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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성경본문 삿 7:1-8
성경본문내용 (1)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과 그를 좇은 모든 백성이 일찌기 일어 나서 하롯샘 곁에 진 쳤고 미디안의 진은 그들의 북편이요 모레산 앞 골짜기에 있었더라(2)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3)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고하여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서 떠는 자여든 길르앗산에서 떠나 돌아가라 하라 하시니 이에 돌아간 백성이 이만 이천명이요 남은 자가 일만명이었더라(4)여호와께서 또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아직도 많으니 그들을 인도하여 물가로 내려가라 거기서 내가 너를 위하여 그들을 시험하리라 무릇 내가 누구를 가리켜 이르기를 이가 너와 함께 가리라 하면 그는 너와 함께 갈 것이요 내가 누구를 가리켜 이르기를 이는 너와 함께 가지 말 것이니라 하면 그는 가지 말 것이니라 하신지라(5)이에 백성을 인도하여 물 가에 내려가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무릇 개의 핥는 것같이 그 혀로 물을 핥는 자는 너는 따로 세우고 또 무릇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도 그같이 하라 하시더니(6)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의 수는 삼백명이요 그 외의 백성은 다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지라(7)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물을 핥아 먹은 삼백명으로 너희를 구원하며 미디안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니 남은 백성은 각각 그 처소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8)이에 백성이 양식과 나팔을 손에 든지라 기드온이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을 각각 그 장막으로 돌려보내고 그 삼백명은 머물러 두니라 미디안 진은 그 아래 골짜기 가운데 있었더라
강설날짜 2012-09-12

2012년 9월 12일 한결교회 수요강설(387,363)

사사기 제14강


삼백명으로 줄이신 하나님


말씀 : 삿 7:1-8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모인 군사들 32,000명을 300명으로 줄일 것을 명하시는 말씀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군사들을 줄이고자 하셨는지, 또 어떻게 줄이셨는지를 오늘 본문을 통해 배워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군사를 300명으로 줄이신 이유


(1)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과 그를 좇은 모든 백성이 일찌기 일어 나서 하롯샘 곁에 진 쳤고 미디안의 진은 그들의 북편이요 모레산 앞 골짜기에 있었더라


아침 일찍 군사들이 일어나서 기드온의 명을 따라 하룻샘 곁에 진을 쳤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표징도 보았고, 아침 일찍부터 나온 부지런한 백성들의 모습을 보면서 사기가 충천했을 것입니다. 믿음의 용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이스라엘 군사의 수가 너무 많다하여 줄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2)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지금 모집된 군사 32000명인데, 300명으로 줄이라는 명령입니다. 군대 갔다 오신 분은 잘 아시겠지만, 전쟁할 때 군사의 수가 많아야 유리하고, 군사 수가 많아야 밀리더라도 다음번에 다시 전쟁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군대를 5만 명, 6만 명을 더 보태주셔도 게임이 될까 말까한데, 군사를 더하기는커녕 300명으로 줄이라는 명령을 기드온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명령하신 것은 일차적으로 기드온의 믿음을 연단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기드온이 어떤 사람입니까? 두려움이 많고 겁이 많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을 때에도 확신하지 못해서 표징을 구했고, 또 전쟁에 나가고자 했을 때도 확신이 안서서 양털을 통해서 하나님을 두 번이나 시험했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께서 두 번의 시험으로 기드온을 시험하실 차례입니다. 두 번에 걸쳐서 군대를 줄이신 것입니다. 이것은 그에게 충격적인 일이요, 양털 표징을 통해서 겨우 전쟁에 나갈 용기를 얻었는데, 다시 그 용기를 잃어버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어려움 가운데로 코너로 몰아넣으신 것은 일차적으로 기드온의 믿음을 연단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지금 모인 32000명이 13만 오천 명에 비하면 턱없이 적지만, 그러나 32000명도 적은 숫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도 어떻게 작전을 잘 짜서 잘 싸우면 할 만하다는 생각이 기드온에게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으로 하여금 숫자를 의지하기보다도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군대의 숫자를 줄이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의지하지 못하고 쉽게 두려워하는 그를 연단하여서 그의 믿음을 강하게 하셔서 믿음으로 전쟁을 수행해 나아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10)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 23:10)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환란을 주심으로써 그의 믿음을 연단하시고 단련하셔서, 마치 은을 단련하여서 모든 불순물을 다 제거하고 깨끗하고 순수한 은을 만들듯이 그렇게 욥의 믿음을 단련하신 것입니다.

 

마 15장에 보면 귀신들린 딸을 가진 가나안 여자 어머니가 나옵니다. 그가 예수님께 나와서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렇게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듣지도 않으시고, 모른 척하셨습니다.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더욱 소리를 질렀습니다. 너무 시끄러운 나머지 제자들이 “너무 시끄러우니 빨리 고쳐서 보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요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그 요청을 들으시고 “그래, 그만 고쳐서 보낼까?”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여인을 쳐다보지도 않으시고, 제자들을 향해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스라엘 외에 다른 데로 보냄을 받지 않았느니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에 의해서 그 이방여인은 해당사항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거절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 여인은 은혜의 정도를 한 단계 높입니다. 예수님 앞에 절을 하면서 예수님을 경배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아랑곳 하지 않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줌이 마땅치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 여인을 고칠 수 없는 이유가 저 여인은 이방 여인, 곧 개와 같기 때문에 고칠 수 없다 라는 것입니다. 단순한 거절이 아니라 모욕감을 주면서 거절하셨습니다. 그때 이 여인이 또 하나의 은혜의 단계를 높입니다. 예수님을 경배했던 단계에서 이제는 자기 자신을 철저히 낮추는, 예수님 앞에 자신을 아주 낮추었습니다. “맞습니다. 나는 개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개가 먹지 않습니까? 부스러기라도 저는 원합니다.” 그와 같은 간구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제야 그 여인을 보시면서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지금까지 외면을 하시고, 듣지도 않으시고, 또 제자들에게만 말씀하시고, 그 여인을 개로 취급하시면서 매몰차게 대하신 것이 예수님의 본심이 아니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이 여인의 연약한 믿음을 (그 짧은 순간이지만), 연단하셔서 그녀의 믿음을 큰 믿음으로 만드셔서 그 믿음을 따라 축복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쓰시고자 하실 때는 그냥 쓰실 수 없습니다. 반드시 거기에는 믿음의 연단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우리를 어려움의 코너로 몰아가셔서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여 강한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신 후에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러한 경우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삼상 1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렇다고 당장에 왕이 된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로 골리앗을 무너뜨리고, 전쟁에 나가서 승리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사울에게는 천천이요 다윗에게는 만만이라고 해서 다윗을 높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다윗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믿음의 연단의 세월을 만납니다. 장인어른이기도 한 사울 왕이 그를 시기하여 죽이려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다윗은 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수 년 동안 정처 없이 도망치면서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고, 심지어는 목숨하나 부지하기 위해 침 흘리며 미친 척까지 하는 그러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그렇게 코너에 몰아넣으심으로써 그로 하여금 매순간을 철저하게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그의 믿음을 연단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9년이라는 세월동안 철저하게 연단하시고, 유다 지파의 왕으로 세우신 후에 다시 6년 동안 연단을 더 하시고, 그 후에 통일 왕국의 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지 15년 동안 자신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그렇게 그를 훈련하시고 연단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다 이러한 믿음의 연단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오히려 이러한 어려움을 통한 믿음의 연단이 없는 것이 바로 버림받은 자의 특징입니다. 여러분 믿음을 연단하는 과정 없이 곧바로 왕으로 세움 받은 사울 왕의 경우를 보십시오. 그가 얼마나 비참한 말로를 겪게 되었습니까? 믿음의 연단과정이 없으면, 결코 믿음을 가질 수 없고, 하나님의 일군으로 쓰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32000명을 300명으로 줄이라고 명령하신 것은 바로 그로 하여금 사람을 바라보는 믿음이 아니라, 숫자를 계산하여서 숫자에 의지하는 믿음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만 붙잡고 나아가는 믿음으로 연단하기 위한 하나님의 작업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도 이와 같이 믿음을 연단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돈을 의지하면, 돈을 끊어내시고, 자신의 건강과 힘을 의지하면, 그 건강을 끊으시고, 또 사람을 의지하면 사람을 끊어내시고,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의지하면, 더욱 낭패를 당하게 하심을 통해서 우리를 코너로 몰아넣으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믿고 의지한 죄를 회개하고 오직 하나님만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그렇게 고난과 연단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단련되어진 후에는 어떠한 상황을 만난다 하더라도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귀한 역사에 쓰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의 연단을 받아서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에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게 하여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숫자를 줄이신 것은 기드온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향한 연단이었습니다.


(2)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에 승리하고 난 후에 하나님을 거스려 자긍하면서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라고 생각할 것을 염려하신 것입니다. 기드온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36)기드온이 하나님께 여짜오되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하시거든(37)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두리니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사면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 내가 알겠나이다 하였더니(삿 6:36-37)


이스라엘 리더자 라는 사람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백성들은 오죽했겠습니까? 자신들의 힘으로 싸워서 이기는 것이고, “하나님은 단지 옆에서 보조적으로 도와주시면 됩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전쟁해서 이기면 사람이란 존재가 본성적으로 악하기 때문에, 누구라도 “이 전쟁은 우리가 그래도 힘이 있으니까, 우리가 전쟁을 잘했으니깐 이겼구나.” 이런 생각을 가지는 데로 빠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말을 하지 못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군사의 숫자를 줄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전쟁의 승리가 오직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주어진다라고 하는 사실을 그들로 알게 하시기 위해서 숫자를 줄일 것을 명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의 죄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깊습니다. 우리의 인간의 죄성이 깊어서 언제든지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는 나 자신을 드러내고, 나 자신을 크게 확대해서 사람들 앞에 드러내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어떤 일을 이루어내면,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로 인정하기보다도, 내 힘과 능력으로 한 것처럼 자랑하고 교만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느 누가 따로 그런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있는 죄성입니다. 그래서 목사는 교회 부흥이 일어나면, “내가 사역을 잘하고 설교를 잘했기 때문에 부흥이 일어났다”고 생각하고, 어떤 성도가 열심히 전도하고 헌신해서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내면, 내가 그렇게 했기 때문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섭섭할 때가 언제냐 하면, 자기가 그렇게 헌신하고 봉사했는데, 목사님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 때 섭섭하고, 또 성도들이 자기를 인정해주지 않을 때, 그리고 그렇게 헌신하고 봉사했는데 집사 안 시켜주고 장로 안 시켜줄 때 그렇게 섭섭한 것입니다. 아니 섭섭하다 못해 심지어는 시험 들어서 교회를 떠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이 다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누구라도 빠지기 쉬운 교만의 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늘 살펴서 혹시 내가 그런 마음을 품고 있지는 않는지 늘 돌아보아야 합니다. 도리어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선한 역사가 일어나면 그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10)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그렇게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려드리고, 자기는 마땅히 무익한 종이라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스스로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를 낮출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낮추셔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을 거스려 교만할까 하여 군사수를 300명으로 줄이셨습니다. 그렇게 300명이 되고나니깐 기드온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이제 무엇을 바라보겠습니까? 초라한 300명으로 어떻게 13만 오천명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그들이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분은 하나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자신들의 숫자도 바라보고, 자신들이 가진 무기도 바라보았지만, 이제는 300명밖에 남지 않으니깐, 두 손 두 발 다 들고 “이제는 하나님밖에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을 사용하실 때, 충분히 그를 낮추시고 겸손케 하신 후에 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은혜로만 할 수 있습니다” 라고 고백하면서 두 손 두 발 다 들고 주님만 의지하는 사람이 되어질 때에 주님은 우리를 크게 쓰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게끔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바울처럼 우리를 낮추고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귀한 역사에 쓰임을 받고 또 모든 영광과 공로를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복된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께 쓰임 받는 군사는 어떤 자인가?


그러면 하나님이 군사 수를 줄이시는데, 어떻게 줄이십니까? 두 가지 기준을 통해서 군사수를 줄이시는데, 첫 번째는 두려워 떠는 자들을 모두 돌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워서 떠는 22000명이 집으로 되돌아가고 만 명이 남았습니다. 두 번째는 물가로 데려가서 물을 마시게 한 후에 물 먹는 자세를 가지고서 구별하셨습니다. 즉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시는 사람과 무릎을 꿇지 않고 손으로 물을 퍼서 입으로 가져다가 개처럼 혀로 낼름낼름 핥아 먹는 사람을 구별하셨습니다. 그래서 개처럼 혀로 낼름낼름 핥아 먹는 300명만 남기고 나머지 무릎 꿇고 물을 마신 9700명은 다 돌아가게 하셨던 것입니다.

 

특히 이 두 번째 시험과 관련해서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다는 것은 바로 믿음이 없는 모습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 9700명을 돌려보냈다고 해석하는 견해입니다. 또 다른 해석은 이 시험이 그들의 믿음이 있고 없고와 상관없이, 어떤 내면의 자질의 문제와는 별개로 단순히 다수를 돌려보내기 위해서 하나님이 선택하신 방법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즉 오늘날로 치면 만 명 중에 300명에만 해당되는 사항을 적용해서... 예를 들면, 쌍까풀이 없고 새가슴인 사람? 혈액형이 AB형이고, 대머리인 사람? 과 같이 그 사람의 영적인 자질이나 믿음의 여부와 상관없이 그냥 다수를 돌려보내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바로 이 해석이 요즘 인기가 있는데, 이 해석의 장점은 본문의 문맥이 결국 숫자를 줄이시는 이유가 그들이 자긍하지 못하도록 하이 위해서 단순히 숫자를 줄이는데 포인트가 있기 때문에, 이 두 번째 해석이 그러한 문맥과 잘 어울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해석에 단점이 있는데, 그것은 그러면 아예 처음부터 딱 300명을 만들 수 있는 그런 기준법으로 구별하셨으면 되었을 텐데, 하나님께서 처음 22000명을 되 돌려보내실 때는 두려워서 떠는 자, 곧 군사의 자질과 믿음 여부를 문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물가로 사람들을 보내시면서 하시는 말씀인 4절에서 “(4)여호와께서 또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아직도 많으니 그들을 인도하여 물가로 내려가라 거기서 내가 너를 위하여 그들을 시험하리라”에서 이 ‘시험하다’라는 말은 아주 색깔이 분명한 단어입니다. 번역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이 단어는 단 한 번도 ‘시험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된 적이 없습니다. 이 단어는 명백하게 한 가지 뜻만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금속을 제련하고 불로 연단해서 불순물을 제거한다 라는 뜻입니다. 즉 부정적이고 나쁜 것을 제거하여 정결하고 순수하게 만든다는 의미가 명백한 단어입니다. 즉 단순히 내면의 자질과는 상관없이 그냥 다수를 돌려보내기 위해 방법으로서 물가에 가도록 하셨다면, 아마도 사사기 저자는 이 단어보다는 ‘나누다’, ‘구분하다’의 뜻인 ‘바달’이나 ‘구별하다’, ‘거룩하다’라는 뜻의 ‘나자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전체 문맥을 보나 ‘시험하다’라는 단어를 생각해 볼 때, 첫 번째 해석(전통적인 해석)이 보다 더 타당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절대적으로 옳다는 것은 아니므로 제 견해에 동의 안 하셔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마도 그것이 보다 타당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만일 이 견해가 맞다면,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군사 수를 줄이심으로 이 전쟁의 승리가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을 드러내실 뿐만 아니라, 또한 수를 줄이시되 아무렇게나 줄이시지 아니하시고 믿음의 용사들만 남기심을 통해서 하나님께 쓰임 받는 믿음의 용사로서의 자질이 무엇인지를 또한 드러내고 계신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는 믿음의 용사로서 군사의 자격요건이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3)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고하여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서 떠는 자여든 길르앗산에서 떠나 돌아가라 하라 하시니 이에 돌아간 백성이 이만 이천명이요 남은 자가 일만명이었더라


22,000명이 돌아가게 되는데, 그들은 두려워 떠는 자였습니다. 기드온의 부름에 응답하여 나아올 때는 용기 있게 나왔지만, 막상 13만 오천 명을 목격하고서 그들과 전쟁할 생각을 하니깐 두려운 마음에 사로잡혔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두려워 떠는 자들을 먼저 돌려보내셨는데, 왜냐하면 이 두려워하는 것과 두려워하는 가운데 불평하고 원망하는 불신앙은 전염성이 매우 강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22,000명이 절대 대다수가 두려움에 떨고 있기 때문에 이 22,000명이 봉기해서 “이 전투는 하지 못한다. 이 전투는 이길 수 없다”라고 악담하고 불평하게 된다면 이스라엘 군대 전체가 전쟁을 포기하는 위기에 처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먼저 두려워 떠는 자들로 돌아가게 하셨는데, 이러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전투에 대한 지침서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바 있는 것입니다.


(8)유사들은 오히려 또 백성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두려워서 마음에 겁내는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그 형제들의 마음도 그의 마음과 같이 떨어질까 하노라 하여(신 20:8)


이스라엘이 전쟁할 때에는 두려워하는 백성들로 인하여 다른 백성들도 겁을 먹고 두려워할 수 있기 때문에, 아예 이들은 전쟁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닫는 바는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쓰임 받고자 한다면, 우리 가운데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그 믿음은 두려움을 극복하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와 복음을 위해 살고자 할 때에는 거기에는 반드시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하고, 고난과 환란을 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22)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 14:22)


많은 환난을 겪어야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약, 이러한 환란에 대하여, 예수를 믿기 때문에 올 어려움에 대하여 두려워하고 떤다면, 결국은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지 못하고, “당신은 믿음이 없으니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라는 명령을 들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62)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 9:62)


눈앞에 있는 환란과 고난과 어려움 때문에 자꾸 뒷걸음질 치고, 뒤를 돌아보며 옛날로 돌아가고자 한다면, 그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즉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는 담대한 믿음의 용기 없이는 결단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담대한 믿음의 용기기 없이는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참으로 도전이 되고, 두려운 경고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어떠한 희생과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고, 담대하게 주님만 바라보며 주와 복음을 위해 헌신하며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어려움 당하기를 꺼려해서 뒷걸음질 치며 세상과 타협하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 자신을 진지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후자라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회개하고 변화되어 돌이키는 것 외에 희망이 없습니다. 여러분 “(39)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입니다(히 10:39). 그러므로 우리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앞으로 전진 해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길에서 만나는 여러 가지 어려움과 환란과 위험한 일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담대하게 전진해 나아가야 합니다.

 

사단 마귀는 어찌하든지 우리가 주와 복음을 위해 살고자할 때 치러야 할 희생과 고난과 어려움을 부풀려서 보여주어서 어찌하든지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때 우리는 사단 마귀가 부풀려서 보여주는 눈앞에 어려움을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들이 나의 재산과 가족과 생명을 해할 수는 있어도 나의 영혼은 해할 수 없음을 알고, 또한 믿음의 길 끝에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상급이 있다는 것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끝까지 믿음을 잃지 않고 전진해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우리 앞에 어떠한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장애가 있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믿으며 두려움을 물리치고 극복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하여서 하나님 앞에 귀히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주님께 쓰임 받는 자는 자기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먼저 구하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두려워 떠는 자 22,000명을 돌려 보내신 후에 남아있는 만 명도 많다고 하시면서 다 물가로 내려가게 하여 물을 마시게 한 다음 물 먹는 자세에 따라 9700명은 돌려보내고 나머지 300명은 남기셨습니다. 그때 이 9700명은 물을 마실 때 어떤 자세를 취했습니까? 무릎을 꿇고 물을 마셨습니다. 이것은 물을 마시는데 있어서 최적의 자세입니다. 벌컥벌컥 하면서 마음껏 갈증을 채우며 마실 수 있는 자세입니다. 그들이 군사훈련가운데 있었으니 갈증이 많이 난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물을 마시라고 하니, 어떡하든지 물을 많이 마시기 위해서, 한 모금이라도 더 마시기 위하여 무릎을 꿇고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군사로서의 자질들을 벌써 상실한 모습입니다. 지금 전쟁을 하기 위해서 모였고, 그들과 멀지 않은 곳에 적군이 모여 있는데, 아무런 경계심 없이 물 마시는 데만 집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느헤미야 4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성벽을 재건하는데, ‘산발랏’이라는 자가 성전을 못 짓게 방해합니다. 그때 이 성전을 짓고 성벽을 짓기 위하여 한 손에는 칼을 차고 한 손은 일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바로 일을 하면서도 적군을 경계하는 군사의 모습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경계병은 아예 옷을 벗지도 않았습니다. 한시라도 적군에게 틈을 두지 않기 위하여 경계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군사의 특징입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원수마귀가 우리를 삼키려 두루 다니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군사의 특징 중의 하나가 바로 늘 경계하고 깨어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이 9700명은 그런 것과는 아랑곳없이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하여 물을 꿀꺽꿀꺽 그냥 너부러져 앉아서 물을 마시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경계심 없이 자기의 배만 채우려는 자들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다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9700명을 보면서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 자신의 이기적인 갈증을 해소하기에만 급급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즉 나를 돌아보기보다는 하나님 중심으로, 영적인 것에 민감하고, 영적인 것에 부지런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하나님이 무엇을 어떻게 요구하시는지 그것에 관심을 두고 그것에 깨어 있는 자가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나 개인적인 것을 충족시키는데 몰두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일군도 될 수 없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수도 없는 것입니다.


(21)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빌 2:21)


많은 자들이 교회 속에 있지만, 진정 그리스도의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어떠한 일들만으로 분주한 모습에 대하여 바울이 안타까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사람마다 자기 사업하는데 바쁘고, 열심히 공부해서 성적 올리는데 바쁘고, 취직자리 알아보는데 바쁘고, 결혼 하는 데만 관심이 가있고, 집장만하고 차 사는데 관심이 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 읽고, 기도할 시간은 없어도, TV 보고, 세상의 음악을 감상하고, 친구들과 만나서 어울리고, 게임할 시간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자들에 대해서 “(6)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딤전 5:6) 라고 말하였습니다. 즉 영적으로 죽어있는 자들의 특징은 당장 당장에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바쁘고, 또 주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기보다도, 당장 눈앞에 있는 나의 육신적인 쾌락과 만족과 욕망에만 몰두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바로 이런 자들은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회개하지 아니하고 계속 그 가운데 살면, 결국 지옥에 떨어지고 말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많은 자들이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해야 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의 형제자매를 사랑하고, 그들에게 주님을 닮은 사랑과 섬김의 삶을 살고, 교회를 봉사하고, 직장에서든지 학교에서든지 가정에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고, 무엇보다도 믿지 않는 가족과 친척과 친구(동료)들과 이웃에 대하여 상한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그들에게 나아가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사는 것이,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런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리스도 예수의 일은 구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일을 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정말 우리의 믿음 없음을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우리 자신을 주님께 헌신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자기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며 우리 자신을 헌신할 수 있습니까? 마지막 남아서 쓰임 받은 300명을 보면, 그들은 6절에...


(6)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의 수는 삼백명이요 그 외의 백성은 다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지라


개같이 핥아서 마시는 모양세가 좋지 못하고, 또 여자처럼 졸장부처럼 그렇게 마시는 것 같지만, 그러나 이들은 군사로서 깨어있는 자로서, 전투에 앞서서 목을 잠간만 축이는, 즉 자기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먼저로 두고, 자기 자신의 갈증을 뒤로 둔 그러한 자들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남겨두셔서 하나님의 역사에 귀하게 사용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들도 다른 사람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똑같이 갈증이 나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은 물을 벌컥벌컥 실컷 마시는데, 왜 자기들도 마시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자기를 부정하고 물을 그렇게 마시지 않은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자가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23)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24)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눅 9:23-24)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질 때만이 우리는 자기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며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지는 것은 결국 내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라고 고백하는 것의 의미로서, 날마다 십자가에 못박힌 채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를 날마다 현재적으로 체험할 때만이 우리는 자기를 부정할 수 있고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구하며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3)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4)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3-4)


군대를 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군대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모든 자유를 억압하고, 통제와 명령에 따라 살아갑니다. 먹고 마시는 것도, 움직이는 것도, 말하는 것도, 잠을 자고 일어나는 것도, 심지어는 화장실 가는 것도 오직 명령을 받고 허락을 받아야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군대는 폭력을 통해 강제적으로 자유를 박탈하는 집단입니다. 그래서 다들 군대 안 가려고 하죠.

 

우리는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의 군대로 소집되어 모였습니다. 일반군대나 그리스도의 군대나 자유가 없다는 것은 동일하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의 군대는 일반군대처럼 강제적으로 자유를 억압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아 값 주고 사신바 되어서 이제는 자원하여 우리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고 우리 자신을 주님께 바친 자들이 된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시기 위해서 그 모진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생각할 때, 내 마음대로 살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이제는 내 안에 주님이 계셔서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오직 주님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자기 생활에 얽매여 사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군사를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이고, 우리로 이 삶으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주님의 은혜를 받은 자라면 주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이런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날마다 이 십자가의 은혜를 깨달아 알게 하시고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우리 마음에 충만히 허락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그 은혜를 힘입어 날마다 자신의 정욕과 욕망을 꺾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면서 고난과 환란을 두려워 아니하고 믿음으로 순례의 길을 전진해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복된 저와 여러분들이 되게 하여주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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