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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성경본문 갈 2:15-21
성경본문내용 (15)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16)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17)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18)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19)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1)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강설날짜 2011-08-03

2011년 8월 3일 한결교회 수요강설

갈라디아서 제11강

 

믿음으로 의롭게 됨

 

말씀 : 갈 2:15-21

서울에 지하철을 가면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띠를 두루고 노방전도하는 사람들을 가끔씩 볼 수 있습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은 한국교회가 전통적으로 강조한 복음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간다”는 것인데, 기독교 복음을 가장 분명하게 그리고 가장 단호하게 표현한 것이기는 하지만, 기독교 신앙의 모든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시급한 내용만 담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믿고 봐야 된다는 것이죠. 물론 그것은 사실입니다. 믿고 봐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에서 다루고 있는 이신칭의 교리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천당 얘기가 아닙니다. 단순히 지옥형벌을 면하고,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더 강조되고 있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바로 이러한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주고 있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라고 하는 이신칭의 교리는 분명 갈라디아서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이것은 자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뿐 아니라, 이렇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신자가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자유를 누리며 살아갈 것인가 하는 성화의 삶에 관한 문제도 오늘 본문이 가르쳐주는 중요한 핵심 메시지인 것입니다. 칭의와 성화가 어떤 관계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이 점이 갈라디아서 전체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이 갈라디아서 전체 본문 중에서 사실은 가장 중요한 본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오늘 본문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관건이 되는 문제는 15절에서 18절까지의 내용을 문맥에 맞게 바르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특히 이 17-18절은 앞의 안디옥 사건과 함께 갈라디아서에서 가장 난해한 구절로 정평이 나 있는 구절입니다. 본문의 문맥을 잘 생각하면서 해석해야 합니다.


15절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이 말씀은 안디옥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안디옥 사건은 우리가 지난주에 배웠던 것처럼 베드로가 야고보로부터 온 할례자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방인 신자들과의 식탁교제를 갑자기 멈추면서 교회가 이방인 신자와 유대인 신자로 반으로 나누어져버린 사건을 말합니다. 결국 베드로와 그를 따라 외식을 행한 유대인 신자들의 행동은 이방 신자들을 함께 교제할 수 없는 이방죄인으로 취급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서,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했던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이러한 안디옥 사건을 배경으로 해서 15절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일단 바울은 유대 신자들의 생각을 먼저 인정하고서 논의를 시작합니다. “맞다. 우리는(여기서 우리는 베드로와 바울 자신을 포함한 모든 유대인 신자들을 말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크게 특권을 입은 유대인들이지, 이방인들과 같은 잡스러운 죄인들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거룩한 백성이지만, 이방인들은 부정한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점차로 “이방인=죄인”이라는 공식으로 생각이 굳혀지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맞다. 우리는 유대인이지, 이방 죄인이 아니다”하면서 일단 그들의 생각을 인정해줍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16절의 말씀입니다. 16절에 “(그러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의 “우리”도 앞 절의 “우리”와 동일하게 바울 자신과 베드로를 포함한 모든 유대인 신자들을 말합니다. 이 구절의 포인트는 “우리도”라는 문구입니다. 이방인들만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 유대인들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16절 뒷부분,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특권적 위치에 있는 유대인들이라 하더라도 그들도 결국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100%를 요구합니다. 율법의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않으면 율법의 저주가 있다고 했습니다(갈 3:10). 그리고 율법은 마음의 동기까지 문제 삼습니다. 형제를 미워하기만 해도,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기만 해도 저주를 당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철저한 율법의 요구 앞에서 타락한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도리어 율법은 온 인류를 무차별적으로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 아래 가두어 버렸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유대인들도 이방죄인들도 똑같이 하나님의 진노와 천벌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만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도 예수님 믿어 은혜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좀 더 부연설명을 드리자면) 예를 들어서, 병원에서 의사가 어떤 두 사람에게 똑같은 처방을 내렸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러면 그것이 의미하는바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둘 다 똑같은 병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뿐만 아니라 유대인들도 똑같이 예수님을 믿어야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면 그것은 유대인들도 이방죄인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죄인이라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유대인 신자들이 자신들은 뭔가 특별한 민족인 것처럼 자만에 사로잡혀서 이방인 신자들을 교제 하지 못할 죄인들로 취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똑같이 율법 앞에서 죄인이고, 똑같이 은혜로 구원받은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이지, 더 이상 율법을 행하느냐 행하지 않느냐 하는 잣대를 갖다 대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하는 얘기가 바로 이 얘기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러한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가 분리되었던 안디옥 사건을 통해서 바로 기독교 복음에서 너무나 중요한 “믿음으로 의롭게 됨”이라고 하는 이신칭의 교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눈여겨 볼 점은 이 16절에서 처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단어, 줄여서 ‘칭의’라는 단어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칭의’라는 단어는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칭의’라는 단어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구원받느냐 받지 못하느냐가 좌우됩니다. 그만큼 중요한 단어입니다.


이 ‘칭의’라는 단어는 법정에서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어떤 법의 기준에 의해서 이 사람이 옳고, 법을 어긴 죄가 없다고 판결 내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칭의’의 반대말은 ‘정죄하다, 유죄 판결을 내리다’입니다. 그래서 칭의는 법을 전제합니다. 율법을 말합니다. 그리고 칭의는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이지, 의롭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 가톨릭은 그 후자로 이해합니다. 신자가 예수님을 믿었을 때, 정말 의로운 성품의 사람으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의롭게 살지 못하면, 그것은 칭의를 잃어버리는 것이 되고, 열심히 순종하면 칭의를 유지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칭의가 사람의 행위에 따라서 좌지우지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생 죽을 때까지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고, 늘 ‘혹시나 구원받지 못하면 어떡하나’ 하며 가슴조리면서 행위에 매달리는 신앙 생활하는 것입니다. 칭의를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결국 행위 구원론으로 빠지는 것이고, 그것은 예수님을 안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그렇게 믿고 죽으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로마가톨릭은 이단입니다. 우리는 칭의를 결코 그런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칭의는 의롭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이 아니라, “나 밖에서” “하늘 법정”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하나님께서 주권적이고 절대적인 권위로 그렇게 선언하시기 때문에 그것은 영원불변하는 선언이 됩니다. 그러므로 칭의는 우리의 행위나 우리의 영적인 상태에 따라서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믿어 의롭다 함을 받은 자라고 한다면, 지금도 여전히 내가 내 자신을 볼 때는 더럽고 추한 죄인이지만, 그러나 은혜로 의롭다고 선언하신 그 주님의 선언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흔들릴 수 없는 든든한 반석위에 있다는 것을 믿고 확신하고, 그 사실을 의지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로 구원해주신 것을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때때로 우리가 죄를 범하게 될 때에, 우리는 이러한 확신을 잃어버리고, 의심하게 됩니다만, 그때도 우리는 그 조건 없는 은혜와 사랑을 바라보면서 다시금 회개하고 일어나서, 그 은혜를 의지하고, 그 은혜 안에서, 그 은혜를 누리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하기 쉽냐면 은혜를 의지하기보다 자꾸 우리의 행함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가 율법의 행함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16절에 보면 이 단어가 여러 번 반복해서 나오는데, 이 “율법의 행함”이라는 말은 인간 스스로의 행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보고자 하는 인간의 모든 행위와 노력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류는 모두다 본성적으로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게 됨을 추구합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타락한 본성입니다. 그래야 자기를 내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만큼 괜찮은 사람이다 하는 나타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인정과 영광의 욕구를 만족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본성적으로 행위 구원론으로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가 다 인간의 선행을 통해서 구원받는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세상의 종교들이 얼마나 도덕을 말하고 윤리를 강조합니까? “착하게 살아야 한다, 선을 행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냥 들으면 좋은 말 같지만, 그러나 자세히 보면 거기에 자신을 내세우려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인류는 이렇게 종교나 인간의 선행이나 도덕이나 윤리로 자신을 치장하고, 그래서 구원이라는 것을 스스로의 노력으로 얻어 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증명하듯이 이러한 인간의 모든 노력은 다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의 완전한 도덕법의 기준을 만족시킨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결코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거나, 의롭다 함을 받거나,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획득하거나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되느냐 하면, 오직 믿음으로,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공로로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율법의 저주를 당하심으로써, 우리 죄의 값을 다 치루시고, 또 우리 대신 율법을 온전히 순종하심으로써 그리고 그 자신의 의로움을 우리의 의로움으로 여겨주심으로써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오직 예수님의 공로로, 은혜로 그렇게 선언해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은혜를 아무에게나 주시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믿는 자에게만 주십니다. 그런데 믿음도 나에게서 생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고 은혜입니다. 그러니깐 우리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내 행위가 거기 낄 자리가 없습니다.


내 행위와 상관없이, 무조건적인 은혜로 우리를 구원해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그 은혜를 늘 감사하며 찬양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어떻습니까? 감사와 찬양이 넘칩니까? 별로 감동이 없잖아요. 그냥 무덤덤할 때가 더 많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타락한 인간은 워낙 행위구원론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은혜를 받아도 그것을 누릴 줄을 모릅니다.


비유컨대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죄인인 우리에게 너무나 아름답고 멋진 “구원이라고 하는 승용차”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로 인해서, 우리는 다 놀라고 감사하고 기뻐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차를 날마다 닦고, 또 사람들에게 자기 차를 자랑해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 승용차를 탈 생각을 안 하고 손으로 밀어서 갈 길을 가는 것입니다. 길 가는 사람이 “왜 차를 밀고 다닙니까?” 물어보면, “아버지께서 선물로 주신 것인데, 그 선물을 위해서 내가 밀기라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냥 차를 편하게 타고 다니는 것은 너무 염치가 없잖아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뭐라도 해야죠?”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많은 신자들의 영적인 상태입니다. 은혜가 너무 낯선 것이어서, 그것을 누릴 줄을 모르고, 처음 구원 받은 것은 은혜이지만, 그 이후는 자신의 행위에 달려있는 것처럼 생각하고서 그렇게 소위 차를 밀고 다니는 피곤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차를 밀고 다니면, 100미터도 못가서 지치고 맙니다. 그러나 그 차에 편안하게 앉아서, 그 차에 자신의 몸을 맡기면, 우리는 시속 100km로 달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누린다는 것은 스스로 의롭게 되려는 수고로운 삶을 내려놓는 것을 말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은혜와 사랑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끊임없이 우리의 행위에 매이면서 수고하는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는 값없이 조건 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도리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께 나아가서 이러한 나의 무거운 짐을 주님께 내어맡기고 주님 발밑에서 그저 편히 쉬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를 누리는 삶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 마음에는 죄인으로 인정되기를 싫어하는 교만과 자기를 내세우려는 욕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죄악된 본성과 우리는 날마다 싸워야 합니다. 성령님께 기도하고 그분을 의지해서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은혜 안에서 강하여지고, 비로소 경건의 능력을 나타내는 삶을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여기서 ‘죄인으로 나타난다’는 말을 신자가 회심한 이후에 실제로 죄 짓는 행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봅니다.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았는데, 실제로 의롭지 못하고 죄를 범하면서 살아간다면,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조장하시는 분이시냐? 결코 그럴 수 없다.”하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결국 의롭다 함을 받은 자는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말인데, 그러나 이것은 거의 틀린 해석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회심한 신자라도 죄를 범할 수 있고, 실제로 매일 죄를 범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을 바울 자신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구절의 “죄인으로 나타난다”는 동사의 시제가 부정과거형입니다. 과거에 한번 있었던 일을 말합니다. 만일 바울이 정말 그런 의미를 의도했다면 현재형을 썼을 것입니다(그리고 동사도 이 동사를 쓰지 않고 다른 동사를 썼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해석은 전체문맥과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한글 성경에는 ‘만일 우리가’라고 되어 있지만, 원어로 보면 ‘만일 우리도’라고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여기서의 ‘우리’가 바로 앞의 ‘우리’와 동일하게 바울 자신을 포함한 유대인 신자들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죄인’은 15절의 이방 죄인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적절합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종합해볼 때 이 구절은 아마도 바울의 복음에 대한 할례주의자들의 반박을 바울이 언급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죠.


“만일 우리가 바울 당신의 주장처럼 율법의 행함 없이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서, 율법을 도외시하다가, 결국 율법 없는 이방 죄인들과 똑같이 우리도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 아니냐? 그러면 결국 그리스도께서 죄의 일꾼이 되시는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들의 주장을 다시 부연설명을 하면 “율법을 무시하고, 할례도 안행하고, 이방죄인들하고 아무렇지 않게 식사도 하고, 그들과 어울리고, 그들처럼 모세 율법을 지키지 않고, 무시하고 살아가면, 결국 그것이 율법 없는 이방 죄인처럼 자기 마음대로 살도록, 마음껏 죄 짓고 살도록 조장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유대인 신자들은 바울의 율법 없는 복음을 신자는 율법을 행할 필요가 없다는 도덕률폐기론으로 오해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 복음에 대한 이러한 오해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닙니다. 바울이 가서 복음을 전하는 곳마다 사실은 유대인들로부터 늘 이런 식의 반대를 직면해야 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1-2) “율법의 행함이 아닌,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라고 말하면, 결국 사람들은 무슨 논리로 빠지게 되느냐 하면, “그러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열심을 내며 무엇 때문에 신앙생활을 할 필요가 있습니까? 마음껏 죄 지으며 마음대로 살아도 구원 받는 데는 지장 없는데, 그렇다면 누가 그렇게 애써가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하겠습니까?” 라는 의문과 반발심이 생깁니다.


그런데 역으로 생각해보면, 이런 반발이 나와야 기독교 복음을 제대로 설명한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복음을 제대로 설명했더니, 그것의 논리적 귀결은 그러면 이제 마음껏 죄 가운데 거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여러분 저의 강설을 듣고, 목사님의 강설을 듣고, “그러면 애써 신앙생활 할 필요가 무엇이 있냐?”하는 의문이나 반발심이 생겨야 합니다. 목사님 강설이 “구원파” 비슷하게, 도덕률폐기론 비슷하게 들려야 합니다. 그렇게 들려야 복음을 제대로 설명한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행함과는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긍휼로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이고 주권적인 하나님의 뜻과 사랑과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대신해서 죽어주신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가 그만큼 능히 우리를 구원하고도 남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십자가로 충분한 것입니다. 다른 조건을 더 제시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어야 하지만, 이후에 참된 행함도 따라와야만 최종적으로 구원 받는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이 실패했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질문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율법의 행함 없이도 구원받는다고 한다면 우리는 왜 신앙적인 열심을 내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노력해야 하는가? 왜 죄를 지으면 안 되는가? 왜 매일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며 고군분투해야 하는가? 우리는 생각할 필요나, 노력할 필요가 없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 나와야 합니다. 우리의 논리성에 의하면 당연히 복음에 대한 설명이, 이러한 무책임으로 귀결됩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는 그렇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바로 바울의 주장입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다는 것인지 본문을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17절 후반부부터 보겠습니다.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바울은 자신의 복음을 도덕률폐기론으로 오해하는 것에 대해서 결코 그럴 수 없다고 단호하게 부정합니다. 그리고 18절은 이런 말입니다.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서 율법을 도외시하는 것이 사람으로 방종과 방탕으로 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예수님께서 헐어버리셨던 율법을 다시금 세워서 그 율법 아래로 들어가는 것이야말로 스스로 범죄자로 입증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앞선 베드로의 위선의 행위를 은연중에 비판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신자가 다시금 율법 아래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를 1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문구가 사실은 19절에 있어야 합니다. 원문을 고려해서 19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율법에 의해서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 나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기 위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이해가 되는 듯하면서도, 잘 이해가 안 되는 아주 심오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선 바울 자신은 율법에 의해서 죽었다고 말합니다. 율법이 자기를 죽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사실은 충격적인 발언입니다. 유대인들은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율법을 가진 것을 대단한 특권으로 알았고, 그것이 자신들을 거룩한 백성으로 의로운 백성으로 만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율법 없는 이방인들을 부정한 죄인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말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도리어 우리를 정죄하고 우리에게 저주를 선고하는 것이고, 율법은 우리를 세우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죽이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바울 자신은 이러한 율법의 저주를 받아서 율법에 의하여 죽임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은 죽은 자를 더 이상 관여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은 이제 율법에서 자유하다는 것입니다. 아니 지금 바울은 펄펄 살아있는데, 이미 한번 죽었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그 이유가 후반부에 나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 복음의 핵심입니다. 주님이 나 대신 율법의 저주를 받으사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성령께서 비상하고 신비한 은혜로 우리를 그 2000년 전의 십자가 사건에 넣어주신 것입니다. 주님과 연합되어서, 이제 그분이 죽으실 때, 말하자면 나도 같이 죽은 것입니다. 그렇게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에서 온전히 자유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더 이상 정죄함이 없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여러분 우리 스스로를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율법주의적인 생각을 철저하게 배격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면서 살아야 구원받고, 그렇게 살지 못하면 심판받는다는 생각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에서 자유했다는 것을 늘 기억하면서 자유의 권리를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주님과 함께 죽었다”라고 하는 사실이 바로 앞에서 우리가 했던 질문들에 대한 답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조건과 자격이 없다는 것,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라는 것을 믿는 자가, 왜 그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을 수 없는지, 왜 신자가 도덕률폐기론으로 빠질 수 없는지, 그 이유가 바로 “우리가 주님과 함께 죽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죽었다라고 하는 신앙이 우리를 책임 있는 삶으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우리를 책임으로 이끄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여 나를 찾아내고 구원해내고, 당신의 자녀로 만들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버려 죽음의 자리까지 찾아오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아는 순간, 우리는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우리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와 사랑을 주님의 죽으심에 함께 참예함으로써 체험적으로 깨달아 알게 되었을 때, 그 은혜와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가만히 있을 수 없도록 우리를 감화한다는 것입니다.


개도 은혜를 받으면 갚는다고 했습니다. 이성 없는 짐승도 은혜에 반응합니다. 하물며 인간이 어떻게 은혜에 반응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정말 그 은혜를 알고도 가만히 있거나 그 은혜의 자유를 남용할 인격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배은망덕한 이유는 은혜를 알고서도 악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은혜를 (지식적으로는 알겠지만) 진정으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는 과거에는 알았지만, 지금은 그 은혜를 망각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사랑과 은혜의 힘은 놀라운 것입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여자들이 어떤 남자랑 결혼하느냐 하면, 자기를 사랑해주는 남자랑 결혼합니다. 남자는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하고, 여자는 자기를 사랑해주는 남자와 결혼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게 그것하고 뭐가 다른가 하는 생각도 드는데, 중요한 것은 불완전한 인간이라도 한 여자를 위해서 소위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식으로, 계속해서 사랑해주면, 그 여자는 그 남자에게 언젠가는 반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반항하고 싫어하다가도, 계속해서 남자가 자신을 희생하고 자신의 사랑을 자꾸 퍼주고 하면, 여자는 감동을 먹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진심은 늘 통하기 때문입니다. 인격은 은혜에 반응하는 존재입니다.


불완전한 인간의 사랑도 그러한데, 하나님의 완전하고 무한한 사랑과 은혜는 어떠하겠습니까?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무한하신 사랑과 은혜의 망망대해 앞에 인간은 반드시 감동을 받고 감화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그 인격이 은혜에 반응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가항력적인 은혜라고 말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인간으로 반응하게 하고, 그래서 신자의 믿음은 결국 순종으로, 감사로, 열심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 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20절은 아주 유명한 구절이고, 우리가 즐겨 읽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이 말씀 구절과 같은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고 물어보면 대부분이 “그렇게 살고 있다”고 대답을 잘 못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도 솔직히 그렇죠? 내 안에 주님이 사시는 것 같습니까? 아니면 내가 살고 있는 것 같습니까? 우리는 후자의 경우가 우리의 솔직한 모습이잖아요?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이 고백대로 살았습니다. 어떻게 바울이 그런 삶을 살 수 있을까 놀라워하면서 바울은 참 대단한 사람이라고, 나와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뭔가 대단해서, 뭔가 특별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우리와 성정이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받은 은혜가 우리가 받은 것보다 뭔가 특별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바울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나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나 동일한 것입니다. Input이 똑같다면 Output도 똑같아야 되잖아요? 그럼에도 우리의 삶과 바울의 삶에 차이가 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얼마나 진정으로 깨달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향한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진정으로 깊이 깨달았습니다. 바울이 그러한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대단한 사람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사랑과 은혜가 너무나 큰 것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그의 인격이 반응했고, 그것이 바울로 하여금 주님을 위해 자신의 삶을 불태우도록 한 것입니다. 바울만이 아니라 누구든지 그 십자가 사랑을 진정으로 깨닫게 된다면 다 바울처럼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십자가 복음의 능력입니다. 아무리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인간이라 하더라도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깨닫게 되면 능력있는 인생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물과 같이 쓸모없는 인생도 주님을 만나면, 포도주와 같은 값진 인생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중요한 것은 사람의 유전자의 차이가 아니라, 내가 그 은혜를 얼마나 진정으로 깨달아 알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만큼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깨달아 알고 있습니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아는 만큼 순종하고 헌신한다는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이 아닌 경건의 능력을 나타내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앞서 말했던 것처럼 우리의 행함과 상관없이 오직 은혜로 주어진 칭의의 은혜 안에 거하고, 그 은혜를 누리를 삶을 살아야 하고, 그 칭의의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죽음의 자리까지 내려가서 섬겨주신 그 은혜와 사랑을 깨달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것을 구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이신칭의의 복음, 은혜의 복음 위에 굳게 세워주시기를 기도해야 하고, 더 나아가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오늘이라고 하는 동안에 조금이라도 더 깊이 깨달아 갈 수 있는 은혜를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우리가 율법의 행함이 아닌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았음을 우리로 알게 하여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은혜 안에 거하며 은혜를 누려가는 자들이 되게 하여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더 나아가 그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의 죽음의 자리까지 섬기러 오신 주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깨달아 알게 하셔서, 주님을 위해 헌신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든 한결 지체들이 되게 하여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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