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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성경본문 갈 3:19-24
성경본문내용 (19)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20)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니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21)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22)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23)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24)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강설날짜 2011-10-05
2011년 10월 5일 한결교회 수요모임강설
갈라디아서 제18강

                                            몽학선생

말씀 : 갈 3:19-24

19절은 율법에 대해 세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곧 1)율법이 주어진 목적과 2)율법이 어떻게 주어졌는가 하는 것과 3)그 율법이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만 있을 한시적인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여기서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셨다는 문구가 우리 눈에 띕니다. 우리는 보통 율법을 누가 주셨다고 생각합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직접 주셨다고 생각하지만, 바울이나 당시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율법을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것이 아니라, 천사들의 중개를 통해서 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신명기 33:2에 보면 “일렀으되 여호와께서 시내에서 오시고 세일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산에서 비취시고 일만 성도 가운데서 강림하셨고 그 오른손에는 불 같은 율법이 있도다”(신 33:2) 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 성도라는 말이 거룩한 무리들이라는 뜻인데, 아마도 천사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구절을 기초로 해서 율법을 주실 때는 천사들을 통해서 주셨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 말씀이 히브리서(히 2:2)에서도 나오고 사도행전에서도 나오는데, 사도행전을 보면 스데반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행 7:53) 그래서 율법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것이지만, 방금 찾아본 말씀처럼 천사들과 함께 또는 천사들의 중보의 손을 빌어 주신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20절에 보면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니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라고 말씀하는데, 사실 이 구절은 난해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갑자기 이 이야기를 왜 하는지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습니다. 학자들은 이런 저런 추측을 내지만, 여러 추측들 중에서도 문맥상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되는 견해는, 여기서의 중보자를 천사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시내산 언약을 맺으실 때, 천사들이 중개인으로 서서 상호간의 언약을 맺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당 구입을 하려고 하는데, 계약을 할 때 주인하고 우리만 만나서 계약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꼭 중개인 또는 법무사의 중개를 통해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서로가 약속하고 합의할 때는 꼭 중개인이 필요한 것입니다. 율법을 주실 때도 바로 중개인을 필요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 시내산 언약이 바로 쌍방 간의 계약이라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키겠다고 서약하고, 만일 지키지 못할 때는 저주도 감수하겠다고 계약서에 사인한 것이고,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키면 그들의 하나님으로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그리고 불순종할 때는 저주로 벌할 것이라고 그 계약서에 사인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쌍방 간의 계약이 성립이 되었고, 여기에 천사들이 중개인으로서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견해가 맞다면 바울이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바로 율법과 약속의 차이를 말하고자 함인 것 같습니다. 즉 율법은 이렇게 쌍방 간의 조건적인 계약인 반면, 약속은 일방적인 계약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고 언약하실 때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개입한 것이 없었고, 그래서 중개인도 필요 없이 하나님께서 직접 일방적으로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하고자 하는 말은 약속이 율법보다 우선하고 우월하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바울은 율법이 한시적임을 말합니다. 율법은 영원한 것으로서 주신 것이 아니라, 잠간 와서 자기 역할만 하다가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끝나버릴 그런 잠정적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바울이 주장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율법의 역할은 끝났기 때문에, 과거에 아브라함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방인들도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될 것을 처음부터 다 작정하셨고, 은혜로 말미암고 예수 안에서 될 것이라면, 율법은 도대체 왜 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을 보내주시고, 처음부터 은혜로 구원하시면 되는 것 아닙니까? 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고 이스라엘 나라의 흥망성쇠라고 하는 긴 역사를 진행시킨 뒤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바울은 19절에서 율법의 목적이 바로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인하여’라는 말은 문법적으로 보면 ‘인하여’를 의미할 수도 있지만, ‘위하여’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한글성경은 “범법함을 인하여, 범법함 때문에” 주어졌다고 번역했지만, 제 생각에는 전체문맥으로 보았을 때, 오히려 ‘범법함을 위하여’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범법이란 법을 어긴 것을 말합니다. 범법이 있으려면 법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법이 없으면, 범법이 없는 것입니다.

(13)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롬 5:13)
법이 없으면, 비록 죄는 있겠지만, 범법이 없는 것이고, 사람들이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7)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8)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롬 7:7-8)

여기도 보면 법이 아니면 탐심을 알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원래 양심이 있기 때문에 탐심이 죄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양심이라고 하는 것이 워낙 사람의 마음에 의해서 합리화되기 쉽고, 또 그것이 쉽게 무뎌지기 때문에, 사람으로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는데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주심으로써 죄를 죄로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죄를 죄 되게 해서, 범법을 양산하기 위해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로마서를 찾아보면...

(20)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이것이 무슨 말인가 생각도 되고, 유대인들이 들으면 까무러칠만한 충격적인 진술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이 죄를 억제하고, 죄에서 이스라엘을 보호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바울은 율법이 죄를 더 만들어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목적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지 좀 더 들어봅시다.

(13)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함이니라(롬 7:13)

율법이 없는 죄를 만들어 낸다기보다도 이미 있는 죄(육신의 죄악된 본성 또는 정욕)를 심히 죄(실질적인 범죄) 되게 해서 본인 스스로 그것이 범법임을 깨닫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이 무뎌진 양심을 각성시키고, 죄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여, 죄로 심히 죄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어떻게 하느냐 하면, 오늘 본문 22절에서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라고 한 것처럼 우리를 죄인으로 낙인찍어 죄 아래 가두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23절에서는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계속 나오는 단어들, ‘가두었다’, ‘매인바 되었다’, ‘갇혔다’라는 단어들의 공통점은 ‘감옥’에 투옥되는 이미지를 나타냅니다. 율법은 바로 우리를 죄의 감옥, 정죄의 감옥에 가두고 투옥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옥에만 계속 있을 것이 아니라, 율법의 최종 종착점은 바로 죽음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이렇게 우리를 죽이는 역할을 합니다. 의문은 죽이는 것입니다. 유대인들, 갈라디아 교사들은 율법은 살리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키면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행하면 살고, 행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 그러한 중립적인 상태에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미 범죄한 죄인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으로는 어느 누구도 의롭다함을 받아 구원에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도리어 죄인으로 낙인찍어 정죄의 감옥 아래 가두고 그리하여 죽음의 형벌을 받도록 하는 것이 바로 율법이 하는 일이고, 그래서 사람으로 하여금 이러한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깨닫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며 자신이 지금 비참한 처지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은혜의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든 인생도 어떻게 보면 사형선고를 받은 채 죽음을 기다리는 사형수와 같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암만 십자가 복음 얘기해도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기 인생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님 믿고 구원받으세요.” 그러면, “나 잘 살고 있으니깐 당신이나 구원받으세요.” 그럽니다. 그렇게 해서는 사람들이 안 들으니깐 자꾸 여기에다 다른 것을 갖다 붙이는 것입니다. “예수님 믿고 복 받으세요. 예수님 믿고 행복하세요. 예수님 믿고 병 고치세요. 예수님 믿으면 지금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 받습니다.” 그러나 전도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말씀을 그대로 가르쳐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것과, 자신이 지금 비참한 처지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올바른 전도방법입니다.

그렇게 전도하고 가르쳤을 때, 그리고 성령이 거기에 역사하면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와 천벌을 피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고, 그리하여 몸서리치고, 비명을 지르며, 구원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에게 복음이 선포될 때에 복음이 황홀한 은혜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복음을 말하기 전에 항상 무엇부터 말합니까? 죄를 지적하고 율법을 말합니다. 로마서도 이 순서로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1장에서부터 3장 초반부까지 죄와 율법을 길게 서술하고, 그 결론이 3장 9절에 나오는 것처럼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죄인이고, 다 형벌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0절에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그러고 나서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라고 하면서 복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이 진정 복음이 되기 위해서는 율법이 먼저 선포되어야 합니다. 율법 없이 선포되는 복음에는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선포된 후에 전해지는 복음에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죄가 더한 곳에 은혜도 더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바울이 생각하는 율법의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율법이 하는 일은 모두를 심판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살길을 다 없애고, 인간에게는 답이 없다는 것과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여기서 구원받을 길이 없다는 것을 처절하게 확인시키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죽게 되었도다. 오호라 나는 죄인이로다. 누가 나를 사망에서 건져내랴”라고 고백하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율법이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살길이 없애서 절망가운데 은혜를 구하는 대로 우리를 몰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로 우리를 자꾸 몰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여러 구원의 방도중의 더 나은 방도가 아니라,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바로 율법의 임무입니다. 이러한 율법의 역할을 바울은 몽학선생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갈 3:24)

몽학선생은 ‘파이다고고스’라는 단어를 의역한 것입니다. 이 ‘파이다고고스’라고 지칭된 사람들은 귀족집의 어린 아이들을 맡아서 데리고 다니면서 보호하고 관리하는 관리인을 말합니다. 그래서 아이가 학교를 오갈 때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잘 데려다주고, 또 여러 가지 위험에서 아이를 보호하며, 또 아이가 잘못된 행동을 할 때에는 엄하게 벌하고 꾸짖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 자체로만 생각하면, 파이다고고스라는 사람들은 매우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이 일에 주로 배우지 못하고 교양이 없는 천박한 노예들이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아이들을 험하고 거칠게 다루기도 하고, 때때로 아이를 못살게 굴어서 주인에 대한 분풀이를 그 아이들에게 행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파이다고고스’라는 용어는 그 당시에 주로 부정적인 이미지로 사람들에게 비쳐졌고 바울도 이 점을 염두에 두면서 오늘 본문을 써내려갔던 것입니다.

물론 노예가운데는 좋은 노예가 있고, 정말 아이를 사랑해서 그 아이를 보호하고 가르치며 학교에 있는 참된 스승에게로 인도했던 파이다고고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런 측면을 내세우면서 율법의 긍정적인 역할을 주장합니다. 그래서 결국 오늘날 새로운 율법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문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해석인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단어의 의미를 생각할 때에는 문맥을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어떤 아이에게 막 잔소리하면서 훈계했을 때, 그 아이가 “삼촌은 꼭 엄마처럼 말을 하네.”라고 반응했다고 칩시다. 그때 이 아이의 말을 해석할 때, 엄마라는 단어만 딱 떼어서 해석하면서, 엄마는 사랑이 많고 인자한 사람이니깐, “삼촌은 꼭 엄마처럼 말한다”라는 말을 “삼촌은 엄마처럼 사랑이 많고 인자하고 좋은 사람이야”라고 해석하게 된다면, 그것만큼 그 말을 곡해하는 경우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문맥에서 율법에 사용된 용어는 하나같이 부정적인 것들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은 우리를 가두고 죽이고 정죄하고 우리의 자유를 억압하며 심지어는 악의 세력과 동맹관계 하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문맥 속에서 이 몽학선생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을 때는 앞서 말한 것처럼, 아이를 못살게 굴고, 억압하고 험하고 거칠게 다루었던 못된 파이다고고스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몽학선생은 결코 긍정적인 의미에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아주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몽학선생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몽학선생의 억압과 괴롭힘 속에서 그 아이는 몽학선생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하게 될 것이고, 때가 되어 몽학선생에서 벗어나 참 스승에게 인도 되었을 때 비로소 참 자유를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다 율법 아래 매인바 됨으로써 절망가운데 탄식하게 되고 구원을 갈망하게 되며, 그리하여 그리스도께로 나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몽학선생으로서 율법의 역할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율법의 몽학선생의 역할은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뿐 아니라 오늘날 예수님을 이미 믿은 우리들에게도 필요합니다. 이것은 은혜를 알기 위해서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자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갈 3:25)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났으면 우리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한 것입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떻게 다시 율법 아래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의 몽학선생의 역할이 신자에게도 필요한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신자 안에는 여전히 죄의 본성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죄의 본성 때문에 우리가 때때로 은혜를 망각해버리고, 믿음으로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살지 않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율법 아래 있는 자처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18)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갈 5:18)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지만, 우리가 성령의 통치를 받지 아니하고 고집을 부릴 때, 우리는 율법 아래 있을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율법 아래 있는 자처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의와 그의 자비를 겸손히 의지하기보다 교만한 마음으로 자기 의를 내세우며, 스스로의 힘으로 선하게 살아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래? 그럼 어디 한번 그렇게 살아보아라...”라고 하시면서 우리의 불신앙과 교만을 징계하시기 위해 우리를 잠시 동안 율법 아래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를 뺑뺑이 돌리시는 것입니다.

마치 출애굽의 은혜를 모르고 원망불평만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그들을 광야에서 뺑뺑이를 돌리셨듯이, 우리가 은혜를 망각하고, 교만해질 때는, 율법을 통해 우리를 뺑뺑이 돌리셔서 우리의 높아진 마음과 우리의 의를 다 산산조각내시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실패와 영적 침체와 그리고 좌절과 절망을 겪게 하셔서 우리의 마음을 낮추시고 가난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데로 나아오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가리까”라는 찬송가처럼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는 자리로 나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신자들이 율법을 배우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렇게 율법을 통해 우리의 마땅한 행실이 무엇인지를 알아가고 그 율법의 거울 앞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비추는 생활을 해야지만 우리는 늘 겸손하게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만을 의지하면서 은혜의 자유를 누리며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곧장 배은망덕의 죄악으로 빠지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우리는 너무나 자기 의를 사랑하는 자들이고 지독한 율법주의자들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자주 은혜를 망각하고 교만해지곤 합니까? 그러므로 늘 우리에게는 이 율법의 몽학선생의 역할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율법이 나태하고 교만한 우리를 끊임없이 찌르고 괴롭히는 가시가 되어서 우리로 계속해서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도록 우리를 몰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혼란스럽고 낙심이 되고 절망이 될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바라보면서 그 은혜 아래로 도피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 가장 혼란스러운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나에 대한 감각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언제나 “나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죄인인 나, 인간의 한계 속에 있는 나, 늘 죄악으로 달려가는 나” 라는 것이 언제나 생생하게 살아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믿는다고 해서 당장 천사가 되고 성자가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면서 끊임없이 “나는 왜 이럴까? 내가 신앙인이 맞는가? 예수님을 믿는 자라고 하면서 왜 나는 매일 이 모양 이 꼴인가?” 그렇게 늘 혼란스러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이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고뇌와 탄식과 절망 속에서 어디로 가야 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밖에 없구나.” 거기로 도피해가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늘 율법 앞에 자신을 비추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날마다 겸손하여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만을 의지하며 그 은혜 아래서 살아가는 우리모두가 되게 하여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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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6 [갈라디아서 4장] 사라와 하갈 비유 file 갈 4:21-31 최상범 2011-11-02 5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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