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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성경본문 갈 1:11-17
성경본문내용 (11)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12)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13)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14)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15)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16)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17)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강설날짜 2011-07-06

2011년 7월 6일 한결교회 수요모임 강설
갈라디아서 제7강

 

바울의 회심

 

말씀 : 갈 1:11-17

 

거짓교사들은 주장하기를, 바울은 예루살렘 사도들에 의해서 임명받은 사도이기 때문에 그들보다 열등한 사도이며, 또한 바울이 전한 할례와 율법 없는 복음은 예루살렘 사도들이 가르친 것과는 다른 것으로서 불완전한 복음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시작되는 자신의 자서전적인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의 사도권과 복음이 사람들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된 것임을 변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1-12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사람들’이란 아마도 예루살렘 사도들을 넌지시 가리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예루살렘 사도들에게 가서 그들로부터 복음을 전해 듣거나 그들로부터 배운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6절부터 보면,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건을 말하는 것으로서, 지금 기독교인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기 위해서 다메섹에 가고 있는 와중에 예수님을 만난 사건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바울은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달았고, 그 즉시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아주 직감적으로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조금 있다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또 회심할 때에 무엇을 받습니까?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회심함과 동시에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라는 소명을 받고 이방인의 사도로 임명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여기서 “곧”이라는 말은 “즉시로”라는 말입니다. 회심한 즉시로 바울은 두 가지를 안 했는데, 첫째는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혈육이란 인간을 가리키는 말로서, 창조주 하나님과 대조해서, 피조물로서 피와 살을 입고 있는 연약한 인간의 측면을 부각시킬 때 쓰는 말입니다. 그냥 사람들과 의논하지 아니했다 하면 되지만,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과 대조되는 인간의 연약성과 불완전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일부러 ‘혈육’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복음과 사도권에 대해서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하지 아니한 것은 17절에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강조점이 사실 여기에 있습니다. “나의 사도권과 내가 가진 복음은 예루살렘 사도들과 전혀 상관이 없다. 내 사도권과 복음은 12사도들과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부여 받은 것이고, 그래서 그들로부터 위임을 받거나 승인을 받을 필요도 없이 곧바로 독자적으로 사역을 시작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곧바로 아라비아로 가서 독자적으로 선교사역을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왜 아라비아로 갔을까? 궁금해 하면서, 아마도 아라비아로 가서 다메섹에서의 체험에 대해 조용히 묵상하고 기도로 이방선교를 준비하고자 했을 것이라고 추측을 합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상 제 생각에는 곧바로 이방인 선교사역을 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와서도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살았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사도행전에도 보면 바울이 회심하자마자 다메섹에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고자 하는 것을 바울의 제자들이 미리 눈치 채고, 그를 광주리에 담아서 성에서 달아 내린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바울은 회심한 즉시로 이방인의 사도로서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의 추측처럼 그것을 따로 조용히 묵상하고 자신의 복음과 신학을 정립하고, 이방인 선교를 기도로 준비할 필요가 과연 있었을까 의문이 듭니다. 왜냐하면 다메섹 사건을 통해서 깨달은 복음이 너무나 분명하고 명확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바울은 회심 즉시로 사도로서 사역을 시작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실들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울이 사도가 된 것과 그가 받은 복음이라고 하는 것이 사람들로부터 배운 것이 아니라 다메섹 사건 가운데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서 부여받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사실은 회심 전후의 급격한 변화에 의해서 더욱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바울은 자신이 과거 유대교에 열심이 특심인 자로서 교회를 핍박하고 잔해하였다고 회상합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교회를 핍박하고 잔해하던 자가 갑자기 구속사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이방인의 선교사역을 감당하는 사도로서 변화되었다라고 했을 때, 그렇게 된 이유에 대해서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밖에 없습니까? 그가 회심하여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은 사람의 힘으로, 사람을 따라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간섭과 역사로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금 본문에서 날카롭게 대조되고 있는 바울의 회심전의 모습과 회심후의 모습은, 다시 말해 과격하고 급작스러운 바울 자신의 변화는 바로 바울의 자신의 복음과 사도권이 사람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된 것임을 증거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바울 자신의 사도권과 복음이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인간적인 교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바울에게 전달된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직 내가 전한 복음만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거짓교사들이 아무리 예루살렘 사도들을 들먹이면서 뭐라 말하든지 간에 그들의 말을 절대로 듣지 말아라는 것입니다. 오직 내가 전한 복음만을 굳게 붙잡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바울이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바울은 바울의 모든 서신에서 자신을 어떤 자로 소개합니까? 항상 사도로서 소개합니다. 갈라디아서나 고린도전후서와 같이 자신의 사도권이 공격받는 곳에서는 더욱 강하게 자신의 사도권을 변증합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높이고 드러내고 자랑하고 싶어서, 또는 사도로서 대접을 받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도권이 부정되면, 자신이 전한 복음도 부정되고, 결국 그렇게 되면, 교회는 복음의 부재로 말미암아서 무너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의 서신에서 항상 자신의 사도권을 맨 먼저 선언함으로써 자신이 이제부터 할 말들이 스스로 지어낸 말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요 명령이요, 계시라는 것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란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자요, 대변인입니다. 청와대 대변인이 나와서 말하면, 그것을 그냥 대변인 스스로가 지어낸 이야기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듯이, 도리어 그것을 마치 대통령이 직접 한 말로, 대통령의 직접적인 뜻으로 우리가 받아들이듯이,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바울 서신을 대할 때, 그것을 사람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요 계시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 서신뿐만 아니라 성경 66권을 다 그렇게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 66권을 읽어가다 보면, 그 놀라운 교훈과 가르침에 탄복하게 되지 않습니까? 또한 1500년 동안 40명에 가까운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통일성과 주제가 연결되는 것을 보면서, 이것이 사람이 썼지만, 그러나 보통 사람의 글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말씀, 계시라고 하는 것은 바로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초자연적인 계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들에게 말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 성경 말씀 위에 굳게 서야 만이 다른 복음이나, 미혹하는 가르침에 넘어가지 않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 말씀의 본의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어느 정도 익숙하거나 훈련이 되지 않은 사람들은 언제든지 다른 미혹하는 이단사상에 넘어가기가 쉬운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계시를 받는다고 말하는 소위 직통계시파나, 아니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하는 자유주의자들의 속임수는 사실 쉽게 분별이 되고, 물리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정말 어려운 것은 성경을 가지고서 말하고, 성경을 토대로 하되, 다만 이상하게 해석함으로써 우리를 미혹하고 유혹하는 이단 사상이 위험한 것입니다. 복음의 가르침 위에 굳게 서있지 않으면, 언제라도 우리는 그러한 가르침들에 갈라디아 교회가 그러했던 것처럼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성경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고, 그 말씀위에 굳게 서기 위해서 성경 전체를 읽고 배우고 묵상하는 데 부지런을 내야하고, 힘을 써야 합니다. 특별히 교회의 가르침과 지도를 잘 받아가야 합니다. 성경을 잘 풀어쓴 책들을 살 때도, 목사의 지도를 따라서 사야하고, 기독교 방송에서 나오는 설교를 들을 때나, 다른 수련회 모임이나, 세미나를 참석할 때에는 반드시 목회자와 상의를 해서 듣거나 참여해야 합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라고 하더라도, 그 가르침 속에 얼마든지 이단성이 포함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것을 주의하면서, 반드시 목회자와 상의해서 이런 것들을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말씀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지만, 정말 말씀의 본의를 드러내가는 설교나 가르침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우리가 잘 실천해서 바른 말씀, 복음의 진리위에 굳게 서야 만이 교회가 흔들림 없이 든든히 서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어서 바울이 회심을 통해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게 되었는지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바울은 자신의 회심 전의 과거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13절에 보면, “(13)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14)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여기서 ‘연갑자’라는 말은 연배가 비슷한 또래를 말하는데, 또래들 중에서는 자신이 유대교에 대한 열심에 있어서 최고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상의 유전에 대해서도 아주 열심이 대단했습니다. 이것은 율법은 아니지만, 율법을 더욱 잘 지키기 위해서 조상들이 만들어 놓은 수많은 규칙과 규율들, 이를테면 구전율법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통달한 사람입니다. 빌립보서에 보면 바울의 회심전의 모습에 대해서 보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데,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 3:5-6)라고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과거의 모습을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며, 흠이 없는 자라고 스스로 평가합니다. 실제로 바울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길리기아 지방의 다소에서 태어났지만, 어렸을 때부터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와서 율법에 대해 엄격하기로 유명한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웠습니다. 거기서 바울은 아주 탁월한 제자로 인정받았고, 아마도 유능한 율법학자로 임명되었을 것입니다(물론 이것은 추측입니다만). 특히 그가 대제사장의 특사로서 다메섹에 가서 핍박을 피해 도망한 기독교인들을 잡아올 수 있도록 그에게 권세를 부여해준 것을 볼 때, 그는 벌써부터 사람들로부터 그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나 그렇게 대제사장의 특사로 행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는 분명 장래가 촉망되는 유능한 젊은이였습니다. 그렇게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만큼 율법에 대하여 탁월한 자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율법을 흠 없이 지켰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율법과 그 율법을 위해 만들어진 구전 율법들을 다 통달하기란 매우 어려운 것이었고, 그것을 낱낱이 지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율법과 조상의 유전을 지키는데 있어서 흠이 없었다고 스스로 평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도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율법에 대한 열심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거짓 교사들이 혹시 이렇게 바울을 공격했는지도 모릅니다. “바울이 율법 없는 복음을 전하는 것은 본인이 율법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소위 율법의 ‘율’자도 모르고 그런 소리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율법 없는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율법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짓교사들보다도 더 탁월한 율법 선생으로서 율법에 도가 튼 사람이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아서 율법시대가 끝이 났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율법 없는 복음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자신이 율법에 열심이 있었던 과거를 언급하는 것은 바론 이런 의도가 숨어있다고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또한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유대교의 대한 열심이 교회를 핍박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아이러니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것 아닙니까? 율법은 의롭고 거룩하고 선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 율법에 대한 열심이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고 핍박하는 결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것을 하나님의 섬기는 예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본인 스스로의 착각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교회를 핍박한 것은 사실은 예수님 자신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에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내 교회를 핍박하느냐?” 하지 않으시고,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핍박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핍박한 것이 됩니다. 이렇게 율법에 대한 그릇된 지식과 열심은 도리어 그리스도를 핍박하고 대적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로마서 말씀을 보면,  “(2)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3)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라고 하고 있습니다. 즉 바리새인들이 자기 의를 내세우기 위해서 율법을 순종하는데 열심을 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힘써 복종치 않고 그리스도와 교회를 핍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나타나는 것처럼 하나님을 향한 지식 없는 열심은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위험은 오늘날 우리들도 처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데, 그것이 지식 없는 열심으로서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한 것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실질적으로 어떻게 드러나느냐 하면, 지난번에 계속 강조했던 것처럼 감사와 겸손이 사라지고, 자기 자랑이 나오고, 옆의 형제들을 정죄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또는 반대로 스스로의 행위에 대해서 절망하고 좌절해서 스스로 자폭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 사람이 비록 교회를 바울과 같이 직접적으로 핍박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사실상 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힘써 대적하는 것으로서, 교회를 무너뜨리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가장 큰 대적자가 바로 교회 내에 있다는 사실과 그 대적자가 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늘 생각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행위와 열심의 동기를 잘 점검하고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그런 죄악 된 본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우리 자신을 잘 점검해야 하고, 만일 그러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거기서 속히 돌이켜서 회개하여 은혜의 복음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우리가 복종하고 순종해야 하는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에 힘써 복종하는 것입니다. 나의 죄인 됨과 무능력을 인정하고, 나의 모든 공로를 배설물로 여기고, 십자가의 은혜 없이는 한 순간도 제대로 살 수 없음을 인정하고, 오직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에 자신을 기대어 쉬고, 겸손히 그 은혜를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15절을 보시면,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라고 하고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자신이 받은 복음이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설명하려고 하는데, 그 그리스도의 계시의 사건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자신의 회심의 사건, 곧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바울은 핍박을 피해 도망간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기 위해서 다메섹을 가다가 홀연히 큰 빛이 비췸을 받고, 거기서 자신이 핍박해왔던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여기서 바울의 모든 사고체계에 급격한 변화가 오게 된 것입니다. 우선 회심전의 바울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로 이해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아래 있는 자라고 신명기 말씀이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이 하나님께 저주받은 예수를 메시아라고 증거했고, 이것이 바울을 격노케 하여 그들을 핍박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남으로 그분이 참으로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저주의 죽음이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속하기 위한 대속의 죽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에 대해서도 완전히 생각이 바뀌게 됩니다. 바울은 율법을 열심히 행하면, 메시아의 나라가 임할 때 구원을 받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열심히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남으로 자신의 이러한 율법에 대한 열심이 도리어 그리스도와 교회를 핍박한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에 충격을 받고 곧바로 율법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율법은 구원의 조건으로서 무력할 뿐 아니라, 도리어 타락한 인간에 의해서 악용되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도구로 쓰일 수 있다는 깨달은 것입니다. 물론 율법 자체는 선하고 거룩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사용되지 않을 때, 얼마든지 스스로를 의롭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자기 의를 드러내는 데 악용되고, 또한 그리스도와 교회를 핍박하기 위한 도구로 악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율법이 성령과 그리스도 안에서 사용될 때, 그 율법은 자기를 자랑하고 남을 정죄하는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내가 죄인이라는 것과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것을 드러내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간음한 여인이 잡혀왔을 때, 성령과 그리스도 없이 율법을 주장한 바리새인들은 그 여자를 돌로 쳐죽여야 된다고 큰소리 쳤지만, 그리스도에 의해서 바르게 해석된 율법에 의하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말씀으로 모든 사람이 다 돌로 침을 당해야 한다는 것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란 행함으로 구원받도록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죄를 깨닫게 하고, 죄를 심히 죄 되게 하고, 우리를 심판 아래 있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은혜를 붙잡도록 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남으로 즉각적으로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아울러서 이 율법이라는 것이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 시내산 언약 때에 주어지고, 이제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그분이 십자가에서 율법의 저주를 대신 당하심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기 때문에, 곧 그분이 율법의 마침이 되셨기 때문에, 더 이상 신자가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즉 율법은 한시적인 목적을 위해서 은혜언약에 더하여진 것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언약은 전적으로 율법의 행함과는 상관없이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즉시로 깨닫게 된 복음의 진리였습니다.


바울이 이것을 깨달은 것은 말로 전해 들어서 안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성령께서 직감적으로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율법 없는 복음은 자신이 직접 받아 누린 구원이기도 했습니다. 즉 바울이 전한 은혜의 복음은 자신의 체험한 바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것이 15-16절에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15)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16)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갈 1:15-16)

 

바울은 자신의 구원이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에 의한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핍박하던 자였습니다. 행위로 보나 그 무엇으로 보나 바울은 구원의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전혀 없는 자였습니다. 그는 자신 스스로의 말대로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던 죄인중의 괴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았다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한 가지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근거가 자신에게 있지 않고 어머니태속에서부터 (더 나아가 창세전부터) 자신을 구원하여 사도로 택하신 하나님의 택하심에 있고, 또 자신을 은혜로 불러주신 그 다메섹 사건에 있다는 것입니다. 택하시고, 불러주시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공로로 말미암아 값없이 용서해주시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영생과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기업의 소망을 누리게 되고... 하는 이 모든 것들을 바울은 한마디로 “은혜”라고밖에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이 깨달은 복음, 그리고 바울이 체험했던 복음, 그래서 사람들에게 전한 복음이 바로 이 은혜의 복음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믿고 받아들이고, 순종하고 의지해야 할 복음이 바로 이 복음입니다.


사실 바울의 회심 사건은 우리의 경험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바울만 하나님의 원수로 행한 것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도 믿지 않을 때는 다 하나님의 원수로 행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구원 경험은 사실은 우리의 구원경험과 동일한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도 바울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어떤 구원받을 만한 꼬투리가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택정하심과 부르심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바울처럼 은혜만을 높이 드러내고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며, 은혜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모습이나 행함을 가지고서 그것을 자신의 구원의 근거로 삼으려는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자신의 행함을 가지고서 자랑해서도 안 되고, 또한 우리의 연약한 모습 때문에 스스로 좌절하거나 절망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가장 우리의 신앙에 해가 되는 것은 죄책감입니다. 죄를 범했을 때 죄책감은 정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본인이 해결할 수 없는 죄책감을 가지게 되면, 톱밥을 켜는 꼴이 됩니다. 더 이상 썰 수 없는 것을 썰게 되면, 답이 없는 미궁에 빠지고, 자책과 죄책감의 그 악순환 속에서 자기 파멸로밖에는 방법이 없는 그런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의 위대함은 바로 이런 무거운 짐에서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놀라운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복음의 은혜는 우리가 어떤 잘못에 처했을지라도 회개하면 됩니다. 이것을 가볍게 쓰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해결책은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고, 예수님에게 있고, 이미 십자가에서 이루셨습니다. 이제 내가 하나님께 빌어서 이제 합의를 보는 사항이 아니고, 이미 우리를 향하여 가지신 사랑과 은혜 안에서, 그리고 십자가에서 이미 이루신 약속 속에서 허락된 회개요, 용서요, 기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하나님의 조건 없는 은혜, 변함이 없는 은혜 안에 거해야 합니다. 변함이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구원받고 은혜를 누리는 이유가 그 근거가 나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택하심에 달려있다는 구원의 반석과 같은 든든한 그 사실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더 이상 율법의 행함에 얽매이지 말고, 값없고, 조건 없고, 그리고 변함없는 이 은혜 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이 은혜만을 의지하고 은혜 안에서 쉬며 안식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우리가 바울이 전한 이 은혜의 복음위에 굳게 서서, 이 은혜 안에 거하고, 은혜를 의지해서 살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만을 찬미하며 감사하는 삶을 사는 자들이 다 되게 하여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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