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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손재호
성경본문 살전 2:1-5

2009년 데살로니가전서 공부
                                                               하나님의 복음
말씀:데살로니가전서 2:1-5

 
2:1절에 보면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감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라고 합니다.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에 들어간 것이 헛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헛되지 않았음을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고난과 핍박 속에서 데살로니가에 들어갔지만 헛수고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복음의 열매들로서 맺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복음이 전하여 지고 열매들이 나타났는데 이러한 복음을 바울 사도가 무슨 복음이라고 합니까? 2절에 보면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 갈라디아서 1:8절에서는 ‘우리가 전한 복음’이라고 했는데, 이곳에서는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이란 그 복음의 기원이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대로 바울 사도는 열두 제자들과는 다르게 복음을 받았습니다. 열두 제자들은 예수님과 3년을 함께 동행 하였고,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성경대로 삼일 만에 부활하셨고 주와 메시아가 되셨다고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증거를 유대교에 대한 이단으로 보고 이들의 무리를 잡으려고 다니던 사람이 바로 바울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이런 바울이 예수님을 따르는 이단들을 잡으려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강렬한 빛이 비추고 하늘로 부터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이것이 바울이 받은 복음의 기원이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11-12절을 보면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전하는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가 있다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도 저주를 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8절을 보면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복음이 열두 제자들이 전한 복음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다메섹에서 복음을 받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사도들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바로 아라비아로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3년 후에 예루살렘에 가서 사도들과 교제를 합니다. 바울 사도의 특징이라면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복음이 이미 유대의 경계를 넘어 섰습니다만, 특히 사도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이 이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직접 받은 복음이기에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복음을 주신 분을 기쁘시게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1:10절에 보면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복음이란 말 그대로 복된 소식, 기쁜 소식인데 왜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까? 기쁜 소식이면 사람들이 기뻐해야 하는데, 왜 바울 사도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까? 바울 사도는 자신이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4절에서도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기쁜 소식이라면 모든 사람에게 기쁜 소식이 되어야 하는데 왜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까? 여기에서 참된 복음과 가짜 복음이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기쁜 소식이란 어떤 것들입니까? 아주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라면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병든 사람이라면 병 고침을 받는 것입니다. 키가 작은 사람이면 키가 커지는 것이고, 학생이면 공부를 잘하는 것이고, 운동선수라면 최고의 선수가 되는 것이고, 사업가라면 사업이 잘되는 것이고, 정치가라면 대통령이 되는 것이고, 종교인 이라면 자기 종교가 세계최고의 교세를 확보하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것들이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 됩니다. 그러나 복음이란 이러한 것들을 죄라고 고발하고 나서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다는 것이 복음의 전제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란 오히려 인간을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숨겨져 있던 죄들을 들추어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죄를 사하시는 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임을 믿는 자는 죄사함을 받는다는 것이 복음의 내용인데 이것을 사람들이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마 7:6).

 

그런데 예수님께서 돼지를 두고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사람에게 하신 것입니다. 사실 돼지는 자기 배의 80%밖에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 위장의 120%를 넘게 먹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사람의 탐심이 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인간에게 기쁜 소식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는 이미 인간이 허물과 죄로 죽어 있기에 죄에 대하여 고통으로 여기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고통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몰라도 고통으로 여기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문둥병에 걸린 사람처럼 통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은 자신을 구제불능의 죄인이라고 부르는 것을 싫어합니다. 사람이 실수도 하고 잘못을 한다는 것은 인정하겠지만 구제불능의 죄인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싫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느 정도의 가능성을 두고서 신도 이만큼 도와주니 인간도 이만큼은 채워야한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인간에게 기쁜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전한 복음이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 기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절을 보면 “너희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미 빌립보에서 많은 고난과 능욕을 받았습니다. 고난은 육체적인 것이고, 능욕은 수치와 모욕이니까 정신적인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받을 수 있는 고난을 다 받은 것입니다. 이러하다면 복음을 전하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을 힘입어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기쁜 소식이기에 환영을 받고 대접을 받아야 하는데 왜 고난과 능욕을 받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복음 안에 사람이 기뻐하지 않는 소식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은 하나님의 필요를 채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원하는 것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을 복음 안에 넣어두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것은 율법 외에 주어진 의입니다. 로마서 3:21절에 보면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로마서 1:17절에서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려면 의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지만 그러나 죄로 인하여 그 필요를 필요로 여기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를 믿는다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복음 안에서 주시고자 하시는 그 의만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필요하지만 다른 것도 달라는 것입니다. 곧 다른 복음을 구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1:7-9절에 보면 다른 복음은 없다고 하면서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가 임한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의 싸움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을 기쁘게 할 것인가? 하나님을 기쁘게 할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10절에 보면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람을 기쁘게 한다면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고 합니다. 복음은 사람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오직 복음만을 전하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사람들이 싫어하는 복음만을 전하였는데도 복음의 열매가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바로 복음이 하나님께로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이기에 고난과 능욕을 극복하고서 증거가 되는 것이고, 그 고난과 능욕 가운데서 전하여진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역시 하나님의 복음이기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들은 자들이 세상의 영광과 부귀를 누렸다면 바울은 아마 가는 곳마다 최고의 대접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바로 사람을 기쁘게 함으로 오는 결과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순진한지 아니면 무지한지 모르지만 ‘우리가 바르게 안 해서 그렇지 바르게만 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결국 세상에서 성공하게 될거야’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내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7)는 그런 말씀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처음에 어떻게 시작하였습니까? 말구유에서 시작하였습니다. 그 과정은 고난과 능욕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지상에서의 예수님을 따르는 자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경건하게 살고자, 주님을 따르고자 하면 할수록 고난과 능욕이 따르게 됩니다. 무릇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한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12절에 보면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경건하게 살려고 하지 않기에 핍박이 없는 것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고 마음만 먹어도 당장 핍박이 올 것입니다. 오늘날도 바울과 같이 복음을 전하게 되면 역시나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기뻐하는 복음으로 변질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 변질시키는 유혹들이 어떻게 들어오는 것입니까? 결국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변질된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사도가 어떠한 싸움을 싸웠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우리도 끊임없이 우리를 좋게 해주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의 관심사는 사람의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타협 없이 하나님의 의만 드러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하는 자세는 오늘 본문 3절과 5절에 잘 나타납니다. 3절에 보면 “우리의 권면은 간사에서나 부정에서 난 것도 아니요, 궤계에 있는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권면이 간사에서나 부정에서나 궤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려면 간사하게 하면 됩니다. 속으로 아니더라도 밖으로 미소 짓고 부드럽고 친절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궤계에서 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궤계라는 것은 아주 교활한 속임수를 말하는 것입니다. 미끼로 고기를 낚을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교회 다니면 당신이 원하는 것을 준다고 합니다. 우리를 따르면 당신이 원하는 것을 준다고 합니다. 이러한 것이 전부 궤계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를 사탕으로 유괴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마다 가지고 싶은 욕망들이 있는데 그 욕망을 이루어 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만 하면 당신의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오늘날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교회로 몰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너희가 나를 왜 따르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주고자 하는 것은 나의 살과 피라는 것입니다(마 26:26-28).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사람의 인기를 얻으려면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준다고 하면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사나 부정이나 궤계에 있지 않고 오직 순전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믿는 자들이 나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복음이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5절을 보면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상대방이 나에 대하여 진정이 아니라 아첨인줄 알면서도 아첨의 말을 하여 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진심어린 충고는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 아첨에 대한 주석을 보니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감언이설이다. 어떤 사람에게 안도감을 줄 목적으로 그럴 듯한 말을 하여 자기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첨을 왜 하는 것입니까? 상대방에게 안도감을 주는 것입니다. 거짓 확신과 거짓 평안을 주는 것입니다. 물론 아첨을 당하는 자는 모릅니다. 자신이 평안하게 된다고 하니 그저 기분이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 자신이 무언가 원하는 목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자신의 목적이나 의도가 없는 것입니다. 자신은 오직 종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종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아첨의 말을 하여서 자기를 따르게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들을 보면 좀 큰 교회가 되면 부교역자들을 많이 둡니다. 그런데 그들 안에서 경쟁이 있습니다. 누가 더 인정을 받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아첨의 말을 하여서 자기의 사람들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교역자들의 세계에서만이 아니라 성도들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의 사람들을 만들기 위하여 얼마든지 아첨의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첨의 말을 하는 것을 결국 탐심의 탈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하나님을 위하는 것처럼 탐심의 탈을 쓰고 나오는 것입니다. 가장 교회를 위하는 것처럼 탐심의 탈을 쓰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도 아니고 교회도 아니고 결국 자기의 다른 목적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른 목적이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의 팽창입니다. 곧 자기의 세력화입니다. 이것이 탐심의 탈을 쓰고 나오는 모습입니다. 입만 벙긋하면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일, 교회를 위한다고 하면서 얼마든지 탐심의 틀을 쓰고 나올 수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설마 나는 아니겠지, 설마 저 사람은 아니겠지, 그러나 설마가 사람 잡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더욱 말씀에 주의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어떠하였습니까? 간사하거나 부정하거나 궤계가 아니었습니다. 아첨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당신은 정말 성실하고 진실하다고 사람들이 인정하고 칭찬하고 영광을 받았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엄청난 핍박과 고난과 능욕을 당한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목적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복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영광이냐 아니냐는 관심 밖의 일입니다. 오늘 본문 4절을 다시 보면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복음을 받았다는 것은 이러한 삶이 나타나는 것이 증거입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간사하게 하거나 궤계를 쓰거나 아첨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의 생각이나 계획이나 행동들이 모두 하나님의 감찰하심 아래 있음을 알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받은 자로서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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