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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성경본문
강설날짜 2011-05-25

2011년 5월 25일 한결교회 수요모임 강설
갈라디아서 제1강

 

갈라디아서 서론(1) - 갈라디아서 구조 분석과 핵심 메시지

 

갈라디아서 서론을 살피기 전에 한 가지 이야기를 함으로써 시작하고자 한다. 어느 모 대학에 동아리를 통해서 두 남녀가 만났다. 두 남녀는 만나서 서로 사랑에 빠졌다. 평생을 같이할 약속도 하고, 누가 보더라도 부러워할 수 있는 아름다운 사랑과 교제를 가졌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남자가 대한의 남아로 영장을 받고 군대에 입대하게 되었다. 사랑하는 여자 친구를 학교에 두고 떠나는 남자나, 또 사랑하는 남자친구를 군대에 보내는 여자의 심정은 서로 찹찹하기 이를 수 없었다. 그러나 서로를 향해서 다짐하기를 여자는 군대 가는 동안에 “나는 결코 당신을 변절하지 않겠다. 끝까지 당신을 대한 신뢰와 사랑을 지키겠다”고 다짐을 했고, 남자도 “내가 군대 있는 동안에 대한의 남아로서 국방의 의무를 충실하고 건강한 몸으로 올 것이고, 시간이 있을 때마다 전화나 편지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드디어 입대하는 날이 되어 떠났다. 남자는 군대를 가서 6주 동안 정신없이 훈련을 받으면서 자기가 떠난 다음에 자기 여자 친구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지만, 이 훈련기간 동안에는 전화도 편지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걱정만 해야 했다. 그런데 같은 동아리의 친구였던 한 남자가 보이프렌드가 군대 갔다고 생각하고 기회를 엿보다가 이 여자에게 접근해 오기 시작했다. 한편으로 이 여자는 6주 동안 아무런 소식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된 일인가 걱정도 했고, 젊은 나이에 만나는 사람도 없고 적적하고 답답하고, 때로는 원망하는 마음도 생기고, 이러던 찰나에 같은 동아리에 있는 남자가 접근해 와서, 선물공세하고 같이 영화도 보고 하는 와중에 친해지게 되었다. 여러분은 사랑의 방정식을 아는가? 사랑은 시간에 비례하고 거리에 반비례한다. 같이 만나는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람은 더 가까워지게 마련이고, 거리가 멀면 멀수록 마음은 떠나가게 되어 있다. 여자는 점점 군대 간 남자 친구를 잊어버리게 되었고 접근한 남자에게 빠지기 시작했다. 6주 동안 훈련을 마치고 자기 여자 친구에게 연락을 하니깐 연락이 되지 않았다. 휴가가 아직 멀었기 때문에 다른 동아리 친구를 통해서 어떻게 되어졌는가 물어보니깐, 아! 자기 여자 친구에게 새로운 애인이 생겼다는 난데없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것도 어느 정도 같은 동아리의 평소에 알고 있는 친구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한편으로는 그 남자에게도 섭섭했을 뿐만 아니라, 짧은 6주 동안에 어떻게 다른 남자에게 넘어 갈 수 있는가 하면서 여자 친구에게도 섭섭했다. 여기서 질문을 던지기를 원한다. 이런 상황에서 그 남자가 어떻게 하는 것이 여자의 마음을 그 남자에게서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안이 될까? 아마도 이것이 그 남자의 최고 관심사이다. 또 다른 질문으로 이렇게 되어진 것이 단순하게 여자는 문제가 없고, 접근해온 남자만 문제가 있는가? 여자는 문제가 없었는데, 남자가 유혹해 왔기 때문에 넘어가게 된 것인가? 아니면, 여자에게도 어떤 문제가 있었기 때문 그런 것인가? 모든 여자가 남자가 유혹하면 다 넘어간다면, 그러면 우리가 잘 아는 춘향의 경우는 어떠한가? 춘향의 경우는 변사또가 그렇게 유혹했지만, 약속했던 이몽룡을 결코 배신하지 않았다.


조금 사설이 길었지만, 그러나 이 이야기는 갈라디아서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과 깊이 관련이 있다. 오늘 이러한 이야기의 배경을 깔고서 갈라디아서 전체 개관을 살펴보려고 한다. 갈라디아서는 6장밖에 되지 않는 짧은 서신이다. 그리고 바울의 서신 가운데서 어느 서신보다도 중요성을 가진다. 그 이유는 갈라디아서는 짧은 서신임에도 불구하고, 바울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초대교회 역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그리고 초대교회의 신학적 흐름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또는 바울의 신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러면 갈라디아서가 쓰여진 배경이 어떠하고 갈라디아서의 핵심 메시지는 무엇인가?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1차 선교 여행을 마치고 안디옥에 돌아온 직후에 AD 48년 경에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쓴 편지로 여겨진다(남부 갈라디아설을 따른다면...). 바울은 1차 선교 여행 때에 갈라디아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 바울이 이들에게 전한 복음은 그가 다메섹 사건을 통해서 받은 복음, 곧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이루신 구원 사건을 통하여 이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할례나 모세 율법의 준수에 관계없이, 인종과 신분과 성의 차별 없이 누구든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 바울의 핵심 메시지이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울이 전한 이 복음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였고 그리고 성령체험을 했다. 바울은 이들과 몇몇 가정교회를 형성한 다음 갈라디아 지역을 떠났다.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예루살렘 교회 출신의 보수파 유대인 신자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찾아왔다. 이들은 갈라디아 크리스챤들에게 바울의 사도성과 그의 복음을 폄하하고 축소시켰다. 그들은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보다도 열등한 사도이며, 그가 전한 복음도 불완전한 복음이라고 하면서, 바울의 사도직과 복음을 훼손하였다. 그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만으로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유대인 신자들과 동등한 하나님의 언약백성과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보충해서 언약백성의 신분과 삶의 표지인 할례와 모세 율법을 지켜야 비로소 유대 그리스도인들처럼 참된 구원의 공동체, 곧 하나님의 언약백성과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는 신분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유대주의들의 이러한 주장에 미혹을 당해서 바울이 그들에게 전한 복음을 부족한 복음으로 생각하여 유대주의자들이 요구한 할례와 모세의 율법을 받아들이려고 하였다. 이것은 사실상 교회 설립자인 사도 바울과 그가 그들에게 전한 복음을 떠나는 행위였다.


바울은 편지를 통하여 자신이 개척한 갈라디아 교회에 자신의 사도성과 복음을 폄하하는 유대주의자들이 찾아왔다는 것과 그들이 자신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가르쳤던 것과는 다른 메시지들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전달했다는 것과, 그리고 갈라디아 교인들 중에 적지 않은 무리가 이들의 가르침에 유혹을 받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떠나려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바울은 너무나 빠른 갈라디아 교인들의 변절에 당황하고 분노하였다. 그러면서 어떻게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를 빠르게 수습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은 당장 그들을 찾아가 그들을 책망하고 문제를 수습해야 하겠지만, 여러 사정으로 갈 수 없기에, 자신을 대변할 수 있는 편지를 급히 써서 우편으로 보냈는데, 그것이 바로 갈라디아서신이라는 것이다.


전통적인 접근에 따르면, 갈라디아 교회의 위기는 “누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인가? 아브라함의 후손인가?”하는 신분의 문제와 이 신분을 결정하는 조건의 문제였다.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주어진다는 메시지를 전한 반면에, 유대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덧붙여 할례와 모세 율법과 유대교 절기에 대한 순종이 추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바울이 볼 때, 갈라디아 교회 안에 제기된 문제는 바로 바울 자신의 사도직과 그의 복음의 사안이 걸려있는 중대한 문제였고, 그의 복음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의 존폐가 달려 있는 문제였다. 왜냐하면 할례와 모세 율법이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신분을 결정하는 구원과 의의 조건이라고 본다면, 예수의 십자가 죽으심은 무의미한 것이 될 것이고, 성령의 선물도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 될 것이고,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바울은 거짓된 사도가 될 것이고, 자신의 과거 현재는 물론 미래의 모든 이방인 선교 사역도 함께 무너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아주 필사적으로 갈라디아 성도들의 변절을 책망하고, 심지어는 다른 복음 전하는 자들에게 저주가 임할 것이라고 하면서 유대주의자들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이렇게 볼 때, 바울 복음의 핵심은 우리의 신분과 구원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의롭다 함을 얻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성령을 선물로 받고, 약속의 상속자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라고 하는 것이 바울 복음의 메시지이다. 때문에 이신칭의 복음이야말로 바울복음의 진수이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이 믿고 있는, 적어도 2000년 교회사동안 가장 많은 신자들, 학자들이 지지해온 그야말로 전통적인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이의를 단다면 그것은 이단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하나 주의해야 할 것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말할 때, (이신칭의가 핵심이고 중요하지만) 이신칭의를 언급한 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갈라디아서의 구조와 관련하여 전통적인 견해는 3중 구조로 보는 것인데, 전통적인 견해는 이 3중 구조(1-2장의 자사전적인 내용, 3-4장에서 복음과 율법의 대조, 5-6장의 윤리적인 권고) 중에서 3-4장을 바울 복음의 핵심적인 부분으로 본다. 그리고 5-6장의 윤리적인 권면 부분을 마치 로마서나 에베소서나 다른 대부분의 바울서신이 종종 그런 것처럼, 복음 교리를 다 서술한 후에 후반부에 추가적으로 윤리적인 부분을 덧붙여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즉 5-6장은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의 앞날을 생각하면서 추가적으로 하는 목회적인 권면에 속하지, 갈라디아 교회의 근본문제와는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2000년 교회사동안 대부분의 학자들이 취해온 전통적인 입장이다. 필자는 여기에 의문을 다는 것이다. 과연 5-6장은 갈라디아 교회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추가적인 권면에 불가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최근에 이 5-6장을 어떻게 볼 것인가와 관련해서 다른 이론들이 등장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두 전선 이론(two-front theories)이다. 즉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동시에 두 전선에서 싸우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3-4장에서는 율법주의적(legalistic) 유대주의자들과 싸우고, 다른 한편으로는 5-6장에서 도덕률 폐기론자들과 싸운다는 것이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전체를 볼 때, 그 어디에서도 이러한 두 대적자들을 동시에 상대한다는 것에 대한 암시를 전혀 찾아 볼 수 없고, 바울은 오직 다른 복음 곧, 한 부류의 대적자들과만 논쟁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에 이 견해는 가능성이 적어 보인다.


5-6장을 어떻게 볼 것인가와 관련하여 또 다른 주된 입장은 바로 바울의 이신칭의 복음이 도덕률 폐기론적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었기 때문에, 3-4장에서 복음진리를 설명한 후에 자신의 복음에 대한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서 5-6장을 첨가했다는 것이다.


과연 5-6장을 어떻게 볼 것인지가 갈라디아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구조분석을 통해서 과연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궁극적으로 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메시지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핵심 메시지와 관련하여 5-6장은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를 중점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갈라디아서의 전체 구조>

[편지 서두]
1:1-5 : 편지 서두. 여기에서 바울은 두 가지 사상, 즉 그의 사도직의 신적 기원과 그리스도의 구속의 종말론적인 성격을 소개한다.

[편지 명제]
1:6-10 : 바울은 거짓 설교자들에게 저주를 선언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고 주장한다.

[이야기]

1:13-24 :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계시와 그를 이방에 전하라는 사명을 받고 어떤 인간과도 상의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독자적인 선교를 시작하였다.
2:1-10 : 14년 후에 바울의 복음과 그의 사도직의 정당성을 예루살렘 사도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2:11-14 : 바울은 안디옥에서 복음의 진리를 위하여 게바에게 대항하였다. 이것은 바울의 복음이 예루살렘의 복음보다 결코 열등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이로써 바울은 자기의 복음의 신적 기원을 간접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A) 2:15-17 : 칭의는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B) 2:18-21 : 믿는 자들은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께 대하여 새로운 삶을 산다.

<- 이 두 차원의 명제는 이후에 전개될 갈라디아 서신의 핵심 골격을 형성한다.

[교훈 / 논증]
A') 3:1-14 :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하고 오직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율법의 저주를 제거하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주장함.


갈 3:15-22 : 율법은 범법을 생산하기 위하여 더하여졌다. 그 결과, 성경은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약속을 받도록 하기 위하여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었다.

B') 갈 3:23-4:1-7 : 믿음이 왔기 때문에, 믿는 자들은 더 이상 몽학선생 역할을 하는 율법 아래 있는 종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4:8-20 : 바울은 하나님을 떠나 옛 노예 상태로 되돌아가는 갈라디아 성도들을 염려하면서,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유지하라고 감정적으로 호소한다.

B') 4:21-31 : 믿는 자들은 계집종 하갈의 자녀들이 아니고, 자유하는 여자 사라의 자녀들이다.

[권면]

A'') 5:1-12 : 그리스도의 구속 때문에, 믿는 자들은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하여 할례를 받아서는 안 되고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B'') 5:13-6:10 : 믿는 자들은 자유에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육체에 복종치 말고 성령을 좇아 행해야 한다.

6:11-18 : 편지 맺음. 편지의 요점들의 요약과 마지막 호소 그리고 축도가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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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결론 부분]
A) 2:15-17
B) 2:18-21

[논증]
A') 3:1-14
B') 3:23-4:7; 4:21-31 (4:8-20은 예비적인 권면과 호소이다)

[권면]
A'') 5:1-12
B'') 5:13-6:10

 

A)부분은 의롭다 함을 받는 방법을 취급하고 있고, 그것은 율법의 행함과 상관없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B)부분은 의롭다 함을 받은 자들의 새로운 존재 방식을 다루고 있다. 율법에서 해방되어 성령이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새롭게 된 신분에 합당하게 육체를 따르지 말고 성령을 따라서 살아라는 것이다. 그리고 A)과 B)의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다.

 

(우선 우리의 본래 논의에 돌아와서), 구조분석을 통해 우리가 보는 것은 5-6장이 단지 3-4장의 핵심 교리를 서술한 뒤에 추가적으로 덧붙여지는 단순한 권면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하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5-6장 역시 갈라디아 교회의 근본문제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럼 어떤 점에서 관련이 있는가?


결국 바울이 볼 때, 할례를 받는다는 것, 곧 구원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충분하지 않다고 보고 모세 율법을 추가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은 성령을 배신하고 육체를 따르는 것과 다름 아닌 것이다. 즉 할례를 받아들이는 것과 육체를 따르는 것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문제이다.

 

(2)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3)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2-3)

 

여기에 보면 할례를 받아들이고 율법의 행함으로 구원받으려는 갈라디아 교인들의 변절을 무엇으로 보느냐 하면 육체를 따라 행하는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서 본 구절(5:16,18)에서처럼 육체와 율법은 서로 병행되어 나타난다. 율법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성령을 배신하고 육체를 따라가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우리는 흔히 육체라고 하면 어떤 죄악된 행동들, 더럽고 부패한 인간의 죄된 본성을 말하는데, 바울이 ‘육체’라고 할 때는 그것보다 더 폭넓게 그리스도와 십자가 복음과 성령을 따르지 않는 모든 것(모든 행동들, 생각들, 우리의 존재양태와 세상과 삶의 원리)들이 다 육체이다. 그러니깐 갈 5장에 나오는 육체의 현저한 일들을 하는 것만 육체를 따른 것이 아니라, 행위구원론을 추구하는 것도 육체를 따르는 것이다.


우리가 지난번에 배웠던 것인데, 육체의 정욕이란 결국 자기 사랑인데, 자기 사랑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고 했다. 첫 번째는 자신의 명예를 사랑한다는 것이고, 즉 자기를 자랑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부패한 욕심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자신의 명예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이 전적부패한 죄인임을 인정하기 싫은 것이고, 자신의 선한 행위와 노력과 공로를 통해 자신을 자랑하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를 말하는 것이다. 앞서 유대주의자들이 할례를 행하는 목적이 무엇이라고 했는가? 자기 육체를 자랑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왜 유대주의자들이 그렇게 할례를 강하게 주장하는가? 왜 행위구원론적인 주장을 하는가? 다 자기 자랑 아닌가? 그러므로 할례를 행하려고 하는 것은 다 자기 육체의 정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와 성령을 따라 살지 않으면 육체를 따라 살 수밖에 없는데,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육체를 따라 살 때에, 그 사람 마음 안에는 율법주의와 도덕률 폐기론적인 사상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율법주의자들이 따로 있고, 도덕률 폐기론주의자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를 따라 사는 자는 반드시 이 두 가지가 같이 있다는 것이다.


율법주의적인 신앙을 가지면 필연적으로 도덕률 폐기론적으로 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와 은혜로 역사하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만이 우리가 거룩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할례를 행한다는 것, 즉 행위구원론적인 생각을 갖는다는 것은 십자가의 은혜에서 떨어지는 행위이고, 그것은 성령을 배신하고 대적하는 행위이며, 따라서 육체와의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패를 좌우할 성령을 버렸으니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한 것이다. 육체의 일이 현저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율법주의적인 삶이란 굉장히 선한 삶을 살기 위해서, 율법을 순종하기 위해 노력하는 삶인데,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삶의 결과는 도리어 육체의 일이 현저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반드시 육체와의 싸움에서 실패하고 도덕적인 방종으로 빠질 수밖에 없다. 십자가 은혜 없이, 성령 없이 우리가 율법을 순종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가? 결코 불가능하다. 그것은 무엇과 같으냐면, 전기 없이 잔디 깎는 기계로 마당의 잔디를 깎으려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해준다. 성령이 오시기 전, 즉 성령 없이 그들이 율법을 준행하려고 했을 때, 그들은 철저하게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성령이 오시면 이것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것이 새 언약이다. 율법을 마음에 새겨주셔서, 순종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즉 십자가의 은혜의 원리가 성령을 거스리는 육체의 정욕을 약화시키고 죽이고, 이 성령이 우리 안에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이다. 율법을 완성하고 이룰 수 있게 된다. 갈 5:22-23이 말해주는 바도 바로 이것이다.

 

(22)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23)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3)

 

성령의 열매를 금지할 법이 없다고 했는데, 상당히 번역이 잘못된 것이다. 여기서 ‘법’은 “율법”이다. ‘노모스’라는 단어인데, 다른 곳에서는 다 ‘율법’이라고 번역해놓고서는 여기는 그냥 ‘법’이라고 해놓았다. 잘못 번역된 것이다. 이 구절이 말하는 바는 율법은 성령의 열매를 금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리어 성령의 열매는 율법을 이루는 것이고 완성하는 것이다(갈 6:2). 그러므로 성령을 떠나서는, 십자가의 은혜를 떠나서는 결코 율법을 순종하는 삶을 살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주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자는 반드시 도덕적인 방종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또한 반대로 만일 자신의 삶을 돌아볼 때, 육체의 현저한 일이 즉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등등의 육체의 일이 나의 삶에 나타나고 있다면, 그것은 또한 무엇을 반증해주느냐 하면, 우리가 지금 십자가 은혜에서 떨어져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고, 바로 내 마음 안에 구원행위론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육체라고 하는 것 안에 율법주의적인 생각과 도덕률 폐기론적인 생각이 동시에 같이 존재한다. 우리가 앞서 했던 이야기를 다시 거론해보자. 군대 간 남자친구를 배신하고 남자의 유혹에 넘어간 여자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가? 분명히 문제가 있다. 남자친구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갈라디아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갈라디아의 교회의 본질적인 문제란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처음에는 예수님을 열광적으로 믿고 받아들였고, 성령도 체험했으나, 바울이 떠난 뒤에 점차로 그 은혜를 까먹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점점 냉각기를 거치면서 그들은 성령을 버리고 육체를 따라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육체를 따르는 마음에 뭐가 잘 들어맞는다고 했는가? 행위구원론적인 종교가 딱 들어맞는다. 마치 스폰지가 물을 흡수하듯이 유대주의자들의 견해에 귀가 솔깃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서 다음의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다.

예수님 믿음(십자가만으로 충족함을 믿음) - 성령 - 율법의 완성
할례를 받음(믿음+할례+율법 순종) - 육체 - 도리어 육체의 일을 냄

 

이 둘 중에서 바울은 위엣 것을 택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울의 갈라디아서를 통해 나타내고자 하는 바울 복음의 핵심이다. 분명 바울 복음의 핵심 메시지는 이신칭의 교리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삶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관심사가 주로 어디에 있냐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자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 이미 하나님 나라의 백성된 자로서 어떻게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증시하며 살 것인가 하는 삶의 문제보다도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인가, 어떻게 구원받고 천국 갈 것인가 하는 신분의 문제에 너무 치중해 있다. 그리고 바울 복음하면 그것만 생각한다. 그리고 바울 복음이 말하는 삶 속에서 성령의 지배를 받고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는 삶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메시지는 그것이 아니다. 성령 안에서의 삶이 아주 강조되어 있다. 이신칭의 교리는 이제 마음껏 죄를 범해도 천국 가는 데는 문제가 없다고 하는 그런 천국행 열차표 같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것을 시작으로 하여 이제 날마다 성령으로 살아감으로써 죄 된 삶에서 해방되어 참된 섬김과 사랑의 삶으로 나타나는 그런 섬김과 사랑의 자유로운 삶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 복음을 그림 그릴 때는 이 전체를 그려야 하는 것이다. 이신칭의만 딱 떼어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 전체가 하나로 어우러져 있는 그림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갈라디아서의 메시지는 야고보서의 메시지와 전혀 다르지 않다. 단지 그들이 상대하던 대적자들이 달랐기 때문에 그런 차이가 나타난 것이지, 복음의 본질에 있어서는 전혀 차이가 없다. 야고보는 믿음은 있다고 하는데 행함이 없는 자들을 향해서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하고서 참된 믿음은 참된 행함을 산출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 것이고, 바울은 행함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고 말하면서, 야고보와 똑같이 그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단순한 지식적인 동의나 교리적인 찬동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갈 5:6).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하는데, 사랑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실 안 믿는 것이다. 바울은 생각하기를 참된 믿음은 성령 안에서의 삶을 말하는 것이고(2:20), 성령 안에서의 삶은 사랑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 바울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서 육체를 따라 사는 삶에 대해 아주 통렬한 경고를 한다.

(7)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8)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7-8)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대단히 도전을 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그러면 성도의 견인 교리와 어떻게 연관되느냐? 하는 의문이 든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경고와 성도의 견인 교리와의 관계가 어떠하냐 하는 데에 관심을 갖기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경고의 말씀을 정말 진지하게 나에게 하시는 경고로 받아들이고 오늘이라고 하는 날 동안에, 지금이라고 하는 순간에 육체의 소욕을 죽이고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시간 우리 자신을 돌아보자. 우리는 위엣 것(믿음-성령-사랑) 안에서 살고 있는가? 아니면 아랫것(할례-육체-육체의 일) 아래서 살고 있는가? 정말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자인가? 우리의 믿음은 참 믿음인가?


두 가지로 점검이 가능하다. 첫째는 내가 정말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내 신분과 구원에 있어서 충족한 것으로 생각하고 믿고 그 사실에 의지해서 사는가? 하는 것이다. 혹시 내 마음에 행위구원론적인 생각이 있어서, 내가 하나님께 나아가고 또 기쁨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나의 순종과 성화의 삶이 뒷받침되어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로마 가톨릭처럼 처음 시작은 믿음과 은혜로 되지만, 이후에는 내가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구원받는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또 다르게 우리는 이런 점검을 해볼 수 있다. 나의 마음속에 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알고 붙잡고 그것을 의지함으로 인해서 마음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가 넘치는가? 감사와 찬양이 흘러나오는가? 아니면 십자가 복음에 대해서 들어도 별 반응없이 냉냉한가?


또 다른 점검방법으로서 우리의 삶을 점검해 보면 된다. 나의 삶 속에서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 그와 같은 여러 가지 육체의 일이 나타는지 아니면 사랑이라고 하는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는지 살펴보면 된다.


만일 이 두 점검 중에 하나라도 우리가 의심이 된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현재 성령을 대적하고 육체를 따라 살고 있음을 반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사실 솔직하게 우리가 현재 성령을 대적하고 육체를 따라 살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는가? 사실 갈라디아의 교회의 모습이 곧 우리의 모습 아닌가? 그렇다고 한다면 지금 이 서신의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한 책망과 경고의 메시지는 동일하게 우리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 우리는 갈라디아서 강설을 통해서 이 경고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번 갈라디아서 강설을 통해서 이 책망의 음성을 듣고, 이 말씀을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회개하여서 우리 가운데 그리스도의 은혜가 회복되어지고,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은혜가 충만히 임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이야기하고 마치겠다. 그러면 결론적으로 어떻게 하면 육체가 아닌 성령을 따르는 삶을 살 수 있는가? 그것은 자기가 죽는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신앙생활의 근본 원리이다. 내가 죽는 것, 자기 목숨을 미워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지는 삶을 사는 것만이 육체가 아닌 성령을 따르는 삶을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는 신앙생활의 기초이고 기본이다. 이것이 없으면 신앙생활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에 바울은 이 점에 대해 세 번씩이나 언급한다.

 

(19)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19-20)
(24)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 5:24)
(1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이 구절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오직 주님의 십자가 은혜만을 믿어 영접하고, 굳게 붙잡고, 의지하는 삶, 그 은혜에 푹 빠져 사는 삶이 자기를 죽이는 비결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정과 욕심은 오직 주님의 십자가에 함께 못 박혀 죽어야만 죽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복음의 핵심은 결국 십자가이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은혜를 우리 안에 능력으로 적용시키시는 성령님이 또한 바로 갈라디아서의 핵심 주제이다. 오직 십자가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죽이고 성령의 통치를 받아가는 삶이 바울 복음의 메시지인 것이다.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우리가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그 십자가 은혜의 감격을 다시 회복하고, 그리하여 우리 안에 있는 육체의 정욕이 뿌리 뽑히고,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역사가 우리 가운데 충만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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