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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성경본문 갈 4:21-5:1
성경본문내용 (21)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22)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 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23)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24)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25)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26)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27)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28)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29)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30)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 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 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31)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 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1)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강설날짜 2011-11-09

2011년 11월 9일 한결교회 수요강설

갈라디아서 제23강

 

약속의 자녀의 의무

 

말씀 : 갈 4:21-5:1

 

이 하갈과 사라의 비유에서 초점이 되는 것은 누가 우리 어머니냐 하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의 어머니냐 하는 것이 아브라함의 자손됨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다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단순히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해서 다 그의 자손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식으로 치면 이스마엘도 자손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종인 하갈에게서 태어났으므로 종일뿐이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났습니다. 인간 스스로의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보겠다고 하는 교만과 불신앙의 결과가 바로 이스마엘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의미에서 아무리 아브라함의 혈통적 자손이라 하더라도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를 붙잡지 않고 사람의 행위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모든 자들은 다 이스마엘과 같이 종의 자녀인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것이 바울이 말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자유한 여자 사라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자유한 아들로서 참 아브라함의 자손이 됩니다. 무엇보다도 이 이삭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전혀 아기를 가질 수 없는 전적인 불능 상태에서 기적적으로 가지게 된 아들이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약속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간섭하심을 통해 된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인간이 협력하거나 보탠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렇게 약속을 따라 은혜로 태어난 이 이삭이 아브라함의 참된 자손으로서 아브라함의 모든 재산을 유업으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구속의 원리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로 하지 않고 하나님 자신의 주권적인 언약으로 자신의 백성들을 구원해 가시는 것입니다. 즉 구원은 사람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은혜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우리의 행위나 우리의 자격이나 조건을 보시고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은혜언약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 앞에서 자신의 전적무능력과 죄인 됨을 깨닫고, 오직 십자가의 은혜만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들이 바로 오늘날의 이삭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이 사라의 자녀이고, 아브라함의 참 자손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라를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교회를 말하는데, 은혜로 말미암아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어머니가 바로 교회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만이 오직 은혜의 복음을 가르치기 때문이고, 이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가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날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양육받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교회는 우리의 어머니인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로부터 태어난 자들만이 자유한 아들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를 태어나게 하시고, 양육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거듭나게 하시고 양육하시는데, 바로 이 교회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교회가 나의 어머니인줄 알고 아이가 엄마 품에 항상 있는 것처럼 교회 안에 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교회의 가르침을 듣지 않고, 오직 은혜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고, 다른 데로 가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갓난아이가 엄마 곁에서 떨어져서 혼자 있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고 다른 데로 떠난 사람은 (끝까지 그렇게 살면) 결국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직 교회의 가르침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교회 안에 거하는 자들만이 마지막 때에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절대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만 구원이 있다고 한다면 그러면 우리의 자연스러운 질문은 교회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냥 간판에 교회라고 적혀 있으면 다 교회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죠? “이것이 교회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시금석은 바로 “은혜의 복음만을 가르치느냐 아니면 은혜에 행위를 덧붙이느냐”하는 것입니다. 그냥 하나님 얘기하고 예수님 얘기하고 성경 얘기한다고 해서 다 교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로마가톨릭의 가르침하고 우리의 가르침하고 같은 성경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비슷하게 보여서, “아 거기도 구원이 있을 수 있겠구나”하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같은 하나님, 같은 예수님 말해도, 오직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지 않으면, 그것은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본인들은 자신들이 참 교회라고 말하겠지요. 그러나 이 갈라디아서의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의 가르침은 저주받을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러면 대한예수교 장로회 간판 달린 교회에 다니면 안심이냐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간판은 교회라고 해놓고서, 대한예수교 장로회라고 해놓고서, 얼마든지 로마 가톨릭적으로, 알미니안적으로 가르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가르치면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그래서 아무 교회나 다닌다고 해서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의 복음을 가르치는 교회에 다녀야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성도가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갈 때, 자기가 알아서 아무 교회나 가면 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목회자의 지도를 받아서 바른 가르침을 하는 교회로 이명 되어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교회를 다니든지 그 교회의 가르침이 어떠한가 분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오직 은혜의 복음만을 증거하는 교회에 소속되어 있다 하더라도 정말 마음으로 그 은혜의 복음을 깨닫고, 그 은혜의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마찬가지로 구원받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냥 매주 교회 온다고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다니면서 얼마든지 말은 항상 “은혜 은혜” 하면서도, 실상은 은혜의 복음을 거절하고 율법주의적으로 신앙생활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교회의 자녀가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교회가 어머니가 아니라, 사실은 하갈이 그의 어머니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이 교회의 가르침이 오직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가? 나는 이 은혜의 복음을 믿는 자인가? 내가 정말 은혜로 말미암아 거듭나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인가? 나의 어머니는 사라인가 하갈인가?”하는 것을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정말 은혜의 복음을 믿어 영접했습니까? 정말 하나님의 진노와 천벌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주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고 오직 그에게만 소망을 두고, 그 십자가의 은혜만을 의지하십니까? 그 은혜를 깨달아 알고 계십니까? 그 은혜를 경험하셨습니까? 우리 자신을 잘 돌아보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에게 그런 경험이 없다면, 우리는 거듭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면 심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러한 경험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리고 이 은혜에 대한 겨자씨 한 알만한 진실한 믿음이 있다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이삭과 같이 약속을 따라 난 자유한 아들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 정체성을 굳게 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지금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의 정체성을 분명히 확인시켜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바울이 처음 복음을 전했을 때, 환영하며 이 은혜의 복음을 영접했고, 성령체험도 했는데, 지금은 이러한 자신들의 정체성을 잊어버리고, 율법의 종이 되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지금 급하게 편지를 써서 ‘너희는 종이 아니라 아들이다’라고 함으로써 다시금 그들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거듭나지 않은 자가 스스로 거듭났다고 생각하고 착각하고서 살아가는 것도 참으로 큰 문제이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갈라디아 성도들 같이 은혜로 말미암아 부르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은혜의 통치와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도리어 그 은혜를 역행해서 율법주의적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도 큰 문제인 것입니다.


사실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온전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늘 구원의 확신 없이, 두려움 가운데 신앙생활하고 있습니까? 우리도 이렇게 살 때가 많잖아요? 이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편지하면서 그들의 정체성을 다시 확인시켜주었던 것처럼, 동일하게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갈라디아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정체성을 다시금 확인시켜주시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갈 4:28)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 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갈 4:31)

 

우리가 은혜위에 굳게 서는 길은 우리의 정체성을 다시 확인하고, 그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거듭난 자라고 한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한 아들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더 이상 우리의 행위에 따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좌지우지될 것처럼 생각하지 마시고, 늘 왔다 갔다 하고, 좋았다 나빴다 하는 우리의 마음과 감정에 구원의 근거를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영원불변하는 말씀과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음을 확증하는 사건, 곧 2000년 전에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어주신 그 역사적 사건에 근거를 두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든든한 구원의 반석을 바라보고 의지할 때에, (그것이 믿음인데, 그렇게 믿음 안에서)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할 수 있고, 또한 주님의 은혜의 통치 아래서 우리의 영혼이 강건해지고 성숙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우리의 정체성을 알게 하여 주시고 우리를 은혜의 위에 굳게 세워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면 교회의 자녀로서 자유한 여자인 사라의 아들로서 합당한 삶이 무엇입니까? 우선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소리 질러 외치는 것입니다. 27절을 보십시오.

 

(27)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갈 4:27)

 

이 구절은 사 54:1을 인용한 것입니다. 한번 찾아볼까요?

 

(1)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 보다 많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사 54:1)

 

이 말씀은 바벨론 포로가 되어 있는 이스라엘을 향한 회복의 메시지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은 황폐하여졌고, 마치 아이를 낳지 못해서 다산과 번영의 꿈을 이루지 못하는 것과 같은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긍휼로 다시 회복되어져서, 다산과 풍요의 땅이 될 것임을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사라가 불능의 상태에서 아무런 소망을 가질 수 없었을 때,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말미암아 약속을 따라 이삭을 잉태하였듯이, 황폐하여지고 잉태하지 못한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크신 긍휼로 말미암아 다산과 번영의 도성으로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3절까지 보면, 지금 이 약속의 말씀의 궁극적 성취가 교회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니깐 단순히 문자적으로 바벨론 포로로 있는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물론 그것도 포함하지만).

 

(2)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3)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로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니라(사 54:2-3)

 

열방을 얻는다는 말은 이방인들도 교회에 들어오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장막터를 넓히고 좌우로 퍼진다는 말은 교회가 온 세상으로 확장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황폐한 성읍들로 사람 살 곳에 되게 할 것임이니라” 라는 말씀은 이 새 예루살렘이 허다한 무리들로 채워질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11,12절에 보면 이 새 예루살렘이 보석으로 치장된다고 말합니다. 이 이미지가 나중에 계시록 21장의 새 예루살렘에 그대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교회를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놀라운 회복의 역사가 사람의 공로나 행위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긍휼의 결과임을 말씀합니다.

 

(7)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8)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의 말이니라(사 54:7-8)

 

그것은 인간 노력의 소산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 하나님의 약속의 실현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외쳐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죄인이고 아무런 자격 없는 자인데,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와 천벌을 받아 마땅한 죄인인데, 오직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이 은혜를 감사하고 찬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나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그 은혜를 자랑하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이 바로 성도들의 마땅한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늘 이 은혜를 찬양하면서 기뻐하면서 감사하면서 살아가십니까?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된다는 것은 다 아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것이 우리의 답답한 현실입니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표정만 봐도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땅히 기뻐하고 감사할 수밖에 없다고 했는데 그것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악 된 본성으로 말미암아서 주님의 크신 은혜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사는 한은 자주 경험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지금 당장 이 은혜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서, 절망하고 낙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변함없는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그것을 바라보고 신뢰하면서 인내해야 합니다. 믿음은 항상 기쁘고 구름위에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황홀하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럴 때도 있지만, 믿음은 오히려 그보다 자주 인내라는 형태로 나타나야 합니다. 지금 내 마음이 답답하고 낙심이 되고 고통스럽지만,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바라보면서 지금의 상황을 참아내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러면서 말씀과 기도에 전념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은혜를 깨닫게 하시고 우리 마음 가운데 기쁨과 감사와 찬양이 흘러나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 안에서 날마다 이 은혜의 방도를 부지런히 사용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경건의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알게 하시고, 이 주님의 은혜를 인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외치는 자들로 빚어주시기를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두 번째는 의무라기보다는 그 결과로서 핍박을 견뎌야 한다는 것입니다.

 

(29)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30)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 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 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창세기 말씀에 보면 아브라함은 이삭이 3살이 되어 젖을 뗄 때에, 잔치를 배설했는데, 그때 이스마엘이 자기보다 14살이나 어린 이삭을 희롱했습니다. 아마도 이스마엘은 이삭이 미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삭이 태어나기 전에는 사람들의 모든 관심사가 자기였는데, 이삭이 태어나자마자 자기는 완전히 찬밥신세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이스마엘이 이 이삭이 미워서 막 괴롭히고 희롱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사라가 보고서 아브라함에게 이 이스마엘과 하갈을 집에서 내어 쫓으라고 요청합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고민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사라의 말을 들으라고 하심으로써 아브라함은 이 이스마엘과 하갈을 빈손으로 쫓아냅니다.


우리는 이 이스마엘이 이삭을 괴롭히고 희롱한 사건을 단순히 형제들 간에 의례히 있는 (형이 동생을 괴롭히는 것) 정도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바울이 그렇듯이 우리는 이 사건을 구속사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타락한 직후에 언약하시기를 창세기 3:15에서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을 원수가 되게 하셔서 치열한 전투가 있게 되는데, 뱀의 후손이 여인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 여인의 후손이 뱀의 후손의 머리를 밞음으로써 승리할 것이라고 약속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이분법적인 관점이 성경전체를 관통하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 / 이스라엘과 애굽/ 이스라엘과 이방나라(바벨론, 앗수르)
다윗과 그의 원수들 / 잠언의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 의인과 악인
참선지자와 거짓선지자 / 압제자와 사회적 약자 / 우상숭배자와 남은자

 

그리고 이러한 갈등의 절정이 바로 진정한 여인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첨예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 전체를 바로 이러한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전투라는 관점에서 풀어 가는데, 그 전투의 패턴이 이 세상에서는 항상 여인의 후손이 뱀의 후손으로부터 핍박을 당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괴롭힌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의 갈등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핍박은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동일하게 계속되는 것입니다.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으로 따라 난 자를 핍박하는 구도가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인 교회는 이 땅에서 고난당하고 핍박을 당하는 것으로 인해서 놀라거나 당황하지 말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겨야 합니다. 오히려 핍박이 없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단은 교회를 두 가지로 핍박합니다. 하나는 이 세상의 정사와 권세로 핍박을 가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이 핍박보다 교묘하면서도 더 위협적인 것으로서 바로 이단을 통한 핍박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큰 대적자는 로마가 아니라 자기 동족이고 형제인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유대인들도 아니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유대인들, 곧 교회 내에 있는 유대주의자들, 거짓교사들이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큰 대적자이고 핍박자였습니다. 옛 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가장 강력한 적은 가장 가까이에 있다.” 교회의 가장 큰 대적자는 교회 내에 있는 이름뿐인 신자들, 다시 말해서 육체로만 태어났을 뿐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믿음이 있다곤 하나, 실상 믿음의 행위는 나타나지 않는 자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는 자들, 항상 배우지만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하는 자들이 바로 교회의 가장 큰 원수인 것입니다. 이들은 사단이 교회 내에 보낸 스파이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갈라디아 교회의 경우처럼 교회 내에 있으면서 갈등과 문제를 일으키고, 주의 종을 불신하게 만들고, 교회를 어지럽히고, 또 사람들을 거짓교훈으로써 그릇된 방향으로 자꾸 이끌어가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이 없는 뱀의 후손들, 사탄이 교회 내에 보낸 스파이에 의해서 교회는 큰 어려움과 핍박을 겪는 것입니다. 모든 교회에 바로 이런 스파이가 다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일반 성도들 가운데서는 우리는 누가 그 스파이인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참 성도고 이 사람은 스파이다 딱 구분해서 두부 자르듯이 자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만일 그렇게 하다가는 가라지를 뽑다가 알곡까지 뽑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스파이 노릇을 하는 것처럼 보여도 나중에 회개할 수가 있는 것이고, 참된 성도라 하더라도 허물과 연약함으로 인해서 죄를 범하거나 잠간동안 교회를 어렵게 만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 말고,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지금 상대하고 있는 거짓교사들과 같이 교회 지도자들과 관련해서 생각할 때는 명백하게 스파이를 구별해서 그들을 내어 쫓으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표지는 오직 은혜의 복음을 가르치는가 아니면 다른 복음을 가르치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을 성도들에게 가르치는 목사, 교수, 장로가 바로 사단이 보낸 스파이입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지도자들을 다 쫓아내라는 것입니다. 만일에 우리 교회 목회자들 가운데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이 있으면 당장 공동의회를 개최해서 그 목회자를 내어 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교회의 가르침 외에 극동방송이나 CTS 방송이나 또는 여러 서적을 통해서 다른 목회자나 교수들의 가르침들을 접하는데, 이와 관련해서도 다른 복음을 얘기하는 것 같으면 당장에 채널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가르침들을 우리는 분별하고 물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얼마나 많은 목사들이, 그리고 교수들이 다른 복음을 얘기합니까? 지난주에 극동방송을 들으니깐 나오는 설교가 하나님 잘 믿으면, 하나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면 복 받고,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 불순종하면 어려움과 낭패를 본다는 설교였습니다. 물론 우리가 불순종하고 살면 하나님 징계하시기 때문에 어려움과 낭패를 보는 것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말씀에 순종하면 낭패 안보고 세상에서 성공합니까? 그렇지 않죠. 이 목사의 설교에는 복에 대해서 그릇된 사상이 자리 잡고 있고, 또 그 복이 자신의 행위에 따라 좌지우지 되는 식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가르침들이 결국 하나님의 은혜에 내가 잘 협력하고 노력해야 은혜를 받고 복을 받는다고 하는 다른 복음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가르침들을 물리치고,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들을 물리쳐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분별하고 물리치려면 내가 먼저 은혜의 복음의 교리를 명쾌하게 알고 있어야 하고, 또 그 은혜위에 굳게 서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릇된 사상을 분별할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이 그 은혜 안에서 자유를 누리면서 약속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가 은혜 위에 굳게 서있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라도 다른 복음을 좇아 율법주의적으로 신앙생활하는 데로 빠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은혜”라고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우리의 체질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악한 본성은 은혜보다는 자기 공로를 자랑하고 행위를 의지하는데 익숙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짓교훈을 분별하고 물리쳐야 할뿐만 아니라, 우리 내면에 은밀하게 자리 잡고 있는 이러한 악한 본성과 날마다 싸우고, 성령님 안에서 그런 생각들을 물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서 내어 쫓아야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율법의 종에서 너희를 구속하여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유한 신분을 주지 않았느냐? 그러면 자유한 아들답게 살아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종이 주인을 섬기듯이, 곧 행위에 따라 상벌이 좌지우지되는 원리를 따라 하나님을 섬기지 말고, 아들이 아버지를 사랑하고 공경하여 섬기듯이 자유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섬기라는 말입니다. 이 자유의 의미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유로운 자녀로 부르심을 입었음을 알게 하시고, 우리가 이 은혜를 감사 찬양하게 하시며, 그릇된 사상들을 분별하고 물리치고, 이 은혜 위에 굳게 서서 자유를 누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게 하여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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