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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성경본문 갈 6:16-18
성경본문내용 (16)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17)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18)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강설날짜 2012-01-11

2012년 1월 11일 한결교회 수요강설
갈라디아서 제32강

 

예수의 흔적

 

말씀 : 갈 6:16-18

 

이제 갈라디아서 마지막 강설입니다.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전체 갈라디아서의 내용을 다시 한 번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바울이 개척한 갈라디아 교회에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이 와서 주장하기를 예수님을 믿어야 할뿐 아니라, 할례를 받고 모세 율법을 지켜야지만 하나님의 참된 언약 백성이요, 최종적인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이 볼 때 그것은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는 중대한 도전이었습니다. 특히 이 사람들이 사도바울의 가르침을 거절하도록 하기 위해서 사도바울이 가지고 있는 사도라고 하는 권위에까지 도전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썼으니깐 쓸 때부터 마음이 굉장히 불편하고 근심이 많은 상태에서 써내려 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쓴 서신서에는 항상 친절한 인사말이 깃들여져 있는데, 그런 것 없이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간 유일한 서신서가 바로 갈라디아서입니다. 아주 격정적으로 이 갈라디아서를 써내려갔던 것입니다. 심지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있으면 천사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다.” 라고 하는 무서운 경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1-2장에서 자신의 사도권을 변증한 후에 3장에서부터 왜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는지 그 복음의 본질을 설명합니다. 결국 왜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고 아브라함의 언약자손이 되느냐 하면,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을 뿐인 것입니다. 오히려 율법은 예수님 외에는 살길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깨닫게 해주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의 저주를 대신 당해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 율법에서 해방되어 자유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바울 복음의 핵심입니다. 다른 무엇으로도 안 되고, 또 무언가를 보태야 할 필요도 없이, 오직 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고, 참된 아브라함의 언약의 후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충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자는 이제 율법에 자유하니깐 마음대로 죄지으며 살아도 됩니까? 바울은 그럴 수 없다고 말합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자녀로서 순종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2:20에서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라고 하는 심오한 고백으로 표현했고, 그것을 5장에서는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우리에게 있어서 갈라디아서의 메시지는 아주 간단한데, 그것은 두 가지입니다.


1) 우리는 행위와 책임이라는 율법적인 테두리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얼마나 행위의 법칙에 얽매일 때가 많습니까? 은혜를 누리기보다도 율법주의적으로 신앙생활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자기가 열심히 잘하는 것 같으면, 잘 한 것을 가지고서 자기 공로를 내세우고 자랑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또는 그 반대로 우리가 연약하여 죄를 범할 때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을 자격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형벌을 두려워하면서, 다시금 그 은혜와 사랑을 받는 자가 되기 위해(그러한 꼬투리를 내가 갖추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행함에 부단히 매달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종의 모습입니다. 종은 주인의 형벌을 두려워하면서 율법조문들에 얽매여 사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는 그런 데서부터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우리가 그렇게 행위에 얽매이고 율법조문에 얽매이는 데서부터 구출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종이 아니라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라고 하는 것이 행위와 책임이라고 하는 조건적인 관계가 아니라, 사랑과 은혜가 주장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하면 징계는 있을지언정 심판이나 형벌은 결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 아래 있지 법 아래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2) 그리고 두 번째는 십자가의 은혜 위에 굳게 서서 이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은혜의 복음을 제대로 선포하면, 이제 내 마음대로 막살자는 것으로 들리는 법입니다. 논리적으로는 그렇게 갈 수밖에 없습니다.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러나 그러한 방탕과 방종으로 나아갈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의 그 구속의 사건이 나의 옛사람을 죽이고 이제는 주님께 접붙여져서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는, 그러한 주님께 연합된 존재로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십자가 사랑 때문에, 마음에서부터 아버지를 사랑하고 경외하며, 자원해서 그 뜻에 순복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을 따라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울의 복음이란 결국 여기까지 가야 하는 것입니다. 구원받고 영생을 얻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으로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중심에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긴 시간 동안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여러 가지를 배웠는데, 한 마디로 하면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십자가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는 십자가만 바라보고 십자가만 의지하고 십자가만 자랑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우리가 이 십자가의 복음 위에 굳게 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흔들림 없이 이 은혜의 복음 위에 굳게 서서, 은혜 아래서 계속해서 자라감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열매가 우리의 삶 속에 풍성해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이러한 갈라디아서 전체 메시지를 담고서 16절을 말합니다.

 

(16)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갈 6:16)

 

바울이 전한 이 복음의 규례를 따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걸어가는 자에게 하나님의 평강과 긍휼이 있고, 그런 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참된 이스라엘입니다. 혈통적으로 유대인으로 태어나야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 길을 걸어가는 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이제 축도를 하다말고, 자기를 더 이상 괴롭게 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17)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무엇이 바울을 괴롭게 했습니까?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거짓교사들의 꾐에 넘어가서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하고, 그래서 결국 복음의 진리에서 떠나려 하는 그 일이 바로 사도바울을 가장 괴롭게 했던 일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는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두 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이 흔적이라는 것이 복음을 전하면서 받은 고난의 흔적들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돌에 맞은 흔적, 채찍을 맞은 흔적들, 몸에 난 여러 상처들이 바로 ‘예수의 흔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갑자기 왜 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까? 문맥을 보면, 갈라디아서 5-6장이 여러 가지로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 복음과 율법, 육체와 영이 대조를 이루고 있고, 6장 끝부분에서는 육체의 표와 예수의 흔적이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고추에 껍질을 잘라내어서 생긴 상처와 복음을 전하면서 생겨난 몸의 많은 상처들을 대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바울이 거짓교사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너희들은 고추에 껍질을 잘라낸 그 상처를 자랑하느냐? 그것을 언약백성된 표라고 하면서 그 육체를 자랑하느냐? 그런 것들은 다 쓸데없는 것들이다. 오히려 나에게는 예수의 흔적이 있다. 그것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상처들이 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참된 언약백성이라고 하는 것이 그런 할례와 같은 육체의 표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을 본받는 삶을 사는 것이 자신이 참된 언약백성이라고 하는 것의 증거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삶이란 한마디로 하면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주님의 고난에 참예하는 삶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서는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죽인 것”은 그냥 “예수의 죽음”으로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의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죽음을 우리도 또한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고난 받는 삶 속에서만 무엇이 나타납니까?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신자의 삶 속에 그리스도의 고난을 본받는 것이 없으면 그 속에 생명이 안 나타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활력이 없고, 맛을 잃은 소금처럼 경건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고난 속에서만 나타납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있어서 고난의 삶은 필수인 것입니다.


그리고 골로새서 1장 24절에서 그는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고난을 피하려하거나 벗어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뿐만 아니라 자신의 소명으로 알았습니다. 우리가 부름 받은 길도 바로 이런 길입니다.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고난의 길을 가는 데로 우리가 부르심을 입은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의 길로 간다는 것이 쉬운 것입니까? 정말 힘든 길입니다. 그 길은 좁고 협착한 길입니다. 그래서 찾는 이가 적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능히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고난은 옵션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참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육체에 어떤 표시들, 즉 오늘날로 말하자면 외적인 행위들로(교회 예배 오고, 헌상도 하고, 찬송도 부르고, 집사라는 직분, 목사라는 직분과 같은 그런 외적인 것들로) 가늠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고난 받는 삶을 살고 있느냐 하는 것으로 가늠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삶에 고난이 없으면, 우리 자신의 신앙을 깊이 고민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주님을 미워하여 죽였던 것처럼, 동일하게 세상은 주님께 속한 신자를 미워하고 핍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일 세상이 나를 미워하고 핍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엇을 말해주느냐 하면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속해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하면 세상이 우리를 미워할 수밖에 없습니까? 그것은 십자가의 도가 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DJ DOC 멤버인 이하늘 씨가 예능프로에서 옛날 멤버였던 박정환 씨에 대해서 좋지 않은 말을 해서, 박정환 씨가 이하늘 씨를 명예훼손죄로 고소한 사건이 한때 이슈가 되었습니다. 이 박정환 씨가 음치?(or 박치?)여서 멤버에서 아웃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박정환 씨가 그 방송을 보고 격분해서 이하늘 씨를 고소하면서 하는 말이 무엇이냐 하면, “평생에 씻을 수 없는 너무나 큰 상처를 받았다.”라고 했습니다. 음치라고 놀린 것이 그 사람에게는 평생에 씻을 수 없는 상처와 명예훼손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너희는 음치 박치다” 이런 차원이 아니라, “너희는 존재 자체가 다 쓰레기”라는 것입니다(만물보다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너희들은 바퀴벌레와 같이 혐오스러운 존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다 죽어 마땅한 극악무도한 죄인들이다 하는 것을 까발리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완전히 사람들의 자존심과 명예를 땅바닥에까지 짓밟아버리는 것이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이 십자가를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십자가를 전하는 우리를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미워하고 우리를 핍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 속하여서 십자가만 자랑하는 참된 신자는 반드시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조롱과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속한 직장에서 가정에서 친척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내 집 주변의 이웃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선을 행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면, 반드시 거기에는 이런 우리를 반대하거나 싫어하거나 조롱하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인 것입니다. 또한 회식자리에서 술 안 마신다고 하면 핍박하기도 하고, 늘 남에게 다 퍼주고 자기는 검소하고 가난하게 살아가면 사람들은 우리를 바보처럼 생각하고 조롱하곤 하는 것입니다. 또 때로는 이런 우리를 이용해먹고 등쳐먹기도 합니다. 또 만일 안 믿는 남편과 함께 살고 있는데, 주와 복음을 위해 여러 가지 손해를 보고 희생을 하면서 헌신하면, 광신자라고 하면서, 적당히 믿으라고 하면서 핍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위해서 살게 되면 이러한 여러 가지 고난이 따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세상으로부터 이런 미움과 조롱과 핍박을 받는 것이 없다면, 그것은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거듭나지 아니해서, 세상에 속해 있어서 그렇든지, 아니면 거듭나긴 했는데, 은혜를 많이 잃어버리고 영적으로 게으름과 나태에 빠진 사람들이 세상 가운데서 자신의 사명의 삶을 온전히 살아가지 않기 때문에 그렇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니깐 자기를 희생하고 헌신하기 싫고, 세상 속에서 핍박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자신의 그리스도인 됨이라는 자신의 분명한 색깔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지 않고, 십자가를 사람들에게 제시하지 않고, 그것을 숨기면서 살아간다면, 그러면서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간다면, 거기는 핍박이 있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결국 십자가를 버리고 육체의 정욕을 따라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가야할 십자가의 길을 가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은혜를 잊어버린 배은망덕한 삶입니다. 우리가 혹시 이런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속에 십자가가 있습니까?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정말 깨달아 알고 있습니까? 찬송가 가사처럼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를 사랑하며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를 붙들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 속에 이 예수의 흔적이 있습니? 우리가 우리자신을 정말 진지하게 돌아보고 만일 이 예수의 흔적이 없다면 우리는 정말 정신을 차리고 회개해야 합니다. “내가 고난의 삶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해서, 우리 마음에 십자가를 품고 세상에 나아가서 사명인의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이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깨닫게 하시고, 십자가를 마음에 품고, 이 십자가를 세상에 제시하며 당당히 고난의 길로 걸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두 번째로, 이 17절을 통해서 살펴볼 것은 ‘흔적’이라는 단어의 독특한 의미입니다. 이 흔적이라는 단어는 ‘스티그마’라는 단어인데, 단순한 상처를 의미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바울이 단순히 몸에 난 상처를 말하고 싶었으면, 이 단어 말고 분명하게 물리적인 폭력에 의해서 생겨난 몸의 상처라는 뜻의 단어가 따로 있는데, 그것을 사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평범한 단어를 쓰지 않고, 신약성경에서 한 번도 사용되지 않은 매우 낯선 단어를 사용합니다. ‘스티그마’는 노예의 몸에 새긴 낙인을 의미합니다. 당시 로마시대는 노예제도가 있었던 시대였습니다. 노예가 되는 이유는 전쟁에 져서 포로로 끌려와서 노예가 되는 경우도 있고, 빚을 져서 갚을 수 없게 되었을 때 팔려가는 경우도 있고, 또 부모가 노예여서 세습된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노예들이 그렇게 했던 것은 아니지만, 어떤 가문의 노예들은 도망하여 도망친 노예들끼리 무리를 형성해서 도적단으로 변하거나, 영화 스파르타쿠스의 경우처럼 대규모로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추노 드라마처럼) 그 노예들에게 문신을 새겼습니다. 화인(불도장)을 지져서 몸에 노예의 표시를 새겼는데, 그것을 ‘스티그마’라고 불렀고, 그렇게 하는 것을 ‘스티그마티제이션’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흔적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상처가 아니라 노예제도라는 배경을 깔고 있는 색깔이 분명한 단어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 표현을 통해서 의도한 바가 무엇이냐 하면, “나는 예수의 낙인을 가지고 있다. 나는 예수의 노예다. 고난을 받아서 생긴 몸의 상처들이 바로 예수의 노예로서 받는 낙인이다. 너희는 고추에 난 상처를 가지고서 언약백성됨의 표로 삼느냐? 나는 복음 때문에 고난 받아 생긴 상처들이 바로 내가 예수님의 노예이고 소유임을 표시해주는 표이다.” 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예수의 노예라고 하는 바울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은 거의 모든 서신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마다 등장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된 나 바울은...”, “예수의 종 된 나 바울은...” 여기서 ‘종’이라는 단어가 오늘날에는 거기다가 ‘님’자를 덧붙여서 “종님, 주의 종” 해서 감히 넘볼 수 없는 그런 높은 자리를 뜻하는 것이 되었는데, 그것은 다 후대의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고, 여기서의 ‘종’은 그냥 노예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 노예제도가 있었던 시대에서, 노예라는 것은 자기 소유도 없고, 자기 운명이 주인에게 철저하게 예속되어 있는, 그래서 자신 혼자서는 독자적인 자유인의 삶을 살 수 없는 그런 숙명과 필연 아래 놓여있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노예의 비참한 삶을 목격하는 사람들에게 바울이 자신은 그리스도의 노예다 라는 말을 하게 되어졌을 때, 그들에게는 이 말이 굉장히 이상하면서도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신이 예수님의 노예라고 하는 정체성을 철저하게 인식하면서 오늘 본문에 “내가 내 몸에 예수의 낙인을 가지고 있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비단 사도바울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입니다. 목회자만 주의 종이 아니라, 여러분들도 주의 종입니다. 주님의 노예들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가 말하는 바울의 복음이 자유의 복음이지만, 그 자유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내 마음대로 하는 자유가 아니라 율법의 노예에서 해방되어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는 아주 역설적인 자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울이 갈 2:20에서 아름답게 표현한 것입니다.

 

(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우리가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함으로써,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살아가던 그런 옛사람, 곧 세상의 길과 가치를 추구하던 내 옛사람이 죽었고, 주님의 새생명으로 살아가는, 그래서 이제 주님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새로운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었다라고 하는 것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노예로 살도록 그렇게 강요하셨거나, 두려움과 공포로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율법의 종이었을 때 그렇게 하는 것이고) 우리가 주님의 노예로 살지 않고서는 도저히 베길 수 없게 만드는 그 무언가가 복음 안에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십자가에 나타난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더럽고 추한 죄인인 자신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대신 못 박혀 죽으신 그 사랑 앞에서 우리는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잡아 이끄는, 피할 수 없는 어떤 숙명에 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 다들 어떻게 고백했습니까? “옛날에는 내 인생의 꿈과 목적을 가지고 나를 위해 살았지만, 이제는 주님의 위해서 사명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하고 다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은 어떠합니까? 지금도 바울처럼 자신이 예수님의 노예라고 하는 정체성을 철저하게 인식하면서 정말 주님의 노예답게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솔직하게 그렇지 못한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이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된 것은 바로 십자가의 은혜를 잊어버렸기 때문이고, 그와 동시에 우리 안에 있는 육체의 정욕이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우리 마음속에 기승을 부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십자가 앞에 나아가서 그 은혜를 회복하고 그래서 그 십자가로 이 육체의 본성을 죽이고 제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믿었다고 곧바로 예수님의 노예다운 삶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적국에서 포로를 잡아왔을 때, 그래서 그 사람이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했을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적국에서 어느 국가의 귀족 집안에 아주 귀한 외동딸을 끌고 왔습니다. 그래서 신분상으로는 졸지에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쁜 옷을 다 벗기고, 노예의 유니폼을 입혔습니다. 그러고 이제 꼼짝도 못하고 노예의 행세를 하고 있는 그 노예가 노예입니까? 신분은 노예인데, 그것이 써먹을 수 있는 노예가 아닙니다. 맨 날 섬김만 받으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걸레질도 못하고, 화장실 청소 하려면 구역질을 몇 번씩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노예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어떻게 합니까? 진짜 노예가 되기 위해서는 그녀를 노예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당시 로마시대에 벌써 그런 사람들을 노예로 훈련시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27)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7)

 

여기서 ‘복종하게 함은’은 다른 구절에서 나오는 ‘복종하다’와 같은 단어의 동사가 아닌 전혀 다른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의 뜻이 무엇이냐 하면, “노예 감독이 되다. 노예로 삼다, 노예처럼 다루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내 몸을 쳐” 할 때, 이 “친다”는 단어 역시 “노예들을 멍이 들도록 때리고 지칠 때까지 학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치는 것이 아니라, 때리고 학대해서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지금 그 당시에 있었던 로마의 노예감독 제도를 염두에 두고서 이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잡혀온 귀족집 딸을 노예감독이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렇게 때리고 무참히 학대하고 해서, 이제껏 살아왔던 자신의 삶의 방식과 습관들을 다 버리게 하고, 내가 귀족이었다라고 하는 자의식을 철저하게 무너뜨려서 서서히 종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의 말 한마디에 벌떡 일어나고, 주인 앞에서 벌벌 길 정도의 사람으로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예를 노예의 근성으로 꽉 차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때 그 노예가 진짜 노예입니다. 그리고 그 노예는 노예근성으로 충만하기 때문에, 주인 없이 혼자서 자유인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유가 주어져도 무서워서 갈 수도 없고, 주인 곁에서 붙어서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될 때, 그리고 주인의 말 한마디에 두려워 떨고 그런 존재가 될 때, 그가 비로소 노예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우리가 무늬만 하나님의 종이라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종입니까? 물론 예수님을 믿는 즉시로 신분은 하나님의 종이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 처음 믿을 때는 “아~ 이제 내가 예수님의 노예로 살아야겠구나” 하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렇게 느꼈다고 할지라도, 그 느낀 것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도 아니고, 한번 느꼈다고 그 사람이 예수의 노예 됨으로 충만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노예됨으로 충만해지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그 사람이 노예로 길들여져서 결국은 자유분방하고 하나님 앞에서 건방지기 짝이 없는 자아중심적인 성향들이 다 깨어지고, 노예근성을 가지고서 주인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그런 노예로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바울이 날마다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킨다고 말한 것처럼, 우리 마음속에서 길길이 날뛰는 그런 자신의 옛사람의 본성의 멱살을 잡고 그것을 혹독하게 다루고 학대해서 그 죄악된 본성을 완전히 제압해야지만, 우리는 주님의 노예근성으로 충만한 그런 새로운 본성으로 갱신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날마다 주님께 은혜를 많이 받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제대로 된 주님의 노예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은혜를 받기 위해 하나님이 정하신 은혜의 방도인 말씀과 기도에 매진해야 됩니다. 그렇게 날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서 자기가 깨어지고 그리스도의 노예됨으로 충만해질 때, 우리는 바울과 같이 그리스도의 노예로서 주님의 뜻에 복종하며,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고, 그러한 사명을 감당할 때 당하는 수많은 고난을 능히 감당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과 같이 그 고난의 흔적을 예수의 노예됨의 표로, 영광스러운 상처로 여기면서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날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알게 하시고, 그 은혜로 육체의 본성을 제압하며, 그리스도의 노예됨으로 충만한 자로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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