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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성경본문 갈 3:10-14
성경본문내용 (10)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11)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12)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13)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14)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강설날짜 2011-09-21

2011년 9월 21일 한결교회 수요강설

갈라디아서 제16강

 

율법의 저주

 

말씀 : 갈 3:10-14

3장 전체 흐름을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3장 1-5절까지는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의 경험에 호소해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이신칭의 교리를 증명하고 있고, 지난주에 배운 6-9절까지는 구약성경에 기초해서 증명을 하는데, 특별히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교리를 긍정적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한편 오늘 본문에서는 계속해서 구약성경에 기초해서 증명하는데, 이번에는 부정적인 측면에서 증명합니다. 즉 우리가 왜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수는 없는지 그 이유를 설명함으로써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로 바울은 세 가지 원리를 제시합니다. 첫째는 율법은 완전함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율법을 어긴 자에게는 저주가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믿음의 원리와 율법의 원리는 물과 불처럼 함께 양립할 수 없는 특징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원리를 구약의 본문들을 인용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그러면 하나하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10절을 보면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라는 말은 구원에 있어서 율법의 행위를 의지하는 자를 말합니다. 이런 자는 저주 아래 있게 되는데, 그 이유는 율법은 완전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 말씀은 신명기 27장 26절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26)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신 27:26)

이 말씀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들이 요단강을 건너거든 그리심산과 에발산에 각각 사람들을 세워서 축복과 저주를 선포해라”고 하면서 그 선포할 내용을 미리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 저주 선포내용이 15절부터 쭉 나오는 것이고, 마지막에 이 저주 선포내용의 결론으로서 신명기 27장 26절이 나오는 것입니다. 모든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율법을 지키려면 하나도 빠짐없이 다 지켜야 저주를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치 연결고리들로 이루어진 목걸이가 중간에 하나만 끊어져도 목걸이가 되지 않는 것처럼, 율법도 613개조의 계명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라도 어기면 612개조 계명을 순종한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고, 그 불순종한 한 가지 계명으로 인해서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절대성입니다. 뿐만 아니라 율법은 우리가 산상수훈에서 보는 것처럼 마음의 동기까지 문제 삼습니다. 실제로 간음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기만 해도 그것이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했고, 실제로 살인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형제를 미워하고 화내고 욕했으면 그것이 이미 살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은 우리 마음속에서 그냥 스쳐지나가는 한 가지 불순한 마음도 결코 용납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죄로 책잡아서 우리에게 저주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율법은 절대적인 완전을 요구하고 내면에까지 철저하게 적용됩니다. 율법이 이렇게 절대적이고 철저한 이유는 바로 율법에 하나님의 완전하시고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속성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하신분이시기 때문에 ‘완전’이 아니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그러나 사실 이것이 실현 가능한 것입니까? 타락한 인간이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있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도리어 모든 인간이 율법을 범했기 때문에 다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아래 있는 인간의 실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갈라디아 교회의 거짓교사들은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이것을 몰랐고, 특히 바리새인들이 이것을 크게 오해했습니다. 그들은 기도할 때 어떻게 했습니까? 성전에 나와서 손을 들고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 18:11-12) 하고 기도했습니다. 자신은 율법을 열심히 지켰다는 것입니다. 물론 열심히 지켰습니다. 우리가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이미 배워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율법을 완벽하게 지켰습니까? 마음으로까지 온전히 순종했습니까?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행위로 따지자면 하나님 앞에서 세리와 창기와 다를 바 없는 죄인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 나름대로 율법을 잘 지켰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했고, 그렇지 못한 세리나 창기들을 판단하고 정죄했던 것입니다. 이 ‘의’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율법을 지킨 것을 가지고서 자기 스스로 의로운 자라고 평가내릴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11절에 보면 “(11)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의롭다고 하다’는 동사는 수동태입니다. 바울이 이 단어를 쓸 때는 항상 수동태로 씁니다. 수동태라는 것은 의롭다고 판단하는 것이 자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군가에 의해서 판단되어지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11절에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즉 ‘의’라는 것은 본인이 스스로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기준으로 우리를 평가 내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율법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평가하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다 기준미달인 것이고, 다 죄인인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조금 선하고, 조금 악할 뿐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하나님 보실 때는 똑같은 죄인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자꾸 어떤 생각이 들기 쉽냐하면, 상대적인 기준으로 서로를 비교하는 것입니다. 내가 저 사람보다 좀 착하고 거룩하게 살고, 예배 안 빠지고 잘 나오고, 헌금 많이 하고, 헌신 많이 하고, 전도도 많이 하면 우쭐해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신앙생활 잘 했으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저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실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착각입니다. 사람의 행실로 따졌을 때 내가 저 사람보다 낫다는 것인데, 그러나 하나님이 정작 우리를 행함으로 따지시면,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다 도토리 키 제기인 것입니다. 다 죄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착하고 거룩하고 순결하게 살아도, 우리가 아무리 헌신하고 충성봉사하고, 전도를 많이 해도, 우리의 모든 행실은 여전히 하나님의 이 절대적인 기준을 만족시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최선의 선행이라도 이 하나님의 완전한 율법 앞에서는 죄가 됩니다. 그러나 은혜로우시게도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예수 믿는 신자를 행위로 평가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를 율법의 속박에서 해방시켜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우리를 행함의 원리로 대하시지 아니하시고 은혜로 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행이 불완전하더라도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공로로 덧입혀서 기쁘게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그 받아주신 것을 인해서 감사할 뿐이지, 결코 자신의 자랑으로 삼거나 우월감의 근거로 삼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행함을 가지고서 자꾸 자랑하거나 우월감을 갖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율법의 행위로 다시 돌아가겠다는 것인데, 거기에는 율법의 저주를 당하는 것 외에 아무런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뜻에 최선을 다해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때마다 늘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의 최선의 행위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완전한 기준에 못 미친다는 것입니다. 즉 선을 행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도 늘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여서 더욱 주님의 은혜만을 의지하고, 또한 연약한 형제를 용납하며 용서하는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에 빠집니다. 스스로 다른 사람보다 의롭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의에 힘써 복종치 않고 내 의를 내세우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율법의 절대성을 늘 잊지 않고 살아감으로써 늘 겸손하게 주님만을 의지하면서 신앙생활 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두 번째는 율법에는 상벌이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범했으면 그것으로 그냥 범한 것으로 끝이 아니라 거기에는 저주가 있고 형벌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상도 있습니다. 12절에 보면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레위기 18장 5절 말씀을 인용한 것인데,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레 18:5)라고 되어 있습니다. 율법을 지켰을 때 주는 상급이 무엇이냐 하면,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 레위기 문맥에서 볼 때 ‘산다’는 것은 직접적으로 영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가나안 땅에서 장수하면서 모든 풍요로운 축복을 누리면서 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약을 볼 때, 구약 따로 신약 따로 보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배경 하에서 신약을 보고, 이제 신약의 성취의 빛에서 또한 구약을 새롭게 해석해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여기서 ‘산다’라고 하는 것은 바로 구원 곧 영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율법을 지켜 행하면 구원 곧 영생을 상으로 받는다는 것입니다(마 19:16-17). 그러나 반대로 하나라도 어기게 되면, 율법의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율법에는 상벌이 있습니다.


이 율법의 상벌을 자세히 기술한 본문이 있는데, 그것이 신명기 28장입니다. 거기 보면, 율법을 잘 지키면 복을 받는데, 말씀하기를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 28:5-6)라고 하였습니다.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있어서 이 말씀은 참 유명한 구절입니다. 목사님들이 심방 왔을 때 자주 이 구절을 인용해서 축복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사실 신명기 28장은 축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저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축복은 1-14절까지 있고, 15절부터 저주가 나오는데, 68절까지가 저주입니다. 축복은 조금만 하고, 저주를 이렇게 길게 하고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미래가 그만큼 어둡다는 것을 미리 암시적으로 예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저주가 여러 가지가 나오는데,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일단 가뭄과 기근과 병충해가 와서 먹을 것이 없어지고, 병들고, 정신이 미치고, 대적들의 침략을 당해서 나라가 망하고 노예로 사로잡혀가고, 또 대적에게 둘러싸여서 먹을 것이 없어서 자기 자식을 음식으로 삶아 먹기도 하고, 필경은 칼로 죽임을 당해서 완전히 멸절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이 명시한 저주입니다. 굉장히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나중에 한번 신명기 28장을 읽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얼마나 철저하고 잔인하게 심판하시는지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이 이 율법 순종에 성공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공했습니까? 실패했습니까? 실패했습니다. 다윗이나 솔로몬 때 반짝 순종하는 듯했지만, 그 외는 온통 불순종으로만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예고된 율법의 저주를 그대로 받아서 멸망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로 남은 자를 두시긴 하셨지만...) 그들이 멸망당한 것을 보면 신명기 28장에 나온 모든 율법의 저주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 그대로 성취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시간 관계상 일일이 다 확인해 보여드리지는 못하지만, 하나도 빠진 것이 없습니다.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율법의 저주가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이스라엘이 율법의 저주를 받아서 멸망 받은 것을 우리가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그렇게 태연하게 쳐다볼 수 있는 그런 입장이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두 가지 면에서 그렇습니다. 첫째는 이스라엘은 모든 인류의 대표이기 때문입니다. 낙동강 수질 검사할 때, 그 물 전체를 다 떠다가 다 수질검사 해봐야 그 강의 수질을 알 수 있습니까? 아니죠. 그렇게 하면 평생을 해도 수질검사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표본으로 강의 극히 일부를 가지고서 수질검사해서, 낙동강 전체의 수질을 평가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온 인류의 대표로 택하시고 그들에게 율법을 주셔서 수질검사 하셨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율법 순종에 실패해서 율법의 저주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이스라엘의 실패는 곧 누구의 실패인 것입니까? 온 인류의 실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만 율법의 저주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온 인류도 똑같이 율법의 저주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19)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롬 3:19)

그러면 억울해 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우리는 율법을 들은 적도 없고 배운 적도 없는데, 율법의 저주를 내리는 것은 불공평하다. 억울하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방민족들에게 율법을 안 주신 것이 아닙니다.

(14)(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15)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 2:14-15)

바로 두 번째로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양심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양심이 바로 마음에 새겨진 율법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죄를 범하면 본성적으로 죄책감을 느끼지 않습니까? 그것이 율법의 작용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실상 모든 인류에게 율법을 다 주신 것입니다. 다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것을 명시적으로 주신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유대인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율법의 ‘율’자도 들어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다 이 율법 아래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사실을 아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도 되는 그런 존재로 지음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냥 남에게 폐 안 끼치고 우리나라 법을 지키면서 나름대로 착하고 괜찮은 인생을 살아가면 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법은 이 세상 나라의 법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법 위에 율법이라는 것이 우리위에 지워져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율법을 우리 모두에게 부과하셨고, 그래서 우리는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면서 살아야 할 의무가 있는 존재이며, 율법을 지키지 않았을 때는 그에 대한 무서운 대가를 치루어야 하는 책임 있는 존재로 지음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자유로운 삶이 주어졌지만, 그래서 양자택일의 상황에서 무엇을 택할지, 무슨 행동을 할지,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생각을 할지를 자신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자신의 말과 행동과 생각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로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우리는 결코 내 마음대로 살아도 괜찮은 삶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율법을 따라 순종하면서 살아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이 율법을 다 지켜 행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든 인류는 다 죄인이고, 그러므로 다 하나님의 저주의 심판 아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이 처한 상황이 바로 이것입니다. 율법의 저주 아래서 비참한 삶을 살다가 결국 죽고, 필경은 영원히 불타는 지옥에 떨어져서 고통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진노의 손아래 있는 죄인들의 처지입니다. 이것은 막연한 이야기도 아니고, 동화속의 이야기도 아니고, 정말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것입니다. 지금도 지옥에는 수많은 영혼들이 끊임없이 고통하며 절규하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어디있느냐” 하면서 자기 고집을 피우고, 자기 마음대로 죄 지으며 살아갑니다. 참으로 무시무시한 상황인데, 문제는 우리 믿는다고 하는 자들도 이런 불신자들처럼 마치 최후 심판과 지옥을 믿지 않는 자처럼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욕심을 좇아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큰 폐단인데, 계속해서 그런 죄 가운데 살아간다면 자신의 중생을 의심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율법의 저주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 임하는 것인데, 또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교회에 오기는 오지만, 여전히 거듭나지 아니한 상태로 있는 외식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믿음을 잘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정말 예수님을 믿는지, 정말 거듭났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내가 믿지 않는다고 한다면, 빨리 죄 된 삶에서 돌이켜서 주님의 중생하시는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반대로 내가 정말 믿는 자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주신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찬양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이 무서운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주신 이 은혜를 가벼이 여기지 말고, 늘 이 은혜를 마음에 간직하고 그 은혜 안에서 감사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이 십자가의 은혜를 가벼이 여기고 있다면, 십자가 은혜에 대해서 무덤덤하고 무감각하다면, 우리는 십중팔구 우리가 어디서부터 구원을 받았는지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즉 율법의 저주의 무서움과 거기서 속량 받았다는 사실을 까먹으면, 우리는 은혜를 가벼이 여기고, 그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고, 감사하지 않고, 귀중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도리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조금만 힘든 일이 있어도 하나님 원망불평하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하는 무시무시한 요청을 하는 불신앙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에 무감각하다면 또한 십중팔구 우리는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시기 위해서 주님이 어떤 대가를 치루셔야 하셨는지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이 무서운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값비싼 대가를 치루셨습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다고 했습니다. ‘속량하다’라는 단어는 “대가를 지불하고 노예를 사서 풀어준다”는 말입니다. 즉 율법의 저주아래 신음하고 있고 비참한 운명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값을 치루어서 거기서 꺼내주셨다는 것입니다. 어떤 값을 치루셨습니까?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셨다’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신명기 21장 23절을 인용한 말씀인데, 그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범죄자를 처형한 후에 나무에 매달리게 하심으로써 추가적인 수치와 모욕을 당하게 하고, 또한 사람들에게 죄를 범하면 이렇게 죽는다고 하는 본보기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예수님이 나무위에 달리심으로써 수치와 모욕을 당하셨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 때문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가 어떻게 이스라엘의 메시아가 될 수 있느냐 고 반문하면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습니다. 바울도 맨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남으로 그 율법의 저주가 바로 자신이 받았어야 했던 저주를 대신 당하신 것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당했어야 했던 율법의 무서운 저주를 십자가에서 대신 당하시고, 물과 피를 흘리심으로써, 자신의 귀한 목숨이라는 값을 치루심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주신 것입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8-19)

주님께서는 자신의 보배로운 피로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피는 곧 생명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피체 먹지 말라고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우리를 이 무서운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값으로 내어주신 것입니다. 어느 누가 여러분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혹시 부모님이나 자기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을지 몰라도, 주님은 원수였던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이 주님의 한량없는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가 이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나 14절에 약속된 것처럼 아브라함의 복을 받고, 성령의 약속을 받는 그런 놀라운 축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평생을 이 주님의 은혜를 마땅히 감사하며 찬양하는 삶을 살고, 이제는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그런 큰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심심하면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배은망덕한 삶을 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참으로 우리는 이 주님의 사랑 앞에서 은혜 앞에서 우리의 배은망덕의 죄를 회개하고 다시금 그 은혜를 회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신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다시금 깊이 깨닫게 하셔서 주님의 은혜를 알고,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께 날마다 감사 찬양하는 자들이 다 되게 하여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을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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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갈라디아서 5장] 진리에 순종 file 갈 5:7-15 최상범 2011-11-30 2682
25 [갈라디아서 5장]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file 갈 5:1-6 최상범 2011-11-23 2607
24 [갈라디아서 5장] 자유 file 갈 5:1-6 최상범 2011-11-16 2782
23 [갈라디아서 4장] 약속의 자녀의 의무 file 갈 4:21-5:1 최상범 2011-11-09 3239
22 [갈라디아서 4장] 사라와 하갈 비유 file 갈 4:21-31 최상범 2011-11-02 5430
21 [갈라디아서 4장] 염려, 호소, 의심 file 갈 4:8-20 최상범 2011-10-26 3644
20 [갈라디아서 4장] 종에서 아들로 file 갈 4:1-7 최상범 2011-10-19 2822
19 [갈라디아서 3장] 믿음이 온 이후로 file 갈 3:25-29 최상범 2011-10-12 3502
18 [갈라디아서 3장] 몽학선생 file 갈 3:19-24 최상범 2011-10-05 3905
17 [갈라디아서 3장] 율법과 약속 file 갈 3:15-18 최상범 2011-09-28 3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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