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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손재호
성경본문 고후 7:1-7
강설날짜 2014-06-25

2014년 고린도후서 공부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말씀:고린도후서 7:1-7

 

우리는 지난 시간에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는 바울 사도의 권면의 말씀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사단의 일군들인 거짓 선생들과 사귀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고린도후서 7장 말씀을 공부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2절 말씀을 보면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가 아무에게도 불의를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고린도후서 6:11-13절 말씀에서 권면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는 말씀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바울 사도에 대해서 마음이 좁아지고 그를 영접하지 아니한 이유를 우리는 2주 전에 살펴봤습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바울을 향하여 마음이 좁아진 것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멍에를 같이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6:11-18절 말씀을 보면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믿지 아니하는 자’란 교회에 나오지 아니하는 그런 불신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단이 광명의 천사처럼 위장하듯이 겉으로는 믿는 모양 같은데 속으로는 믿지 아니하는 바울이 떠난 뒤에 들어온 거짓 선생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마음이 바울에게서 좁아진 것은 바로 이와 같이 겉으로는 믿는 자 같은데 실제로는 믿지 아니하는 거짓 선생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2절 말씀을 다시 보면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가 아무에게도 불의를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고 합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1절 말씀을 보면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라고 했습니다(고후 7:1). 그런 후에 바울 사도는 이제 다시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았고,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다고 합니다.

 

바울 사도가 왜 자꾸만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향하여 ‘우리를 향하여 마음을 넓히라’,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고 하는 것입니까?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그냥 발에 먼지를 떨쳐 버리고 가면 되지 않습니까?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전도 여행 보내시면서 누구든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발에 먼지를 떨어버리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9:5절을 보면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나가 각 촌에 두루 행하여 처처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더라”고 했습니다(참조. 마 10:5-15, 막 6:7-13).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파송하면서 제자들에게 너희를 영접하면 너희가 그 집에서 먹고 마시고, 너희를 영접치 아니하면 발에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0:10-12절 말씀에도 보면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 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70여명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것이 바로 심판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볼 때 열두 사도들이나 70여명의 제자들을 영접하는 것과 영접하지 않는 것의 차이가 얼마나 무서운 것입니까?

 

그런데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왜 그렇게 하지 않고 다시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고 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자신이 얼마나 비천한 자 인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주님께서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오래 참아주셨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바리새인으로 있을 때에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예수님을 이단의 괴수로 보고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을 잡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들이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메섹 도상으로 찾아오신 것입니다(행 9장).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부활의 권능으로 바울을 사로잡으셔서 그를 이방의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사도행전 9:15절에 보면 “주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원수로 행하던 자신을 오래 참아주신 주님의 사랑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가 자신에게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예수님께 행한 일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아주 약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과 같은 사도가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이 아쉬워서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에게 이렇게 애걸하듯이 다시 자신을 영접하라고 하는 것입니까? 바울 사도는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고 하면서 우리가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지 않았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았고,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지 않았다고 합니다(2). 우리가 인간적으로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바울 사도의 이 고백대로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향해서 불의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해롭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을 속여 빼앗지도 않았습니다. 실제로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불의를 행하고, 해롭게 하고, 속여 빼앗은 자들은 바로 고린도교회가 기쁨으로 용납한 거짓 선생들이었습니다(고후 11:19-20).

 

그런데도 바울 사도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3절을 보면 “내가 정죄하려고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로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정죄하려고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무슨 말을 할 때에 정죄하려고 하는지 아닌지는 척 들어보면 압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바울 사도가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심하게 책망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죄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말한 것입니까?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다고 합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바울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그들은 함께 죽고 함께 살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란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운명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함께 죽고 함께 산다고 해서 바울이 죽을 때에 고린도교회 교인들도 함께 죽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한 지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29절 말씀을 보면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밖으로 오는 환난만이 아니라 속으로 눌리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고린도교회를 위한 근심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약하면 자신이 약하고, 누가 실족하면 자신이 애타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있는 지체라면 반드시 이런 모습이 나타날 것입니다. 발가락이 아프면 손가락이 주물러 주고, 달리기를 해서 다리가 고생해서 일등을 하면 손이 상을 받습니다. 이처럼 함께 죽고 함께 살 운명이 바로 성도의 관계인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자신을 오해한다고 할지라도 한 몸이 되게 하신 주님께서 지금도 일하고 계시기에 마음으로 영접할 수 있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4절 말씀을 보면 “내가 너희를 향하여 하는 말이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라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하는 말이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할 것도 많다고 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담대하게 말하는 것은 한 몸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몸이 아니라면 그럴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담대하게 말하고서는 근심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심하게 말해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낙심을 하지는 않았는지, 그들의 마음이 상해서 더욱 닫히지는 않았는지 염려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디도가 바울에게 옴으로써 모든 환난 가운데서 위로와 기쁨이 가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랑할 것도 많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 사도에게 있었던 환난과 위로가 무엇이었습니까? 5절 말씀을 보면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일행이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 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였다고 합니다.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다고 합니다. 그 다툼과 두려움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잘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바울의 모습은 평소 우리가 기대했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우리는 바울 사도 그러면 죽음도 불사하고 용감하게 열심히 복음을 전한 불굴의 투사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바울도 수많은 환난과 핍박 중에서 두렵고 떨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보낸 후에 그들의 소식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디도가 속히 오지 않고 그 오는 것이 더딤을 보고서 혹시 사고를 당했나,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상처를 받았나 노심초사 한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에 신앙이 좋은 상태를 세상의 그 어떤 환난과 핍박이 와도 초연하게 모든 것을 초월한 것처럼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름에 달 가듯이 유유자적함도 아닙니다. 치열함 싸움이 있고 두려움과 근심이 있습니다. 물론 세상에서 어떻게 잘 먹고 잘살까 하는 그런 근심과 싸움은 아닙니다. 온갖 환난 속에서 두렵고 떠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그렇게 두렵고 떨면서 무슨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까? 고린도전서 2:1-5절 말씀을 보면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 했습니다. 약하고 두렵고 떨었지만 전도란 성령의 나타남으로 되는 것이기에 자신이 그런 모습으로 부인되어 지고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지난번에도 보았습니다만 거짓 사도들은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완벽해 보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따르는 자들이 하나님의 능력인 십자가에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사람에게 머물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을 보면 도저히 사도처럼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가 바울에게서 마음이 좁아지고 그의 사도됨과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바울이 마게도냐로 가게 되었습니까? 고린도후서 2:12-13절 말씀을 보면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치 못하여 저희를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드로아에서 디도를 기다리다가 오지 않자 다음 약속 장소인 마게도니아 지역으로 가서 디도를 기다린 것입니다. 가는 곳마다 환난과 핍박을 당하지만 고린도교회의 소식을 가지고 올 디도로 인하여 또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드디어 디도를 만난 것입니다.

 

6-7절 말씀을 보면 “그러나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의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저의 온 것뿐 아니요, 오직 저가 너희에게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고함으로 나로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께서 디도의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다고 합니다. 디도가 가지고 온 소식은 고린도교회가 바울의 편지를 받고서 회개하고 또 디도가 고린도교회에서 받은 위로를 전하여 바울이 위로를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고린도교회가 바울을 사모하고 애통하고 바울을 향하여 열심이 있는 것을 고함으로 위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문제가 완벽하게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 사도는 디도가 가지고 온 고린도교회의 소식을 인하여 위로를 받았다고 합니다.

 

바울 사도의 삶을 보면 죽도록 수고를 합니다. 자신의 사사로운 욕심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복음을 전하면서 외적 내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당합니다. 밖으로는 환난과 다툼과 자지 못함과 잘 먹지 못함으로 육체는 편치 못하였고, 속으로는 교회를 위한 염려로 두려움과 근심이 가득하였습니다. 이렇게 수고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무엇을 해 주셔야 위로가 되겠다고 생각하십니까? 목회성공, 세상의 자랑입니까? 그러나 바울에게는 이런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디도가 가지고 온 고린도교회가 회개하여 다시 복음을 사모하게 되었다는 그 소식이 바울로 하여금 기쁨과 위로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 소식이 왜 바울에게 기쁨과 위로가 되는 것입니까? 데살로니가후서 1:3-12절 말씀을 보면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찌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며,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너희로 환난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그 날에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얻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면 복음으로 환난을 당하는 자는 안식으로 갚으시고 복음을 핍박하며 환난 당하게 하는 자를 환난으로 갚으신다고 하십니다. 그 환난은 영원한 멸망의 형벌인 것입니다. 그러한 심판과 은혜를 바울 사도가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교회가 자신의 편지를 받고 회개하고 다시 복음에 대하여 사모함이 일어나는 것에 대하여 그렇게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지금 무엇이 위로가 되십니까? 바울 사도의 이 위로가 우리의 위로가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자신이 비천한 자임을 모르는 사람은 오늘 말씀이 하나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여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아는 사람이라면 바울처럼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자신이 얼마나 비천한 자인지를 알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비천 한자를 위로하시는 우리 주님의 위로가 우리의 심령에도 충만케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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