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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성경본문 갈 5:26-6:5
성경본문내용 (26)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1)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2)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3)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4)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5)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강설날짜 2011-12-21

2011년 12월 21일 한결교회 수요강설
갈라디아서 제29강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말씀 : 갈 5:26-6:5

 

우리가 성령의 열매에 대해서는 살펴보지 못했는데, 사실은 이 덕목들 하나하나가 한 주 설교가 될 수 있을 만큼 아주 깊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다루지 않고, 다음에 따로 기회를 마련해서 성령의 열매 하나하나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5절에 보면,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살았기 때문에, 성령으로 행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을 따라 산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냐 하는 것에 대해서 26절부터 6장 10절까지 바울이 여러 가지로 설명을 합니다. 그 첫 번째로 언급하는 것이 교회 내의 분쟁의 문제입니다. 사람이 성령을 따라 살지 않고, 육체를 따라 살 때, 육체의 일이 현저하게 되는데, 그 육체의 일이 바로 원수 맺고, 분쟁하고, 분내고, 당 짓고 하는 인간관계의 파괴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문제를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실제로 갈라디아 교회에 그런 분쟁의 문제가 있었던 것 같고, 그러나 사실은 이 분쟁의 문제라고 하는 것은 어느 시대 어느 교회나 늘 있는 문제인 것입니다.

 

(26)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갈 5:26)

 

그러한 분쟁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헛된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헛된 영광, 줄여서 허영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다른 사람들보다 높아지고자 하는 명예욕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러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와중에 제자들이 서로 높이 되려고 싸웠던 것과 같이, 자기를 높여서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영광을 받으려는 욕망이 바로 허영입니다. 바로 이 허영이 두 딸을 낳는데 그 첫째 딸 이름은 분냄(격동함)이고 둘째 딸 이름은 투기인 것입니다. 여러분 요한과 야고보가 그들의 어머니와 함께 예수님을 찾아가서 주님의 좌우편 자리를 구했을 때, 이를 들은 제자들의 반응이 어떠했다고 했습니까? 이를 듣고서 분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자기를 높이고자 하면, 다른 사람들에게서 분냄과 격동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나 야고보나 요한과 같이 예수님의 특별한 대우를 받은 이 세 명은 그런 높은 자리를 탐해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만, 아예 존재감이 없는 제자들, 사람들이 이름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제자들은 꿈도 못 꿀 자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베드로나 요한이나 야고보를 부러워하면서, 시샘이 나고 질투하고 투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허영은 다른 사람들의 분냄과 격동과 투기를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교회 내에서 일어나는 분쟁의 원인이 바로 이 허영입니다. 보통 교회 내에서 분쟁은 주로 세 가지 원인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생각하는데...

 

1) 신학적인 차이 : 이것은 매우 긍정적인 분쟁입니다. 이런 분쟁은 있어야 합니다.
2) 돈 문제 : 재정 사용과 관련해서 의견 충돌이 있을 때 일어나는 분쟁입니다.
3) 파워게임 : 예를 들면, 손 목사 계열, 최 목사 계열 이렇게 나뉘어서 교회의 실권을 누가 질 것이냐 하는 것을 가지고서 파워게임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장로와 목사 사이에, 때로는 목사와 성도들 사이에 파워게임을 합니다. 그리고 대부분 이 돈 문제와 파워게임은 같이 갑니다.

 

오늘날 교회의 교단이 무수히 많은데, 이렇게 교회가 나눠지고 분열된 원인이 사실은 돈 문제와 파워게임 때문입니다. 몇몇 경우만 신학적인 차이 때문에 갈라진 것이지, 그 외는 다 자기를 높이려는 허영 때문에 서로 분쟁하고 나뉘는 것이죠. 물론 나눠질 때 항상 명분은 신학적인 차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허울 좋은 변명에 불과한 것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라고 하는 목사들이 각자의 허영을 구하기 때문에 분쟁하고 분열하는 것인데, 그래서 교단 분열사는 기독교의 참으로 부끄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때에는 세상 사람들보다 더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 정치”하면 아주 그냥 치를 떱니다. 그러나 저라고 안 그럴 것 같습니까? 저도 정치에 뛰어들면, 저도 똑같이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허영을 구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다 허영을 구하는 마음이 있는데, 성령의 통치 아래서 그 죄를 죽이면서 살아가지 않고, 육체를 따라 살게 되면, 누구나 다 그런 죄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십시다. 우리 교회에도 분쟁이 있지 않습니까? 눈에 보이는 큰 분쟁은 없지만, 마음속에 어떤 형제를 향한 크고 작은 분노와 투기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것은 우리가 성령을 따라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를 자랑하고 높이고 으뜸이 되고자 하고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영광을 얻고자 하는 허영의 욕망은 언제 가장 잘 나타나느냐 하면, 다른 사람이 죄를 범했을 때, 잘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떻게 나타납니까? 더욱이 그 사람이 자신이 평소에 미워했던 자면, “그럼 그렇지. 내 그럴 줄 알았어.”하면서 그 죄 범한 사람을 마구 판단하고 비판하고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때로는 “나는 이러 이렇게 사는데 너는 왜 이러 이렇게 살지 못하느냐?” 하면서 판단하고 요구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렇게 요구와 판단과 정죄가 난무하고, 자기는 그렇지 않다는 자랑이 난무하면 교회는 결국 분쟁이 일어나고 사랑의 공동체로 세워져 갈 수 없게 됩니다. 그것은 교회의 참된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성령을 따라 산다는 것은 누가 죄를 범하면, 구 죄 범한 형제를 불쌍히 여기고 그 형제를 용서하고, 그 형제가 회개하여 돌이키도록 돕고 섬기는 것입니다. 바로잡는다는 말은 회복시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회복은 말씀의 권면과 훈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죄 범한 형제를 불쌍히 여길 수 있느냐 하면, 나도 그 동일한 죄에 충분히 빠질 수 있다고 하는 자신의 취약한 약점을 스스로 인식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충분히 동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형제를 불쌍히 여겨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자신도 그 죄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의 성화의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누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바울은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하라”고 말씀합니다. 신령한 자가 도와야하고, 온유한 심령으로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표현이 “너희 가운데 신령한 자들”이라고 하지 않고, “신령한 너희는”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들” 곧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다 신령하다고 지금 바울이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여기서의 “신령한 자”라는 말은 예수님 믿는 사람들 중에 특별히 영성이 뛰어난 사람, 또는 성숙한 사람을 말한다기보다는 단순히 영적인 사람, 곧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사람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자면 누구든지 신령한 사람이고, 신령한 사람이면 신령한 자답게 성령의 통치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서 온유한 심령으로 죄 범한 형제를 돕는 일에 마땅히 자신을 헌신해야 한다고 바울이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섬김의 원리를 2절에서 보다 폭넓게 적용합니다.

 

(2)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여기서 ‘짐’은 앞에서 언급한 형제의 연약함과 허물, 그 형제의 영혼을 짓누르며 고통스럽게 하는 죄악과 부도덕을 말합니다. 그것을 옆에 있는 형제가 감당하며, 섬기며, 그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을 성경은 섬김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 공동체는 이렇게 서로 섬기는 공동체입니다.


본문에 보면 ‘서로’라는 말이 제일 먼저 나옵니다. 강조되고 있는 것이죠. 바울이 지금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은 죄를 범한 자가 어떻게 해야 죄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 옆에 있는 형제들이 그를 어떻게 대하고 도와야하는지에 대한 의무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 사람 죄 짓는 것 하고 나와 무슨 상관이냐”하는 것은 올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내 죄와 싸우고 내 죄 회개하고 사는 것, 날마다 내 죄 죽이고 사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남의 죄까지 신경 쓸 세가 어디 있냐” 하면서 개인 신앙에만 몰두하는 것도 올바른 지체의식이 아닙니다. 자신의 죄를 죽이고 죄를 참회하는 삶을 매일 살아가야 할 뿐만 아니라, 옆의 형제가 죄를 범하면 그것을 내 일처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그 형제가 죄의 짐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어야 할 의무가 또한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형제의 죄 짓는 일이 남의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각 지체들입니다. 한 사람이 음행의 범죄를 지으면, 그 지체는 그리스도의 지체로 창기의 지체가 되게 하는 것이 되고, 결국 교회 전체를 부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나 혼자 거룩하고 경건하게 살겠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온 지체들이 다 같이 거룩하고 경건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내 인생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죄는 전염성이 있습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갈 5:9) 고린도 교회에서 심각한 음행 사건이 있었을 때, 다 쉬쉬하고 아무 대응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음행의 죄의 누룩이 고린도교회에 퍼져갔던 것이죠. 그래서 바울이 심하게 꾸짖으면서 그 사람을 왜 내어 쫓지 않았냐고 책망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옆의 형제가 죄 가운데 빠졌을 때, 그 죄가 공동체 가운데 드러났을 때는 가만히 놔두어서는 안 되고, 말씀으로 권면하고 돕고, 또 회개하도록 하고, 그렇게 해도 회개하지 않으면 여러 가지 권징을 통해서 회개하도록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서로 허물과 약점을 감당하고 서로서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도록 권면하면서 온 지체들이 거룩하여지고 성장해가는 것을 주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에는 성숙한 신자가 있고 연약한 신자가 있어서, 주로 성숙한 신자가 연약한 신자를 감당하고 섬기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어느 누구의 도움과 섬김이 필요 없을 만큼 강한 사람도 없고, 전혀 남에게 어떠한 도움도 줄 수 없는 약한 자도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서로 섬기며, 도와주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의 약점을 담당하고, 그 사람을 무거운 죄의 짐에서 건져내고, 하면서 서로 돕고 서로 섬기면서 교회가 사랑 안에서 든든히 서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성숙한 자들은 더욱 약한 자들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은혜를 많이 주셔서 성숙하게 해주신 것은 영적으로 연약한 형제들을 도우라고 그 성숙이라는 은혜를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땅히 연약한 형제들을 감당하며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롬 15:1)
(14)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살전 5:14)

 

그래서 교회의 이상적인 모습은 모든 사람의 어깨에 다른 형제의 신음하는 무거운 짐들이 메어져 있어야 합니다. 그 짐이 어떤 짐이든지 간에 함께 감당해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냥 이루어집니까? 마음속에 허영이 있는데, 자기를 높이고 자기 인정 영광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데, 다른 형제의 허물을 용납하면서 낮아져서 섬기려고 하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결국 우리 마음에 있는 이 허영의 죄를 죽이고 성령을 따라 살아갈 때만이 그런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하는 것인지 조금 있다가 살펴보기로 하고...) 그렇게 성도들이 서로의 짐을 지며 감당하는 삶을 살 때, 그리스도의 법이 성취됩니다. 그리스도의 율법이라고 표현되어야 옳습니다. 이 그리스도의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모세의 율법과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21)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21)

 

그리스도의 율법이라고 말하는 것은 방종주의자들을 염두에 두고서 하는 말입니다. 방종주의자들은 이제 모세의 율법에서 해방되었으니 아무런 법 없이 내 마음대로 살면 된다고 하는 것인데, 바울은 그것을 반대하면서 우리는 율법에서 해방되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게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 다른 율법주의가 아니라, 우리가 이미 배웠듯이, 그것은 사랑의 법이고, 생명의 성령의 법이고 야고보서로 말하면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율법입니다. 내용상은 모세의 율법과 그리스도의 율법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세의 율법의 내용이고, 그리스도의 율법의 내용입니다. 다만 성취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모세의 율법, 곧 의문의 율법은 지킬 힘을 주지 않고 다만 정죄하고 죽이는 역할 만 하지만, 그리스도의 율법, 곧 영의 새로운 율법은 성령이 순종할 원동력이 되어서 자원해서 기쁨으로 순종할 수 있도록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율법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율법에서 자유하게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녀로서 기쁘게 순종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율법은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의 사랑을 전제하고 또 그것을 모범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계명을 주실 때 단순히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는 모세의 율법을 반복하지 않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면서 새 계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원동력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범이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이 법을 공표하셨을 뿐만 아니라, 친히 삶 속에서 그 모본을 보이셨습니다.


간음 중에 잡힌 여인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요 8:11). 다 돌을 하나씩 쥐면서 그 여인을 죽이려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라고 하심으로써 다 돌을 내려놓고 떠나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죄 없는 예수님은 돌을 던지실 수 있으셨지만, 정죄치 아니하시고, 그 여인을 용서해주셨습니다. 단순히 그 여인의 죄를 없던 것으로 눈감아 주신 것이 아니라, (공의의 하나님이 그럴 수는 없으시고) 그 여인을 짓누르고 있는 죄의 짐을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로 나아가셔서 그녀 대신 수치를 당하시고, 그녀 대신 죽음의 형벌을 받으심으로써 그녀를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죄용서만 하신 것이 아니라, “다시는 범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녀를 고쳐 새롭게 하시고 거룩한 새 삶을 살게 도와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의 섬김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말은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은 섬김의 삶을 살아라는 말입니다. 서로의 약점과 허물을 가지고서 판단하고 요구하지 말고, 말없이 겸손하게 낮아져서 서로의 허물과 약점을 대신 짊어지고 담당하면서 섬기는 것, 서로의 짐을 대신 지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삶입니다. 그 짐이 무슨 짐이든지 그것을 감당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삶을 살아가는 것이 쉽습니까? 우리가 서로의 종이 되어 누군가를 섬긴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자기 깨어짐, 자기를 버리는 자기희생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같이 공동체 생활을 하는데, 어떤 사람이 공동체 생활에서의 기본 에티켓이나 남을 배려하는 마음 없이 자기 삶에만 몰두하는, 그래서 매일 어지럽히기나 하고, 자원해서 청소하거나 설거지를 한 적도 없는 매우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약점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십시다. 어딜 가나 그런 사람이 있는데, (제가 옛날에 그러했습니다.^^) 신학교 다닐 때, 기숙사 생활을 하면, 여러 사람이 함께 살기 때문에 제때 청소하지 않으면, 그 기숙사가 아주 지저분하게 됩니다. 특히 그 기숙사가 반지하인데 다가 부엌하고 욕실이 붙어있는 곳이다. 그래서 제때 청소하지 않으면, 곰팡이가 피고, 설거지나 음식물 쓰레기를 제때 버리지 않으면 음식물 썩는 냄새가 진동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밥을 먹고도 설거지를 안 하고, 그렇게 더러운데도 아무도 안 치우는 것입니다. 저도 안치우고, 다들 자기 살길 바쁘고, 그런데 말없이 그것을 섬긴 분이 있었습니다. 남이 하기 싫은 일을 도맡아 하는 전도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한 두 번이지 깨끗이 해놓으면 몇일 안가서, 원상회복됩니다. 그래도 그것을 또 혼자서 꿋꿋이 섬기시는 겁니다. 한 번도 우리보고 안 한다고 뭐라 하거나 판단하거나 불평하거나 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분도 바쁠 텐데, 그렇게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 덕에 다른 사람들이 아주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기쁨으로 그렇게 섬기는 모습을 보면서 아주 도전도 받고 은혜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참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고 사는 것이 남들 뒤치다꺼리 하다가 일 다보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자기부인과 희생이 따릅니다.


그런데 이런 눈에 보이는 잘못된 습관이나 약점이라고 하는 짐을 감당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 사람의 영적인 짐을 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형제가 나에게 죄를 범해서 나에게 피해를 입혔을 때, 상처를 주었을 때, 그 사람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고 그 형제를 용납해 주는 것은 앞에 약점을 감당해주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형제가 죄에 빠져서 신앙이 위태로울 때, 그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말씀으로 도와 그 사람을 죄에서 구출해내는 것은 더더욱 어렵습니다. 오늘 말씀처럼, 온유한 심령으로 그 사람을 바로잡는 일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져야 하는 짐 중에서 가장 최고봉에 있는 짐은 죄의 형벌을 대신 당하는 것입니다. 한두 달 전 뉴스에 강간 살인 혐의를 받고 무기징역을 받은 사람이 15년 징역을 살고, 모범수로 가석방되어 나와서 24년 동안 법정에서 진실공방을 하면서 싸워서 39년 만에 무죄선고를 받아서 억울한 누명을 벗은 한 사람의 이야기가 이슈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뒤집어써서 대신 형벌 당하면서, 그 인생이 억울한 누명으로 완전히 파괴되어지고, 가정과 그 친척들이 피해를 보고, 그래서 그 사람이 하는 말이 피눈물이 난다고 했습니다. 그 억울함과 분노를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청춘과 인생을 다 감옥에서 보냈는데, 무엇으로 그의 억울함을 보상해줄 수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대신 형벌을 받는 것만큼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가 받았어야 할 죄의 형벌을 대신 뒤집어쓰시고, 내가 받았어야 할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과 수치와 조롱을 그 참혹한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심으로써 나의 죄 값을 대신 치러 주셨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내 죄 때문에 30세라는 꽃다운 나이에 죽으셨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그것을 억울해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셨고, 그분은 바로 이 일을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자원해서 그 길을 가셨습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죄 범한 것 밖에는 없는 원수와 같은 존재인데, 주님은 이런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셔서, 우리를 이렇게까지 섬겨주신 것입니다. 섬기시기 위해서 죽음과 지옥의 형벌이라는 저 밑바닥까지 내려가신 것입니다. 그러한 섬김을 저와 여러분이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이렇게 은혜 아래서 살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가 정말 십자가의 은혜를 마음 속 깊숙이에서 깊이 깨닫게 된다면, 이 십자가 은혜 앞에서 우리가 그동안 형제들의 약점과 허물을 감당하지 못하고 불평하고 판단하고 정죄했던 마음들이 얼마나 배은망덕한 것이고, 교만한 것이고, 악한 것인지를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크신 은혜의 섬김을 내가 받았는데, 나는 형제들의 조그만 약점 하나 감당하면서도 이렇게 힘들어 하고, 투덜대고 그 형제를 판단하니. 나는 정말 주님의 사랑이라곤 눈꼽 만치도 없는 이기적인 인간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거기서 참회가 나오고, 회개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살고 싶은 강렬한 열망 가운데 그 은혜를 날마다 구하고, 성령의 통치를 받는 가운데서 서서히 자기의 이기적인 죄악 된 본성이 깨어지고, 그 은혜 안에서 자신을 버리고 희생하여 형제의 약점과 허물을 사랑으로 감당하고 섬기는 주님을 닮은 모습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여러분은 서로의 허물과 약점을 주님께서 우리의 죄의 짐을 지신 것처럼 그렇게 온유와 사랑으로 오래 참음으로 대신 지면서 감당하십니까? 아니면 그 허물과 약점과 죄들을 불평하고 원망하고 판단하고 비난합니까? 우리 자신을 깊이 돌아보고, 우리에게 이런 사랑의 섬김의 모습이 없으면 깊이 회개하고 참회해야 됩니다. 그리고 먼저 주님의 은혜를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그 은혜를 깨달아서 나도 주님을 닮게 해달라고 그래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삶을 살게 해달라고 간절히 구하면서, 성령을 의지하면서 살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자기를 희생하여 사랑으로 섬길 수 있는 힘을 공급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충만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갈 6:3)

 

이러한 사랑의 실천이 내 삶에 없는데, 단순히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조금 나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가지고서, 자기가 뭔가 된 줄로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높이 되고자 하고, 교만하게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보다 못한 죄 범한 형제를 비난하고, 그래서 마음속에서 미움과 분노가 일어난다면, 그러면서도 스스로 뭐가 된 줄로 생각하면, 그것은 스스로 속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4절...

 

(4)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그래서 바울은 사람들이 하도 남의 결점은 잘 파악하고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자기의 약점과 죄는 인식하지를 못하니깐, 각각 자기의 행위를 살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율법의 거울 앞에서, 그리스도의 모범의 거울 앞에서 우리 자신을 비춰본다면, 자랑할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내 안에 선한 어떤 것이 있다고 한다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것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로 허락하신 것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서만 그 은혜를 자랑하고 기뻐하면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자랑은 부정적인 의미의 자기를 ‘자랑’하는 교만의 개념과는 다른 단어입니다. 아주 긍정적인 자랑, 기쁨, 만족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5)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이 구절은 2절과 상충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짐’은 앞의 2절과 다른 단어입니다. 문맥으로 보더라도 2절과는 전혀 다른 측면을 말하는 것입니다. 2절은 서로 짐을 지도록 도와주어야 할 의무를 말하고, 5절은 다른 사람의 회개가 나를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자기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이 짐은 그 누구도 대신 짊어 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4절의 명령("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각자 각자 자기 행위대로 하나님 앞에서 계산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날마다 자기 행위를 살피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두 가지 길, 두 가지 삶을 제시합니다. 어떤 삶을 살아갈 것입니까? 헛된 영광을 좇아서 육체를 따라 살아서, 결국 스스로 속임 가운데 교회 내에 싸움과 분쟁만 일으키며 교회 공동체를 파괴하는 삶을 살 것입니까? 아니면, 성령을 따라 삶으로써 온유한 심령으로 형제의 짐을 서로 지면서 사랑의 섬김을 통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삶을 살 것입니까? 우리가 갈 길은 분명합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우리를 그 십자가 은혜위에 굳게 세워주셔서 우리로 서로 짐을 지며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자가 되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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