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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성경본문 갈 1:10
성경본문내용 (10)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강설날짜 2011-06-29

2011년 6월 29일 한결교회 수요모임 강설
갈라디아서 6강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말씀 : 갈 1:10

 

이 10절 말씀을 6절에서 시작되는 단락의 결론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6-9절과 11절 이하 단락을 연결시켜주는 전환부 역할을 하느냐, 아니면 11절 이하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단락에 포함되느냐 하는 점에 대해서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릅니다. 제 생각에는 이 세 가지 모두가 다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글 성경에는 생략되었지만, ‘그러므로’라는 단어가 문장 첫 마디에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10절은 6절부터 시작되어온 단락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이 10절은 내용상 11절 이하의 새로운 단락으로 내용을 전환하는 연결고리 역할도 하고, 문맥적으로 보면 10절부터 새로운 단락을 시작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10절은 앞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이어가면서 새로운 주제를 향해 나아가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10절이 앞 뒤 단락과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물음표를 가지고면서 오늘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0절은 두 가지의 질문을 하는데, 하나는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하는 것입니다. 특히 첫 번째 질문에서 ‘좋게 하랴’라는 단어는 사실 의역한 것으로서 원래 단어의 의미는 ‘설득하다’라는 단어입니다. 원래 의미를 떠나서 아주 의역한 것인데, 그러나 아주 잘 한 의역입니다. 왜냐하면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 자주 사용했던 방법이 아첨과 아부를 함으로써 사람들의 호의와 환심을 얻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라는 질문은 “내가 갈라디아에서 행한 사역들의 동기가 사람들에게 환심을 사려고, 또는 사람들의 호의와 지지를 얻으려고 한 것인 줄 아느냐”하는 말입니다. 이 질문에서 바울과 독자들에게 기대되는 대답은 당연히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람들을 좋게 하거나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기 위한 동기를 가지고서 복음을 전하고 사역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했다면 바울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닙니다. 바울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면서 그것을 목적으로 사역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라는 첫 번째 질문과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랴”라는 두 번째 질문은 사실 같은 내용의 질문으로서 반복의 의미를 갖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똑같은 질문을 두 번씩이나 반복함으로써 자신의 순수한 동기에 대해 변호해야 했던 이유는 갈라디아의 거짓 교사들이 이 점과 관련하여 바울을 공격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실 이 질문들은 거짓교사들의 공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두 가지 면에서 공격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의 호의를 얻기 위해서 반쪽 복음만 전했다고 비판한 것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할례와 율법 없는 복음을 전함으로써 그들에게 할례와 율법의 무거운 짐을 면제시켜주고, 장애물을 제거하여 믿기 쉬운 복음을 제시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이유가 그들로부터 반대를 받지 않고 그들의 호의를 쉽게 얻어내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점과 관련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이방인들이 ‘할례’에 대해서 상당한 부담감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포경수술은 사실 매우 힘들고 고통스러운 수술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마취기술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진통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생으로 수술해야 하는데, 얼마나 고통이 극심하겠습니까? 그래서 많은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게 되고 섬기게 되지만, 그러나 정식으로 할례를 받아서 유대교에 입교하지 않았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에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라고 불리는 자들이 자주 나오는데, 바로 이런 이방인들을 지칭하는 관용적인 표현이었습니다. 할례 때문에 유대교로 완전히 입교하기를 망설이는 사람들이 실제로 많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할례와 율법은 이방인들에게 부담스럽고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그런데 거짓교사들에 의하면 바울은 이러한 부담스럽고 무거운 짐을 제거하고 할례와 율법 없는 반쪽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가 갈라디아 사람들의 반대를 최소화하고 그들의 지지와 환심을 얻고자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짓교사들이 결과적으로 주장하는 바는 바울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방인들이 율법과 할례를 부담스러워하고 꺼려함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개의치 않고, 꿋꿋하게 율법과 할례의 복음을 전하는 자신들이야말로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는 참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의 공격에 대해서 바울은 단호하게 반박합니다. 바울은 그러한 할례 없는 복음, 율법 없는 복음을 전한 것이 결코 사람들의 기쁨을 위해서, 사람들의 호의를 얻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오히려 할례와 율법 없는 복음은 오직 그리스도로의 계시를 따른 것이라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 바울이 깨달은 바는 율법과 할례란 한시적인 것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만 있을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사람들의 환심을 얻으려고 할례 없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0절 다음에 11절부터 2:14까지의 긴 자서전적인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의 복음이 그리스도로부터 직통으로 받은 계시에 의한 것임을 설명하고, 그 다음 3-4장에서는 율법의 구속사적인 의미, 율법의 한시적인 역할,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율법에서 우리를 자유하게 했다는 것을 길게 설명합니다. 즉 바울의 복음이란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복음이고, 오직 하나님의 기쁨을 위한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거짓교사들의 공격은 이뿐이 아닙니다. 두 번째로 거짓교사들은 바울의 행동에 일관성이 없다고 비판했습니다. 10절에서 ‘이제’라는 말과 ‘지금까지’라는 말이 바로 이러한 점을 시사해줍니다. 거짓교사들은 바울이 시간과 장소에 따라서 자신의 기조와 사상을 바꾸는, 자기 주변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말과 행동을 바꾸는 일관성이 없는 사람으로 의심하고 비판했던 것입니다. 사실 바울의 모습에는 그렇게 오해할 만한 충분한 요소가 있었습니다.

(19)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20)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21)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22)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고전 9:19-22)

 

이러한 바울의 기조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일관성이 없는 행동으로 오해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할례’문제에 있어서도 이러한 융통성을 나타냅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그렇게 할례를 반대하고, 또 갈라디아서 2:2-3에서 보는 것처럼 디도에게는 억지로 할례 받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를 쓴 이후 제2차 선교여행 때 갈라디아 교회를 다시 방문했을 때, 거기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베풉니다(행 16:3). 또 다른 예로, 바울은 3차 선교여행 후에 예루살렘에 방문했을 때, 유대인들을 얻고자 하여 의도적으로 할례를 행하고 율법의 규례들을 지킵니다(행 21:20-26). 이런 모습들이 다른 사람이 볼 때, 상황에 따라 자기 뜻을 뒤바꾸는 일관성 없는 모습으로 비쳐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렇게 하는 것은 갈라디아 거짓교사들의 말마따나 자신이 상황에 따라 자신의 기조와 사상을 뒤바꾸는 그런 얄팍한 기회주의자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구원받도록 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이익과 권리와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고 희생하는 차원에서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울의 이러한 의도를 분명히 파악해야 합니다. 바울은 할례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에서 할례를 아주 반대하지만, 그것은 할례 자체가 나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할례가 구원의 조건으로서 제시되는 것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에게 할례나 무할례나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6절에서 “(6)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라고 말하였습니다. 할례를 행하느냐 행하지 않느냐는 것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오직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러한 표면적인 바울의 일관성 없는 모습들은 사실은 더 중요한 일관된 목적, 곧 사람들의 구원과 유익을 위하는 바울의 사랑의 목적에 기인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을 구함이라고 하는 더 크고 중요한 일관된 목적에 귀속된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오늘 본문 말씀이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라고 해서 사람들의 기쁨을 무조건 구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23)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24)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3-24)


(31)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32)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33)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 10:31-33)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고,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서로의 종이 되고,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자신의 자유를 절제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한 가지 목적이 무엇이냐 하니깐, 33절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순수한 목적으로 사람의 기쁨을 구하고 타인의 영적 유익을 위해 서로의 종이 되어 섬기는 삶을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목적이 아닌,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는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갈라디아서 본문의 말씀처럼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 사람들의 환심과 지지를 얻으려는 불순한 목적에서 이루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섬기는 모습들의 동기가 무엇인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때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갈라디아서 본문과 같이 복음의 본질을 놓고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는 것과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 충돌 될 때입니다. 이때 무엇을 택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숨은 동기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만일 그때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지 않고, 사람의 기쁨을 구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그동안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고 섬긴 것이 사람들의 환심이나 지지를 얻기 위한 불순한 동기에서 비롯된 것임을 드러내는 것이고, 그리하여 자신이 그리스도의 참된 종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순수한 동기를 증명하기 위해서 두 가지 측면에서 논증해 갑니다. 첫째는 자신의 가르침과 논조 속에 나타난 강경하도고 단호한 태도입니다. 앞에서 저주를 선포하는 모습이나, 뒤의 단락에서 예루살렘 사도들과 동등한 사도로서 당당하게 관계 맺는 모습이나, 그리고 디도를 억지로 할례 받게 하려는 압박에 끝까지 복종하지 않은 단호한 모습, 심지어는 복음을 따라 행하지 아니하는 베드로를 도리어 꾸짖고 책망하는 모습들은 자신이 사람들의 눈치나 보고 비위나 맞추면서 사람들의 환심과 지지나 얻으려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신이 이 복음을 위해서 받았던 핍박을 통해서 자신의 동기의 순수함을 증거 합니다.

 

(11)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갈 5:11)


(17)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 6:17)

 

바울은 이 복음을 전하면서 숱한 핍박과 어려움과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개척할 때 유대인들에 의해서 많은 반대에 부딪히고 심지어는 돌에 맞아서 죽기 직전까지 간적도 있었습니다. 왜 바울이 유대인들로부터 이런 핍박을 받았습니까?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전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도 이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사역으로 말미암은 할례와 율법 없는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혐오했던 이유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메시아라고 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방인들을 할례와 율법 없이 그들의 공동체 내로 들여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있을 때, 이방사람들과 음행하고 교제함으로 인해서 염병이 왔고,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질투심을 가지고 창으로 그 사람들을 죽여서 염병이 그친 사건을 알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같은 동족 유대인들이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들과 아무런 조건 없이 교제하고 함께 지내는 것을 보면 분노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묵과하는 것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행위라고 생각하고, 비느하스처럼 그런 배교를 행한 자기 동족들을 핍박하고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가는 곳마다 율법 없고 할례 없는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많은 반대와 핍박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몸에 이 복음 때문에 받은 핍박으로 인한 영광의 상처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바울은 이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과 목숨을 아끼지 아니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참된 종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거짓교사들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12)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 뿐이라(13)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갈 6:12-13)

 

그들은 도리어 핍박을 면하기 위해서 할례의 복음을 전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바로 그들이 그리스도의 참된 종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들이 할례 없는 복음을 전한 이유는 갈라디아 성도들을 사랑하여 그들의 구원과 영적 유익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말해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들이 핍박을 면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기 육체를 자랑하기 위해서, 이러한 불순한 목적을 위해서 전한다는 것입니다.

 

(4)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갈 2:4)

 

그리고 그들의 또 다른 목적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누리는 자유를 엿보아서 그들은 자신들의 종으로 삼고자 하기 위한 것입니다. 자신들을 따르게 하고, 자신들의 종으로 삼는 것이 그들의 목적입니다. 결국 거짓교사들은 자기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목적으로 사역에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바로 참된 그리스도의 종의 모습이 어떠하고 거짓교사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은 일차적으로 저와 목사님 같이 교회의 사역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불순한 목적을 위해서 사역하느냐 아니면 주님을 위해서 그리고 타인의 영적 유익과 구원을 위해서 사역하느냐 하는 것에서 참된 목자냐 거짓된 목자냐가 구별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를 맡아 섬기는 목자에게 반드시 요구되는 자세가 바로 사람의 기쁨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기쁨만을 구하겠다는 자세입니다. 이 자세가 없이는 한시도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교회를 세워가는 일을 결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호의를 얻어서 그들로부터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히고, 반대 없이 고난 없이 성공적으로 목회 사역을 하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히게 되면, 결국 목회자는 사람을 따라 말하게 되고,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 말을 꾸미게 되고, 결국에는 순수하게 복음진리를 가르칠 수가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 세상에서 목회성공을 추구하는 사람, 1000명 교회 이루어서 자기 이름을 내려고 하는 불순한 동기를 가진 목회자들은 복음을 순수하게 가르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이란 결코 많은 사람들에게 달가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거치는 돌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참된 복음을 전하면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반드시 많은 반대와 배척과 심지어는 사람들의 반발로 인한 핍박을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목회자들은 순수하게 복음을 가르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님의 기쁨만을 위해서 복음을 증거하지 않고, 이 복음을 변질시켜서 전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 핍박과 고난의 복음, 자기 죽음의 복음, 회개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의 힘의 복음, 꿈과 희망의 복음, 영광과 번영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도들도 이런 가르침을 주는 목사님을 찾아다닌다는 것입니다.

 

(3)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4)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딤후 4:3-4)


(29)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30)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행 20:29-30)

 

많은 목회자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사람들을 아부하고 아첨하고, 비위 맞추고, 그들에게 위로와 소망과 힘을 주는 말씀만 전하고, 또 적당하게 그들의 공명심을 충족시켜줌으로써, 결국 그들을 기쁘게 하고 그들의 호의와 환심을 사서, 목회자 자신의 꿈과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도 이런 목회자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어떻게 됩니까? 교회 전체가 부패하고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도 성도도 같이 멸망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목회자는 주의 종으로서 사람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행하지 아니하면 마땅히 남자처럼 담대히 일어서서 그릇된 자들을 책망하고 그들과 맞서 대항함으로써 교회를 오류와 부정으로부터 순결하게 보호해야 합니다. 그렇게 사람들을 때로는 단호하게, 때로는 모질게 책망하고 경계하면, 책망을 받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오류를 시정해준 것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상처를 받고 시험에 들 수가 있으며, 어떤 경우는 목회자에 대한 불신을 가지고서 목회자를 반대하고 공격하는 세력으로 돌변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주의 종으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면 이러한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과의 평화가 깨어지고 많은 반대와 대적을 직면하는 일을 두려워하거나, 행여나 자신의 언행이 사람들의 비위를 상하게 할까 염려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기쁨만을 구하는 목회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목회자는 자신의 자존심, 체면, 내 인정, 내 영광, 자신의 안위와 평안하고자 하는 마음을 다 버리고 오직 주와 복음을 위해 고난도 마다하지 않으며, 목숨까지도 바치겠다는 각오로 이 사역에 임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보면서, 과연 자신이 그리스도의 종으로 합당한 자세로 사역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참된 목자는 때로는 매섭고, 차갑고, 냉정할 수 있어야 하는데, 저는 그렇지 못하고 참으로 우유부단한 사람입니다. 저는 체면이 많고, 마음이 여려서 사람들에 싫은 말하기를 잘 못하는 사람입니다. 태생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복음의 진리를 따라서 사람들을 책망도 하고, 사람들을 권면하기도 하고 돕고 섬기기도 해야 하는데, 그럴 자신이 솔직하게 없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처럼 복음증거 하는 사명을 감당하면서 여러 가지 고난 받는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여러모로 자신이 과연 그리스도의 참된 목자인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식적으로는 바르게 가르칠지 모르나 결국에는 사람들의 비위나 맞추어가며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목회를 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습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제가 저의 안일한 삶을 회개하고, 자기체면, 자기욕심을 버리고 오직 주님의 영광을 구하고 기쁨을 구하는 목회자로 설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참된 종으로서 이 한결교회를 주님의 뜻을 따라 섬겨가게 하여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두 번째로, 이 말씀은 목회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또한 모든 성도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목회자들만 주의 종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다 주의 종들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다 교회의 리더로 세워져서 교회를 섬길 자들입니다. 그리고 가정에서는 자녀들을 주의 진리로 가르쳐야 할 선생들이고 우리 주위의 이웃들에게 복음을 증거 해야 할 선교사명이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종으로서 마땅히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람들을 기쁘게 해서 그들의 환심과 호의를 얻으려 하는 동기에서 신앙생활하면서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24)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듯이, 자기를 위한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만을 구하는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만을 구하는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마땅한 자세가 결핍될 때 우리는 어떻게 살 수밖에 없느냐 하면,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 사람들의 호의와 지지와 환심을 사려고 하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내 인정영광, 내 자존심, 체면, 내 안위와 편안함을 추구할 때, 우리는 복음의 진리를 따라 말하고 행동하지 못하고,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고, 아부하고 아첨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장로나 집사가 되기 위해서, 자신이 교회에서 인정과 영광을 얻기 위해서,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그들로부터 조롱과 멸시, 거절을 당하고, 때로는 핍박과 어려움도 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려면 많은 것을 희생하고 부인해야 하기 때문에, 이런 어려움들을 피하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해도 그들의 비위에 거슬리는 내용, 예를 들면 죄나 심판이나 지옥과 같은 내용을 잘 말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십시다. 혹시 우리가 이런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복음의 진리를 따라 행하며, 고난과 어려움을 각오하고 주님의 영광과 주님의 기쁨만을 구하는 삶을 우리가 살고 있습니까? 솔직하게 우리가 이런 삶을 살지 못하고 있음을 고백치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런 우리의 안일하고 이기적인 삶에서 돌이켜서 회개해서 그리스도의 기쁨과 영광만을 구하는 그분의 종으로서의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주님의 복음위에 굳게 세워주시고, 사람의 기쁨을 구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기쁨만을 구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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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6 [갈라디아서 1장] 다른 복음은 없나니(2) file 갈 1:6-9 최상범 2011-06-22 2789
» [갈라디아서 1장] 사람들에게 좋게하랴 file 갈 1:10 최상범 2011-06-29 3995
484 [갈라디아서 1장] 바울의 회심 file 갈 1:11-17 최상범 2011-07-06 3416
483 [갈라디아서 1장] 핍박자에서 복음증거자로 file 갈 1:18-24 최상범 2011-07-13 2504
482 [갈라디아서 2장] 우리가 가진 자유 file 갈 2:1-10 최상범 2011-07-20 2798
481 [갈라디아서 2장] 복음의 진리를 따라 file 갈 2:11-16 최상범 2011-07-27 2835
480 [갈라디아서 2장] 믿음으로 의롭게 됨 file 갈 2:15-21 최상범 2011-08-03 4095
479 [갈라디아서 2장] 내가 산 것이 아니요 file 갈 2:19-20 최상범 2011-08-24 2927
478 [갈라디아서 3장]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file 갈 3:1-5 최상범 2011-08-31 3471
477 [갈라디아서 3장] 육체로 마치겠느냐 file 갈 3:3 최상범 2011-09-07 3415
476 [갈라디아서 3장]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file 갈 3:6-9 최상범 2011-09-14 3250
475 [갈라디아서 3장] 율법의 저주 file 갈 3:10-14 최상범 2011-09-21 3666
474 [갈라디아서 3장] 율법과 약속 file 갈 3:15-18 최상범 2011-09-28 3536
473 [갈라디아서 3장] 몽학선생 file 갈 3:19-24 최상범 2011-10-05 3910
472 [갈라디아서 3장] 믿음이 온 이후로 file 갈 3:25-29 최상범 2011-10-12 3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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