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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성경본문 갈 3:3
성경본문내용 (3)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강설날짜 2011-09-07

2011년 9월 7일 한결교회 수요강설

갈라디아서 제14강

 

육체로 마치겠느냐

 

말씀 : 갈 3:3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는 질문은 예상 밖의 질문입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바울의 질문은 차라리 이것일 것입니다. “너희가 믿음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 율법의 행위로 마치겠느냐” 그런데 바울은 믿음이 들어갈 자리에 성령을 넣고, 율법의 행위를 넣을 자리에 육체를 넣었습니다. 즉 믿음을 성령과 연결시키고, 율법의 행위를 육체와 연결시킴으로써 바울의 사상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국면을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이 구절의 의미는 명백합니다. 성령으로 시작했다는 말은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를 말합니다. 즉 할례 없이, 율법을 행함 없이,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복음을 듣고 믿었을 때에, 의롭다 함을 얻고 성령을 선물로 받은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육체로 마친다는 말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의 현재 문제를 말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저버리고 율법으로 다시 돌아가서 할례를 받고 율법의 여러 조항들을 지킴으로 의롭다함을 받으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십자가의 은혜로, 성령으로 시작했으나, 나중에는 율법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바울이 볼 때 그것은 단순한 실수나 허물 정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것이요, 우상숭배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아주 격렬한 어조의 질문으로 그들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이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라는 약간의 모욕적인 호칭으로 그들을 책망합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시작도 중요하지만 과정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기 ‘마친다’는 말은 ‘완성하다’, ‘끝내다’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말 앞에 ‘지금은’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글성경에는 ‘이제는’이라고 되어 있지만, 원래 말뜻은 ‘지금은, 현재는’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있어서 “내가 옛날에 예수님을 믿어 영접하여 신자가 되었다”라고 하는 과거의 경험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의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는지, 어떻게 나의 구원을 완성해 가려하는지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주장하는 것은 시작을 성령으로 했으면, 생이 끝날 때까지 그 과정 전체도 성령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고, 특히 중요한 것은 지금 현재 성령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5절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번역이 조금 매끄럽지 못합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살았기 때문에, 성령으로 행해야 합니다”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이미 우리는 성령으로 살았습니다. 새로운 삶을 얻었습니다. 그러면 그 시작으로 끝이고, 다가 아니라, 이제 매일 매일의 삶이 성령으로 행하고 성령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령으로 행한다, 성령으로 살아간다는 말이 의미하는바가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는 것이 성령으로 시작할 뿐 아니라 성령으로 마치는 것이 될까요? 바울이 성령으로 산다는 말을 할 때, 그것은 어떤 신비한 은사를 행하고, 기적을 행하고, 능력을 행하는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산다는 말은 처음 시작할 때 오직 값없이 허락하신 십자가의 은혜 앞에서 그렇게 울고 감격하고 감사했던 것처럼, 현재도 그 십자가를 믿고 의지하며 늘 감사함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으로 사는 것과 성령으로 살아간다는 말이 똑같은 말입니다. 바울은 성령 안에서의 삶을 갈 2장 20절에서 이미 표현한 바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처음 믿고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만 십자가에 감격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도 이 은혜에 감격하며 그 은혜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서부터 우리가 죽을 때까지 이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으로 시작해서 성령으로 마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내가 구원받는 것은 오직 십자가 은혜밖에 없다” 하고서 그 십자가의 필요성을 더 깊이 깨달아 가야 하는 것이 정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시작은 십자가 은혜로 해놓고서는 지금은 율법의 행위를 의지함으로써 십자가가 별로 필요하지 않은 상태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육체로 마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려고 하는 경우가 갈라디아 교회에만 있었던 문제가 아니라, 성령이 오심으로 교회가 시작된 이후로부터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끊임없이 교회 내에 있어왔던 문제인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펠라기우스(A.D. 354-418)라는 사람이 이와 비슷한 주장을 했습니다. 펠라기우스는 교회가 세속화되고 타락해 가는 것을 보면서, 그것을 한탄하면서, 행위구원론을 주장했습니다. 펠라기우스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인간은 전적타락했기 때문에 사람이 죄를 범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어째서 그러냐? 인간은 전적타락하지 않았다. 인간에게는 선을 택하고 악을 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고, 그에 대한 책임이 있다. 예수님을 믿고 선한 삶을 살면 구원받겠지만, 악한 삶을 살면 구원받지 못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 어거스틴이 나서서 반대했고, 결국 여러 논쟁 끝에 이 펠라기우스의 사상은 이단으로 정죄 받았습니다. 그런데 로마 카톨릭은 이 입장을 조금 받아들였습니다. 로마 가톨릭은 주장하기를 비록 처음에는 은혜를 입어서 거듭났다 하더라도 이후에는 행위가 따라와야만 구원받을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종교개혁자들이 들고 일어나서 종교개혁을 일으켰고, 다시 은혜의 복음을 회복했습니다. 그런데 또 조금 있다가 개신교 내에서 이와 같은 문제가 발생해서 갈라져 나온 부류가 있는데, 바로 감리교와 오순절교, 성결교입니다. 이들은 보다 더 교묘하게 주장합니다. 행함을 통해서 구원 받을 수 없지만, 그러나 내가 믿어야만 구원받는다고 주장합니다. 맞는 말 아닙니까? 그런데 조심해야 합니다. 제가 방금 말씀드린 이 세 가지 사상을 이해하기 쉽게 사람이 물에 빠진 예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펠라기우스라는 사람은 사람이 물에 빠져서 죽을 위기 가운데 있는데, 사람이 스스로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따라서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살려면 거기서 스스로 헤엄쳐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펠라기우스의 생각이고, 로마 가톨릭의 생각은 물에 빠졌는데, 스스로 나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밧줄을 던져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내가 잘 잡고 손으로 밧줄을 끌어당기면서 내가 물 밖으로 나와야 합니다. 신인협력설이죠. 하나님의 은혜도 있어야 하고, 내가 열심히 손을 움직여야 합니다. 감리교, 오순절순복음교, 성결교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밧줄을 던져주셔야 할뿐 아니라, 하나님이 끌어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물살이 너무 세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 그 밧줄을 잡아당겨 전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밧줄을 놓지 않고 끝까지 붙잡고 있는 일입니다. 그냥 붙잡기만 하면 됩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행함으로는 구원받지 못하지만, 믿어야 구원받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죠? 그런데 이 세 가지 이야기가 다 다른 이야기 같지만, 본질은 같은 것입니다. 즉 구원이라는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에 더하여서 내가 무언가를 협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들이 바로 뭡니까? 다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려는 것입니다. (펠라기우스는 아예 성령으로 시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뭡니까? 우리는 물에서 스스로 나올 수도 없고, 밧줄을 던져주셔도 우리 스스로 계속 잡고 있을 힘이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큰 그물을 가지고서 우리를 덥석 낚아서 건져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말하는 이신칭의 복음이고,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을 아무런 자격이 없는 자들이었는데,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하심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주신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를 은혜로 구원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이 십자가 은혜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이 은혜 안에서 자유를 누리고, 이 은혜만을 자랑하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성령으로 시작해서 성령으로 마치는 것입니다. 반대로 앞에서 말했던 세 가지 사상처럼, 처음에는 십자가 은혜인데, 이후에는 내가 나의 행위로써 자꾸 무언가를 보태고 협력해야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고서 신앙생활하는 것은 다 육체로 마치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저주받은 사단 마귀의 사상이요, 그리스도의 도를 배반하는 것이요, 우상숭배의 죄악입니다.


그런데 이런 심각한 죄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있다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정통 장로교에 속해 있다 하더라도 얼마든지 로마 가톨릭처럼 감리교처럼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 자신을 잘 돌아보십시오.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에 십자가 은혜를 알고 감격하고 감사의 눈물을 흘렸던 그 은혜가 지금 현재도 여러분의 삶을 주장하고 있습니까? 신앙생활을 지속하면 할수록, “아 정말 주님의 십자가 은혜 밖에 없구나”하면서 그 십자가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히 깨닫고, 그 은혜만을 의지하며 사십니까? 사실 우리의 마음이 십자가에 대해서 무덤덤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삶이 마치 십자가가 그리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십자가 은혜 없이도 매일 매일을 잘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만일 그렇다 라고 한다면, 혹시 이러한 신앙과 삶이 만연되어 있다면, 우리는 영적으로 매우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성도들과 동일하게 우리도 바로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빠지기 쉬운 오류가 무엇이냐 하면, 한번 은혜를 입고 그 다음에는 은혜가 필요 없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내가 좀 영적으로 성숙해지고, 성화되어지고, 거룩해지고, 신령한 사람이 되어서, 믿음 충만 성령 충만해서, 정말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고 희생 봉사 충성하는 자가 되어서, 좀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서보고 싶은 것입니다. 은혜가 없이도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는 그런 훌륭한 신앙인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러한 자신이 잘한 것을 가지고서 하나님 앞에 떳떳이 서려고 하는 것은 다 거짓이고 외식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이런 식으로 대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시작해서 은혜로 마치시는 것입니다. 처음도 십자가 은혜요, 나중도 십자가 은혜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처음 예수님 믿었을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때 우리에게 하나님께 사랑받고 은혜 받을 만한 어떤 꼬투리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값없이 은혜로 우리를 사랑해주시고 용서해주시고 구원해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조건 없는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신데, 우리가 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처음에야 당연히 그렇게 값없이 은혜를 받는 것이지만, 이제 그 이후는 은혜 받은 자로서 마땅히 어떤 높은 위치로까지 가 있어야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고 받아주시지 않겠느냐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과연 그렇게 우리를 대우하십니까? 만일 하나님이 그렇게 여전히 조건과 규칙으로 대하신다면 이 세상에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은 절대적이고 100%이어야 하며, 온전히 순수한 동기에 의한 순종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성화되고 성숙한 신자라 하더라도 그 행위가 하나님 보실 때는 더러운 누더기 옷과 같고, 우리의 최선의 행위에도 하나님은 죄의 찌꺼기를 발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자신의 행위들을 가지고서 하나님의 기준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인간의 행위들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출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대하시지 않으십니다. 처음도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를 받아주시고 사랑하시고, 지금도, 그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를 변함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잘하면 사랑하시고, 제대로 못한다 싶으면 사랑안하시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볼 때, 지금도 여전히 연약하고 허물 많고 자주 배은망덕하는 한심한 자신으로 인해서 자책하고 절망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은혜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받는 자로서 은혜의 보좌 앞에 당당히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은 우리를 변한 없이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우리를 향해 활짝 문을 열어놓고 계시는데, 우리는 내가 이런 저런 조건을 갖추어야 떳떳하게 하나님을 찾아가 만날 수 있겠다 하고서 계속해서 자기 고집을 피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부둥켜안고 계시는데, 우리는 이런 저런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하나님이 나를 찾아올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조건 없이 값없이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시는데, 우리의 자존심과 체면 때문에 이 은혜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시하는 것이고,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자존심, 체면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떳떳하게 되어서 나가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죄인 됨을 겸손히 인정하시고,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십시오.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바라보면서 나아가십시오. 그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밀려오는 것을 경험하게 되고 우리의 병든 마음이 치유될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도 십자가 은혜, 지금도 십자가 은혜, 죽을 때까지 십자가 은혜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그 은혜를 누리며 그 은혜만을 자랑하는 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두 번째로 생각해야 할 것은 믿음과 성령이 연결되어 있고, 율법의 행위와 육체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볼 때 율법으로 돌아가서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것은 성령을 거부하고 육체를 따라 사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성령과 육체가 아주 날카롭게 대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성령과 육체의 대조는 갈라디아서 후반부에도 나옵니다.

(16)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17)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18)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19)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20)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21)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22)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23)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16-23)

여기 성령의 열매와 육체의 일이 대조되어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살면 성령의 열매가 맺히나, 육체를 따라 살면 육체의 일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육체를 따라 산다는 것은 인간의 죄악 된 본성대로 산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구원에 있어서 십자가 복음을 온전히 의지하지 않고, 인간 스스로의 행위를 의지하는 것도 육체를 따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깐 막 죄 짓고 악을 행하고 방탕한 삶을 사는 것만 육체의 일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행함으로 구원받으려는 것도 바로 육체의 일입니다. 특히 이 세상의 종교인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도덕 윤리를 강조하고 착하게 살아서 구원받으려고 합니까? 그러나 그런 것들이 다 육체라는 테두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성령과 육체를 대조할 때는 넓은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성령으로 산다는 것은 오직 십자가 은혜를 믿음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결과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반대로 육체를 따라 산다는 것은 인간의 행위로 구원받으려는 것을 의미하며, 그 결과 육체의 일이 현저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신앙과 행함이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떤 신앙을 가지느냐에 따라 삶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행함없는 구원”의 저자 권연경 교수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믿음과 행위 사이를 싸움 붙여 왔다. 믿음 없는 행위와 행위 없는 믿음, 다시 화해시키기에는 때가 늦은 것일까? 행위에 자신이 없는 자는 믿음의 면죄부에 매달리고, 신앙의 윤리성만 강조하는 이는 은혜의 능력을 너무나 가볍게 여긴다. 불가능할 것 같은 화해의 실마리는 무엇인가?”


저는 개인적으로 이 책을 별로 안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이 책은 행위구원론을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매우 이단성이 있는 책입니다. 그러나 방금 들려드린 이 글귀는 우리로 하여금 한 번 생각해보게 하는 의미 있는 글귀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의 본질을 너무나 잘 집어낸 문구입니다. 행위에 자신 없는 자는 믿음의 면죄부에 매달리는 반면에, 교회의 세속성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일방적으로 행함만을 강조하고, 심지어는 이 책의 저자처럼 행함을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로 부각시키기도 하는 것입니다.


특히 행위에 자신 없는 자는 믿음의 면죄부에 매달린다는 말이 우리에게 찔림이 됩니다. 앞에서 살펴본 변함없는 예수님의 사랑과 십자가 은혜를 통해서 우리의 영혼이 고침을 받고 삶이 변화되어야 하는데, 그 순서가 거꾸로 되는 것입니다. 행위에 자신이 없으니깐, 면죄부로서 오직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복음에 매달린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앞에서 말씀드렸고, 사실 제가 몇 주간에 걸쳐서 계속 강조하는 것이, 주님 안에서의 자유, 조건과 자격이 우리 안에 있지 않고 하나님과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에 있다는 것, 그래서 우리가 죄를 범해도 회개하면 언제나 용서받을 수 있고, 그래서 제가 한 말이 우리는 배반한 것보다 더 많이 돌아오면 된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죄책감과 절망에서 벗어나서 그리스도 안에서 허락된 놀라운 은혜와 자유를 누리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우려하는 것은 이러한 갈라디아서가 말하는 이신칭의 복음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죄 가운데 계속해서 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안심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복음이 우리 심령 깊숙이까지 역사하면, 우리의 심령이 그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깨닫게 되어질 때에, 반드시 우리의 삶에는 변화가 있게 되는 것인데, 문제는 그렇게 깊숙이까지 깨닫지 못하고 그냥 표면적으로만 알아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신앙의 문제를 고치려고 하지 않고, 행함에 자신이 없는 부분을 여기 믿음과 은혜의 교리라고 하는 면죄부에 매달려서 위로 받고, 스스로 자신의 상태가 괜찮다고 안심하는 것으로 그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저의 강설의 의도도 아니고 바울도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갈라디아서의 메시지는 행함에 자신 없는 사람들에게 안심할 수 있도록 해주는 면죄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온전히 의지하지 못하고,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 때문에 절망하고 좌절하며 방황하는 슬픈 영혼들,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낮아진 심령을 가진 참된 신자로 하여금 십자가의 은혜 안에서 자유를 누리도록 하고, 그리하여 그의 삶이 변화되어 결국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행함에 자신이 없어서 믿음의 면죄부에 매달리려 한다면, 우리에게는 갈라디아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야고보서가 필요할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요, 그것은 가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야고보서에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갈라디아서 역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십자가 은혜를 믿음으로 살면 그것이 성령으로 사는 것이고, 성령으로 살면 사랑이라고 하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과 행함이 결코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는 믿음을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 삶에 사랑으로 역사하는 것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믿음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정말 예수님을 믿는 자인지, 과거에는 믿었는데,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지금은 육체로 마치려고 해서 육체의 일을 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성령을 받은 적이 없는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을 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단순히 십자가 은혜를 통해서 구원받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우리의 삶을 통해서 성령의 열매를 맺는 데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십자가 안에 있는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은혜를 알게 하여주시고, 우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 은혜로 말미암아 살아가게 하시며, 그리하여 우리의 삶이 변화되어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게 하여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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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1 [갈라디아서 3장]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file 갈 3:1-5 최상범 2011-08-31 3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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