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4장] 사라와 하갈 비유

by 최상범 posted May 04,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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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성경본문 갈 4:21-31
성경본문내용 (21)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22)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 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23)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24)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25)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26)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27)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28)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29)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30)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 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 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31)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 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강설날짜 2011-11-02

2011년 11월 2일 창원한결교회 수요강설
갈라디아서 제22강

 

사라와 하갈 비유

 

말씀 : 갈 4:21-31

 

오늘 본문은 그냥 읽어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그런 본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보면, 그런 부분들이 있잖아요? “이게 지금 무슨 말이지?”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부분 말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런 본문입니다. 그래서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 구절을 가지고서 이단들이 장난을 많이 칩니다. 오늘 우리가 이 본문의 의미를 확실하게 알고 정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이제 교리적인 논증도 끝냈고, 그들의 감정에 호소한 설득도 끝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20절에서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라고 말했습니다. 이제라도 같이 함께 하여서 직접 대화를 나눔으로써 내 (격앙되고 화난) 음성을 (온유한) 음성으로 바꾸고 싶지만, 지금 상황이 그럴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들리는 소문만 들어서는 내 마음에 의심이 자꾸 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이제까지 충분하게 논증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지막으로 하나를 더 말해야겠다고 하면서 사라와 하갈의 비유를 덧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상 그것은 바울의 대적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거의 카운터 펀치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용만 보면 그것은 혹시나 해서 하나 더 말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마지막에 써먹으려고 아껴두고 아껴둔 최후의 병기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결국 하고자 하는 말이 거기에 나오거든요. 30절 “그들을 너희 가운데서 쫓아내라”는 것입니다. 아주 강력한 논증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내용이 무엇이냐 하면 창세기에 나오는 사라와 하갈 이야기를 통한 비유입니다. 자유한 아내인 사라에게서 상속자 이삭이 나오고, 계집종인 하갈에서 결국에 쫓겨나고 마는 이스마엘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비유적으로 해석하기를, 하갈과 이스마엘은 율법에 종노릇하는 자들을 의미하고, 사라와 이삭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이방인들을 포함하는 모든 신자들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연결을 바울은 ‘비유’라고 말했습니다(24절).


우리가 이 본문의 의미를 살피기 전에 바울이 ‘비유’를 말한 것에 대한 세 가지 입장을 먼저 말씀을 드리고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비유라는 말이 ‘알레고레오’라는 말입니다. 많이 들어본 말이죠? ‘알레고리’라는 말의 어원이 되는 말인데, 바울이 지금 구약을 해석하면서 알레고리적으로 해석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접근할 때 가질 수 있는 첫 번째 입장은 “바울도 성경을 해석할 때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니깐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오리겐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를 해석할 때,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행인에 대해서 말하면서, 여리고는 이 세상이고, 예루살렘은 천국이고, 예루살렘으로 가다가 강도를 만나는데,  그 강도는 사단과 마귀들이고, 그 강도를 만나 죽을 위기에 처해 있는 자는 죄와 고통 가운데 신음하는 우리이고, 그 사람을 도와주는 선한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이고, 상처에 바른 기름은 성령을, 포도주는 예수님의 보혈을 의미하고, 우리를 데려다 준 주막은 교회이고, 동전 두 개는 각각 구약과 신약이고, 다시 온다는 말은 재림을 말하고... 이런 식으로 성경을 문자적 의미와는 다른 차원의 새로운 의미를 이끌어 내는 것이 바로 알레고리 해석입니다. 오리겐은 성경을 다 그런 식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알레고리 해석은 성경의 문맥을 완전히 벗어나서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게 하기 때문에 나쁜 해석방법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입장이 우리는 그런 식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사도이기 때문에 성령의 영감가운데 그러한 알레고리 해석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입장은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하나의 입장입니다. 그러나 보다 좋은 입장은 세 번째 입장으로서 바울이 이것을 ‘알레고리’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상 그냥 ‘비유’로 또는 ‘예표’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바울의 이 비유는 창세기에 기록된 사라와 하갈 이야기에서는 전혀 의도되지 않았던 새로운 의미들을 알레고리적으로 새롭게 해석 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모세가 이 창세기를 기록할 때 본인은 몰랐겠지만, 영감하시는 성령의 의도 속에는 이미 그 의미가 의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깊은 성령의 의도를 따라서 논증하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비유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문의 의미를 살펴보면 볼수록, 이 사실을 보다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본문 한 말씀 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바울은 앞서 율법을 근거로 해서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것을 반박한 적이 있었습니다(갈 3:10).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하면서, 율법을 근거해서 논증을 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창세기의 사라와 하갈 이야기를 언급합니다. 율법을 언급할 것처럼 하더니 왜 창세기를 인용하는가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여기서의 율법이라는 것은 모세오경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창세기도 율법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22)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 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23)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라고 합니다. 사라에게서 난 아들 이삭과 하갈에게서 난 아들 이스마엘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을 이해함에 있어서 핵심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비유를 관통하는 이삭과 이스마엘의 두 가지 차이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두 아들 사이의 주요한 차이점은 두 가지인데, 바로 첫 번째는 그들을 낳은 어머니가 각각 달랐다는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계집종인 하갈에게서 태어났고, 이삭은 자유한 아내인 사라에게서 태어났습니다. 고대사회에서 부모의 신분은 자녀의 신분까지도 영향을 미칩니다. 따라서 이스마엘은 비록 아브라함의 자녀이지만, 계집종에게서 태어났으므로 종의 신분이 되고, 이삭은 자유한 아내에게서 태어났으므로 상속자로서 자유한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머니의 차이로 인한 신분의 차이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차이점은 수태 방법의 차이입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과 하갈 사이의 자연적인 성관계를 통해 수태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스마엘의 출생은 자연적일뿐만 아니라, 불신앙의 결과였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약속의 성취의 때를 믿음으로 기다리지 못하고, 그들 스스로 꾀를 내어 스스로의 능력으로 목표를 달성하려고 하는, 순전히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뤄보겠다고 하는 불신앙과 교만 가운데서 하갈을 이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스마엘을 말할 때, 육체를 따라 난 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23절 ,29절). 육체를 따라 났다는 것은 인간적인 방식과 인간적인 열심과 노력으로 이루어낸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어떻게 태어났습니까? 아브라함이 99세가 되어서, 거의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그리고 사라도 폐경기에 이른 지 이미 오랜 상태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즉 결코 정상적으로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완전 무능력과 불능의 상태에서 하나님의 초자연적이고 직접적인 간섭을 통해 기적적으로 수태된 것이 바로 이삭입니다. 물론 성관계를 통해서 이삭을 수태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하갈의 경우와는 다르게 초자연적인 기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라가 이삭을 낳은 것은 인간의 어떠한 노력이나 수고의 산물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대로 하나님 자신이 주권적으로 성취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을 약속을 따라 난 자라고 말합니다(23절). 그리고 이것을 다시 “성령을 따라 난 자” 라고도 표현합니다(29절).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시는 분은 성령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 이삭과 이스마엘의 차이점에 초점을 두는 이유는 거짓교사들이 자신들이야말로 아브라함의 혈통적인 참된 자손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주장은 단지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 됨을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다 아들이 아니라, 누가 그의 어머니이고, 어떤 방식으로 태어났는가하는 것이 아브라함의 자손 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관심은 “누가 우리 어머니냐? 사라가 우리의 어머니냐? 하갈이 우리의 어머니냐?”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앞에 3장에서는 “누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냐?”하는 것이 중요했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누가 우리 어머니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어머니는 누구입니까? 속으로 자신의 육신적인 어머니를 다 떠올리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오직 은혜로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거듭난 자라고 한다면 우리의 어머니는 사라인 것이고, 그러므로 우리는 아브라함의 진정한 자손으로서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나는 전적부패하고 타락한 죄인이고 아무런 자격이 없지만,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 때문에, 내 행위와 상관없이 오직 은혜로 의롭다 함고 구속함을 입은 자가 바로 사라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러면 이스마엘은 어떤 자를 가리키겠습니까? 율법의 행위를 의지하는 자들, 곧 스스로의 능력과 행위로 구원을 받고자 하는 자들,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대신 자기들 자신의 행위에 소망을 두는 자들이 바로 오늘 본문의 이스마엘이고, 그들의 어머니는 하갈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하갈과 이스마엘이 아무런 재산도 상속받지 못하고 빈손으로 쫓겨났듯이 결국 구원받지 못하는 비참한 결말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24-26절은 이러한 관점을 좀 더 폭넓게 다룹니다. 두 여인을 각각 언약과 산과 예루살렘과 연결시킵니다. 이것이 좀 어려울 수 있는데, 지금부터 집중해서 보셔야 합니다.


(24)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25)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26)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하갈은 옛언약, 시내산, 그리고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연결됩니다. 옛 언약은 시내산에서 율법으로 세운 언약을 말하는 것이니깐 옛언약과 시내산 언약이 하갈과 연결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갈과 시내산이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도 연결 되고 있습니다. “지금 있는 예루살렘”은 팔레스틴 중심지에 있는 예루살렘 도시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언약이 도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예수님을 거부하고 여전히 옛 언약을 고집하고 있고, 지금도 율법을 따라 성전에서 희생 제사를 드리고 있으며, 율법을 잘 지켜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모든 유대인 공동체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지금 있는 예루살렘”은 예루살렘에 거주하지 않아도 그리스도를 배척한 모든 이방에 흩어진 유대인들도 포함하는 것이고, 또 거기에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여전히 유대인으로서의 혈통을 자랑하고, 율법을 의지하고, 자신들이 예루살렘 교회 출신이라는 것을 자랑하는 자들도 포함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들이 다 지금 있는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사람들이고, 또 예루살렘 그 자체인 것입니다. 이들은 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율법을 잘 지키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착각으로서 누구든지 율법의 행위에 의지하게 되면, 곧바로 율법의 종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 지역에 거주하는 모든 유대인들, 그리고 이방에 흩어져 사는 예수님을 거부한 모든 유대인 공동체는 다 율법의 종노릇 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지금 있는 예루살렘”을 시내산과 하갈과 동일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바울은 이 시내산이 아라비아에 있다고 했습니다. 아라비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뺑뺑이를 돈 사막지역을 말합니다. 사막은 황량해서 나무나 식물이 자랄 수 없고 따라서 아무 열매도 볼 수 없는 메마르고 삭막한 곳입니다. 율법의 종노릇하며 사는 삶의 혹독함과 삭막함을 이 단어가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노력에 구원의 소망을 두면 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갈과 대조적으로 사라는 무엇과 연결됩니까? “위에 있는 예루살렘”과 연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지만, 시온산과도 연결됩니다. 이것은 매우 놀라운 선언입니다. 이 말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신구약의 구속사의 흐름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구약의 모든 것들은 신약의 모형이요 그림자요 예표였습니다. 구약의 모형과 그림자와 예표는 자주 물리적이고 물질적이고 혈통적인 것으로 주어졌습니다. 눈에 보이는 가나안 땅, 눈에 보이는 예루살렘 도시, 혈통을 따른 이스라엘 백성들, 눈에 보이는 성전과 동물의 희생제사... 등등 모든 것들이 눈에 보이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신약에 오면 이 개념들이 모두 영성화됩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가나안 땅, 눈에 보이는 예루살렘 도시, 눈에 보이는 성전, 혈통을 따른 이스라엘 민족 등은 오늘날 신약 성도들에게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고, 그것은 오히려 참된 실체의 예표인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가나안 땅은 우리의 영적인 가나안, 곧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시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예표 했던 것이고, 눈에 보이는 예루살렘은 영적인 예루살렘, 곧 하늘 위의 예루살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고 성전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옛날의 십자군 전쟁과 같이 예루살렘을 여전히 신학적으로 의미가 있는 성지라고 생각하고 그곳을 수복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혀 틀린 생각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예루살렘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예루살렘, 곧 하늘 위에 예루살렘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 위에 예루살렘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의 참된 영적 거주지요, 더 나아가 그 하나님의 백성들 총회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곧 교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22)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23)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히 12:22-23)

 

그리고 이 교회를 “위에 있는 예루살렘”, “하늘의 예루살렘”라고 표현한 것은 교회가 이미 하늘에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미 하늘에 있습니다. “너희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함께 부활했고, 함께 하늘에 앉힌바 되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엡 2:6; 골 3:3). 굳이 천상적 교회 지상적 교회를 나누어서 설명하지 않더라도, 우리 한결교회만 놓고 보더라도, 우리가 비록 이 지상에 불완전하고 연약한 상태로 있지만, 우리 한결교회는 또한 이미 승리했고, 이미 하늘에 앉힌바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 살지만,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 개의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장차 썩어 없어질 것으로서 대한민국 사림동의 주민등록증이고, 또 하나는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하는 하늘 위 예루살렘 성의 주민등록증입니다.


물론 이 하늘 위의 예루살렘의 궁극적 승리와 완성은 주님의 재림의 때에야 이루어지겠지만,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그러한 승리와 미래에 완성될 하늘의 예루살렘을 미리 당겨서 이 땅에서 이 눈에 보이는 한결교회로 누리고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의미로 교회를 표현할 때, “이 땅의 교회”라고도 말하지만 “하늘에 있는 교회다”, “하늘 위의 예루살렘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몇일 전에 서울을 다녀오면서 창원버스터미널에서 나오는 길에 한 이단의 전도를 받았습니다. 이 이단은 “어머니 하나님”이 계시다고 주장하는 이단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근거구절로 오늘 본문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우리의 ‘어머니’다 라고 했을 때 의미한 바는 “하나님이 우리의 어머니시다”라는 것이 아니라 하갈과 대조되는 “사라가 우리의 어머니다” 라고 말하려고 한 것입니다. 아래 대조를 잘 보십시오.

 

하갈 - 시내산 - 지금 있는 예루살렘
사라 - 시온산 - 하늘 위에 예루살렘

 

바울은 율법에 종노릇 하는 자들을 하갈의 자녀로 말하고 있고, 이 하갈은 시내산과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동일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고 그와 반대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은 신자는 사라의 자녀이고, 사라는 시온산과 하늘 위에 예루살렘과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 위의 예루살렘이 우리의 어머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6)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갈 4:26)

 

사라가 자유한 아내이고 그녀에게서 난 자라야 자유한 아들인 것처럼,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교회만이 자유자이고 이 교회가 낳은 자녀만이 그리고 교회의 양육을 받는 자들만이 자유한 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하고 싶은 말은 우리가 아무 자격 없어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세운 새언약에 근거하여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한다면, 우리의 어머니는 바로 “사라”이고, “교회이다”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직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을 바울은 이사야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덧붙여 설명합니다.

 

(27)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갈 4:27)

 

이 말씀은 마치 남편을 일찍 여읜 자녀 없는 과부와 같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비참한 처지에 이른 딸 시온, 곧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입니다. 남편이 없어 자녀를 낳을 수 없는 절망 가운데 있는 과부가 다시 자녀를 낳게 되는 어머니가 되었듯이, 그렇게 절망적인 예루살렘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자녀를 낳는 어머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바울은 오늘 신약의 신자들의 모임인 하늘 위의 예루살렘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로 하늘 위의 예루살렘이 어머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 위의 예루살렘, 곧 교회란 행위와 상관없이 오직 은혜로,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속함을 받은 신자들이 모여 있는 것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은혜의 복음을 부정하는 로마가톨릭이나 유대교에 있는 자들이나, 아니면 알미니안을 따르는 자들은, 즉 행위로 구원받겠다고 하는 모든 자들은 다 교회의 자녀가 아니고 다 하갈의 자녀들이고 그런 자들은 율법의 종노릇하다가 구원을 상속받지 못하고 비참한 말로를 맞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교회에 연합한 자들, 곧 오직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고 은혜만을 의지하고 은혜만을 자랑하는 자들은 교회의 자녀들은 구원받아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상속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이 참으로 어렵지만, 그 메시지는 단순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참으로 중생한 자라고 한다면, 우리의 어머니는 사라이고 자유한 여자에게서 났으므로 우리는 참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이을 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하여 은혜로 구원하신 것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생산불능의 상태에 있을 때에 약속을 따라 기적적으로 이삭을 낳았던 것처럼, 우리는 죄인으로서 아무 자격 없었지만,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기적적으로 거듭나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 은혜를 날마다 의지하는 것, 늘 이 은혜를 인해서 날마다 감사하는 것, 나의 죄인 됨을 날마다 고백하면서 이 은혜만을 자랑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신자의 마땅한 삶이고, 그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입니다.


그러나 이 은혜를 거부하고, 고집을 피우고, 십자가를 온전히 의지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행위를 의지하게 될 때, 우리는 언제라도 율법의 종노릇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종노릇한다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늘 자격과 조건을 갖추기 위해 행위에 얽매이는 삶을 사는 것이 율법의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솔직하게 우리가 이렇게 신앙생활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신자라면 누구나 이런 경험을 다 해보았을 것입니다.


율법주의의 대표적인 형태가 바로 자신의 구원여부를 내 마음 안에서 확인하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늘 자신의 구원을 내 마음 안에서 확인하려는 죄악 된 본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자신에게서 자랑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자랑하고 자신의 명예와 영광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죄악된 본성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부패한 본성 때문에 우리는 늘 내 안에서 자격을 찾고, 조건을 찾으려고 하다가 결국 실패하고 그래서 율법의 정죄 아래서 절망하고 자책하면서 자폭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죄악 되어서, 또는 우리 자신이 연약하기 때문에 애통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지만, 문제는 내가 자격이 없다는 것으로 애통하고 절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격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마련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다 마련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은 변함없고 크고 놀라운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해서 고집을 피우고 절망하고 자책하고 자신을 혹사시키고 자폭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늘 마음에 자신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 어떤 경지에 이르러서, 떳떳하고 보란 듯이 신앙생활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내 스스로의 힘으로 떳떳하게 서고 싶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늘 행위에 매달리고, 행위가 있냐 없냐, 자격이 있냐 없냐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보란 듯이란 없습니다. 오직 자신의 죄인됨과 십자가의 공로만을 의지하는 신앙생활 외에는 우리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그런 식으로 자기 안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하는 자는 율법의 종노릇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없고 아라비아 사막의 삭막함만이 그 삶에 가득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는 해답이 없습니다. 해답은 우리 밖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 있는 것입니다.


죄의 불뱀에 쏘였을 때, 우리는 거기에만 신경 쓰고 있을 것이 아니라, 눈을 들어 놋뱀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약함만 보고 절망하고 좌절하지 말고, 우리밖에 있는 구원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 마음 상태에 매몰되지 말고, 2000년 전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역사적 사건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증거하고 있는 성경 말씀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는 늘 죄인이고, 나에게는 아무런 자격 없지만, 주님의 일방적인 은혜와 사랑,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 때문에 이렇게 구원받은 자로 살게 되었다는 것을 믿고 신뢰하며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생활이고,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시는 바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4:28에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갈 4:28)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는 사실을 틀림없는 사실로 믿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자유한 아들답게 날마다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고, 오직 십자가 은혜만을 감사함으로 의지하고, 그 은혜만을 자랑하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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