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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손재호
성경본문 야고보서 1:26-27

2011년 야고보서 공부
                                                         참된 경건이란?
말씀:야고보서 1:26-27

 

오늘 말씀에서 야고보는 참된 경건에 대해서 말합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경건’에는 두 가지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헛된 경건이고, 다른 하나는 참된 경건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평소에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경건이란 어떤 것입니까? 사람들마다 다 자기 나름대로의 기준이 있을 것입니다. ‘주일은 빼먹지 않는다. 십일조는 반드시 한다. 예배시간에 떠들지 않는다. 정장을 한다.’ 등등. 우리는 이러한 여러 가지들을 경건의 모습이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이러한 스스로 내린 기준들이 사실 참된 경건을 막고 있다는 것입니다.

 

26절을 보면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는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고 합니다. 야고보는 여기서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자’의 헛된 경건 곧 자기기만의 위험성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경건한’이란 헬라어로 ‘드레스코스’(qrh'sko")인데 이 단어는 신약 성경 본 절에서 단 한번 사용된 말입니다. 그리고 이에 상응하는 명사 ‘드레스케이아’(qrhskeiva)는 신약성경에 네 번 나오는데, 그 두 번이 오늘 본문 26-27절에 나오고 있습니다(행 26:5; 골 2:18). 형용사 ‘드레스코스’는 공중예배를 드리거나 금식을 하거나 혹은 빈궁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처럼 외적으로 경건한 행위를 수행하는 사람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가 말하는 ‘경건한 사람’이란 1세기 당시 종교적인 제반 행위들 곧 기도나 금식, 예배, 구제와 같은 것으로 표현되는 종교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그러한 종교적인 행위를 통해 스스로 경건하다고 확신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저자 야고보는 만일 그러한 사람이 ‘자신의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면’ 그의 경건은 헛된 것이며, 따라서 그는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한 사람’이란 아무런 제약 없이 자기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물론 본문에서는 이 사람이 어떻게 말을 함부로 하는지 명확하게 지적해 주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어떤 자를 가리켜 말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주측 해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남을 비방하기 위해 말을 불손하게 한다거나, 미워하여 저주스러운 말을 한다거나, 남을 업신여겨 함부로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여튼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함부로 놀린다는 것은 그 사람의 경건이 헛것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겉으로 경건한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고 또한 스스로 자신이 정말 경건한 사람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자기 마음을 속이게 되는 것입니다. 22절에서 우리가 살펴본 대로 진리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고 있는 자라고 한 것처럼 스스로 경건하다고 확신하면서도 말이나 생활에서 남에게 본을 보이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마음을 속이고 있는 자인 것입니다.

 

야고보는 3장에서 말을 절제하지 못하는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서 자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윤리적인 행동 특히 말의 절제가 뒤따르지 않는 종교적인 행위들은 하나님 앞에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성경은 곳곳에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호세아 6:6절에 보면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했고, 마태복음 9:13절에서는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2:7절에서는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야고보서 2:14절에서는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이고, 따라서 구원을 가져다 주지도 못한다고 했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4).   

 

그런데 26절에서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한 자는 그 경건의 기준이 누구입니까?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스스로 나는 경건하다는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경건은 남들과의 비교에서 오는 경건입니다. ‘나는 저 집사보다 경건하다, 나는 저 목사보다 경건하다’는 식입니다. 물론 이런 기준들은 다 겉으로 보이는 행함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경건이 이처럼 자기 스스로의 기준을 가지고 평가 한다면 다른 사람에 대한 비판과 동시에 자기 자랑이 나오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그 혀를 재갈 물리지 않는 자처럼 남에 대한 정죄와 자기에 대한 자랑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다 헛된 경건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18:9-14절을 보면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사회에서 바리새인 그러면 누구보다 경건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경건은 자타가 공인하는 경건입니다. 이들이 왜 그렇게 경건하게 살았는가 하면, 율법을 보면서 자기들의 삶의 태도를 반성하면서 시작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나라가 왜 이렇게 보잘 것 없는 나라가 되었는가를 율법에 비추어보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았기에 이렇게 되었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면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아니하고,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가도 복을 받는다고 했는데 현실은 외세에 시달리며 고생하고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서 그렇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율법을 실천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어떤 경우는 율법의 요구보다 더 심하게 자기들을 쳐서 복종시키면서 경건하게 살고자 한 것이 바리새인 운동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다 존경할 수밖에 없는 경건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바리새인의 의들이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습니까? 성전에서 기도하는데 한쪽 구석에 세리가 보이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바리새인이기에 그 입에서 무엇이 튀어나오는 것입니까?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토색, 불의, 간음하지 않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나함을 감사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이레에 두 번이나 금식하고 십일조를 바친다고 합니다. 얼마나 경건한 모습입니까? 그러나 이것이 바로 헛된 경건인 것입니다. 자기 혀를 재갈물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경건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보았을 때 예수님은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여 지켜야 하는데 예수님은 안식일 날 일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꺼리는 세리와 창기들과 어울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이 경건이냐를 시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경건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볼 때에 먹기를 탐하고 술을 즐기는 자로 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주동자들이 누구입니까? 스스로 경건하다는 자들이었습니다. 날마다 거룩한 옷을 입고 거룩한 성전에서 거룩하게 지낸다는 제사장계열과 날마다 생활 속에서 거룩을 실천하며 경건하게 살고자 한 바리새인들의 손에 의하여 예수님께서 죽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경건이 이 바리새인들과 같지 않습니까? 그 기준을 자기 스스로에게 두지는 않습니까? 내가 이정도만 하여도 다른 사람보다 경건하다는 생각이 들고 그러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으니 그 입으로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결국 교인들의 싸움이라는 것이 누가 더 의로우냐하는 싸움인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에서만이 아니라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동일한 싸움입니다. 나는 너보다 낫다는 기준을 가지고 있는 한 자기 정당성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공로를 주장하게 되면 반드시 바리새인의 모습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건은 모두 다 헛된 것입니다. 경건을 가지고도 결국 자기 자랑을 하고 자기 사랑을 한 것입니다. 우리의 이러한 헛된 경건 때문에 예수님이 죽임 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참된 경건이란 무엇입니까? 27절을 보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고 합니다. 저자 야고보는 가짜 경건과 대조적으로 구제와 및 세속적 유혹과 관련하여 ‘정결하고 흠이 없는 경건이 참된 경건’이라고 합니다. 특히 여기서 야고보가 참된 경건의 대표적인 행위로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아보는 구제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라는 말씀이 왜 참된 경건에 속하는 일입니까? 신명기 16:9-12절을 보면 “칠 주를 계수할찌니. 곡식에 낫을 대는 첫날부터 칠 주를 계수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 할찌니라.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찌니라”고 했습니다. 곡식에 낫을 대는 첫날부터 칠 주를 계수하라고 했는데 이 날을 칠칠절이라고도 하고, 오순절 혹은 맥추절이라고도 합니다. 이런 절기 때 노비와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와 함께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이어서 나오는 초막절에도 고아와 과부와 함께 하라고 합니다. 맥추절만 아니라 초막절도 그렇고, 신명기 14장에서는 매 3년마다 십일조를 따로 하는데 그것으로 레위인, 고아, 과부, 나그네를 위해 사용하라고 합니다. 왜 이렇게 하라고 하느냐 하면 너희가 애굽에서 종이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24:17-22절을 보면 객이나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게 하신 것은 애굽에서 종이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셨던 것을 기억하라고 이 일을 명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아와 과부를 돌본다는 것은 자신들이 잘나서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준다는 차원이 전혀 아닌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구제가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또다시 자기 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경건 곧 자기 의를 들어내기 위해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것은 바리새인들이 이미 잘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에서 너희가 구제를 하거나 기도를 하거나 금식을 할 때에 은밀하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구제와 기도와 금식과 같은 것이 종교에 있어서 경건의 생활인데 그런 행위를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곧 자기 자랑을 위해 하는 것은 헛된 경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라는 말씀은 너희가 종이고, 고아며, 과부요, 나그네라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신이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경건입니다. 자기는 경건하니까, 나는 의로우니까,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겨야지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 사람임을 잊어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 야고보가 유대인들이 행하여 왔던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을 몰라서 다시 이 말을 하였겠습니까?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이미 선지자들이 그러한 고발을 많이 해왔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제사 지낸다고 소를 잡고 양을 잡으면서도 고아와 과부를 학대하고 있었던 그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몰랐습니다. 우리의 경건이 얼마든지 이렇게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자비인 것입니다. 종교적인 행위가 아니라 긍휼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9:9-13절을 보면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앞에서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서도 봤습니다만 세리는 누가 봐도 경건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바리새인들보다 세리가 의롭다함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리새인 안에는 긍휼이 담겨질 공간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 의로 가득 찬 것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주의 긍휼과 자비를 입게 된 것입니다. 이보다 더한 경건이 어디에 있습니까? 삭개오가 주님을 만나고 나서 토색한 것을 네 배나 갚고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참된 경건이란 주님을 제대로 만났느냐의 문제입니다. 구제를 하면서도 자기의 죄를 알고 자신이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되는 자임을 아는 사람이 바로 참으로 경건한 사람입니다.

 

야고보는 끝으로 참된 경건은 “세상으로부터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물들지 아니하는’(아스필로스, a[spilo")이라는 말은 의식적인 정결보다는 도덕적인 정결을 의미합니다(참조. 4:1-10). ‘세속’(코스모스, kovsmo")이라는 말은 창조세계를 의미한다기보다는 하나님을 대응하려는 세력을 의미합니다. 곧 믿음의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는 모든 곳에 널리 퍼져 있는 죄악을 전체적으로 통칭하는 말입니다. 결국 성도들의 도덕적 행위는 하나님께 대한 흠 없는 충성심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자는 주변 세계의 가치관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지만, 만일 세상에 영향을 받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된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참조. 4:4; 마 6:24). 야고보는 이 문제를 4장에 가서 구체적인 문제들과 더불어 상세하게 다룹니다. 결국 야고보는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한다는 것이 참된 경건이라고 합니다. 세상의 시대흐름, 세상의 사상과 가치관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 참된 경건입니다. 이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합니다. 그러려면 돈이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돈으로 결론짓는 이런 세상에서 경건조차 자기 이익의 재료로 삼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이러한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자기를 지키는 것이 참된 경건인 것입니다. 누가 자기는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되는 자임을 알고, 누가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겠습니까? 오직 주님의 긍휼과 은혜로 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여 주시고, 자신이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할 자임을 알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아버지 앞에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 곧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아 구제하는 참된 경건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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