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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성경본문 갈 1:1-5
성경본문내용 (1)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2)함께 있는 모든 형제로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3)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4)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5)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강설날짜 2011-06-08

2011년 6월 8일 한결교회 수요모임 강설
갈라디아서 제3강

 

하나님께서 하신 일

 

말씀 : 갈 1:1-5


오늘 배울 내용은 갈라디아서의 인사말입니다. 무엇이든 서론이 매우 중요한 것처럼,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시작하면서 하는 이 인사말 부분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여기 보면 바울은 그 당시의 서신들이 일반적으로 그랬던 것처럼, 발신자와 수신자를 언급하고 인사말을 합니다. 발신자는 ‘바울’이고, 수신자는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이고, 인사말은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간단하게 적어도 될 인사말 부분을 아주 긴 수식어를 붙여서 길게 늘이고 있습니다. 아주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먼저 발신자를 적으면서, ‘사도된 나 바울은’이라고 하면 될 것을, 아주 길게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하면서 자신의 사도권의 기원에 대해서 길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사도권을 강조해야 했던 이유는 그 당시 갈라디아 교회를 어지럽히던 거짓교사들이 바울의 사도권을 폄하했기 때문입니다. 즉 바울은 예루살렘 사도들에 의해서 사도로 세움 받았고, 때문에 예루살렘 사도들보다 열등한 사도이고, 그래서 그가 전한 복음도 불완전한 복음이기 때문에 그의 가르침을 따르면 안 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이 사람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신적인 권위에 의해서 된 것이라는 것을 먼저 인사말에서부터 아주 강조해서 설명해야 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수신자 부분을 보겠습니다. 본인에 대해서 그렇게 길게 소개했으면, 또한 수신자를 언급할 때도 길게 하면 될 텐데, 오히려 수신자 부분에는 아무런 수식어가 없습니다. 그냥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라고 하고 있습니다. 사실 다른 바울 서신들을 보면 수신자에 대해서 여러 가지 수식어를 붙이는 것이 바울의 일반적인 관례입니다. 로마서를 보면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라고 하고 있고, 고린도전서에 보면 보다 더 길게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는 수신자에 대한 수식어가 없고, 그냥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라고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들을 향한 바울의 약간의 냉정하고 차가운 어조를 느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바울 서신들을 보면 인사말에 이어서 수신자들로 인해 감사를 드리는 부분이나 또는 수신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부분이 종종 나오는데, 갈라디아서에는 그런 것이 전혀 없습니다. 인사말이 끝나자마자 6절에서부터 곧바로 책망이 들어갑니다. 심지어는 저주를 선포하면서까지 아주 강한 어조로 책망합니다. 이러한 것들을 보면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의 변절에 대하여 얼마나 놀라고 분노하고 분개하였으며, 또 얼마나 긴급하고 급박하게 이 편지를 써내려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좇는 문제는 생사가 걸린 문제로서 아주 긴급히 해결되어야 할 심각한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그토록 바울을 분노하게 하고 분개하게 하였던 것일까요? 갈라디아 교회를 어지럽히던 거짓 교사들의 주장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무슨 다른 신을 숭배한다든지, 아니면 다른 교훈을 한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 자체를 변질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은혜로는 충분치 않고, 은혜에 행위를 덧붙이려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3장에 가면 바울이 직접적으로 이런 질문을 하면서 거짓복음을 공격해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너희가 얻은 구원이 믿음에 의한 것이냐 행위에 의한 것이냐”(갈 3:2,5) 그러나 오늘 본문, 인사말 부분에서부터 이미 그런 내용으로 들어가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초석을, 근거를 마련하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3절을 보면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라고 함으로써 짧은 인사말을 합니다. 한글성경으로 보면 그렇게 보입니다. 그러나 원어로 보면 3절과 4절이 한 문장으로서 3-4절이 다 인사말입니다. 즉 은혜와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있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거기다가 영어로 치면 관계대명사 ‘who’를 넣어서, ‘그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냐’를 길게 늘여서 서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울은 기독교 복음의 본질을 서술합니다. 그분이 무슨 일을 하셨다고 합니까? 4절에 우리 죄를 위해서 자기 몸을 주셔서 우리를 이 악한 세상에서 건져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고 선언합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여기에 우리가 구원받는 것에 있어서 우리의 어떠한 믿음이나 신실함이나 순종의 행위들이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 때문에 우리가 이 악한 세상에서 건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오직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놓여져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님 믿어야 구원받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회심하고, 성령을 받아야 구원받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것을 다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처음 예수님 믿었을 때를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때 예수님을 만났고, 십자가의 은혜를 깨달았고, 그 구원의 은혜를 인해서 감격하고, 눈물도 흘리고, 때로는 신비한 체험도 하고, 간증거리가 될 만한 놀라운 일도 경험 했습니다. 그러한 회심하는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이 있어야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믿는 일도 없었고, 감격과 확신과 체험과 경험도 없으면서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주제넘은 생각이 어디 있으며, 얼토당토않은 자기기만이 어디 있겠습니까? 반드시 믿고 회심하고 은혜를 체험하고 감격과 감사와 기쁨을 경험하는 것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믿음과 확신과 감격과 경험들이라는 것은 우리의 구원을 지탱해주는 근거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면서 느끼다시피 내 감동, 감격, 확신이라는 것은 그렇게 큰 힘을 오랫동안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쉽게 식고, 쉽게 흔들립니다. 그런 상황 가운데서 내가 구원받은 자인가 아닌가 하는 확인을,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완성하신 일이라고 하는 더 큰 근거에서 찾지 않고, 나의 구원의 경험이나 내 신앙, 확신, 감격, 감동에서 찾는다고 한다면, 우리의 구원에 대한 확신은 우리의 상태에 따라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할 때는 구원받은 자인 것처럼 생각되었다가도, 그렇지 못할 때는 구원이 취소되었거나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지는 가장 어려운 문제가 바로 이 문제 아닙니까? 분명히 “예수님을 만났는데,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는데, 왜 구원의 확신 없이, 매일 흔들리고 의심하고 낙심하고 절망하는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구원의 근거를 우리 자신에게서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믿음이나 감격이나 확신이나 경험들이, 그것들을 우리 안에 있게 한, 보다 더 큰 권위에, 곧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하는 더 큰 권위에 근거하고 있지 않으면, 우리의 믿음이나 확신이라는 것들은 다 실없는 것이 되고, 신앙생활은 힘을 잃고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지금도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으로 계속해서 서 있을 수 있도록 지탱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나 신실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작정과, 또한 그 뜻을 따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사역이 바로 우리의 구원의 근거로서 우리를 지금도 든든한 반석처럼 우리를 지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하고, 이 사실에 우리가 기대어서 의지하고 의존해서 신앙생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말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라는 것이 우리가 선택하고 우리가 믿었고, 우리가 결정해서 시작되고 성립된 것이 아니라, 창세전에 우리가 존재하지도 않은 때에 우리를 구원으로 예정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로 삼아주셨기 때문에,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시고 자녀삼아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그 근거는 우리의 믿음이나 신실함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과 예수 그리스도의 일하심에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에 달려 있는 것이고, 때문에 구원은 전적인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참된 백성들은 이러한 든든한 반석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또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시작하신 구원을 또한 반드시 간섭하시고 이루어 승리케 하실 것이기 때문에, 성도의 견인교리는 확실한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의심이 생기고, 신앙 전반에 대해 회의가 생기기도 하고, 때로는 좌절과 낙심과 절망과 체념 속에서 방황하기도 합니다. 여러 가지 영적 침체와 신앙의 정체됨, 형식화되고 냉냉한 신앙생활로 인해서 근심하고, 그래서 아예 신앙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도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신앙의 끊을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인내심이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붙드심의 결과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실망하고 낙심하고 그래서 나를 포기하는 일은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포기하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끝까지 견인해 가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애초부터 우리를 택하시고 구원해주신 것이 우리가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과 신실함을 보시고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작정하신 뜻과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 죄를 위해 대신 죽어주신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그렇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사실에서 위로를 받고, 힘을 얻고, 그래서 우리의 낙심과 절망에 자리에서 또 다시 한번 일어서서 믿음의 길을 다시금 담대하게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늘 이 튼튼한 반석에 우리의 영혼을 기대고, 그것을 믿고 신뢰하면서 신앙생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구원이라는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내가 믿을 필요 없고, 나의 경험이라는 것, 감격과 확신이라는 것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로봇처럼 조종하시고 조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인격적인 관계를 요구하시고, 사랑과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야 하고, 우리는 복음의 의미를 깨달아 알아야 하고, 예수님을 믿어 영접해야 하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회심하는 체험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믿음과 경험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결과물들이지, 결코 구원의 근거로서 서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우리가 기억하고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자꾸 우리의 구원의 근거를 우리 자신에게 두고서 신앙생활하기가 쉽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해놓고도, 우리가 우리의 확신과 의지로 우리의 믿음을 지켜내지 못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자꾸 어떻게 하기 쉽습니까? 우리 스스로 그 원하는 영적인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신앙의 규칙들을 자꾸 만드는 것입니다. 물론 이 규칙이 우리에게 안내서가 되거나 자기를 성찰하는 잣대가 되는 것으로는 좋지만, 우리의 규칙은 늘 자기 근거로 작용하기 때문에 언제나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은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자, 열심히 성경보자”, 다 중요하고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열심히 기도해서 하나님이 보상해주었다”거나, “나는 열심히 성경을 보아서 여기까지 왔다”라는 근거로서 작용하기 시작하는 것이 우리의 죄성이고, 그것이 근거로서 작용하기 시작하면 나는 십자가가 많이 필요치 않은 존재로 독립하게 됩니다. 그러면 거기에는 자랑이 생기고 은혜가 점점 사라져가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정죄하기 시작합니다. “당신이 신앙적인 경지에 못 이르는 것, 신앙적인 평안을 얻지 못하는 것은 당신이 부족한 탓이다”라는 얘기를 합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맞는 표현이지만, 그런 근거를 우리가 가질 수 있다는 차원에서 하는 얘기라면,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은혜와 축복들이 하나님의 은혜가 유일한 이유였다는 것이 잠식되거나, 우리의 공로가 혼합되면, 기독교는 힘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힘을 잃는 것은 무엇으로 당장 드러나느냐 하면 교회 안에 자랑과 정죄가 성행하고, 감사와 겸손이 자리를 차지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공동체가 아니라 미움과 다툼과 불신의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 가면..

 

“(26)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27)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28)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29)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6-29)

 

자랑하지 못한다는 것은 자기가 가진 결과가 자기에게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이유가 있으면, 원인이 있으면 우리는 자랑하게 됩니다. “나는 이렇게 했더니 됐더라”는 겁니다. 이것은 물론 미묘한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 했더니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셨다”라는 말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때 말하는 “내가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응답 하시더라”는 기도가 조건으로서가 아니라,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가운데서, 하나님께 구하였더니 하나님이 주셨다”라는 의미로 기도를 얘기한다면 이것은 아주 옳은 신앙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나는 기도라는 조건을 제시했더니 하나님이 그 결과로 보상하시더라. 나는 기도했고, 너는 안했다”라는 말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이미 십자가 은혜에서 떨어져서 예수님이 아닌 자기를 자랑하는 자리에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26절에 보면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것이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우리가 더 종교적이어서, 더 지성적이어서, 더 신실해서, 더 여타의 조건이 있어서, 그 보상으로 기독교 신자가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30절의 결론이...

 

“(30)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31)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전 1:30-31)

 

갈라디아서 1:1-5의 핵심 되는 주제는 하나님의 주권과 예수님 안에서의 은혜라고 말할 수 있는데, 예수님이 모든 우리 신앙 고백의 내용과 약속의 근거이시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근거가 우리의 신실함이나 종교적인 헌신이나 열심에 있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 삶 가운데 그런 것이 있어야 합니다만, 그러나 그것이 원인이나 조건으로 등장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은혜와 축복들은 다 예수님 안에 있고, 우리가 그 안에 있음으로 말미암아서 그 모든 것들을 은혜로 거저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어떤 결과가 있든지 간에 우리는 누구만 자랑해야 합니까? 예수님만 자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13)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1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3-14)

 

결국 갈라디아서의 메시지는 자랑의 문제인 것을 보게 됩니다. 무엇을 자랑할 것이냐, 누구를 자랑할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무언가를 자랑한다는 것은 그것에 자신의 구원의 근거를 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본질을 다루는 문제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근거를 두고 있느냐 아니면, 자신의 믿음과 신실함과 행함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우리가 구원받느냐 심판받느냐를 결정하는, 우리의 영적인 운명을 결정하는 문제입니다. 대단히 심각한 문제인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 자신을 진지하게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누구를 자랑하고 있습니까? 어디에 구원의 근거를 두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원의 근거로 여기고 그것만 의지하며 그것만을 자랑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 스스로의 믿음과 확신과 신실함으로 우리의 신앙생활과 구원을 계속해서 유지하고 지탱하려고 하고 있습니까? 혹시 내가 원하는 신앙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 신앙의 여러 규칙을 만들고 그것으로 자기 자랑거리를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솔직히 이렇게 신앙생활 할 때가 많지 않습니까?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지금 다른 복음을 좇는 갈라디아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매우 영적으로 위험한 상태에 빠져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번 갈라디아서 강설을 통해서 바울의 경고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로 듣고 이 다른 복음에서 반드시 돌이켜야 합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주님의 은혜의 복음 위에, 주님께서 마련하신 그 튼튼한 구원의 반석 위에, 우리를 세워주셔서, 오직 주님의 공로만 의지하고 그 십자가만 자랑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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