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2.11 21:36

청교도 예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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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예배특강(수요예배)
                          
                                                 청교도 예배(1)

오늘부터 두세 주간에 걸쳐서 청교도 예배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합니다. 청교도 예배는 간소화하고 심원한 영성을 일으켰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존중하고 예배에 신선함을 불어넣었다. 주일을 예배드리는 날로 따로 구별하고 교회만이 줄 수 있는 교제를 즐겁게 나누었다. 그들은 교회를 영적인 실체로 파악하고 평신도의 역할을 크게 신장시켰다. 예배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여를 유도하고 실제로 모든 성도들의 제사장직을 위한 것이었다. 청교도 예배는 편리한 또는 자만하는 신을 바라거나 양심의 가책이 가벼워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청교도 예배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의 마음의 표현이요, 믿음의 표현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이었고 기독교의 핵심이었다. 청교도 예배는 결심과 용기를 강화시켰다. 이 예배의 목적은 모든 칼빈주의 문화의 목적과 마찬가지로 성화, 즉 그리스도께 대한 헌신과 귀의를 증명하는 행동들이었다.
청교도들은 설교를 대중적인 공적예배라고 생각하였다. 성령이 함께 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침과 주장을 통해 인간에게 구원과 성스러움을 가져다주는 중요한 권능의 메시지로 생각하였다. 청교도들은 성경 속에 명백히 인정된 것만이 예배에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도록 믿었다. 공적인 예배의 순서를 정함에 있어 ‘루터’의 법칙은 성경에 반대되지 않고 편리해 보이는 전통적 사항들을 허용한 반면에, ‘칼빈’의 법칙은 성경이 직접적으로 규정하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참조. 박영호. 「청교도 실천신학」, p. 405.)
청교도들은 성경의 지시 없이 인간의 전통을 포함시키지 않은 순수한 예배를 추구했고 하나님이 바라시는 방식으로 예배하기를 원했다. 인간에 의한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참된 예배로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청교도들의 예배시간에 설교되어진 성경말씀의 신학은 청중이 듣고 깨닫게 되는 성경 말씀의 실천을 만들어 내었다.
존 월즈(John Wells)는 「실천적인 주일성수」(The Practical Sabbatarian)라는 유명한 저서에서 예배의식에 대한 성도들의 접근방식에 대한 경향성과 특히 설교의 경향성을 다음과 같이 보여 주었다. John Wells. The Practical Sabbtarian: or Sabbath Holiness Crowned With Superlative Happiness(London, 1688), p.274.


우리는 가정에서 아침 경건의 시간을 마치고 매우 즐거운 마음으로 은총과 구원을 받기 위하여 예배에 참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령에 가난한 영혼, 배고프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은총이란 선물을 나눠어주시는 예배에 참석합니다. 예배는 우리가 천국의 물건을 사고 천국의 상품을 구경하는 영적인 물품교환을 하는 성스러운 시장, 천국의 시장인 것입니다. 이러한 예배에는 또 다른 안식일의 갱신을 맞이할 때까지 우리에게 충분하게 도움을 주게 되는 은총의 가르침과 그리고 평안을 얻게 되는 시간입니다.

1. 예배란 무엇인가?

청교도들의 예배는 인간이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요, 이미 받은 은혜가 무겁고 감당할 길이 없어 우리의 영혼이 압도되어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있는 것이다. 예배란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뵈옵고 지극한 경외심을 가지고 머리를 숙이는 일이다. 구약성경에서 예배로 번역되어 있는 히브리어의 근본 의미는 “머리를 숙이다”라는 뜻이다. 우리는 흔히 찬송을 부르는 일, 기도하는 일, 설교를 듣는 일 등이 예배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이런 것들은 예배에 이르기 위한 예배과정이요, 진정한 예배는 우리를 그의 무한한 사랑과 은혜로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을 뵈옵고 우리의 전인격이 경외하는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부복하여 경배하는 일이다.(출 4:31; 대하 29:29; 느 8:6)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순종의 결과이며 또 원인이 되어 신앙생활의 활력소요 토대가 되는 것이다. 이 예배에서 찬송과 감사로 이어지며 삶의 모든 부면이 하나님에 대한 숭경으로 점철되며 삶 전체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삶이 되었다. 청교도들의 모토는 ‘전생활의 예배화’ 곧 삶 전체를 예배의 심정으로 사는 일이었다. 그들은 못 하나를 박아도 하나님께 예배라고 생각하였다.
청교도들은 대개 예배라는 말을 하나님과 우리의 모든 직접적인 교제를 나타내는 말의 가장 좁고, 가장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했다. 여기에는 공적인 기원과 사적인 기원, 숭배, 묵상, 믿음, 찬양, 기도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교훈을 받는 것이 포함된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요 4:24)드려야 한다. 청교도는 이 말씀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이해했다. 즉, 한편으로 예배는 내적인 심령이 역사 하는 문제이어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 예배는 하나님의 뜻과 역사의 계시된 현실에 대한 응답이며 성령에 의한 심령의 적용이었다. 그러므로 청교도는 예배가 단순하고 성경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경이 그들에게 진리의 원천이었던 바와 똑같이 단순성은 그들에게 내적인 것의 보장이었다. 청교도 예배의 간소한 단순성은 종종 세련되지 못했다는 비평을 받았다. 그러나 청교도에게 단순성은 기독교 예배의 아름다운 본질이 되는 요소였다.
오웬은 화려한 예배당과 예배의식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신실한 예배에서 찾으시는 ‘아름다움’과 관련된 어떤 것을 갖고 있거나 또는 갖고 있을 수 있다는 사상을 일축한다. 오웬은 그리스도인들 자신이 성전이며, 하나님의 거처임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또한 그는 진정한 예배란 땅에서 몸으로 행해지지만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와 하늘 그 자체로 들어가는 것”이므로 사실상 “천국에서 행해지는 것”이라는 사실도 상기시킨다. 화려한 예배의식과 교회 건물의 장식이 그 자체에 있어서 예배를 풍성하게 하는 것이라는 사상은 어이없는 불경인 것이다.
차녹(Charnock)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할지니라”(요 4:24)를 본문으로 한 “영적 예배”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예배를 분석하여 오웬의 분석을 보충한다. Stephen Charnock, Works, vol. I, p. 298.


예배는 하나님의 뛰어나심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실제적인 사상들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하나의 행동입니다…또한 예배는 의를 사모하고 경외하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매혹되고, 하나님의 선포하심을 포용하고, 이 가장 사랑스러운 대상과 친밀한 교제에 들어가 그에게 자신의 모든 애정을 바치는 의지의 행동입니다.

차녹은 중생한 자들만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들만이 진정으로 사모와 복종을 하나님께 쏟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에서 신령함을 발견하실 수 있으시기 전에 먼저 우리는 그리스도의 날개 아래에서 나음을 입어야 한다. 죽은 본성에서 나오는 모든 예배는 죽은 예배에 불과한 것이다.
차녹은 이어 영적 예배는 정직한 심령과 순수한 심령을 요구하기 때문에 오직 성령의 능동적인 도우심에 의해서만 수행된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Ibid., p. 307.


영적 예배에는 믿음과 사랑과 겸손과 자기 부정의 행동들이 수반되며 하나님에 대한 마음의 열망의 표현이어야 합니다. “영적 예배자는 실제로 모든 신앙 의무에서 하나님을 알고자 열망한다…예배를 목적으로 열망하는 것은 육욕적입니다. 예배를 수단으로 열망하며, 예배 가운데 하나님과의 교제를 열망하며 행하는 것이 영적이며 신령한 삶의 열매입니다.” 그러한 영적인 예배는 기쁠 것입니다.

성도들이 공적 예배를 사랑한다는 것은 부단한 청교도의 주제였다. 왜냐하면 성도들이 예배에서 하나님을 구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예배는 단지 감사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굶주린 자들이 배부름을 얻고, 빈손이 풍성하게 채워져서 돌아가게 되는 은혜의 수단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예배 가운데서 인간에게 나오시기 때문이다. 오웬은 기독교 예배의 의식들은 “신령한 사랑의 감각을 전달하는 수단이며, 믿는 자들의 영혼에 신령한 은혜를 공급하는 수단이다”라고 선언한다. 청교도 실천신학, p. 414.


2. 예배의 요소
청교도의 예배 요소들과 활동들의 목록에는 정규적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포함된다. 곧 찬양(특별히 시편들을 노래하는 것), 기도(고백의 기도, 경배의 기도, 중보의 기도), 설교, 성례(성찬식), 그리고 교리문답과 교회 훈육활동이다. 이 모든 활동 가운데 청교도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의 이름으로 함께 모인 자신의 백성을 만나기 위해 오신다는 사실을 주장했는데 무엇보다도 설교에서 이 사실을 주장했다. 설교는 가장 엄숙하고 고귀한 활동이므로 인간의 목회 직무 중 가장 중요한 시금석이었다. 교회에서의 설교는 절대적으로 성령의 사역이므로 은혜의 절대적 수단이다. 따라서 회중에게 있어 설교를 듣는 것은 그들의 삶의 가장 중대한 사건이다. 청교도는 이 사실을 깨달으라고 예배자들에게 간청하였고 설교되는 말씀을 경외와 주의와 기대를 가지고 들으라고 간청하였다. 리처드 박스터(Richard Baxter)는 「기독교 훈령집」 가운데 그의 “설교되는 말씀을 유익하게 듣기 위한 지시들”에서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Richard Baxter, Works, vol. I, pp. 473,475.



당신은 거의 관심 없는 문제를 듣는 것처럼 경솔한 심령으로 들으러 올 것이 아니라 듣고자 하는 거룩한 말씀의 이루 말할 수 없는 중요성과 필요성과 결과를 의식하고 오십시오. 당신이 얼마나 그 말씀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 깨달을 때 그 말씀은 모든 특별한 진리를 당신이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을 줄 것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을 열심히 적용하는 것을 당신의 직무로 삼으십시오…억지로 이끌지 않으면 더 나아가지 않는 자들이 하는 것처럼 목사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지 마십시오…당신은 설교자만큼 할 일이 있고 설교자만큼 언제나 바빠야 합니다. 당신은 입을 열어 그 말씀을 맛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당신을 대신하여 맛을 보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부지런히 일하며 나태한 목사를 미워할 뿐만 아니라 듣는 데 나태한 심령도 미워하십시오. 되새김질하여 다시 생각하고 집에 와서 은밀하게 다시 상기하고 묵상으로 다시 자신에게 다시 설교하십시오. 만일 설교자가 냉담하게 말씀을 전했다면 자신의 심령에 보다 열렬하게 다시 설교하십시오…

설교를 듣는 그 자체가 예배의 목적이 아니며 열렬한 설교 감상과 설교자를 찾아다니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헌신의 절정이 아니다. 토마스 아담스(Thomas Adams)는 설교를 듣는 것이 문제의 전부라고 하는 가정에 단호하게 반대하며 설교는 기도와 찬양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이렇게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Thomas Adams, Works, vol. I(Edinburgh, 1861), p. 103.


많은 사람들이 이 거룩한 곳으로 와서 듣고자 하는 열망에 가득 차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열심을 망각합니다. 우리의 모든 설교는 여러분으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곧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도록 교육하는 것입니다…나는 우리의 교회들이 청중이라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청중이 아니라서 불평합니다. 여러분이 설교를 들으러 오는 것을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더 빨리 오십시오. 여러분이 공적 기도를 개을리 하는 것을 불평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쪽에서만 여러분을 축복하고 여러분은 하나님을 축복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데…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오해하지 마십시오. 설교를 듣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활동이 아닙니다…하나님의 예배가 설교를 듣는 것에 제한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배하는 더 넓은 범위를 갖고 있습니다. 기도와 찬양 등이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