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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손재호
성경본문 왕상 18:21-40
강설날짜 2017-04-12

2017년 열왕기상 공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말씀:열왕기상 18:21-40

 

오늘 말씀은 엘리야가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는 사건입니다. 엘리야는 두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이 참 신이심을 나타냈습니다.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과 기도대결을 벌렸습니다. 이를 통해서 바알과 아세라가 거짓 신이며, 여호와가 참신이심을 증명합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이 말씀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계시가 무엇인지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엘리야가 아합 왕과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가 누구인가를 두고 논쟁하는 것을 살펴봤습니다.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가 누구였습니까? 열왕기상 18:16-20절을 보면 아합 왕은 엘리야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아합과 아합의 아버지 집이 여호와의 명령을 버리고 바알들을 따랐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라고 합니다. 엘리야가 누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가 되는지 결판을 내어보자고 아합에게 제안을 합니다. 이에 아합이 사람들을 보내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을 갈멜산으로 모아 엘리야에게로 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와 아세라의 선지자를 보게 됩니다. 이들이 왜 이세벨의 상에서 먹습니까? 이세벨이 시돈의 엣바알(바알이 그와 함께 있다는 뜻)이라는 왕의 딸입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모태로부터 바알의 신앙으로 가득한 사람입니다. 이런 왕비의 상에서 먹는다는 것은 이러한 권력자들이 원하는 것을 빌어주는 자들이 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왕의 권력을 반대하면 스스럼없이 모함하여 죽이는 자가 이세벨입니다. 이러한 이세벨의 비위를 맞추어주면서 밥이나 먹고 살아가는 자들이 바로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21절을 보면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여호와 하나님과 바알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어느 때 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고 책망을 합니다. “여호와가 하나님이라면 여호와를 따르고 바알이 하나님이라면 바알을 따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만 섬깁니까? 아니면 바알도 섬깁니까? 이스라엘의 신앙은 하나님만 섬기는 것이 아니라 바알도 섬기는 것입니다. 북 이스라엘을 보면 성전이라는 곳이 두 곳이 있습니다. 벧엘과 단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여호와의 신앙이 금송아지 우상을 섬김으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것과 구별되지 않습니다. 혼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야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느냐”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22-24절을 보면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 오십인이로다. 그런즉 두 송아지를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저희는 한 송아지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놓지 말며 나도 한 송아지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놓지 말고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고 했습니다.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에게 제안을 합니다. 송아지를 잡아서 나무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말자고 합니다. 너희는 너희의 신의 이름을 부르고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라고 하자고 합니다. 이에 백성들이 그 말이 옳다고 합니다. 우리가 엘리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 오늘 이 장면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런 기도 응답이 내렸으면 하는 소원들이 있기에 불로 응답하시는 엘리야의 하나님이라는 노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께서 오늘날도 불로 응답을 하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양다리 걸치고 있는 우리들의 머리위에 불이 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용감하게 불로 응답하여 달라고 하는 것은 무식해서 그렇습니다. 불로 응답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지 불로 응답했다면 그렇게 구한 자들 위에도 불이 떨어질 것입니다.

 

25-29절을 보면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많으니 먼저 한 송아지를 택하여 잡고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그러나 불을 놓지 말라. 저희가 그 받은 송아지를 취하여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가로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저희가 그 쌓은 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오정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저희를 조롱하여 가로되 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간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이에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그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하더라. 이같이 하여 오정이 지났으나 저희가 오히려 진언을 하여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를지라도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고 아무 돌아보는 자도 없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알 종교의 실상을 볼 수 있습니다. 송아지를 잡아놓고 불을 붙이지 않고 불로 응답하도록 기도하라고 엘리야가 말합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이 거절을 할 수가 없습니다. 못하겠다고 하면 해보지도 않고 싸움에서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엘리야의 말이 옳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피할 수 없는 자리입니다. 그런데도 자신들의 숫자를 믿고 또 자신들의 종교성을 믿는 것입니다. 종교에서도 여러 가지 능력과 표적들이 얼마든지 나올 수 있습니다. 마귀가 얼마든지 그러한 능력들을 나타나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거짓 기적도 지금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둘 사이에서 무엇이 옳은지 확인하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종교라는 것은 나 여기에 있고 능력이 많은 신이 저기에 있다고 상정하고 자신의 정성과 노력을 바치면 신이 응답한다는 체제입니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니면서도 이런 식의 신앙생활을 했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종교생활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응답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도는 경쟁력이며, 기도는 인생역전이며,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고 하는 설교를 합니다. 그런데 그런 기도를 할 때에 결국은 지극한 정성을 바치라는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것이 종교성의 원리입니다. 시간과 물질을 바치라고 합니다. 목사가 이런 종교를 전한다면 그 사람은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을 전하는 자입니다.

 

26절부터 다시 보면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 850명이 그들이 받은 송아지를 가져다가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이르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라고 하며 부르짖습니다. 아무 응답이 없자 그들은 제단 주위에서 뛰놀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 앞에서 금송아지를 섬길 때도 이렇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침부터 정오가 되기까지 부르짖어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이에 엘리야가 조롱합니다. “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간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라고 하며 조롱하였습니다(27). 그러자 그들이 더욱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합니다. 이와 같이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하였지만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하는 자나 돌아보는 자가 없었습니다.

 

저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오늘날 우리 기도원이나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많은 부흥사들이 응답받을 때 까지 기도하라고 합니다. 철야 금식을 하며 부르짖고 헌금을 바치고 응답이 올 때까지 부르짖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기도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죽고 그리스도가 살기를 기도합니까? 아니면 자신의 뜻이 부인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까? 그런데 그런 기도는 하지도 않으면서 자기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한다면 그것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자들과 무엇이 다릅니까?

 

그러면 엘리야의 기도를 보겠습니다. 30-35절을 보면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저에게 가까이 오매 저가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되.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 두 돌을 취하니 이 야곱은 여호와께서 옛적에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 저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단을 쌓고 단으로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용납할만한 도랑을 만들고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번 그리하라 하여 세번 그리하니 물이 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하게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갈멜산에 제단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성전이 세워지기 전에는 산당에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제단들은 무너지고 온갖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제단들만 가득한 현실입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는데 야곱의 열두 아들의 수대로 돌 열두 개를 취하여 제단을 쌓습니다. 야곱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이라고 이름을 바꾸어 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북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 열두 돌을 취하여 제단을 쌓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무위에 잡은 송아지를 올려놓고서는 네 통에 물을 떠서 그 제물과 제단위에 붓게 합니다. 그렇게 하기를 세 번이나 반복해서 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열두 통의 물을 제물과 제단에 부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제단 주변에 도랑을 파놓았는데 그 도랑에까지 물이 흘러 가득 찬 것입니다. 엘리야가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은 인공적으로 불이 붙을 가능성이 전혀 없게 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이 참된 신이심을 증거 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면 엘리야가 기도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36-38절을 보면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고 했습니다. 제단을 수축하고 물을 붓는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기도하는 시간은 몇 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 기도하는 것을 보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이름을 부르는 것은 언약의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지금 이 대결은 ‘바알이 참 하나님이냐, 엘리야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냐’라는 대결입니다. 엘리야가 여호와께 기도하기를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심을 알게 하여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러자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도랑의 물까지 핥았습니다. 곧 도랑의 물까지 마르게 하였습니다. 놀라운 능력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이를 통하여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참 신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39-40절을 보면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엘리야가 저희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저희를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고 했습니다. 열두 통의 물을 부은 제물과 제단에 불이 붙었습니다. 그리하여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도랑의 물까지 다 말려 버렸습니다. 이를 통하여 바알이나 아세라가 참 하나님이 아니라 엘리야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백성이 엎드리며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이때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고 합니다. 아세라 선지자의 이름이 빠졌지만 바알의 선지자라는 말 속에 이들도 포함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다 붙잡아 기손 시내에서 죽였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과 하나님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할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편에 선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서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역사하시면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않고 하나님 편에 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씀드린 대로 만약 오늘날 이렇게 불로 응답하신다면 지금 양다리 걸치고 있는 우리 모두는 불이 내려와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나는 절대로 둘 사이에서 양다리 걸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우리가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한 양 다리 걸치고 사는 인생들입니다. 여기서 자유 할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우리가 오늘날 무엇을 보고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거리지 않고 돌이킬 수가 있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기려고 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메시아를 기다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의 나라를 함께 생각한 것입니다. 메시아의 왕국이 이 지상에서도 힘 있는 나라로 드러나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고 하심으로 유대인들에게서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예수님은 미움을 받습니다. 나를 따라오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싫다고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 것이 세상의 종교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십자가와 세상의 종교 이 둘 사이에서 십자가로 가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8-24절을 보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했습니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십자가의 도를 따라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세상의 지혜로운 것을 좇아 사시겠습니까? 우리는 십자가의 도를 따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가 되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3:1-3절을 보면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라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성도들이 어리석다고 책망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버리고 율법을 쫓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는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를 따라 사는 것은 율법으로 자신을 치장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어느 곳에서 사시겠습니까?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십자가의 도를 알게 하여 주시고, 우리로 오직 십자가의 도를 따라 사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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