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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성경본문 갈 1:18-24
성경본문내용 (18)그 후 삼년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 오일을 유할새(19)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20)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21)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22)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23)다만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24)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
강설날짜 2011-07-13

2011년 7월 13일 한결교회 수요강설
갈라디아서 제8강

 

핍박자에서 복음증거자로

 

말씀: 갈 1:18-24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지난주 본문에 이이서) 계속해서 자신의 회심 이후의 이력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지난주 살펴보았던 본문에 의하면, 회심하자마자 곧바로 어디로 갔다고 했습니까?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거기서 무엇을 했습니까? 곧바로 이방인의 사도로서 선교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그 후 삼년 만에 비로소 예루살렘으로 처음으로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바울은 베드로와 야고보만 보고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고, 15일만 유한 후에 곧바로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 떠났다는 것입니다. 지금 하는 얘기들, 자신이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얼마만큼 유했고, 또 어디로 갔다고 하는 이런 이력들을 서술하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한 일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잘 아는 것처럼 이것은 갈라디아 교회 문제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큰 기관에 책임자가 되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소문이 나기를 저 사람이 지난주에 서울 갔다 오더니 청와대 들렀다가 그 후에 이 기관의 책임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새로운 책임자가 변명하면서 하는 얘기가 나는 청와대 갈 때, 대통령 만나러 간 것이 아니라, 그 청와대에서 개를 사육하고 있는 내 친구의 사촌 만나러 갔었고, 거기서 세파트 외에는 아무도 만나게 없다 라는 것입니다. 이 상황이 이해가 되십니까? 대통령을 만나서, 청탁해서 이 자리에 와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청와대에 간 것은 다른 일 때문에 간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이 본문을 통해서 자신이 예루살렘에 들린 것은 예루살렘 사도들로부터 이방인의 사도로 승인을 받거나 인정을 받으려고 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 역시 그들로부터 배워서 전수받기 위함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심방하려고” 하였습니다. 이 단어는 무언가를 전수받거나 인정받기 위해서 만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안면을 익히기 위해서 (순전히 친교를 목적으로) 만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26)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27)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행 9:26-27)

 

바울은 예루살렘 제자들과 친교하기 위해서, 사귀기 위해서 만나고자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입니다. 다른 목적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15일 유했다고 했습니다. 15일은 뭔가를 심도 있게 배우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입니다. 물론 집중적으로 하면 뭔가 배울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러나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은 이 15일 동안 주로 무엇을 하였습니까?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28)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29)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30)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행 9:28-30)

 

15일 유한 것도, 복음을 전하다가 그 복음을 대적하는 무리들 때문에 어려움에 처해져서 어쩔 수 없이 일찍 떠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깐 바울에게는 예루살렘 사도들로부터 복음을 배울 시간이 거의 없었다고 보아야 옳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복음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임이 여기서도 증명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예루살렘 사도들에게 전혀 전해들은 것이 없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시절동안의 여러 가지 세세한 가르침들과 행사들에 대해서는 바울은 예루살렘 사도들을 통해서 어느 정도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계시를 주실 때는 그런 세세한 것까지 일일이 다 계시해주신 것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은 사도들로부터 듣고, 그리고 여러 구전전승들, 기록들을 바울은 참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본질과 바울의 신학의 근본적인 원리만큼은 전해들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 알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이 오늘 본문에서 일관되게 계속해서 강조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외에 다른 사도를 보지 못한 것도 자신의 예루살렘 방문의 목적이 이방인의 사도로 임직받기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만일 그 만남이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공식적으로 세우는 모임이었다면 12제자가 다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거기서 베드로와 야고보외에는 다른 사도들을 만나보지 못했다는 것은 그 모임의 목적이 친교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사실들을 통해서 자신의 사도됨이나 복음이라고 하는 것이 예루살렘 사도들에게 어떠한 의존이나 종속 됨 없이 독립적으로, 독자적으로, 그리고 초자연적인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아서, 즉 신적인 권위에 의해서 된 것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또한 23절과 24절에 보면 “다만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거짓교사들의 주장을 정면으로 공격하는 것입니다. 거짓교사들이 어떻게 주장했습니까? 바울이 지금 전하는 복음은 예루살렘 사도들의 것과는 다르다고 그들은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구절을 통해서 바울이 지금 전하는 복음은 과거에 자신이 핍박했던 복음과 전적으로 동일한 복음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예루살렘 사도들의 복음과 자신의 복음이 완전히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복음증거사역의 소식을 듣고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렸다는 것은, 그들이 바울의 사도로서의 권위와 그의 복음 메시지를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오늘 본문들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의도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거짓교사들의 선동과 자신을 향한 공격들이 모두 다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 사도들보다 열등한 사도라는 것, 그들로부터 복음을 배웠다고 주장하는 것, 바울이 예루살렘 사도들의 복음과는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것 등 여러 가지 거짓 교사들의 주장들이 다 그들 스스로가 지어낸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거짓교사들은 어찌하든지 거짓말로 속여서 갈라디아 교회로 하여금 바울에 대해 불신을 갖도록 하고, 그리하여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은혜의 복음에서 떠나게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들이 얼마나 교묘하고 간사하게 거짓을 말했는지, 그들의 시도가 갈라디아 교회에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을 분노하게 했고, 그래서 2장 중반부까지 자신의 사도성과 복음의 독자성과 신권 기원에 대해서 길게 변호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사단 마귀가 하는 짓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들을 거짓말로 교묘하게 속여서 넘어뜨리는 것이 그들이 처음부터 행해왔던 것입니다.

 

(44)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 8:44)

 

교회 내의 거짓교사들, 거짓 선지자들의 전형적인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거짓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거짓을 말해서 말씀 맡은 자에 대한 불신을 심는 것이 그들의 주된 일이요, 또한 사단 마귀의 주된 전략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확실히 기억해야 합니다. 사단 마귀의 제1차 공격대상은 언제나 말씀 맡은 자들입니다. 여러분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얼마나 공격했습니까? 얼마나 예수님을 흠집 내려고 시험하고 거짓으로 선동하고 비판하였습니까? 또한 오늘 갈라디아서 본문처럼 거짓 교사들이 얼마나 거짓말로 바울을 흠집 내려 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다 사단 마귀가 하는 짓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공격이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단 마귀는 어찌하든지 목회자에게서 작은 꼬투리나 틈만 보이면 곧바로 그것을 가지고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목회자에 대한 불신을 심습니다. 교회 내의 거짓교사들, 거짓선지자들이 특별히 이 일에 쓰임 받습니다. 그들은 주의 종의 연약한 점이나 허물을 가지고서 부풀려서 사람들에게 소문을 퍼뜨리고, 그래서 불신을 조장합니다. 아니면 아예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어서 불신을 심습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말씀에서 떠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일 때문에 성경은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 세 사람의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딤전 5:19). 그만큼 거짓을 말해서 교회지도자들을 모함하고 음해하려는 시도들이 늘 있어왔다는 것입니다.


물론 목회자들도 연약한 인간이고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허물과 약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허물과 약점을 성도들은 용서하고 도리어 기도해주어야 하는 것이지, 그것으로 인해서 시험에 들고, 불신과 쓴뿌리가 내 마음에 자리 잡도록 허용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허물과 약점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징계하시고 훈련하실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주의 종을 신뢰하고 존경하고, 그리하여 말씀이 막히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쓴뿌리를 갖게 되면 결국 사단의 까불림을 당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사단이 그렇게 역사해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말씀을 못 듣게 하는 것입니다. 목사에 대한 쓴뿌리가 있으면 말씀이 들릴 리가 없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실제적인 문제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단 마귀의 역사를 분별해야 합니다. 내 마음에 혹시 그런 일이 없는가 살펴보아야 하고, 혹시 우리 주위에는 그런 일이 없는가 살피고 분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의 종에 대한 불신 때문에 교회를 떠나고 신앙을 버립니까? 사단 마귀의 공격이 그만큼 무섭고 위력적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종을 신뢰하면서, 교회에서 공적으로 선포되는 말씀 위에 굳게 서고, 그리고 그 말씀의 본의를 배워가는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살 길입니다. 교회가 사단의 공격을 방어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사단의 모든 강력을 파하고, 그들을 짓밟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성령의 검, 곧 말씀의 검으로 무장하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우리가 사단 마귀의 역사, 거짓교사들의 선동을 잘 분별함으로써, 그리고 말씀을 힘써 배워감으로써, 사단의 궤계를 물리치고, 승리하여, 날이 갈수록 든든히 세워져 가는 한결교회 모든 지체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계속해서 22절을 보시면,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유대에 있는 교회들”은 예루살렘의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팔레스틴 전역에 흩어져 지내는 그리스도인들을 말합니다. 왜 흩어져 지냅니까? 스데반의 순교를 기점으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심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보면 스데반의 순교 후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팔레스틴 전역과 이방지역으로 흩어졌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는 일인데, 그리하여 복음이 유대 전역으로 전파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유대 땅(로마의 행정 구역 명칭) 곳곳에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흩어지게 한 장본인이 누구입니까?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기독교 탄압의 앞잡이 노릇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바울입니다. 바울이 대제사장으로부터 권세를 부여받고서 다메섹에 간 것도 핍박을 피해 도망간 그리스도인들을 다메섹까지 좇아와서 그들을 잡아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기 위해서였습니다. 유대 땅의 교회들은 살기등등했던 바울의 핍박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바울의 핍박을 피해 흩어진 유대의 교회들이 이제는 어떤 소식을 듣는 것입니까? 23절에 “다만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라고 했습니다. 이 도를 핍박하는데 앞장섰던 자가 도리어 이 도를 전파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적이 있어도 이런 기적이 어디 있습니까? 요즘 반전 드라마, 반전 영화가 유행이지만, 이보다 더 큰 반전이 어디 있습니까? 바울의 이 극에서 극으로의 변화는 어떤 드라마보다도 감동적이고, 아름답고, 하나님의 변화시키는 능력과 은혜를 찬양하게 만드는 기적의 역사인 것입니다. 유대 교회들은 이러한 바울의 변화를 인해서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렸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회심, 바울의 극적인 변화를 통해 우리는 세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라면, 그 사람이 어떤 자라 하더라도, 어떠한 삶을 살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능히 그 사람을 180도 변화시키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절대로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했던 사람도 하나님이 역사하면 변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너무나 강퍅하기 때문에 절대로 변화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말씀 앞에서 꼬꾸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이 꼼짝없이 하나님의 은혜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불가항력적인 은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자 하실 때는 사람이 그것에 대해 저항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어주고,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셨고,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우리를 사로잡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반전시키시는 은혜의 역사입니다.
‘이젠 어둠보다 빛이 더 좋아’라는 책을 보면 우리가 잘 아는 1994년에 있었던 지존파 살인 사건의 주인공 김현양이라는 사람의 여러 편지글들이 나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전혀 변화될 소망이 없는 사람인데, 놀랍게도 구치소에서 복음을 영접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구치소에서 사형집행을 당하기 전까지 동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전도자의 사명을 감당하는 자로 변화된 것입니다. 어느 누가 이 지존파 깡패인 살인마가 예수님을 믿고 변화되어 복음전도자가 될 것이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 전할 때, 선입견을 가지면 안 됩니다. “이 사람은 내가 복음전해도 절대로 안 믿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그 선입관을 버려야 합니다. 오히려 정말 안 믿을 것 같은 사람이 오히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깐 우리는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 가리지 말고, 모든 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고 안 믿고는 그 사람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냐 아니냐,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느냐 안하시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아무리 강퍅한 사람을 만나도 하나님이 역사하면 반드시 반전이 있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만 보더라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자신이 사실은 다 반전의 주인공들 아닙니까? 우리가 어디 처음부터 예수님 믿을 것 같은 사람들이었습니까? 아니었잖아요? 우리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복음을 대적하고 강퍅한 마음을 따라 살던 자들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전혀 변화될 소망이 없는 자들이었는데, 어찌어찌하다보니깐 모임에 참석하게 되고, 전혀 믿을 마음 없었는데,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역사하셔서, 그대로 말씀 앞에 고꾸라져서,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에 사로잡혀서, 지금 이렇게 교회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해서 사는 하나님의 자녀요 성도로 변화된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변화되는 은혜를 우리가 입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유대 교회가 바울의 변화를 인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렸던 것처럼, 우리도 물처럼 쓸모없는 우리 인생을 포도주와 같은 값진 인생으로 변화시켜주신 주님의 은혜를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 찬양, 영광을 돌려드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처럼 이제는 모든 자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의 이 반전시키시는 역사의 도구로 쓰임 받는 삶을 또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우리가 바울의 변화를 통해서 생각해야 하는 것은 바울의 변화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로의 변화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핍박자에서 복음 증거자로의 변화입니다. 단순히 핍박자에서 그 도를 믿는 자로 변화된 것이 아니라, 그 도를 전하는 자로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소명인의 인생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보았던 것처럼 바울이 다메섹에서 회심할 때에는 구원만 받은 것이 아니라 소명도 함께 동시에 받은 것이었습니다. 16절에 보면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바울을 구원하시고 부르신 것입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흔히 소명을 생각할 때는, 일단 구원받고 난 뒤에 또 다른 특별한 은혜를 통해서 소명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회심 사건에서 보는 것처럼 사실 소명은 우리가 구원받을 때 동시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바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단순히 죄와 심판에서 구원하시기만을 위해서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죄와 심판에서의 구원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어떤 해야 할 일을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서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일꾼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소명 없는 신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주의 종만 소명 받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자가 구원받을 때 소명도 같이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소명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인데,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일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교회를 신약성경이 말하는 참된 교회로 세워가는 일입니다. 그것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로서 자신에게 맡겨진 모든 임무들(교회나 직장이나 학교에서나 가정에서나)을 성실히 수행하고, 모든 상황에서 우리의 선행으로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며,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인데)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가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소명입니다. 우리는 이 소명을 구원과 더불어 부여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이제 예수님 믿고 구원받았으면 그걸로 끝”이 아니라, 도리어 그것을 시작으로 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따라 충성을 다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야 할 변화는 단순히 소극적으로 죄 짓는 삶에서 죄 안 짓는 삶으로의 변화가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소명을 따라 여러 가지 신앙의 의무들을 감당해 가는 데까지, 특히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데까지 변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바울이 핍박자에서 복음증거자로 변화된 것처럼, 복음 증거자로서의 소명인의 삶으로까지 변화되었습니까? 우리 자신을 한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라고 한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그 소명을 따라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삶을 살기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소명을 따라 살아가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충만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세 번째로 생각해야 할 것은 바울에게 주어진 소명에는 고난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린다’는 동사가 미완료형으로 되어 있어서 계속적인 의미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계속적으로 바울에 관한 새로운 소식을 듣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소식들을 들었을 것입니다. 먼 이방 땅에 바울이 복음을 증거 했고, 거기에 교회가 새로이 개척되었다는 소식도 들었을 것이고, 또 바울이 복음 증거함으로 인해서 여러 가지 고난과 환란을 당했다는 소식들도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 우리가 세 번째로 생각해야 할 포인트입니다. 이를테면, 이전에는 복음을 대적하고 핍박하는 자였는데, 이제는 그 복음을 증거하는 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복음 전함으로 인해서 자신이 핍박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고난이라고 하는 주제가 바울의 소명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13)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14)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15)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16)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행 9:13-16)

 

바울이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했는데, 이제 하나님께서 그것을 도로 갚아주시겠다는 것입니다(표현이, 뉘앙스가 조금 이상합니다만). 내 이름을 위해서 얼마나 해를 받아야 할지를 그에게 보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바울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9)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고전 4:9, 13)

 

이런 것을 보면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철저하게 바울을 고난당하게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하나님의 복수입니까? “너 나를 핍박했지, 너도 한번 당해봐라” 이겁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바울에게 고난을 주실 때는 사실은 굉장히 깊은 의미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울에게 고난을 주실 때는 고난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또 무엇을 주십니까? 위로와 은혜를 넘치게 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고난을 능히 이겨내도록 하셨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고난은 “하나님이 나에게 복수하시는 것이다”라는 개념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신 은혜다”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난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고난 속에서 더욱 주님을 의지하게 되었고, 고난 속에서 주님의 한량없는 위로와 은혜를 체험하였으며, 고난당함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함께 참예하고 부활의 능력에도 참예하였고, 고난과 약함과 어려움 속에서 도리어 하나님의 강하신 능력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도리어 고난예찬론가가 되었습니다.

 

(9)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10)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9-10)

 

바울은 고난 속에서 도리어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난다는 것을 깨닫고서 고난 예찬론가가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경건의 능력, 하나님의 나라의 능력은 고난이라는 밭에서만 자라나고 꽃을 피운다는 것입니다. 모든 경건의 능력과 담대함과 그 신비가 다 어디에서 비롯되느냐 하면 고난 받는 삶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떻게 말하느냐 하면, 아까 읽었던 고전 4장 말씀의 16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경건의 비밀은 고난에 담겨 있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에게 바울은 너희들도 나처럼 고난 받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신 말씀은 사도 바울에게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심히 부담이 되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것은 이제 행복하게 이 세상에서의 내 꿈을 이루며, 편안하고 안일한 삶을 살기 위해서, 소위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바울처럼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이 세상에서 얼마나 해를 당해야 하는지를 점차로 깨달아 가는 삶을 살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고난의 삶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고난의 삶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복음의 능력을 드러내고 거룩하고 경건하고 성화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 바울을 본받고 싶지 않습니까? 바울처럼 살고 싶지 않습니까? 그 복음에 대한 열정과 뜨거움, 주님에 대한 사랑과 충성심, 그의 경건함과 담대함을 본받고 싶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바울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따라 살아감으로써 고난 받는 삶으로 뛰어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소명을 따라 살면 반드시 고난이 찾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희생해야 하고, 헌신해야 하고 포기해야 하고,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멸시와 핍박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 가지 곤경과 어려움에 처해야 하고, 건강을 잃을 수도 있으며,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소명을 따라 사는 자들이 당하게 되는 고난입니다. 그래서 그 길을 좁고 협착해서 찾는 이가 적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길만이 생명의 길이요, 이 길만이 영생의 길이며 영광의 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소명을 따라 고난 받는 삶을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고난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나라를 상급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길을 버리고 이 세상의 행복을 추구하는 넓은 길, 편한 길을 따라가면 반드시 멸망당하고 지옥 심판을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것들을 생각할 때, 희생하는 것, 헌신하는 것 아까워하거나, 여러 가지 곤경과 핍박과 어려움 당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바울처럼 그 부르심의 상급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그 푯대를 향해 전진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제가 이렇게 말해도 선택 받은 자들만이 이 약속을 굳게 믿고 나아갈 것이고, 택함 받지 못한 자들은 망설이다가 결국 세상의 행복을 좇아 살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그저 그 길을 가고 싶다고 해서 그냥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없이는 결코 이 길을 갈 수 없습니다. 바울처럼 오직 주님의 은혜에 사로잡힌 자들만이, 불가항력적인 변화의 은혜를 경험한 자들만이, 오직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이 세상에서 주님의 이름을 위해 해를 당하는 삶을 살 수 있고, 또 그러한 자들이 영광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 자신을 돌아보십시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바울처럼 소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이런 고난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소명을 져버리고, 고난을 피해서 이 세상의 행복과 편안함과 안일함을 좇아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각자가 우리 자신을 깊이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께서 주신 소명이 무엇인지 알게 하여 주시고, 장차 우리에게 주실 영광의 기업의 풍성이 어떠한지를 알게 하여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을 소망하지 않고,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핍박자에서 복음증거자로 변화된 바울처럼, 이 세상에서 오직 소명을 감당하기 위해 고난을 인내하며 감당해 가는 우리 모든 한결 지체들이 되게 하여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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