종의 관계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습니다.

 

(6)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7)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4:6-7)


(15)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5)

 

바울은 몽학선생 아래 있는 자, 율법 아래 있는 자를 종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몽학선생 아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꼭 노예가 주인에게 순종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주인은 노예에게 행동 규칙을 명령하고 상벌을 규정합니다. 노예는 벌을 두려워해서 순종합니다. 아니면 상을 얻기 위해서 순종합니다. 그리고 꼭 시키는 것만 하고 안 시킨 것은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자유한 아들과 같이 순종합니다. 아들은 따로 규칙이나 상벌규정이 없어도,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원하여 순종합니다. 아버지가 시키지 않아도 아들은 무엇이 아버지를 기뻐하게 할지를 분별해서 자원해서 순종합니다. 물론 때로는 불순종해서 아버지를 슬프시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잘못했을 때 징계는 있을지언정 아들로서 자격박탈이라든지, 심판이나 형벌은 없습니다. 회개하면 언제든지 용서해주십니다. 아버지의 아들을 향한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십시다. 우리는 하나님께 어떻게 순종합니까? 자유한 아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원하여 순종합니까? 아니면 지옥 안가기 위해서 순종합니까? 매주 예배 나오고, 오늘 수요모임도 나오고, 죄 안 짓고, 착한 일 하고... 하는 것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기쁨으로 순종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천국 가기 위해서 순종하는 것입니까? 늘 내 허물진 모습을 보고서 하나님이 나의 구원을 취소하시고 나를 벌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절망하고 좌절하지 않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몽학선생 아래서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에서 많이 벗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부활한 참된 신자라고 한다면, 우리는 율법의 종이 아니라, 자유한 아들로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잘못 살았을 때는 애통해하고 참회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때때로 심각한 죄 가운데 있을 때, 이 죄된 길로 계속 가면 결국 멸망의 길로 빠지고 말 것이라는 경건한 두려움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참된 회개로 나아가도록 해야하지, 좌절과 절망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나의 구원문제, 나의 칭의 문제의 근간이 흔들리도록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내 행위에 따라 구원이 좌지우지되는 상황에서 우리는 졸업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잘 순종하면 상 받고, 불순종하면 하나님께 벌을 받는 그런 위치에서 우리는 해방되었습니다. 더 이상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가 율법의 원리 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행위에 의해 조건 지어지는 관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무조건적이고 변함없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하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어주셨다는 것이 확증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는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조건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지 않을 때, 예수님을 찾지도 않을 때,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죽어주신 것입니다.


제가 제 딸 윤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랑하는데는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너무 사랑스럽습니다. 또 윤희가 사고가 나서 다치거나 죽어버릴 것을 상상하면 너무 고통스럽고 괴롭습니다. 그래서 늘 윤희가 혹시 위험에 처하지는 않을까 살피고, 길을 갈 때는 항상 손을 잡습니다. 위험한 곳에서는 절대로 손을 놓지 않습니다. 윤희가 특별히 이쁜 짓을 해서, 그리고 윤희가 나의 어떤 기준을 만족시켜서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식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유가 없고, 무조건적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이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같이 자격 없고 허물진 죄인을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아들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로 변함없이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러한 무조건적이고 변함없는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사랑 안에 거해야 하는데, 우리가 이것을 거절하고 자꾸 내 자신에게서 조건을 갖추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고 싶어하는 것인데, 그것은 우리 마음에 자기 의를 내세우려는 욕심과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교만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것은 갈라디아 성도들과 똑같은 우상숭배요 불신앙의 죄인데, 우리가 혹시 이런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거기서 속히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나오는 것도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로 거기서 나오도록 하시기 위해서 매를 드시는 것입니다. 율법의 무거운 짐을 우리에게 메우셔서 우리를 그 율법 아래의 황량한 광야에서 뺑뺑이 돌리십니다. 죄와 실패와 넘어짐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드러내시고, 그래서 우리의 높아진 의를 다 무너뜨리시고, 우리를 낮추시고 겸손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회하며 십자가로 나아오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을 빨리 깨닫고, 불신앙의 죄를 빨리 깨닫고, 회개함으로 주님의 조건 없는 사랑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무조건적이고 변함없는 십자가의 사랑을 진정으로 깨닫고 그 안에 거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원하여 기쁨으로 순종하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표현을 처음 사용하는데, 이 표현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 우리는 더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위대한 특권이고 권세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로 누리는 특권은 첫 번째로 성령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내주하시고, 모든 영적인 축복들을 우리 안에 적용시켜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도 놀라운 것인데, ‘아바’라고 부르는 것은 더욱 놀라운 것입니다. ‘아바’라는 것은 아버지를 줄여 부른 말인데, 친근한 표현입니다. 오늘날 아빠하고 비슷하긴 한데, 그것보다는 좀 더 공경하는 마음이 갖추어진 표현입니다. 아들은 사랑하는 아빠에게 언제라도 나아갈 수 있을 만큼 아버지와 친근합니다. 종은 주인에게 함부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적절한 조건과 절차를 갖추어서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아들은 아무 때나 아버지에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하나님과 관계 맺고 있습니까? 우리가 참된 신자라면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아들이면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의 나라인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어 이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 됨의 놀라운 특권입니다. 예수님을 믿었으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결과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갈 3:27)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옷 입는 것으로 비유하고 있는 것이죠. 옷을 입는다는 것은 첫째로, 일체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몸과 옷은 함께 움직입니다. 몸과 옷은 그렇게 하나인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옷은 그 사람의 본 모습을 가리고, 외모를 형성하고, 신분을 말해줍니다. 저는 어깨가 좁습니다. 그런데 저의 이 삐쩍 골은 골격과 좁은 어깨를 이 양복이 커버해줍니다. 그리고 이 양복 때문에 깨끗하고 깔끔해 보이지만, 사실 저는 그렇게 깔끔한 사람이 아닙니다. 샤워는 자주 하지만, 목욕 안한지 좀 되어서 때를 밀면 때가 많이 나올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옷이 그것을 가려줍니다. 우리의 벌거벗은 모습을 이 옷이라는 것이 감싸고 있어서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자신의 벌거벗을 모습을 보지 않고, 옷을 봅니다. 옷이 우리의 외모를 형성하고 신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라면, 우리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나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시지 않으시고, 그리스도로 옷 입은 모습을 보십니다. 곧 나를 보실 때 그리스도를 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그를 얼마나 기뻐하셨습니까? 그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의인이었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하나님은 마치 예수님을 보시는 것처럼 우리를 의인으로 보시고, 자신의 아들로 보시고, 그래서 기뻐하시고 사랑하시며, 모든 축복과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볼 때는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언제나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죄인인 나, 늘 한계 속에 있는 나, 늘 죄악으로 달려가는 나라는 인식이 언제나 생생하게 살아있고, 늘 죄인이라는 인식이 우리에게 있는 것인데,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보실 때 이런 우리의 허물과 죄를 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덮고 감싸서 보시기 때문에, 우리를 여전히 기뻐하시고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대우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 안에 있는 어떤 선한 것이 조건이 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나 밖에 있는, 나를 감싸고 있는 그리스도의 보혈이 근거가 되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고, 우리의 의가 되시고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자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30)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31)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전 1:30-31)

 

그래서 우리는 이 옷을 근거로 하나님께 언제든지 나아갈 수 있고, 언제든지 하나님께 은혜와 축복을 구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또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것을 보지 못하고, 우리 자신을 볼 때마다 늘 자책하고 절망하고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물론 율법 앞에서 죄를 깨닫고 애통하는 마음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율법의 몽학선생의 역할입니다. 이를 통해서 “나에게는 근거가 없구나, 나 밖에 있는 변함없고 무조건적인 주님의 십자가 보혈밖에 없구나.” 하는 것을 절실히 깨달아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율법의 몽학선생의 역할이 아닌, 몽학선생 아래에 거하면서 끊임없이 희망 없는 좌절 속에 빠진다면, 그것은 앞서 말했던 자기 의를 세우려는 교만이고 불신앙의 죄입니다. 바울을 분개하고 화나게 했던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의 경우처럼 율법으로 다시 돌아가는 불신앙의 죄인 것입니다. 우리의 자책, 나 자신에 대한 불만족, 절망의 원인을 잘 보아야 합니다. 정말 자신의 죄를 깨닫고, 죄인임을 인정하고, 십자가밖에 없음을 알고, 그 십자가로 나아가기 위한 율법의 몽학선생의 역할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 하나님 앞에 떳떳하고 싶어서 자책하고 절망하는 것인지, 그 동기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어서 28절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라는 말은 모든 종교적, 사회적, 성적인 차별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언급은 유대인의 기도 내용에서 나온듯합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으로 만들어 주지 않아서 감사, 노예로 만들어 주지 않아 감사, 여자로 만들어 주지 않아서 감사한다”는 내용의 기도로 기도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들을 언급하면서 영적으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을 밝히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았든지, 안 받았든지 상관없이 남녀노소 빈부귀천 할 것 없이 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것입니다.

 

(29)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9)

 

3장은 아브라함으로 시작해서 아브라함으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할례 안 받고 모세 율법 지키지 않아도 예수님을 믿어 주님과 연합하였으면, 그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참 이스라엘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결과적으로 약속된 유업을 이을 자이고, 언약의 상속자입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 배운 것을 잘 간직해서, 늘 우리를 덮고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만을 믿고 의지하여 하나님께 믿음으로 나아가고 아들로서 하나님의 즐거이 순종해서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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