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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성경본문 갈 4:1-7
성경본문내용 (1)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2)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3)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4)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5)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6)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7)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강설날짜 2011-10-19

2011년 10월 19일 한결교회 수요강설
갈라디아서 제20강

 

종에서 아들로

말씀 : 갈 4:1-7

 

바울은 율법 아래서 종노릇하는 노예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한 아들을 대조하면서 한 가지 예를 듭니다. 그것은 상속자가 어릴 때에는 종과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장차 아버지로부터 모든 재산을 이어받아 주인이 될 상속자라 하더라도 어릴 때에는 종과 다름없습니다. 왜냐하면 성인이 될 때까지는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후견인과 청지기는 몽학선생과 같은 것입니다. 자녀를 맡아서 보호하고 감시하고 데리고 다니면서 가르치고 훈육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때로는 매를 들어서 엄하게 대하기도 합니다. 아무리 주인의 자녀로서 상속자라 하더라도 어릴 때는 이렇게 종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들이 시키는 대로 살아야 하고, 그들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정한 때가 되면, 곧 성인식을 거치게 되면, 이러한 몽학선생과 청지기와 후견인들로부터 자유하여 아들로서의 모든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이르게 됩니다. 상속자로서 모든 권리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그 전까지는 종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이야기를 영적으로 적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어렸을 때는 이 세상 초등학문 아래 종노릇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의 상황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 4절로 말할 것 같으면 “때가 차기 전에”를 의미합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 모든 인류는 다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서 종노릇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 초등학문이 무엇입니까? 이 단어의 원래 의미는 두 가지입니다.

 

1) 우주를 구성하는 근본요소들, 우리식으로 말하면 ‘원소’의 개념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네 가지 요소가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 물, 불, 흙, 공기 -> 벧후 3:10

 

(10)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 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 3:10)

 

2) 여기서 파생된 의미로서 초보적인 원리와 교훈으로 해석됩니다. -> 히 5:12

 

(12)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히 5:12)

 

그리고 이 두 번째 견해를 따라서 한글 성경은 이 단어를 ‘초등학문’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즉 기초적인 원리와 교훈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이 기초적인 원리와 교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위해서 본문의 문맥을 살펴봅시다.

 

(3)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갈 4:3)

 

여기서 ‘우리는’이라고 하는 주어는 일단 유대인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율법 아래 종노릇한 것을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서 종노릇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 초등학문은 분명 율법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우리’에는 이방인들도 포함됩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은 이방인들이었고 율법을 몰랐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도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에 이미 초등학문 아래서 종노릇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8절에 보면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갈 4:8)라고 해서 우상의 종노릇했다고 말합니다. 즉 그들은 우상을 숭배하고, 그 이교종교의 여러 가지 규칙들과 의식들과 도덕적인 교훈들에 종노릇하며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이교종교에서 명하는 여러 가지 규칙들과 의식들, 도덕적인 교훈들이 바로 이 세상의 초등학문인 것이죠.

 

(9)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10)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갈 4:9-10)

 

여기서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은 분명히 율법을 의미합니다. 10절의 절기들도 유대 절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이 세상의 초등학문’이라는 용어를 이중적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율법 아래로 돌아가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교종교에서 여러 가지 규칙과 의식들과 도덕적인 교훈들 아래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사실상 동일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교종교에서도 우리는 율법의 흔적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불교와 유교, 도교와 신흥종교, 모든 이단과 사이비를 보아도, 공통적인 특징은, 교주가 있다는 것과 경전이 있다는 것과 그리고 그 경전에는 사람들에게 굴레 씌우는 많은 의식들과 전통들과 또 무엇보다도 도덕규범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절에 가서 불교경전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것을 듣고 매우 놀랐습니다. 마치 성경을 읽는 것처럼 경건하고, 거룩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내용을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고개가 끄덕여지는 그런 말들이었습니다. 이것은 불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유교의 핵심개념은 교육을 통해 사람을 교화시켜서 선하게 살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유교에 철저하신 저의 할아버지는 매일 하시는 말씀이 “기독교나 불교나 유교나 다 똑같다. 사람을 교화시켜서 착하게 살도록 만드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기독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는 도덕과 윤리를 가르칩니다. 이것은 바로 인간의 마음에 새겨진 율법인 양심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러한 율법과 관련된 모든 것을 뭉뚱그려서 ‘이 세상의 초등학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울이 이것을 악하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약하고 무능력하고 비천한 것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과 이방인에게 주신 양심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좋은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자신들의 죄를 깨달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때가 차서 하나님께서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셔서 우리를 율법에서 속량해주셨으면, 이제 더 이상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즉 초등학교 과정은 꼭 필요하고 중요한 것인데, 거기서 졸업했으면, 더 이상 초등학교에 등교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다시 초등학문에 돌아가려고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골로새서 말씀을 보십시다.

 

(8)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골 2:8)


(20)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21)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22)(이 모든 것은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 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23)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골 2:20-23)

 

여기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이 사람들의 명과 가르침, 철학과 속임수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 아울러서 금욕과 고행적인 방법들과 의식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이 율법의 무능력함과 비천함이 더 분명히 드러나는데, 그것은 너무나 쉽게 사람들에게 악용된다는 것입니다. 분명 율법은 선한 것이고 좋은 것이고, 사람들의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러한 율법의 목적을 뒤틀어버리고, 악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즉 율법을 잘 지키면 구원을 얻을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율법을 자기의 의를 내세우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인해 자신들이 성스럽고 신앙심이 깊은 줄로 생각하고, 선하며, 경건한 체하였습니다. 반대로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해서 수많은 규칙들을 첨가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계명을 잘 지키기 위해서 수천가지의 규칙들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해서 자주 금식하고, 금욕하는 등의 고행의 방법들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전 과정이 이교종교에서도 그대로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자신 안에 있는 양심을 통해서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어 구원을 갈망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 착하게 살면 구원을 이룰 수 있겠다 생각하여 자신들을 위한 종교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종교를 통해서 여러 가지 도덕적인 가르침을 명하고, 금욕과 고행과 의식들의 굴레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것이죠.


그러나 바울의 말처럼 이것은 속임수입니다. 철학과 헛된 속임수입니다. 유대교나 이방종교나 다 똑같이 뭔가 착하게 살아서, 선하게 살아서, 또는 여러 가지 금욕과 고행과 의식들을 통해서 구원을 이루어보겠다는 것은 모두 헛된 속임수입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가 육체를 좇는 것을 금하는데 아무런 유익이 없고, 도리어 이것을 쓰는 데로 부패로 돌아갑니다. 또 거기에는 결코 구원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같은 종교끼리 왜 배척하며, 편협하게 굴며, 옹졸하게 구는가? 어떻게 당신네들만 옳단 말인가? 너무 오만하지 않는가?” 라고 기독교를 공격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을 아직 몰라서 그렇습니다. 인간에게 답이 없다는 것을 다른 모든 종교에서 확인하여야 합니다. 다른 모든 종교는 증상을 잠간 가려주거나, 잠간 우리를 어떤 환상 속으로 인도하여 현실을 잊고, 자신을 잊게 해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답이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를 얽어매고 종노릇시키는 이 세상의 약하고 비천한 초등학문인 것입니다.


모든 인류는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다 이 율법의 종노릇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때가 차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심으로 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마다 다 초등학문에서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면 골로새서 말씀처럼 이 세상 초등학문에 대하여 이미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제 이 세상 초등학문과 우리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의 다른 종교인들이 자신들의 신과 관계를 맺듯이 그런 식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과 이전에는 없었던, 다른 종교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러한 전적으로 새로우면서 놀라운 관계를 맺습니다. 바로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입니다.


반면에 이 세상의 다른 종교들은 그 신과 자신이 다 주인과 종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행위의 원리가 지배한다. 이를테면 내가 신을 잘 섬기고 정성과 공을 들이고, 그 신의 말씀을 잘 순종하고, 죄를 덜 짓고 착하게 살면 복을 받고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그렇게 자기의 신과 관계를 맺습니다. 그 관계의 근거는 전적으로 행위가 됩니다. “내가 얼마나 신에게 정성을 드렸느냐...” 하는 것이 결정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을 부르면서, 이러한 이방종교의 방식으로 신앙생활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이야말로 저주받을 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복음을 좇는 것이고, 그런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아들과 종의 대조를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율법아래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주인과 종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과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부자지간같이 묶지 못합니다. 율법은 계속 강요할 뿐입니다. “이것을 지켜라, 저것을 지켜라” 강요하고, 또 지키는 것을 도와주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지키지 못하면 정죄와 심판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자지간이면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자녀라는 것은 혹독하고 냉정하게 다룰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부모는 자식을 자기의 생명을 이을 자로, 자신의 명예와 지위를 가업을 이을 자로서 대우하지, 결코 기계적으로 혹은 규칙적으로 대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녀는 부모의 사랑의 대상이요 보호의 대상이요 기쁨의 대상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는 이유와 조건이 없습니다. 사랑은 보상을 원치 않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이고, 사랑은 강요하지 않습니다. 강요해서 사랑하게 만드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나의 사랑에 보상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와 상관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식을 사랑할 때, 이쁜 짓 할 때만 사랑합니까? 나쁜 짓해도 사랑하지 않습니까? 사랑해서 징계하지 않습니까? 매를 들 때 미워서 형벌해서 죽이려고 매를 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를 바르게 고쳐서 바르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 매를 듭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우리에게 매를 드실 때, 우리로 거룩함에 참예하도록 하기 위해서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고,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은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우리는 로마서 5장을 제대로 이해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맺게 된 새로운 관계가 바로 이러한 관계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서 이유와 조건 없이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기뻐하심을 받는 아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이 고백하는 가장 위대한 진리입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어떤 생각에 빠지느냐 하면, 이러한 아들로서 하나님 앞에 서지 않고, 종으로서 하나님께 나아가려하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자꾸 주인과 종의 관계로 생각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이 되기 위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서 내가 뭔가를 행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에 대해 강박관념을 가지고서 행위에 매달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살지 못했을 때, “내가 이따구로 신앙생활 하는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겠는가? 나를 기뻐하시겠는가?” 라고 하면서 절망과 좌절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자신의 잘못을 알고, 말씀 앞에서 죄를 깨달아서 두려움을 가지고 자신을 성찰하고 애통하는 마음과 회개와 결단의 도전을 받는 것은 좋은 것이고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과 관련하여,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의 기초를 어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것에 근거를 두게 되면 그것이 오늘 본문이 말하는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려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우리는 곧장 은혜에서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마음속에 “예수를 믿었으면 뭔가 틀려야 되지 않느냐? 뭔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모습이 나와야 되지 않느냐?”라는 생각이 들 때, 물론 이 말이 틀린 말이 아닌데, 이 말에는 은연중에, 그리고 저 밑바닥에 윤리와 도덕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윤리와 도덕이라는 차원에서의 종교인 것입니다. 이 세상의 초등학문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구원해주셨는데, “구원 받은자답게”라는 말이 윤리적이고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하고 싶은 얘기는 그렇게 얘기를 하면 금방 ‘봐라! 나는 신자답지, 너는 아니지’라고 하는 자기 증명으로 자기도 모르게 자기 안에 어떤 근거를 두는 것으로 돌아오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뭔가가 달라야 된다 라는 것의 근거를 자신에게서 세운다는 것이 언제나 문제가 됩니다. 즉 결국에는 “나는 은혜를 받을 만해서 은혜를 받았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죽을 만해서 죽었다”로 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을 만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예수를 보내어 그의 죽음으로 우리를 불러내셔서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지,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문제를 제발 혼동하지 말라”는 것이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하고자 하는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늘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는 이러한 초등학교를 졸업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 이상 자신을 근거로 하여 구원을 세우기로 하는 대서 졸업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는 그런 종과 주인의 관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바라보며 은혜의 보좌 앞에 당당히 나아가는 아들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그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자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에 종으로 서고 싶은 악한 교만과 싸워야 합니다. 떳떳하고 싶은 마음, 이때까지 잘못한 것을 만회할만한 결과물을 만들어 내어서 나아가려는 마음, 뭔가 조건을 갖추고서 나아가려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체면과 교만을 버리고, 스스로가 죄인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느 때든지 은혜 아래로 돌아와야 합니다. 내가 지금 어떤 상황에 있든지, 어떤 죄를 범했든지, 어떤 영적인 침체와 낙담 속에 있든지 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향하여 진심을 쏟아놓고 그분의 긍휼만 바라보며 그를 향하여 달려가는 것 외에 그것을 대신할 신앙의 다른 어떤 결단도 실천도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할 일은 이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고서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들 됨의 삶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고 기대하시는 삶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깊이 깨달아서, 흔들림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고 감사드리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얻어 아들이 된 우리는 이제 율법에서 해방되었으므로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렇죠?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은혜 아래 있게 되면,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면,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면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십니다. 아들이기 때문에 그 아들의 영인 성령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성령께서 신자들 마음 안에 살아계셔서 내주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고 한다면, 우리 안에 성령님이 정말 살아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놀라운 것입니다. 율법은 주인과 종의 관계를 상정하고, 규칙과 처벌만 명할 뿐, 순종할 힘을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고, 우리의 양자됨을 친히 증거하시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양자로 삼아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알게 하시고,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감사와 사랑의 마음이 일어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을 마음껏 섬길 수 있는 자유의 삶을 살게 하시는 것이죠.


과거 주인과 종의 관계였을 때는 형벌이 두려워서, 율법의 강요에 의해서 순종했지만, 이제 전혀 다른 동기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마음껏 하나님을 순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레미야의 새언약의 성취입니다. 성령께서 율법을 우리 마음에 새겨주신다는 것이 바로 이 말입니다.


로마서 7장에 보면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롬 7:6)라고 했습니다. 의문이라는 것은 율법의 조문을 말합니다. 과거 유대인들처럼 율법 조문에 매여서 종의 관계로 순종하지 말고, 이제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마음껏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긴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성령께서 친히 모든 순종의 원동력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에게서 사랑이 나타났을 때, 그것을 나의 열매라고 하지 않고, 성령의 열매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종에서 아들로 신분이 바뀌어졌다는 것을 알게 하시고, 늘 아들로서 하나님께 나아가며,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아먹고 튼튼해져서 아들로서 합당한 삶의 열매를 맺어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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