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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성경본문 갈 6:11-15
성경본문내용 (11)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12)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 뿐이라(13)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1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15)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
강설날짜 2012-01-04

2012년 1월 4일 한결교회 수요강설
갈라디아서 제31강

 

십자가만 자랑

 

말씀 : 갈 6:11-15

 

6장 11절부터는 갈라디아서의 결어부분에 해당합니다. 이제 바울은 마지막으로 몇 가지를 덧붙여 언급함으로써 이 서신을 마무리 지으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독특한 점은, 다른 서신들의 결어부분에서는 대부분 문안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갈라디아서에는 그것이 나타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지금 갈라디아 교회의 상황이 문안하고 안부를 묻고 할 분위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전체를 흐르고 있는 어떤 긴장감과 급박함, 그리고 바울의 염려와 분노 같은 것들이 이 서신을 끝맺고 있는 결어 부분에서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 손으로 이렇게 큰 글씨로 쓴 것을 보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보통 바울이 편지를 쓸 때는 대필자를 두어서 대신 쓰게 한 뒤에 마지막 부분만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하는 식으로 써서 그 편지가 틀림없는 자신의 편지임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썼습니다. 대필자를 쓰는 이유는 눈이 안 좋아서 그랬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탁월한 율법선생이 될 정도로 율법을 공부했으면, 눈이 나빠질 만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대필자를 쓰는데, 마지막은 항상 자신의 서명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바울의 대적자들이 바울의 편지를 위조함으로써 교회에 거짓된 사상을 전파하는 일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나중에 데살로니가 후서를 잘 읽어보십시오. 거기 보면 실제로 그런 일들이 있었던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후서를 마무리하면서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이는 편지마다 표적이기로 이렇게 쓰노라”(살후 3:17) 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는 아마도 대필자를 쓰지 않고, 본인이 직접 쓴 것 같습니다. 물론 다르게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서 바울이 갈라디아서 전체를 친필로 쓴 것이 맞다면, 이 11절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자신이 직접 쓴 이 갈라디아서를 보다 주의 깊게 읽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말을 하는 것입니다. 즉 대필자를 쓰지 않고, 일부러 직접 한자 한자 적었다는 것, 게다가 눈이 안 좋은 상황인데도 큰 글씨로 썼다는 것을 갈라디아 성도들이 안다면, 그들은 더욱 이 편지 글자 하나하나에 깃든 자신들을 향한 바울의 애틋한 마음을 느끼면서 보다 세심하게 읽어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결론 부분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마지막으로 거짓교사들의 선동의 그릇된 목적을 까발림으로써 다시 한 번 우리가 추구해야할 신앙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거짓교사들의 선동의 그릇된 동기는 두 가지입니다. 그것은 핍박을 면하려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기를 자랑하기 위함입니다. 겉으로 볼 때 거짓교사들은 매우 갈라디아 성도들을 위하는 것처럼 보이고, 그래서 그들이 참 이스라엘 백성으로 합류하여 참된 아브라함의 언약의 자손이 되게 하기 위해서 할례를 권면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러나 사실상 그들이 그것을 통해서 얻고자 했던 것은 자신의 안위와 명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핍박을 면한다고 했는데, 우리는 지난번에 (못 보신 분들도 있지만) 회복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듯이, 얼마나 유대인들이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고 또 그들을 핍박하려고 하는지를 잘 알 수 있었습니다. 비록 그것이 바울 당시보다 2000년 뒤인 오늘날의 일이지만, 그러나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바울 당시에 일어났던 핍박과 박해를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습니까? 그것은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자신들이 생각할 때 이단 사상가였던 예수를 메시아로 전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그리스도인들의 반(反)율법적인 가르침 때문이었습니다. 유대교에 있어서 율법이 차지하는 위치는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할례를 받고 모세율법을 지켜서 유대 공동체의 전통과 정체성을 지키는 것은 그들에게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이 폐기되었다고 주장하면서, 가는 곳마다 유대회당에 들러서 유대인들로 하여금 유대정체성을 버리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율법에 금지된 이방인과의 교제를 스스럼없이 함으로써 유대인들의 강력한 반발을 사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민수기에 보면 비느하스가 이방인과 음행한 동족 유대인을 창을 찔러 죽임으로써 이스라엘에게 임한 하나님의 진노를 그치게 하였던 것처럼, 그들은 그런 유대 공동체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임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한 것입니다. 그들은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생각하며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교 전통을 버리고 전심으로 예수님을 좇은 수많은 유대인들은 그들로부터 쓰라린 박해와 여러 가지 위협과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고통을 당했고, 무엇보다도 가족과 친구들과 나라로부터 버림을 당하고 출교를 당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사람들로부터 그렇게 출교당하면, 그 사람은 그 사회에서 함께 살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불법으로 체류하는 외국인이 온전한 직업을 가지면서, 정상적인 사람다운 생활을 할 수 없듯이, 출교당하면, 심지어는 자신의 일터도 잃어버릴 수도 있고, 살던 마을에서 쫓겨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많은 유대인들이 그런 박해 속에서 가난하고, 비참하게 살았던 것입니다. 때문에 바울은 이방지역에 선교를 할 때마다 헌금을 거두어서 예루살렘에 가져다주었는데, 그것이 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거짓교사들은 이런 핍박을 면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도 말하지만, 그것보다도 할례와 모세 율법을 더 중시함으로써 자기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호감을 사려고 했던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유대인들의 핍박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핍박하는 이유가 단순히 반율법적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예수가 메시아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핍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할례를 전하면 그러한 핍박을 그나마 축소시킬 수 있고, 또 무엇보다도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호감을 갖고 있어도 결국 그 가르침이 반율법적이어서 기독교를 배척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율법과 할례를 주장하면, 많은 동족 유대인들이 기독교에 대해 호감을 갖게 되고, 예수님을 따르고자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5장 11절에 무엇이라고 합니까? “(11)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갈 5:11)


만일 바울이 거짓교사들처럼 할례를 전하고 율법주의적인 예수 복음을 전했다면, 훨씬 핍박이 줄어들었을 것이고, 많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믿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복음 자체가 그런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뒤에서 다시 살펴보겠지만, 십자가 자체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모든 율법적인 행위들을 쓰레기로 만드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공로와 자랑을 다 배설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이 십자가 복음이 많은 유대인들에게 거치는 반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러한 유대인들의 거절과 핍박을 각오하고서라도 이 십자가의 복음을 고수했던 것이고, 그러나 그 반대로 거짓교사들은 자신들에게 미칠 핍박을 면하기 위해서 복음을 변질시켜버린 것입니다.


두 번째로 거짓교사들의 그릇된 동기가 무엇이냐 하면, 자기를 자랑하기 위해서입니다.


(12)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 뿐이라(13)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갈 6:12-13)


여기서 육체의 모양을 내려한다는 말은 육체의 겉모양을 예쁘게 꾸미고 매끈하게 해서 사람들이 보기에 좋게 한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예쁘게 꾸미느냐 하면, 사람의 고추를 덮고 있는 껍질을 잘라내어서 아주 깔끔하게 꾸며 놓았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육체의 모양을 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단순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분명히 할례 받은 사람하고 할례 받지 않은 사람하고 느끼는 기분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할례 없는 사람보다 할례 받은 사람이 뭔가 확실한 구원의 보장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 것이고, 확실하게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겠습니까? 반대로 그런 것이 없는 사람은 뭔가 찝찝하고 그러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깐 거짓 교사들은 그런 불안 불안한 상태에 있지 말고 할례를 행해서 뭔가 깔끔하고 확실하게 정리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목적이 무엇이냐 하면, 그들의 육체로 자랑하려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가르침을 따라 할례를 받으면 자연스럽게 누가 높아지느냐 하면, 유대인 자기 자신들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나는 할례 받은 참 언약백성이고, 너는 아니라는 것”이죠. 그래서 “너도 나처럼 되고 싶으면 할례를 받아라.”라고 함으로써 뭔가 자기가 아브라함의 참 자손이라고 하는 특권적인 지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육체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례를 요구하고 율법을 지켜야 된다고 명하지만, 그러나 정작 본인들은 율법을 하나도 안 지키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외적인 몇 가지 조항들은 지키겠지만, 율법이 명하는 가장 중요한 의와 인과 신은 버리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스스로 속임 가운데 육체의 모양을 내려는 데만 관심을 가지고, 그것으로 자기를 자랑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 모습이 꼭 바리새인과 똑같은 것입니다. 겉은 아주 멋있게 꾸미는데, 속은 썩어 있는 것과 같은 바리새인들과 똑같은 것입니다.

 

(23)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24)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25)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26)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27)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28)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 23:23-28)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명예와 자존심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종교 활동을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율법을 지키려고 애쓰고,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그들의 모습들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훌륭한 모습으로 비치겠습니까? 그래서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인정을 한 몸에 받은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오늘날이야 우리가 그들의 외식을 비판하고 하지만, 그 당시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보통 사람으로는 따라갈 수 없는 수준으로 그 수많은 율법 조항들을 지키려고 애쓴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인정을 받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바로 이 바리새인이라는 신분과 자신의 행위들이라는 것으로 자신의 죄를 감추고, 자신을 아주 거룩하고 훌륭한 사람으로 포장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종교는 자기 죄를 가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도구이다.” 사람이 얼마든지 자신을 포장하기 위해 이 종교를 이용해 먹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외식이고 위선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리새인들만의 얘기입니까? 우리 얘기는 아닙니까? 우리도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서 종교활동을 열심히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예를 들어서 우리가 교인이고 매주 교회 나온다고 하는 것, 특히 내가 교회 집사고 장로고 하면, 그런 신분이나 종교행위들이 얼마나 나의 내면의 부패한 모습을 감추어주는지 모릅니다. 제가 목사라는 것이 저의 죄를 얼마나 감추고, 저를 거룩한 사람으로 보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그 거룩한 뜻을 가르치는 모습을 보면, 사람들이 저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저 스스로도 여러분 앞에 서서 이렇게 말씀 전하다보면, 내 스스로가 내가 좀 뭔가 된 듯한... 그런 기분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자격 없고 더러운 죄인이냐 하면, 여러분들이 저의 본 모습을 본다면, 다 구역질을 하며 혐오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그런 죄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목사고, 내가 집사고, 교사고... 하는 그런 직분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또 주님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예배에 참석해서, 찬양도 하고, 기도도 하고, 헌상도 하고, 여러 가지 영적인 말들로 사람들을 권면하기도 하고, 그런 신앙적인 행위들을 가지고서 자신을 포장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외식과 위선으로 자신의 내면을 감추고, 외적으로 꾸며진 신앙생활을 통해서 사람들로부터의 좋은 평가와 존경과 좋은 이미지로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내 이미지가 실추되고, 내 죄가 사람들 앞에 드러나면 얼마나 고통스러워합니까?


그래서 사람들의 눈앞에서는 신앙생활 잘하지만, 아무도 보지 않는 은밀한 곳에서는 더러운 부패한 본성을 따라 사는 것이 현대판 바리새인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경건의 겉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실체는 없는 것이 바로 오늘날 현대판 바리새인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 마음속에는 누구나 자신의 자존심과 체면과 명예를 사랑하고자 하는 죄악된 본성이 있습니다. 이것이 날마다 십자가의 은혜 아래서 깨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라도 자신의 명예와 자존심을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형제가 음란 동영상을 보는 장면을 제가 목격했습니다. 그 죄가 들킨 후 교회를 떠났습니다. 회개하고 우리 교회 계속 있으면 될 텐데 교회를 아예 떠나버렸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찬양 반주도 섬기고 주의 일에 열심하는 이미지 좋은 청년이었습니다.


또 언젠가 제가 어떤 형제가 죄를 범하는 장면을 목격했는데, 그때 그 형제가 하는 말이 제일 처음 하는 말이, “제발 소문만은 내지 말아 달라.” 그랬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했다는 죄책감보다는 자신의 이미지가 실추되는 것을 더 걱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사실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그것이 다 자신의 자존심과 체면과 명예를 깊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명심해야 합니다. 내 자존심, 체면, 명예를 사랑하는 마음이 깨어지지 않고서는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아니 십자가로 다가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바로 우리의 모든 자존심과 체면과 명예를 배설물로 취급하고 짓밟아 버리기 때문입니다. 지금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 라고 했을 때는 바로 이 점이 전제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이 말은 사실은 1세기 당시에는 굉장히 충격적인 말입니다. 우리야 십자가가 거룩한 상징으로 사용된 지 거의 이천 년이 지난 오늘날을 살고 있기 때문에 이 말이 당연한 말로 들리지만, 제1세기 당시에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있어서 이 말은 그야말로 혐오와 공포를 의미했습니다. 우리 시대에 맞게 말하자면, 그것은 사형 집행용 전기의자나 죄수의 목을 졸라 죽이는 밧줄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나는 사형집행용 전기의자만을 자랑한다...” 공감이 가십니까?


찬송가 135장의 “최후 승리를 얻기 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 까지...” 를 오늘날 우리의 표현으로 가사를 바꾸면,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목에 걸린 죽음의 밧줄을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얻기까지 험한 죽음의 밧줄을 붙들겠네...” 어떻습니까? 느낌이 오십니까?


십자가는 단순하게 사형집행도구이고, 사형집행도구이면, 그것은 극악무도한 죄인을 심판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해 죽으셨는데, 예수님이 무슨 죄가 있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 때문에 그렇게 비참하게 저주와 심판을 받아 돌아가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명백히 보여주는 것은 우리는 모두 다 죽을 죄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전적부패와 무능력을 보여줍니다. 인간 스스로의 행위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모든 높아진 명예와 자존심들을 다 배설물로 취급하고 짓밟아버리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이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명예를 높이고자 하고, 자신의 자존심과 체면을 본성적으로 깊이 사랑하는 타락한 인간이 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모든 인간들은 다 어두움을 사랑하고 자기 명예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 십자가로 나아올 수 없습니다. 도리어 십자가를 배척하고 핍박해 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거치는 특성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십자가로 나아오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나아오느냐 하면,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은혜를 받은 자는 나오는 것입니다. 거듭나서 새로 지으심을 받은 사람은 이 십자가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은혜입니다. 거듭난 신자는 이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역한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지를 깊이 깨닫게 되고, 그래서 그동안 자신이 자랑스럽게 여겨온 것이나, 의롭다고 생각했던 것, 그런대로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자존심과 체면을 다 시궁창에 내어던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빌립보서 3장의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의 메시지와 빌립보서 3장의 메시지는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2)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3)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4)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5)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6)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7)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2-9)

 

십자가 앞에 가보니깐, 주님을 만나고 보니깐, 그동안 자신이 자랑스럽게 여겨왔던 자신의 많은 내세울만한 행위들, 자랑들, 그런 의로움들이 배설물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내 죄 값을 치러주시고, 또 예수님의 의로움을 나의 의로움으로 선언해주심으로써 죄와 심판에서 구원하여 주신 은혜를 깨닫는 것입니다.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된 것이고, 우리의 구원이 이 십자가로 충분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이 놀라운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십자가의 공로만을 자랑하고 찬양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만을 의지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십자가만을 자랑하면서 살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결국 행위의 원리를 따라 살지 않고, 은혜 아래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갈라디아 강설을 시작했을 때 배웠던 것처럼, 자기 자신에게 근거를 둠으로써 끊임없이 구원의 확신이 왔다갔다는 하는 상태.... 결국 그것이 자기를 자랑하려는 욕망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내가 잘하면, 스스로 된 것처럼 생각하고, 다른 못하는 사람 판단하고 정죄하고, 또한 반대로 내가 못하면, 스스로 절망에 빠져서 그렇게 행위의 원리를 따라서 사는 것, 그것이 바로 다른 복음이고, 자기 의를 내세우는 신앙입니다. 자꾸 내 행위로 하나님께 용납되려고 하는 것이죠.


우리가 부름 받은 자리는 그런 자리가 아니라, 행위의 원리에서 해방된 자유한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은혜로, 십자가의 공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은혜 아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했든 못했든 늘 십자가 앞에서 회개하고, 십자가만 의지하고 겸손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이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십자가만을 찬양하고, 그리고 이 십자가를 전파하고, 그래서 그 십자가로 말미암는 여러 가지 핍박과 박해들을 기쁨으로 감내하고 사는 것이 바로 신자의 삶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는 결국 오직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십자가가 그 중심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제 갈라디아서를 마무리하면서, 이 십자가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아주 심오한 내용으로 표현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바울이 어디어디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혔다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데, 거기에 들어가는 것들이 1)죄에 대하여, 2)율법에 대하여(초등학문에 대하여), 3)옛사람이(정과 욕심),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본문에서처럼 4)이 세상에 대하여 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이라는 것은 앞에 죄, 율법, 옛사람 모두를 다 통합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죄가 지배하고, 사단이 지배하고, 율법이라고 하는 행위의 원리가 지배하며, 그래서 끊임없이 행위에 얽매이며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이루려고 하는 그런 세상, 그리고 그렇게 해서 자기를 자랑해보이려고 하는 세상, 그러나 결국은 육체의 현저한 일을 내고, 정욕대로 살 수밖에 없는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십자가로 말미암아서 그 세상이 끝났습니다. 우리는 이제 새로 지으신 새로운 세상에 있게 되었습니다.

 

(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우리만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눈으로 볼 때는 여전히 우리는 옛세상에 살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영적으로 이미 새로운 세상에 발을 들여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이냐 하면, 의로우신 하나님이 은혜로 통치하시는 세상이고, 더 이상 행위의 원리로 율법적인 차원에서 우리를 대우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그 사랑하시는 자녀로 대우하시고, 은혜로 그 사랑으로 우리를 통치하시는 세상입니다. 그 십자가로 말미암는 주님의 공로로 이 모든 은혜를 누리는 그 자리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의 사랑을 알고 아버지를 사랑하여 자원해서 기쁨으로 순종하는, 성령 안에서의 열매 맺는 삶으로의 세상으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외적인 것을 꾸미기보다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와서 신앙생활을 하는 삶으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말 거듭난 자라면, 우리 자신을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는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여전히 우리의 육신은 이 세상에 살고 있어서, 그래서 우리 마음속에 끊임없이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자꾸 일어납니다. 행위의 원리에 얽매이기 쉽습니다. 죄에 빠지곤 합니다. 그러한 긴장과 갈등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육체의 성령의 싸움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거기서 나의 의가 깨어지고, 죄를 사랑하는 마음이 깨어지고, 그 주님의 사랑에 감동되어서 주님께 사로잡힌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이고, 성령에 씨앗을 심는 자입니다. 매일 매일을 성령에 씨앗을 심는 자가 되어서, 오직 은혜아래서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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