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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성경본문 갈 1:6-9
성경본문내용 (6)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7)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8)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9)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10)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강설날짜 2011-06-15

2011년 6월 15일 한결교회 수요모임 강설
갈라디아서 제4강

 

다른 복음은 없나니

 

말씀 : 갈 1:6-9

 

한글성경은 이 6절을 “그리스도의 은혜로”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지만, 원문에 보면 “이상히 여기노라”라는 단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상히 여긴다”라고 번역한 것은 너무 약하게 번역한 것이고, 사실은 “놀란다” 또는 조금 강하게 번역하면 “경악한다”라고 번역해야 옳습니다. “내가 놀란다, 내가 경악한다”라는 말로 바울은 인사말에 이어 본론부분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인사말에 이어서 마땅히 바울서신에서 기대되는 감사부분이 없다는 것, 그리고 매우 다급하고 격렬한 어조로 본론 첫 부분에서부터 책망을 시작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바울이 얼마나 갈라디아 교회의 변절에 대해서 분노하고 분개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화를 내는 이유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버리고 다른 복음을 좇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욱 바울을 경악하게 했던 것은 “이같이 속히” 떠났기 때문입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 타락하고 변절하는 것은 그래도 이해할 만합니다. 물론 그것도 나쁜 것이지만, 인간이란 워낙 부패하기 쉬운 존재이기 때문에 그래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 교회의 변절은 바울의 예상을 벗어난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그렇게 빨리 변절할 줄은 몰랐던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했을 때 그들은 복음을 열렬히 환영했고 성령체험도 했습니다. 그랬던 그들이, 이제는 바울이 떠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너무나 쉽게 그리고 너무나 속히 그리스도의 복음을 버리고 다른 복음을 좇았던 것입니다.


특히 우리는 바울의 표현에 주의해야 합니다. 바울은 너희가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떠나서 다른 복음을 좇는 것을 이상히 여긴다”라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떠나서 다른 복음을 좇는 것을 이상히 여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깐 은혜의 복음의 가르침을 포기하는 것은 단순히 지식적이고 교리적인 변화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자기를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르신 이, 곧 우리를 은혜로 구원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을 져버리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5:4에서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4) 라고 말했습니다. 율법주의적인 구원론을 받아들이는 것은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다름 복음을 좇는 것은 부분적으로 잘못되는 것이 아니라, 교리적으로 조금 문제가 있게 되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하나님을 떠나서 복음과 정반대로 돌아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배교인 것입니다. 이같이 하나님을 속히 떠나는 모습은 사실 우리가 구약의 이스라엘에게서 자주 봐왔던 모습 아닙니까?

 

(8)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며 그것에게 희생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출 32:8)

 

우리가 구약성경을 읽으면서 놀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제나, 그리고 항상, 그리고 속히,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숭배로 빠져 들어갔다는 사실입니다. 여기 출애굽기 말씀에도 보면, 그들은 이제 막 출애굽하고 홍해를 건너고 시내산에 이르러서 비로소 하나님과 언약을 맺으려고 하는 그 때에,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우상 숭배하였던 것입니다. 방금 전까지 그렇게 하나님의 놀라운 기사와 이적들을 친히 목격해 놓고서도 너무나도 쉽게, 너무나도 빨리 변절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너무나 빠른 변절에 모세도 하나님도 놀라고 분노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거의 다 정복하고, 죽기 직전에 고별설교를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몇 번이고 확인시키고 약속을 시켰는데, 무슨 약속을 시키느냐 하면 절대로 우상숭배하지 말 것을 약속하게 합니다. 말씀을 보면...

 

(14)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15)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16)백성이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섬기는 일을 우리가 결단코 하지 아니하오리니(17)이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 그가 우리와 우리 열조를 인도하여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시고 우리 목전에서 그 큰 이적들을 행하시고 우리가 행한 모든 길에서, 우리의 지난 모든 백성 중에서 우리를 보호하셨음이며(18)여호와께서 또 모든 백성 곧 이 땅에 거하던 아모리 사람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19)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너희 허물과 죄를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20)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화를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21)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아니니이다 우리가 정녕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수 24:14-21)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결코 배신하지 않고 주님만을 위해서 살겠다고 아주 결연하게 결단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결심이 얼마나 갔습니까? 얼마 못 갔습니다. 여호수아가 죽자마자 바로 우상숭배로 빠집니다. 그래서 사사기 2:17을 보십시오. 많은 페이지를 넘길 필요가 없습니다. 불과 2페이지 뒤입니다.

 

(17)그들이 그 사사도 청종치 아니하고 돌이켜 다른 신들을 음란하듯 좇아 그들에게 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그 열조의 행한 길을 속히 치우쳐 떠나서 그와 같이 행치 아니하였더라(삿 2:17)

 

그들이 여호와를 떠나서 변절하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속히 치우쳐 떠났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십니까? 대적에게 붙이셔서 고통을 당하게 하십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했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고,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사사를 보내셔서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그런데 좀 살만해지면 또 속히 떠나서 우상숭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계속 반복되는 것이 사사기의 내용이고 또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기 전까지의 이스라엘 역사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변덕스러운 모습은 단순히 이스라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실상 모든 인간의 부패성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잊어버리고, 속히 떠나서 배은망덕하게 하나님을 대적하며 사는 것이 워낙 인간의 전적 부패한 모습이라는 것이고, 그러한 모습이 오늘 본문의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의 모습에서 재현되고 있으며, 그것은 또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의 모습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솔직하게 우리가 얼마나 속히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배은망덕하게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루에도 수십 번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떠나서 내 마음대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가도, 시대가 변해도 사람은 똑같습니다. 사람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매우 중요하고 꼭 필요한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갈라디아 교회의 변절과 이스라엘의 우상숭배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변절을 우상숭배로 보고 있습니다. 단순히 지식적으로 교리적으로 부분적인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는 행위로, 하나님을 배신하고, 하나님을 져버리는 행위로 보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라 그 말입니다. 루터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자기 의를 내세우려는 행위구원론이야 말로 가장 보편적이고 악한 우상숭배이다.” 사실 신구약 성경 전체가 바로 이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구약성경이 핵심적으로 다루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다른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의 죄’입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는 조금 상황이 달라져서 다른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의 죄에 대한 책망이나 경고가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신약시대 사람들은 우상숭배의 죄를 많이 안 짓게 되었느냐? 그것이 아니라, 우상숭배의 대상과 방식이 바뀐 것입니다. 다른 신이 우상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재물이 우상이 되고, 사람이 우상이 되고, 쾌락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신약성경이 증거하는 가장 강력한 우상은 바로 ‘자기 의’라고 하는 우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과 명예와 쾌락’이 우리의 우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자기 의를 내세우는 것이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다” 라고는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교묘하면서도 가장 악한 우상숭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이 계속해서 책망하고 경고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부정하는 이단 사상입니다. 거짓 교사들과 그들이 가르친 다른 복음이야말로 신약의 저자들에게 있어서는 초대교회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점에 대해서 바울뿐만 아니라 신약의 거의 모든 저자들이 반복적으로 그리고 아주 강력하게 비판하고 경고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기간 동안에 가장 미워하셨고, 가장 많이 비판하시고 정죄하셨던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세리와 창기들이었습니까? 이방의 우상숭배자들이었습니까? 아니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이방 신을 숭배하던 자들이었습니까?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 당시 하나님의 가장 잘 섬기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던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을 예수님께서는 가장 미워하셨고 비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하면서 그들에게 저주를 선포하셨습니다.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의롭다 생각하고, 자신의 행위를 공로로 삼아서 자기 의를 내세우고, 또 그렇게 살지 못하는 세리와 창기들을 정죄하는 그들의 교만한 행위를 하나님께서는 가장 미워하시고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거짓 교사들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가르쳤던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구원을 위해서 율법을 행해야 한다고 가르침으로써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부수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행위를 자랑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그들을 향해 바울은 예수님이 바리새인에게 그러하셨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저주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선언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오늘 확실하게 기억하십시다.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우상숭배가 무엇인가 라고 했을 때, 그것은 바로 은혜의 복음의 교리를 떠나서 다른 복음을 좇는 것이라는 겁니다.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부정하거나 희석시키거나 약화시키는 모든 가르침은 다 다른 복음으로서 저주받을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르침을 좇아 신앙생활하는 것이 다 우상숭배의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갈라디아에 있는 거짓 교사들이나, 또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에서 떠나서 다른 복음을 좇는 갈라디아 성도들은 본인들이 우상숭배하고 있다고 전형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더 잘 섬기는 것이다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볼 때 그것은 이름만 “하나님, 예수님”하는 것이지, 사실은 다른 종교를 숭배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믿는다고 다 예수님 믿는 게 아닙니다. 같은 예수님을 고백하고 같이 찬양도 드리고 같이 예배도 드려도 그것이 전혀 다른 종교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 한다고 말은 하지만, 사실은 다른 예수님을 섬기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나에게 해당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얼마든지 자신의 의를 내세우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우리 안에 그런 악한 본성이 다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천부적으로 지독한 율법주의자들이다.” 우리 안에는 죄인임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자존심이 있고, 교만한 마음이 있고, 또 우리 자신을 자랑하려는 욕망이 다 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나타난다고 그랬습니까? 지난주에 배웠던 것처럼, 자신의 구원의 근거를 하나님의 작정하신 뜻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어주신 그 공로에 두지 않고, 자꾸 자기에게서 구원의 근거를 찾으려고 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스스로 규칙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두 가지 형태가 나타납니다. 하나는 그 규칙대로 잘하는 사람은 자랑하게 되고, 또 다른 하나는 그 규칙대로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정죄하고 낙심하고 좌절한다는 것입니다. 자랑과 절망, 이 두 가지는 서로 상반되는 모습이지만, 그러나 그 본질은 같습니다. 자랑이나 절망이나 다 구원의 근거를 하나님께 두지 않고, 자기에게 두려는 것입니다. 둘 다 자존심과 교만한 마음과 자랑하려는 욕망에서 나온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는 열심 있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자랑이 문제가 되는 경우는 별로 없을 것 같고, 제가 볼 때는, 우리 교회에는 사실 자랑보다는 무엇이 더 문제냐 하면 절망과 좌절이 우리가 겪는 시험 중에서 가장 큰 시험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자기가 자신을 정죄할 수 없는 자리에 부름을 받았음을 의미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남을 정죄하지도 말아야 하지만, 자기 자신도 우리는 정죄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의 신앙을 경직되게 하고 사납게 하고 편협 되게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자기가 자신을 용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허물과 연약함을 발견하게 될 때, 우리는 “내가 이러고도 신앙인이라는 게 말이 되는가?”라는 자책을 하기 쉽고, 더 나아가서 “나 같은 것이 교회 나올 자격이 되는가? 내가 교회 나와서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저 사람들이 나를 모르니깐 그렇지” 라고 스스로 자책하고 좌절하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자주 이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많은 경우 우리의 신앙생활에 은혜가 없고, 마음에 낙심과 절망이 가득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자기를 용서하지 못하고 자꾸 규칙을 만들어 우리 자신을 채찍질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신앙생활을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가장 큰 행복을 못 누리게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나의 허물, 나의 죄악, 나의 연약함, 나의 못난 것으로 더 이상 자폭해서는 안 됩니다. 나에게서 어떤 못난 모습을 발견한다 해도, 나를 절망과 자폭으로 포기하려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서 실망한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어떤 기대를 걸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전적부패한 인간에게 기대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자신에게 기대한다는 것은 여전히 자신의 전적타락과 부패함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고, 계속해서 구원의 근거를 자신에게 찾으려고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기대를 아예 걸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성령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우리는 죄만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과 은혜를 의지하고 신뢰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1)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2)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3)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4)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5)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6)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7)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1-5)

 

예수님이 우리가 죄인일 때 죽으셨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찾지 않을 때, 예수님을 믿지 않을 때는 물론이고, 예수님의 필요성을 알지도 못할 때,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죽어주셨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확증했다고 합니까? 사랑을 확증했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얼마나 보상의 논리 속에 있습니까? “내가 사랑하니깐 너도 날 사랑해라. 사랑할만하게 굴어야 내가 사랑해주지”라고 하는 식의 보상의 원리로 사랑을 자꾸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조차도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자꾸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내 행위로 뭔가 사랑받을 만한 꼬투리를 만들려고 애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보면 지금 이 사랑이 언제 등장하느냐 하면, 우리에게 뭔가 사랑받을 만한 꼬투리가 없을 때 정도가 아니라 그 반대로 원수 되었을 때, 죄인 되었을 때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인들 겁내랴 이 얘기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처음부터 우리의 부패함을 다 보셨습니다. 내가 내 자신을 아는 것보다 더 우리의 내면의 비열함과 교만과 부패함을 다 보셨습니다. 그리고 애초부터 이러한 우리의 상태와 형편과 상관없이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자녀삼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의 모습이 형편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포기하시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5:1-5절이 우리의 현주소입니다. 현실은 환란 중에 있는 것입니다. 그 환란은 외부적인 환란만이 아니라, 내부적 심령의 환란이 있습니다. 내가 신자같이 않은 것이 괴로운 현실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게 못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마땅히 어떤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사랑을 입은 것도 알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도 아는데, 사랑으로 답할 실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배우는 것입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환란 속에서 자책과 절망 속에서, “그래 나에게는 나를 만족시킬 실력과 근거가 없다”는 것을 배웁니다. 이것이 환란이 만들어내는 인내와 연단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그리스도께로 자꾸 몰아냅니다. 주님만을 의지하게 합니다. 그래서 소망을 이룹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이라는 말은 “이 소망이 헛되지 않음은, 이 소망이 실패할 수 없는 것은” 이란 말인데, 소망이 실패할 수 없는 이유가 앞서 읽었던 7-8절에 나온 내용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때때로 연약해서 넘어질 수는 있지만, 그러나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하는 이유는 우리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했고 하나님의 사랑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조건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거래이고 이해관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사랑을 그리스도 안에서 입은 자이기 때문에, 때때로 우리가 연약하여 범죄한다 하더라도 좌절과 낙심으로 자폭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우리가 분발을 해야 합니다. 무책임해지고, 은혜 지상주의의 방종으로 나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서론에서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 사역의 공로를 온전히 의지하라는 말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고 그것에 의지하고 의존하는 것이 성령을 따라 사는 것이고, 그러한 삶을 살 때만이 진정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강조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어디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열매 맺는 신앙의 원동력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은혜의 복음에 자신을 온전히 기대어 의지하는 신앙에 있다는 것입니다. 해먹이라는 나무침대를 아십니까? 나무에 끈을 매달아서 만든 침대를 말합니다. 만일 나무가 부실해서 “부러지면 어떡하나” 하고 의심이 든다면, 우리는 결코 이 나무침대에 자신의 몸을 내어맡길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나무가 든든하다는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그 해먹에 기꺼이 우리 몸을 내어맡겨서 거기서 편히 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도 바로 이런 것입니다. 믿음이란 바로 모든 의심을 버리고, 주님의 은혜에 온전히 기대고, 우리 자신의 운명을 내어맡기고, 그 은혜 안에서 편히 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좌절과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도 바로 이길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구원의 근거를 찾지 않고, 주님의 은혜만을 온전히 의지하고 신뢰하고, 그 사랑 안에서 편히 쉬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과 상관없이 여러 가지를 배웠는데, 왜 지난주부터 자꾸 이 점을 강조하느냐 하면, 이 부분이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의 전체 주제와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모스 말씀을 통해서 회개의 메시지를 듣고 있는데, 그것은 사실 갈라디아서의 메시지와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역시 긴급히 회개할 것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역시 우리가 은혜의 복음에서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좇는 우상숭배의 죄를 강력하게 질책하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해야 하는데, 무엇을 회개해야 하느냐 하면, 우리 마음에 있는 자만과 교만과 여전히 자존심이 살아있음을 회개해야 하고, 그동안 좌절하고 절망했던 교만, 또는 반대로 자랑해왔던 교만을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주님의 은혜만을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회개입니다. 회개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임 됨을 깊이 발견하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와 사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이런 회개의 역사, 은혜 위에 굳게 서는 역사가 우리 모임 가운데 넘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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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3 [갈라디아서 1장] 하나님께서 하신 일 file 갈 1:1-5 최상범 2011-06-08 2778
662 [갈라디아서 2장] 내가 산 것이 아니요 file 갈 2:19-20 최상범 2011-08-24 2916
661 [갈라디아서 2장] 믿음으로 의롭게 됨 file 갈 2:15-21 최상범 2011-08-03 4083
660 [갈라디아서 2장] 복음의 진리를 따라 file 갈 2:11-16 최상범 2011-07-27 2831
659 [갈라디아서 2장] 우리가 가진 자유 file 갈 2:1-10 최상범 2011-07-20 2780
658 [갈라디아서 3장] 몽학선생 file 갈 3:19-24 최상범 2011-10-05 3882
657 [갈라디아서 3장] 믿음이 온 이후로 file 갈 3:25-29 최상범 2011-10-12 3483
656 [갈라디아서 3장]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file 갈 3:6-9 최상범 2011-09-14 3237
655 [갈라디아서 3장] 육체로 마치겠느냐 file 갈 3:3 최상범 2011-09-07 3403
654 [갈라디아서 3장] 율법과 약속 file 갈 3:15-18 최상범 2011-09-28 3518
653 [갈라디아서 3장] 율법의 저주 file 갈 3:10-14 최상범 2011-09-21 3644
652 [갈라디아서 3장]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file 갈 3:1-5 최상범 2011-08-31 3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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