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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성경본문 갈 3:1-5
성경본문내용 (1)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2)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3)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4)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5)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강설날짜 2011-08-31

2011년 8월 31일 한결교회 수요강설

갈라디아서 제13강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말씀 : 갈 3:1-5

바울은 갈라디아서 1-2장에 걸쳐서 자신의 사도권과 복음을 변호했고, 2장 끝부분에서는 바울이 결국 하고자 하는 말, 곧 복음의 진수의 내용을 간략하게 서술했습니다. 그리고 3장부터는 그것을 증명하는 부분입니다. 왜 사람이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될 수 없는지, 왜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인지, 그리고 율법을 주신 목적이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오늘 본문 3장 1-5절까지는 그들의 경험에 호소함으로써 복음을 증명하고 있고, 6-18절까지는 성경말씀에 기초해서, 특별히 아브라함 이야기를 통해서 논증해갑니다.


1절에 보면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는 질문으로 본 단락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모든 문장이 다 질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총 6가지의 질문이 나오는데, 그 질문들이 하나같이 책망이 섞인 매우 격앙된 어조의 질문들입니다. 1절에 보면 한글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오!’하는 감탄사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에서는 ‘형제들아’라고 따뜻하게 불렀는데, 여기서는 그냥 ‘갈라디아 사람들아’라고 차갑게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 대하여 ‘어리석도다’라고 강력하게 책망합니다. 이것이 두 번씩이나 나옵니다. 3절에도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라고 했습니다. 이 ‘어리석다’라는 말은 생각 없이 행동했다가 큰 낭패를 보는 사람에게 쓰는 말입니다. 즉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영적 분별력을 상실한 채 아무 생각 없이 거짓교사들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 생각 없는 사람들아! 생각 좀 해라”라고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1절을 계속해서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여기서 “밝히 보이거늘”이라는 말은 형상을 새겨서 또는 그림을 그려서 눈으로 확실히 볼 수 있게끔 나타내는 것을 말합니다. 즉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복음의 진리를 눈에 선명하게 보일정도로 아주 명확하고 분명하게 전달했습니다. 마치 그들 앞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처럼 그렇게 생생하게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그들 눈에 밝히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변절하였다는 사실에 바울은 이해할 수 없어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꾀더냐?”라는 말은 마술과 관련된 단어입니다. 마술로 유혹하고 꾀어서 사람을 호리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거짓교사들이 진짜 마술로 사람을 호렸다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마술처럼 사람을 속여 혹하게 해서 거짓교훈에 빠지게 했다는 말입니다.


결국 1절을 통해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는데 왜 거짓교사들의 가르침을 따라서 율법의 행함으로 의롭게 되고자 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이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은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했고 전적으로 무능력하다라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은 인간 스스로의 노력과 행함으로는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인간은 자신이 죽을 죄인이라는 사실과 오직 이 십자가의 은혜로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될 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인간의 모든 노력과 행함과 공로를 부정하고 배제합니다. 만일 사람이 율법의 행함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곧 십자가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위와 십자가는 함께 양립할 수 없는 그런 것입니다. 물론 거짓교사들은 한 번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부정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반드시 이 예수님의 대속의 사건을 믿고 죄 사함의 은혜를 받아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과 더불어서 할례를 받고 모세 율법을 지켜서 유대인이 되어야만 참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사실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완전히 무효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제시하지만, 그것은 허수아비로 세워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우리 대신 죽으셨다”라는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을 믿고 받아들여서, 주님과 함께 죽고 사는 체험을 했다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감히 “그 대속의 은혜에 또 다른 것을 보충해야 되겠다”라는 생각을 전혀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정말 생각 없이 행동하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런데 그 짓을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했으니, 바울이 얼마나 분노하고 당혹스러워할 수밖에 없었겠습니까? 아니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밝히 보이는데 왜 거짓교사들의 가르침에 미혹되었느냐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렇게 생각 없는 사람이냐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갈라디아 교회에만 있었던 일입니까?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얼마든지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교회사적으로 보면 늘 이 문제가 교회에 나타나서 교회로 하여금 변절하도록 한 경우가 끊임없이 이어져왔고, 오늘날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잘 돌아보아야 합니다. 정말 내가 이 십자가의 공로가 나의 구원에 있어서 충족하다는 것을 믿고 오직 십자가만을 믿고 신뢰하고 의지하고 사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혹시 내가 이 십자가의 공로를 믿어야 할뿐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의 말씀들을 잘 지키고, 그렇게 내가 제대로 살고, 바르게 살아야 결국 구원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만일 그렇게 생각하고 신앙생활하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아무리 말로는 “오직 은혜로 오직 십자가로 오직 믿음으로”를 외쳐도, 사실상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십자가를 부정하고 우리의 공로와 행함을 내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가 밝히 나타내고 있는 의미를 늘 분명하게 깨닫고 인식하면서 신앙생활 해야 합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내 감정에 따라, 내 기분에 따라 왔다 갔다 하는 신앙생활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생각 없는 사람이 되지 말고 늘 십자가의 의미를 생각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십자가에 대해서는 다 아는 사실인데...’ 하지 말고, 다 알고 있어도 다시 한 번 십자가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가 명백하게 보여주는 그 의미에 대해서 깊은 깨달음이 있을 때,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반드시 놀라운 변화가 있게 될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과, 십자가에 나타난 주님의 지극한 사랑과, 오직 이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깨닫게 될 때에 우리는 비로소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쓸데없이 방황하거나 허튼 짓을 안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늘 정신차리고서 십자가를 생각하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그냥 기분대로, 아무 생각 없이 신앙생활하면,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갈라디아 성도들처럼 어리석은 짓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깊이 생각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이제 바울은 그들의 경험에 호소합니다. 두 가지 경험에 호소합니다. 첫 번째는 2절에서처럼 처음 예수님을 믿었을 때 성령을 받은 것에 호소합니다. 즉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서냐 아니면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을 믿어서냐”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경험하는 수많은 성령체험에 호소합니다. 4절에 보면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괴로움을 받는다’라는 동사는 사실 의역된 것입니다. 이 동사의 원래 의미는 단순히 ‘당하다, 겪다, 경험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괴로움을 당할 때도 쓰이지만, 긍정적인 경험을 할 때도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여기 ‘이같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여기서 말하는 경험은 복음으로 인한 고난을 말하는 것이기 보다 앞서 바울이 호소한 갈라디아 성도들이 경험한 수많은 성령체험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보다 적절해 보입니다. 이것이 대부분의 학자들이 취하는 견해입니다. 왜냐하면 갈라디아 교회에 많은 핍박이 있었다는 정황을 찾기가 어렵고, 문맥상으로도 긍정적인 성령체험으로 보는 것이 보다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4절을 다시 해석하면 ‘너희가 이같이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인한 많은 성령체험을 헛되이 경험했느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경험은 5절에서 동시에 나타납니다.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 성령이 그들 안에 계속해서 내주하시면서 능력의 기적을 행하신다는 말입니다. 지속적으로 성령의 외적인 은사와 기적을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어떤 성령의 능력의 기적을 체험을 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바울과 갈라디아 성도들 본인들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 두 가지 경험에 바울은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하는 말은 이런 말입니다. “내가 율법 없는 복음, 할례 없는 복음을 전했을 때, 너희가 열렬히 환영하여 받아들였고, 그렇게 믿고 받아들였을 때,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였느냐? 성령의 능력의 기적을 체험하지 않았느냐? 성령이 늘 너희 안에 계셔서 성령께서 주시는 모든 신령한 은혜와 축복을 경험하지 않았느냐? 그때를 잘 떠올려보아라. 그때 그런 은혜를 받고 누린 것이 할례를 받고 모세 율법을 지켰기 때문이냐? 아니지 않느냐? 듣고 믿음으로 받은 것 아니냐?”라는 것입니다.


이 ‘성령’이라는 단어가 갈라디아서 3장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느냐 율법의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느냐” 하는 문제에서, 갑자기 왜 성령을 받는 얘기가 나오는 것인가 의문이 들 수도 있지만, 사실 이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하면서도 또한 적절한 타이밍에 나온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성령을 받았다”라는 것은 성령께서 이 사람이 구원받은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을 인치시고 증거하셨다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8)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8)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많은 유대인들이 회개하여 구원을 받았고 또 성령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때까지 베드로의 생각에는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는 유대인들에게만 이 은혜가 주어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강림과 임재의 약속은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고넬료 사건을 통해서 이 생각을 깨트리십니다. 사도행전 10장으로 가보겠습니다.

“(44)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45)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46)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47)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48)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 저희가 베드로에게 수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행 10:44-48)

베드로가 생각한 절차는 이들이 마음으로 돌이켜서 먼저 할례를 받고 모세 율법을 지킨 후에, 곧 유대인이 된 후에,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성령이 임할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이런 절차 없이 곧바로 그들에게 임하셨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놀란 것입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느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이 사람이 비록 이방인이라도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성령께서 친히 인 치신 사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망설임 없이 그에게 세례를 주어 교회의 정회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만일 베드로가 세례를 주지 않았다면, 그것은 곧 성령을 대적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방인에게 할례 없이 곧바로 세례를 주는 것이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고정관념에는 크게 어긋나는 것이지만, 감히 어떻게 하지 못하고 성령님의 뜻에 순종하여 세례를 베풀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유대인들이 이 소식을 듣고 분개합니다(2-3절). 그래서 베드로가 길게 해명하면서 마지막에도 앞에서와 똑같은 말을 합니다.

(15)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16)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17)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행 11:15-17)

여기서 “능히 금하겠느냐”와 “능히 막겠느냐”는 같은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벽을 허무셨으니 누가 능히 그 뜻에 대적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무도 대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이 베드로의 말을 듣고서 이방인들에게도 회개를 주셨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했던 것을 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 벽 허문 것을 무엇을 통해서 나타내셨습니까? 이방인에게도 유대인들과 똑같이 성령을 허락하심을 통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았다 라는 것은 바로 이 사람이 구원받은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성령께서 인쳐주심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바로 이 갈라디아 성도들의 경험에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 없는 복음 할례 없는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받아들였을 때에 성령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런데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 뭐 또 다른 추가할 것이 있는 것처럼, 할례를 받고 모세 율법을 지키려고 하느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 스스로의 경험을 되돌아보도록 함으로써 사람이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율법의 행함이 아닌 오직 믿음으로 되는 것임을 그들 스스로 깨닫도록 돕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믿었을 때를 돌아보십시오. 그때 여러분에게 어떤 성령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었습니까? 성령을 받을 만한 어떤 선한 행함의 조건을 제시했습니까? 어떤 꼬투리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우리는 성령이 있는 줄도 몰랐고, 성령을 받으려고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목자님이 하도 오라고 해서 그냥 못이기는 척하면서 앉아 있다가, 말씀을 듣다가 보니깐 나도 모르게 눈물 콧물 다 쏟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고, 그래서 성령이 내 안에 오시는 놀라운 체험을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을 주신 것은 전적인 은혜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체험한 장본인이기 때문에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부정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은혜로 받았다면, 계속해서 은혜로 누려야 하는데, 시작은 성령으로 해놓고서 그 이후는 육체로 마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호소하는 두 번째 측면이 바로 이 성령의 내주하심과 능력으로 행하심입니다. 성령의 내주하심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리게 되는 모든 신령한 복의 총체를 말합니다.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의 죄 사함의 은혜를 계속해서 적용시켜주시고, 말씀을 통해서 그 은혜와 사랑을 깨닫게 해주시고, 삼위 하나님과 교제케 하시고, 고난 가운데서 우리를 위로하시고, 장차 받게 될 유업을 보증해주시고, 우리를 양자삼아주시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시고, 죄 짓고 방황할 때는 탄식하시며 중보기도해주시고, 또 우리로 회개케 하시고, 늘 진리로 인도하시고, 우리로 포기치 않고 끝까지 견디고 인내하게 해주셔서,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 그 앞에 흠이 없이 거룩한 자로 반드시 서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한번 성령이 임하셨으면 다시 떠나가시는 일이 없으시고, 빌 1:6 말씀에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라고 하였듯이 성령께서 끝까지 우리를 인도해 가시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은 이 모든 성령의 축복을 받아 누리고 경험한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은 당연히 듣고 믿음으로 이러한 모든 은혜의 축복을 누려왔던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고 또한 믿음으로 성령을 누렸다는 것입니다. 시작할 때만 믿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3절의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는 굉장히 어렵고 중요한 구절이기 때문에 다음 주에 살펴보기로 하고, 우선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성령의 임재하심과 내주하시는 은혜를 받고 누린다는 것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그러면 오직 믿음으로 이런 은혜가 주어진다는 것인데,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받았다는 말은 우리에게 어떤 조건이나 꼬투리가 없고, 오직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와 긍휼로 주어졌음을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자 하셔도 내가 믿지 않으면 안 주신다. 결국 인간이 믿어야 하는 것이다. 믿음은 우리 인간이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이다.”라고 말합니다. 내가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느냐 주어지지 않느냐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처음 받을 때 뿐 아니라, 그 이후에도 우리가 끝까지 잘 믿어야 성령께서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계속해서 계신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알미니안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이런 주장을 합니다. 물론 우리가 믿음으로 성령을 받는 것은 분명합니다. 믿지 않는 자에게 이런 은혜가 주어질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마치 성령을 “받고 안 받고”가 사람의 마음 상태에 좌지우지 되는 식으로 이해한다고 한다면, 내가 믿었기 때문에 성령을 받는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성경을 크게 곡해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믿음과 대조되어 나오는 말은 율법의 행위입니다. 율법의 행위란 인간 스스로의 행위로 구원받기 위한 모든 노력과 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이 율법의 행위와 대조된다는 것은 믿음이 이러한 구원받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내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 내가 믿어주었다라는 식의, 다시 말해서 인간 스스로가 하나님께 내세워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나를 구원하시지 않으면 안 되도록 요구할 수 있는 그런 식의, 공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도리어 믿음이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인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히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만을 의지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믿음으로 성령을 받는다고 말할 때에 초점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내가 믿었다”라는 믿음 자체에 초점이 가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믿느냐, 무엇을 믿느냐 하는 그 믿음의 대상과 내용에 초점이 가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오직 인간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 오직 십자가의 공로로만 구원받는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는 자에게 구원의 은혜가 주어지고 성령이 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성령을 받는다는 말은 성령을 허락하신 그 근거와 이유가 나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당신의 주권적이고 무조건적인 은혜로 허락하신 은혜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공로로 주어진 것입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13)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14)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갈 3:13-14)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다는 말은 우리를 책임이라는 테두리에서 구원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책임이라는 것은 원인과 결과의 법칙이고 인과율에 따른 것입니다. 우리는 결과를 얻으려면 조건을 만족시켜야 하는 법칙 속에 있는 존재이고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율법의 저주 아래 있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이렇게 책임의 테두리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우리를 건져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대신 율법의 저주를 당해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이러한 책임의 테두리에서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성령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더 이상 책임의 관계가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조건을 제시하고 만족시킬 때 하나님이 무언가를 해주시고 하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은 것이 무언가 우리에게 꼬투리가 있어서가 아니다 라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것이고, 그와 더불어 성령께서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계속해서 내주하시고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심도 우리가 그만큼 잘 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실망시키지 않고 그 기대에 부응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십자가의 은혜와 공로로 인해서 우리에게 약속의 성령이 허락된 것이고, 또한 값없이 무조건적으로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심으로써 그 공로로 허락된 것이라면, 그 공로로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주신다라고 한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는, 우리가 어느 때나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성령님의 크신 은혜를 구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잘할 때만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형편없을 때도 주님의 자비하심만을 바라보면 눈물을 머금고 주님께 나아가면 주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받아주시고 우리에게 성령의 충만의 은혜를 주시고, 우리의 형편없는 신앙을 고쳐주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안 나간다는 것입니다. 안 나가는 것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신이 형편없을 때는 면목이 없어서 못나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가기 싫어서 안 나갑니다. 왜요?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살아야 할 텐데,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정욕은 그렇게 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는 하나님께서 말씀의 강력한 책망을 통해서 회개케 하시고 돌이키십니다. 그래도 안 되면 인생 채찍과 막대기를 통해서 우리를 돌이키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앞서 말씀드린 자신이 형편없어서 면목이 없어서 못나가는 경우입니다. 하나님께 나가고 싶은데, 자신의 죄 때문에 면목이 없어서 못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 번째로 말씀드릴 문제와 사실상 동일한 것입니다. 두 번째 문제는 나아가려고 하기는 하는데, 자꾸 자신에게 조건을 만들고서야 나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배운 것처럼 이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십자가를 부정하는 것이고, 율법의 행위를 다시 도입하는 것이고, 책임의 테두리에 있던 과거로 퇴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실 이런 신앙생활을 할 때가 많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바울의 꾸중과 책망은 오늘날 우리를 향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다시 율법을 도입하면 그리스도 십자가는 없어지고, 은혜는 없어지고, 성령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율법과 죄에 종노릇하는 비참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믿음으로 거듭난 자라고 한다면, 주님과 함께 죽고 산 자라고 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책임의 테두리 안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벗어났고, 은혜 아래 있습니다. 이미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리고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주시는 모든 신령한 축복들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어떤 조건을 제시하면 그때서야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공로를 의지해서 구하기만 하면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나에게서 어떤 조건을 만들어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지 마십시오. 내가 나를 얼마만큼 닦고 준비하고 조건이 완성되면 하나님이 응답하시겠지 그러니 말고, 지금 당장, 하나님께 나아가서 구하십시오. 그리고 자신의 죄 때문에 면목이 없고, 마음이 죄로 인해서 쓰리고 아파도, 주저하지 말고 예수님께 나아가십시오. 이것이 쉽지 않지만, 그렇게 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의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솔직하게 하루에도 12번 예수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12번 부인하셨으면 13번째 돌아설 수 있습니다. 오늘 회개했는데, 내일 배신 때리면 어떡합니까? 그러면 또 한 번 돌아오면 됩니다. 우리는 배신한 것보다 더 많이 돌아오면 됩니다. 굉장히 도덕률폐기론적으로 들리고, 또 사실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이미 말이 안 되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의 손에 의해서, 피조물을 위해서 죽는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이미 거기서부터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인과율, 조건과 결과의 법칙이 이 십자가에서 깨졌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그러한 인과율의 법칙이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와 자식이라고 하는 사랑의 법칙이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무조건적인 은혜와 사랑으로 말미암아서,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라고 하는 그 영원하고 충족한 공로로 인해서,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 안에 영원히 내주하시면서 모든 신령한 축복을 은혜로 값없이 주시는 것이고,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고 한없이 끝없이 용서해주시고 우리를 품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자신의 죄 때문에 면목이 없어도 망설이지 말고, 오늘 함께 기도하면서 이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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