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2106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Extra Form
◆ "예수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3):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두 번에 걸쳐서 "예수 믿는다"는 것은 (1) 예수님을 나 자신과 온 세상의 유일한 구주(the only Saviour)로 받아들이고 신뢰하는 것이고, (2) 예수님을 우리 삶의 주님(the Lord)으로 모시고 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그런 삶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표현해 본다면 그것은 우리가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온 천하를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Coram Deo) 있음을 의식하면서, 의식적으로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 앞에서의 삶, 하나님 면전(面前)에서의 삶, 하나님 존전(尊前) 의식[神尊意識]을 가지고 사는 삶에 대해서 좀더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Coram Deo) (1) 죄의식(Sin-Consciousness)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그 무엇보다 먼저 가장 깊은 죄의식을 느끼게 됩니다. 이는 엄위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들과 용서받은 죄인들이 가장 먼저 느끼게 되는 의식입니다. 그러므로 죄의식이 기독교의 현관이요, 참 기독교에 이르는 통로라는 우리 선배들의 생각은 참으로 옳은 통찰입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우리는 가장 먼저 엄위하시고 죄를 참아보지 못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는 감히 설 수 없는 존재라는 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이고, 마땅히 그래야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죄의식을 실존적으로 깊이 있게 느끼지 못하는 이들이 많이 있어 왔습니다. 그런 이들 가운데서 유난히 자신의 죄인 됨을 깊이 느끼고, 어떻게 죄인인 내가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참으로 실존적으로 고민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심각한 고뇌를 잘 아는 그의 후예들 가운데서는 기독교적 죄의식을 깊이 있게 설명한 이가 많습니다. 가장 깊이 있게 죄의식을 가지게 되면 사람은 모든 인간적인 것에 대해서 철저하게 절망하게 됩니다. 우리의 모든 것에 대해서 철두철미 절망하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노력이나 의지나 감정이나 이성을 전혀 내세우거나 의존하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참된 죄의식을 가진 이는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정죄에 자기를 내어 맡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직도 인간적인 그 어떤 것에 의존하려고 하는 이는 아직도 철저하게 절망하지 않았고, 아직 철저한 죄의식을 갖지 못한 자입니다.

하나님 앞에(Coram Deo) (2) 칭의 의식(Justification-Consciousness)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참된 죄의식을 가진 이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대속[代理 贖罪] 사역에 근거하여 믿는 자들에게 선언하시는 죄용서, 즉 칭의(稱義)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참으로 인간적인 모든 것에 대해 절망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 방식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 하나님께서 이루시고 선언하신 것을 그대로 수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우리의 행위로 하지 않고, 주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을 그대로 믿는[즉, 받아들이고 의존하는] 것으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칭의 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참된 죄의식을 가진 이는 칭의 의식을 가지며, 또한 참된 칭의 의식을 가진 이는 참된 죄의식을 가집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역설이 바로 기독교적 진리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우리는 동시에 의인이면서 죄인이다"(simul justus et peccator)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 보면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빛에서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의와 공로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셔서 우리를 온전한 의인으로 보시고 받아 주신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우리가 끝임 없이 의식적으로 적극적으로 죄를 지어 나가지만, 하나님은 십자가 사건 때문에 우리를 의인으로 보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루터의 천재적이고 선언적인 표현은 때로 그런 오해의 소지를 던져 주지만, 그가 성경으로부터 발견하고 표현하려고 하는 바는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아무리 완벽히 노력해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철저하고 완벽한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죄인일 뿐이지만(모든 인간적인 것에 대한 철저한 절망), 그런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 들여 질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끊임없는 노력 때문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그의 온전하신 삶의 의(義)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낯선 의(alien righteousness), 즉 우리에게 전가된 [덧입혀진]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의(義)의 관점에서는 우리가 의인(義人)이나, 아무리 노력해도 다 떨어진 누더기 같은 의만을 내는 우리들로서는 죄인이라고 할 수밖에 없으니, 우리는 동시에 의인이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Coram Deo) (3) 성화의 삶(The Life of Sanctification)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이렇게 동시에 의인이요, 죄인으로 보는 이는 이제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는 성화의 삶을 살아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다른 가능성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이 온전히 하나님 앞에 있음을 의식하는 사람은 이제 하나님의 말씀 전체(Tota Scriptura), 즉 온전하게 해석된 하나님의 말씀을 유일한 규범으로 하고(Sola Scriptura), 성령님을 의존하여 성령님과의 교제 가운데서 성화의 삶을 살아가고, 또 그렇게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의 그의 삶은 십자가에서 이루신 성자의 사역에 끊임없이 의존하며, 그 사역을 적용시켜 주시는 성령님께 온전히 의존하는 삶이 됩니다. 그는 십자가의 빛에서 사는 그리스도의 사람이고, 성령님과의 교제 가운데 사는 성령의 사람이요,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 가는 성경의 사람입니다. 바로 여기에 성화의 삶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의 일상성과 현실 전체를 성경과 성령님의 가르침 아래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 인간의 삶의 모든 부분과 영역이 다 이런 성화의 삶, 성령님과의 교제의 삶, 하나님의 경륜 전체를 이해하고 그에 따라 살아가려는 삶의 영역인 것입니다. 이런 영역 밖이나 주변의 작은 소위 종교성의 영역에 성화의 삶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 이원론적인 것으로 지칭되기도 하는 그런 소아병적인 사고와 삶의 분과화(departmentalization)는 성경적 기독교의 모습과는 거리가 멉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에 의하면 우리의 일상성(everyday life)과 공적인 영역(public arena) 그 한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서 우리의 성화의 삶이 있어야 합니다. 성화는 일상성과 공적인 삶의 영역을 떠나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속의 한 가운데 우리의 거룩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있는 이는 세속 속의 성자(the secular saint)입니다.

하나님 앞에(Coram Deo) (4) 사랑의 삶(The Life of Love)

   그러므로 우리의 하나님 앞에서의 삶은 같이 하나님 앞에선 이들과 함께 하나님을 섬겨 나간다는 의식을 나누는 사랑 의식(agape-consciousness)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 앞에 설 때는 참으로 홀로 섭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홀로 정죄 됩니다(따라서 여기서는 아무런 비교 의식도, 우열 의식도 없는 것이다. 그런 것이 있는 한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참된 죄의식을 아직 가지지 못한 것이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홀로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그의 삶과 십자가에서의 구속을 믿음으로 칭의함을 받습니다(여기서도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 앞에 홀로 선 이들은 자신들만이 홀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홀로 하나님 앞에서 정죄받고 칭의함을 받은 다른 이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는 참으로 냉정하게 홀로 서야 합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하나님 앞에 서면 우리가 사랑할 많은 이들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처럼 함께 살아가도록 새로 지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 공동체 안에 있는 동료 그리스도인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실천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탄생된 이 공동체 안에서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고 실천하고 연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가시적인 현실(可視的 現實)로 이 세상에 드러내야만 합니다.

   이 공동체 안에서의 삶과 함께 그는 동시에 그 공동체 안에서 연습한 그 사랑을 온 세상 안에 가서 실천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그의 사랑이 표현되어야 하는 사랑의 역사(the works of love)가 나타나야 하는 무대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피하여 가야 할 영역이 아니라, 우리가 그 안에 들어가 살아야 하는 우리의 사랑의 실천의 장(場)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하나님 사랑의 도관(channel of the love of God)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삶은 사랑의 삶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됨을 깊이 인식하며, 칭의의 은혜 가운데서, 날마다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한 형제된 자들을 사랑하며, 그 사랑을 이 세상 가운데 나타내는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