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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성경본문 갈 2:11-16
성경본문내용 (11)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12)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13)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14)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15)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16)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강설날짜 2011-07-27

2011년 7월 27일 한결교회 수요모임 강설

갈라디아서 제10강

 

복음의 진리를 따라

 

말씀 : 갈 2:11-16

 

오늘은 안디옥 교회에서 일어났던 다소 충격적일 수 있는 사건을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이 베드로는 책망하는 사건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12사도들 중에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베드로를, 바울이, 온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책망하고 비난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은 뉴스로 치면 속보로 알려야 하는 아주 특종 감 같은 사건입니다.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며 사도로 선택받은 12제자 중에 수제자인 베드로를 예수님을 한 번도 보지도 못하고, 과거에는 도리어 교회를 핍박했고, 어떻게 하다가 회심해서 이방인 선교 일에 뛰어든 사람이 책망했다... 이런 기가 막힌 일이 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주 충격적인 사건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바울이 이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자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앞 단락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사도권과 복음의 권위가 예루살렘 사도들보다 결코 열등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무슨 내용으로 베드로를 책망했든지 간에 일단 베드로를 책망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바울의 사도권이 베드로의 사도권보다 결코 열등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계속해서 얘기했던 것인데, 오늘 본문은 어떻게 보면 그런 이야기들의 하이라이트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나의 사도권과 복음은 예루살렘 사도들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이야기를 단순히 자신의 사도권과 복음을 변호하기만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건을 토대로 해서 바울은 이제 이신칭의 복음을 천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 사건의 핵심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느냐, 아니면 행함으로 의롭게 되느냐 하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물론 표면적으로 보면 베드로가 이방인 신자들과 함께 식사하다가 야고보로부터 어떤 이들이 왔을 때, 할례자들을 두려워해서 이방인 신자들과의 식사교제를 멈추고 물러갔다는 것이,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느냐 행함으로 의롭게 되느냐 하는 내용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고 의문이 들 수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초대교회의 상황을 생각해볼 때, 과연 이 문제가 복음의 본질적인 문제임을 보게 됩니다. 이것을 확인하는 것이 우리가 오늘 본문을 생각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과거 구약시대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인과 함부로 교제를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특히 교제하는 일의 대표적인 것이 무슨 식사를 한다든지, 아니면 이방인 여자와 성관계를 맺는다든지 하는 일을 결코 해서는 안 되는 금지된 일이었습니다. 물론 이방인은 무조건 안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이방인들이 유대교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고 할례를 받으면 얼마든지 유대 공동체에 받아들여져서 유대인과 교제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할례를 받지 않고 모세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이방인들은 결코 유대인들과 상종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율법이 명하는 바이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입니다. 이스라엘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방인들과 철저하게 구별되고 구분되어야 했습니다. 다윗이 이방인을 말할 때 뭐라고 표현합니까?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에 대한 경멸이 그 말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 대해서 가졌던 생각입니다. 이방인들은 부정하다는 생각은 사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입니다. 율법이, 특별히 음식법이 그것을 말합니다.


레위기 11장을 보면 음식법이 나옵니다. (11장이니깐 일명 젓가락 장이라고 말합니다.) 이 음식법에 보면 어떤 동물은 정하기 때문에 먹어도 되고, 어떤 동물은 부정하기 때문에 먹으면 안 된다고 하는 규정들이 길게 열거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음식법 중에서 기억나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돼지 - 굽이 갈라졌으나 되새김질을 못하기 때문에 못 먹음, 토끼 - 되새김질은 하지만, 굽이 갈라져 있지 않기 때문에 못 먹음, 물고기 중에서는 비늘이 없는 장어 종류나, 미꾸라지, 메기 다 못 먹는 것) 이런 것들은 부정한 것이고 가증한 것이기 때문에 먹어서도 안 되고, 그 시체를 만져서도 안 되는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음식법을 주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방인과 철저하게 구별시키신 것입니다. 이 사람이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바로 같이 식사해 보면 명확해진다는 것입니다. 식사를 할 때 자꾸 무언가를 가리고 안 먹고 하는 것을 보면 이 사람은 틀림없는 유대인인 것입니다. 이렇게 구별시키기 위해서 음식법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음식법에서 정한 음식들과 부정한 음식들은 사실 무엇을 상징하느냐 하면, 유대인과 이방인을 각각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거룩한 백성으로 이방인들을 부정한 백성으로 구별하셨듯이 음식도 그렇게 정한 것과 부정한 것으로 구별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별을 하나님께서 언제 철폐하시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이 모든 구별을 철폐하셨습니다. 아니 결국에는 철폐할 것을 왜 구별하셨는가 생각도 들고, 처음부터 유대인 이방인 구분 없이 구원해가시면 안되는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여기에는 사실 깊은 구속사적인 신비가 있습니다. 그것은 작전상 후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먼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셔야만 하셨던 것입니다. 먼저 유대인들을 이방인과 구별시켜서 그들을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의 나라로 부르시고,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을 이 세상에 계시하심으로써 이방인들을 구원코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제사장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실패하였습니다. 결국 율법의 저주를 받아 심판을 받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구속사역은 실패한 것이냐,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록 이스라엘은 거룩한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은 실패했지만,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심판을 하나님께서는 도로 역이용하셔서 이스라엘을 율법의 저주의 본보기로서 사용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온 인류의 실패이며, 따라서 온 인류를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 있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스라엘이 실패했던 그 대제사장의 역할을 온전히 감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온 세상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율법의 저주를 친히 담당하심으로써 인류를 율법에서 구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끝장났기 때문에, 이제 모든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별이 철폐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구속사의 신비인데, 갈라디아서를 계속 살펴 감을 통해서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 배워갈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기록과 해결책을 기록해 놓은 신약성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당시에는 신약성경이 없었고, 아직 이러한 구속사적인 신비를 깨달은 자가 거의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이방인들을 부정하고 가증한 백성이라고 생각했고, 그들이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할뿐만 아니라 할례를 받아서 먼저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유대교와 기독교는 별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가 유대교가 아니라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또한 자신들의 유대교로 입문하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도들의 생각을 깨뜨리시기 위해 환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 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보자기 환상을 보여주시면서, 보자기에 온갖 부정한 짐승들과 새와 곤충들을 먹으라고 하시는데, 베드로가 뭐라고 대답합니까? 14절을 보십시오. “이런 부정하고 속된 것들을 어려서부터 먹지 아니했다”고 거절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15절.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이제 음식법이 폐해졌으니 아무 동물이나 다 먹어도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음식법에서 부정한 음식들이 상징하는 바인 이방인들을 속되다거나, 부정하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조금 있다가 이방인 고넬료를 만날 것인데, 부정한 이방인이라고 그를 물리치지 말고, 이방인 고넬료와 아무런 장벽 없이 교제하고 또 그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28절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28)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행 10:28)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복음을 전했더니, 성령이 고넬료에게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45)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46)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47)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행 10:45-47)

 

놀랬다는 것은 베드로의 기대를 완전히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생각에는 이 사람이 복음전함을 받고, 그리고 할례를 받고나서 유대인이 된 후에야 성령을 받겠거니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곧바로 복음을 믿었을 때 성령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했다는 것은 그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망설임 없이 곧바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생각이 많이 바뀌었을 것입니다. 이방인들도 유대인이 될 필요 없이 오직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곧바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직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행 11장 2-3절을 보면 베드로를 마구 비판합니다.

 

(2)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힐난하여(3)가로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행 11:2-3)

 

유대 신자들은 왜 함부로 이방인들과 식사교제를 나누었냐면서 비판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높은 장벽을 실감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그 장벽을 다 무너뜨리셨는데, 아직도 그들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후에 베드로가 잘 설득해서 그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고치기는 하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유대 신자들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예수님도 믿어야 할 뿐만 아니라, 할례를 받고 모세 율법을 지켜야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아야 자신들의 공동체 내에 받아들여지고, 그리하여야 비로소 유대 신자들과 교제할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에 반하는 다른 복음인 것이고, 거짓교사들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래서 행 15장에 보면, 이런 무리들의 본격적인 활동에 대해 설명합니다.

 

(1)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행 15:1)
(5)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행 15:5)

 

이렇게 초대교회는 이 문제로 아주 홍역을 앓았습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예루살렘 공의회를 통해서 공식적으로 이 문제가 해결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전까지 교회는 이방인 신자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그리고 이방인 신자들이 할례와 모세 율법의 순종 없이 유대인 신자와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이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는 당분간 이러한 다른복음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도 바로 이러한 예루살렘 공의회 이전이라는 배경 하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베드로는 야고보로부터 보냄을 받은 어떤 무리들이 오기 전까지 이방인 신자들과 스스럼없이 식사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식사 교제를 나누었다는 것은 이방인 신자들도 자신과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할례를 받지 않았고, 모세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들은 자신과 동일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식사 교제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는 확실히 복음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고, 그 복음의 진리를 따라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야고보로부터 온 어떤 사람들이 찾아왔을 때부터였습니다. 베드로는 이들이 왔을 때,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이방인들과의 식사교제를 멈추고 물러갔습니다.


도대체 이 “야고보로부터 온 어떤 사람들”이 누구이고, 왜 베드로가 야고보로부터 온 이 사람들을 두려워했는지, 그리고 할례자들을 두려워했다고 했는데, 이 할례자가 이 야고보로부터 온 어떤 사람들과 동일인물인지, 아니면 다른 자들을 말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본문은 아무런 단서도 주지 않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 점에 있어서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합니다. 너무나 의견이 다양해서 어떻게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의 의견 중에 그나마 제가 볼 때 가장 타당한 해석을 하나만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말하는 것이 다 틀린 얘기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일단 이 ‘야고보로부터 온 사람들’이 안디옥 교회의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야고보가 직접 보낸 파견단일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러면 야고보가 왜 그들을 안디옥 교회에 보내었는가? 생각할 때, 아마도 야고보는 안디옥 교회 내에서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가 어떻게 교제 나누고 어떻게 함께 지내는지 궁금해 했기 때문에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서 보낸 것으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야고보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의 심기를 건드릴 만한 행동을 안디옥 교회 공동체가 안 하기를 바라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믿지 않는 유대인 한 사람이라도 얻기 위해서 교회가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기를 바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공의회 때 어떻게 합니까?

 

(19)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 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20)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21)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행 15:19-21)

 

야고보는 율법의 행함이 아닌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이신칭의 복음에는 동의했지만, 그것이 너무 율법을 무시하는 태도로 나타나서 유대인들의 반감을 사는 것에 대해서는 우려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몇 가지 조항을 부탁해서 쓸데없이 유대인들의 반감을 사지 말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야고보는 15:19-21에서 자신의 동족을 구원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바울에게 부탁합니다.

 

(20)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21)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 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또 규모를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저희가 들었도다(22)그러면 어찌할꼬 저희가 필연 그대의 온 것을 들으리니(23)우리의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24)저희를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저희를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게 대하여 들은 것이 헛된 것이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25)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행 21:20-25)

 

야고보는 어찌하든지 갓 개종한 유대인들이 바울이 온 것을 인해서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바울에게 율법의 몇 가지 의식법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달라고 요청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 신자들은 여전히 율법에 열심이 있었고, 율법 없는 복음 할례 없는 복음을 전하는 바울에 대해서 반감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가 바울을 영접한 것을 그들이 듣게 되었을 때에, 자칫 잘못하면 교회 내에 큰 혼란과 분쟁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 유대인 신자들을 위해서 바울로 하여금 율법을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도 이러한 야고보의 요청의 응하여서 자신이 율법 없는 자이나, 율법 있는 자를 얻기 위해서 율법 아래 있는 것처럼 행동하였습니다. 이렇게 야고보는 비록 이신칭의 복음을 믿었던 자였지만, 기독교가 동족 유대인들에게 반감을 사지 않도록 하기 위해 늘 조심스럽게 행동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가 안디옥 교회에 베드로를 보낸 후에 또 다시 다른 사람들을 보낸 이유는 혹시 안디옥 교회가 유대인들로부터 비판과 반대를 받을 행동을 하지 않을까 우려하여 보낸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야고보의 선한 의도와는 달리 많은 할례자들과 유대인 신자들은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고 모세율법을 지켜야 구원받는다는 강경한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라고 할 때, 그 배경에는 수많은 율법에 열심 있는 유대인 신자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강경파에 속하는 할례자들의 무언의 압박이 그 속에 숨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야고보로부터 온 어떤 이들이 안디옥 교회에 왔을 때, 순간적으로 할례자들과의 충돌을 두려워하여 이방인과의 식사 교제를 멈추고 물러섰던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자신이 믿고 있던 이신칭의 복음을 부정하고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의도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앞에 있는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 믿고 있는 바와 다르게 행동했던 것입니다. 마치 주님을 정말 사랑했지만, 막상 죽음의 위협 앞에서 주를 부인했던 과거의 경험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베드로의 이 행동에 대해서 외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베드로는 혹시 야고보에게서 온 자들이 예루살렘 교회에 가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나누었다고 보고하고, 그래서 유대인들로부터 더 거센 반발과 핍박을 받게 될 것을 두려워해서 그는 복음의 진리를 따라 행하지 않고 외식을 행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그 순간 자신의 안위와 유익을 위해서 외식을 행하고 말았습니다. 12절에 ‘떠났다’는 표현은 스스로 구별했다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나누고 구별할 때 쓰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스스로를 이방인 신자들과 구별시켰습니다. 그리고 ‘떠났다’, ‘물러났다’는 두 동사 모두 미완료 시제로 되어 있어서, 그들이 온 즉시로 식사 교제를 멈추었다는 것이 아니고 점차로 교묘하게 멈추었다는 것입니다. 능구렁이 빠져나가듯이, 멈추는 듯, 안 멈추는 듯, 하면서 살며시 교묘하게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베드로의 행동에 의해서 남은 유대인들도 베드로를 따라 외식을 행했고, 심지어는 바나바까지 이 외식에 동참했습니다. 이 상황을 상상 속에서 한번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이제까지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가 자유롭고 은혜로 교제 나누며 식사하던 그 평화가, 베드로의 물러감으로 인해서 갑자기 깨어지고, 분위기는 어수선해지고, 유대인 신자들이 다 빠져나가고 바나바도 빠져나가고, 이방인 신자들은 이 상황을 어리벙벙하게 지켜보고 있고... 참으로 안디옥 교회는 베드로 한 사람의 행동 때문에 이방인 신자와 유대인 신자로 완전히 나누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한 몸이 되게 하신 것을 베드로의 행동이 둘로 나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할례자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서 외식을 행하게 되었지만, 그 행동의 결과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스스로 다른 복음을 동의한 꼴이 되었고, 복음의 진리의 반대편에 서게 된 꼴이 되었습니다. 이방인과 식탁교제를 할 수 없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것이고, 그들이 할례와 모세 율법을 지키기 전까지는 식탁교제 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이나 다름없는 행동이었습니다. 즉 베드로의 행동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율법의 행함과 상관없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 복음을 심각하게 훼손한 행동이었습니다. 또한 자신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함께 외식을 행했기 때문에 그 파급효과가 더욱 컸습니다. 이처럼 교회 지도자의 잘못은 교회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베드로 한 사람의 외식은 그 한 사람의 외식으로 끝나지 않고, 온 교회로 하여금 다른 복음을 좇게 만들고, 교회를 반으로 갈라버렸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러한 베드로의 행동의 위험성과 그 결과들을 단번에 간파하였고, 곧바로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비난을 한 것입니다. 무엇이라고 비난합니까? “(14)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갈 2:14)


이것은 한 마디로 말하면, “너도 율법을 다 못 지키면서, 왜 이방인들에게는 율법을 행하라고 강요하느냐, 너도 율법없는 이방인들처럼 살면서 어찌하여 이방인들을 할례와 모세 율법을 행하게 해서 유대인답게 만들려고 하느냐”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오직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고 율법에서 면제된다고 말하면서 이방인들에게는 왜 본인도 지지 않는 율법의 무거운 멍에를 지우려고 하느냐”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아마 이 책망의 말을 듣고, 아차 싶었을 것입니다. 그 이후의 내용은 본문에 나타나지 않지만, 베드로는 바울의 책망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였을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이후에 예루살렘 공의회에 있을 때 한 말에서 드러납니다.

 

(10)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11)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행 15:10-11)

 

바울이 했던 말을 거의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한 이 율법의 무거운 멍에를 왜 이방인들에게 강요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이나 유대인들이나 다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이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바로 이신칭의 복음을 말합니다.

 

(15)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16)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5-16)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초대교회 당시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는, 이신칭의 복음에 대해서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그러나 정신 차리지 않으면 우리도 베드로처럼 복음의 진리는 알지만, 복음의 진리를 따라 살지 않고 외식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베드로도, 어떤 상황이 닥치니깐 경거망동하게 된다는 것은 어느 누구라도 이러한 잘못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안디옥 교회와 같은 상황이 재현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슷한 상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자신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목사님이 만일 다른 복음을 증거하게 될 때에, 많은 사람들이 그 가르침의 오류를 분별하지 못하고 내가 사랑하는 존경하는 목사님이기 때문에 그냥 그대로 따라가는 수가 생깁니다. 마치 바나바가 베드로를 따라 외식하였듯이, 그렇게 될 위험이 우리에게 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목사님을 존경은 하되, 의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의지하면 늘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존경하고 우리는 말씀을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복음이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았다고 하는 확고한 사실위에 있었을 때, 그는 베드로의 위선에 동참하지 않고 도리어 분별하며 복음의 진리를 위해 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복음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어렴풋하게, 흐릿하게 알지 말고, 복음의 진리를 확실하게 알고, 그 복음의 진리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람들의 견해에 휩쓸리지 않고, 복음의 본질을 건드리는 사단의 교묘한 공격들을 분별하여서 그것에 한 치의 타협도 없이 곧바로 전투적인 자세를 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복음의 진리가 무엇인지 확고하게 깨달아 알고 있습니까? 그냥 단순하게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오직 은혜로 구원 받는다 막연하게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그 복음의 진수를 진정으로 체험적으로 피부에 와 닿게 확실하게 깨닫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복음의 진리를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자유의 정체가 무엇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인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 주부터 이것을 자세히 배울 텐데 주님께서 우리로 복음의 진리가 무엇인지 더욱 깊이 깨달아가게 하시고, 이 복음의 진리 위에 굳게 서서 행하는 우리게 되게 하여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이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우리가 복음의 진리위에 굳게 서서, 그 진리를 따라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에 언제나 괴리를 느끼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베드로도 복음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았지만, 그 복음의 진리위에 굳게 서있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상황에 따라 좌지우지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 모르는 신자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에게는 베드로가 두려워했던 할례자들보다 더 무서운 우리 내면의 교만과 정욕, 그리고 시시때때로 오는 사단의 공격이 있는데, 우리가 복음의 진리위에 굳게 서있지 않으면, 상황에 따라, 시시때때로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다른복음을 좇아 살아갈 위험성이 우리에게 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자주, 이러한 은혜의 복음, 이신칭의 복음 위에 서있지 못할 때가 많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행함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유지하려고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지금도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으로 서 있도록 지탱하고 있는 것은 나의 행위나, 나의 신실함이나, 나의 업적이나, 나의 믿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믿어야 하고, 신실해야 하고, 주님을 위해 헌신 봉사 충성해야 하지만, 그러한 우리의 행위가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서있도록 지탱해주는 근거는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계속해서 제가 강조하는 것이지만, 또 이 얘기를 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너무나 자주 어떻게 하기 때문입니까? 우리가 연약하여 죄를 범할 때,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을 자격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고, 다시금 그 은혜와 사랑을 받는 자가 되기 위해서, 그러한 꼬투리를 내가 갖추기 위해 자신의 행함에 부단히 매달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조건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는 결코 행함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을 갖출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사랑받고,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서 있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신 주권적인 뜻과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율법의 저주를 친히 담당하신 그 은혜의 공로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율법을 행함에 있지 않고 오직 은혜로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십계명 배우고, 하나님의 율법을 배우고 실천해야 된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그것을 못 지킨다고 해서 우리의 구원이 취소되고 우리의 하나님의 백성이 됨이라고 하는 신분이 없어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오직 은혜로, 변함없고 무조건적인 사랑과 은혜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하는 이 복음의 진리를 우리가 알뿐만 아니라, 날마다 이 은혜를 알고, 그 은혜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행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바울처럼 진리위에 굳게 서고, 진리를 그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고, 내 자신과도 타협하지 않고, 날마다 복음의 진리 위에 굳게 서서 복음의 진리를 따라 행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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