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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성경본문 삿 3:12-31
성경본문내용 (12)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므로 여호와께서 모압 왕 에글론을 강성케 하사 그들을 대적하게 하시매(13)에글론이 암몬과 아말렉 자손들을 모아가지고 와서 이스라엘을 쳐서 종려나무 성읍을 점령한지라(14)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왕 에글론을 십 팔년을 섬기니라(15)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우셨으니 그는 곧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를 의탁하여 모압 왕 에글론에게 공물을 바칠 때에(16)에훗이 장이 한 규빗 되는 좌우에 날선 칼을 만들어 우편 다리 옷 속에 차고(17)공물을 모압 왕 에글론에게 바쳤는데 에글론은 심히 비둔한 자이었더라(18)에훗이 공물 바치기를 마친 후에 공물을 메고 온 자들을 보내고(19)자기는 길갈 근처 돌 뜨는 곳에서부터 돌아와서 가로되 왕이여 내가 은밀한 일을 왕에게 고하려 하나이다 왕이 명하여 종용케 하라 하매 모셔 선 자들이 다 물러간지라(20)에훗이 왕의 앞으로 나아가니 왕은 서늘한 다락방에 홀로 앉아 있는 중이라 에훗이 가로되 내가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왕에게 고할 일이 있나이다 하매 왕이 그 좌석에서 일어나니(21)에훗이 왼손으로 우편 다리에서 칼을 빼어 왕의 몸을 찌르매(22)칼자루도 날을 따라 들어가서 그 끝이 등뒤까지 나갔고 그가 칼을 그 몸에서 빼어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기름이 칼날에 엉기었더라(23)에훗이 현관에 나와서 다락문들을 닫아 잠그니라(24)에훗이 나간 후에 왕의 신하들이 와서 다락문이 잠겼음을 보고 가로되 왕이 필연 다락방에서 발을 가리우신다 하고(25)그들이 오래 기다려도 왕이 다락문을 열지 아니하는지라 열쇠를 취하여 열고 본즉 자기 주가 이미 죽어 땅에 엎드러졌더라(26)그들의 기다리는 동안에 에훗이 피하여 돌 뜨는 곳을 지나 스이라로 도망하니라(27)그가 이르러서는 에브라임 산지에서 나팔을 불매 이스라엘 자손이 산지에서 그를 따라 내려오니 에훗이 앞서 가며(28)무리에게 이르되 나를 따르라 여호와께서 너희 대적 모압 사람을 너희의 손에 붙이셨느니라 하매 무리가 에훗을 따라 내려가서 모압 맞은편 요단강 나루를 잡아 지켜 한 사람도 건너지 못하게 하였고(29)그 때에 모압 사람 일만명 가량을 죽였으니 다 역사요 용사라 한 사람도 피하지 못하였더라(30)그 날에 모압 사람이 이스라엘의 수하에 항복하매 그 땅이 팔십 년 동안 태평하였더라(31)에훗의 후에 아낫의 아들 삼갈이 사사로 있어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명을 죽였고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
강설날짜 2012-07-25

2012년 7월 25일 한결교회 수요강설

사사기 제7강


사사 에훗


말씀 : 삿 3:12-31


오늘 본문을 보면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어려움을 겪게 되자, 그 어려움 속에서 다시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계속 반복적으로 죄를 짓는 이스라엘의 모습도 안타깝지만, 이러한 그들이 부르짖을 때마다 다시금 들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돋보이는 본문입니다. 그러면 왜 이스라엘은 자꾸 반복하여서 똑같은 범죄를 계속 짓는 것일까요? 이스라엘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11절과 12절을 보시면...


(11)그 땅이 태평한지 사십년에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었더라(12)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므로 여호와께서 모압 왕 에글론을 강성케 하사 그들을 대적하게 하시매(삿 3:11-12)


그 범죄하는 과정을 보시면, 옷니엘이 죽은 이후에 범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4:1에서도 또 나옵니다.


(1)에훗의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삿 4:1)


즉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사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죄를 안 범하다가, 사사들이 죽으면 다시금 죄를 범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바가 무엇이냐 하면, 사사가 단순히 전쟁에서 승리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그 후에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그들을 다스림을 통해서 그들의 악함을 억제하고 또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살도록 지도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사가 죽으니깐, 이스라엘의 악을 억제하고 경건한 것을 장려하던 모든 분위기들이 사라지면서, 다시금 그들의 죄악성이 살아 올라오고 그래서 그들이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약과 연관시켜 보면...


(13)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14)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3-14)


우리의 육과 영이 충돌합니다. 성령으로 육을 제어해야 된다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서로 싸우고 있는데, 우리는 성령을 좇아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이러한 육신이 제어되지 아니하고, 영적으로 느슨하게 되어지는 것을 통하여서 결국은 똑같은 죄를 반복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도 이러한 우리 안에 육신이 제어가 되지 않으면, 영적으로 느슨하게 되어져서 결국은 과거에 짓는 죄들을 다시 반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참된 사사이신 예수님을 우리의 마음에 왕으로 모시고 예수의 영이신 성령으로 우리의 육신을 제어해야 됩니다. 이러한 죄죽임의 삶이 없이는 결코 경건의 능력이 나올 수 없고,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과거의 죄를 반복해서 짓는 어리석음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왜 그들이 반복해서 죄를 짓게 되는지 다른 이유를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영적으로 부주의하게 되어졌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서 경고하셨습니다.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신을 섬길 때에는 반드시 대적의 압제를 당하고 진멸 당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그들은 이미 한번 경험했습니다.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구산 리사다임의 압제 아래서 8년을 고통을 당한 것입니다. 그렇게 고생을 했으면, “이제는 우리가 범죄하지 말아서 다시는 매맞지 말자” 그렇게 해야 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고생했던 과거를 망각해버리고,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 하신 경고의 말씀에도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신경 쓰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학적인 용어로 “부주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주의함은 영적으로 느슨하게 되었을 때 나타나는 첫 번째 현상입니다. 일부러 고의적으로 잊어버리려고 하고 망각하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느슨해지면, 그래서 육신이 점점 살아 올라오면 자동적으로 그런 것에 대해서 무감각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이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게 될 때에 그것이 장차 나에게 어떠한 고통으로 돌아올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고, 당장 눈앞에 있는 풍요의 복을 얻기 위해서 우상에게 절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주의함에 대하여 마 7장의 산상수훈의 결론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지으면, 그 결과는 뻔한 것입니다. 비가 오고 바람이 오고 창수가 나면 그 집은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영적으로 부주의한 자는 비를 예상하지도 아니하고 창수를 예상하지도 아니하고, 바람을 예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세상의 즐거움과 육신의 만족을 위해서 모래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나중의 결국이 어떠합니까? 비와 바람과 창수가 나게 되어졌을 때, 무너지되 그 무너짐이 심하다고 하였습니다. 즉 자신의 행동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지에 대해서는 주의하지 아니하고, 당장의 눈앞의 현실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자들이 이와 같이 비참한 결말에 처해질 것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경고의 말씀으로 이르신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부주의함을 일컬어서 영적인 암매라고 말합니다. 눈앞에 있는 것만 보고 먼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는 선견지명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창원이 계획도시인데, 처음 도로를 닦을 때, 8차선 도로를 만드니깐 사람들이 막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왜 그렇게 쓸데없이 도로를 넓게 만드냐...” 아주 반대가 심했습니다. 창원이라는 도시가 30-40년 전만 해도 허허벌판이고, 공장만 덩그러니 있는데, 그런데다가 도로를 그렇게 넓게 만들었으니 충분히 그 반대를 이해할만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 창원은 8차선도 너무 좁습니다. 출퇴근 시간만 되면 차가 밀립니다. 옛날에 그 넓게 생각되었던 도로도 지금은 너무나 좁게 느껴집니다. 사람이 100년도 아니고 30년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구가 늘고 차가 많아질 것이라는 것을 누가 예상했겠습니까? 그래서 요즘에는 구청과 시청마다 도시개발하고 먼 미래를 보고 계획하는 부서가 따로 있어서 먼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전문가들을 통해서 도시를 계획하도록 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시계획만 그런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을 하든지 100년을 바라보고 일해야 된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멀리 내다보고 일을 해나가야 된다고 강조합니다.

 

이렇게 이 세상의 일에 대해서도 선견지명을 갖는 것이 중요한데, 하물며 우리의 영혼의 운명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 우리가 선견지명을 가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겠습니까?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고, 그렇지 못할 때 어떤 결말에 처해지는지에 대한 선견지명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교회 다니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당장에 취직하는 문제, 결혼하는 문제, 건강문제, 자식문제, 성적문제, 사업문제, 재산문제, 가정문제... 이런 데는 정말 지나칠 정도로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는데, 우리의 영혼의 운명이라든지, 우리의 영혼의 건강이라든지, 지금 우리가 영적으로 어떤 길을 걸어가고 있고, 어떤 결말로 치닫고 있는지 그것에 대해서는 별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영적인 암매입니다. 우리가 솔직하게 이런 삶을 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우리가 일부러 이런 삶을 사는 게 아니다. 영적으로 느슨하게 되어질 때에, 즉 우리 안에 육신이 제어되지 않고 육체가 살아 올라오게 되어지면, 나도 모르게 이렇게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서 우리의 육체의 정욕을 대적하고 거슬러 싸워야 합니다. 날마다 성령으로 육체를 제어해야 합니다. 이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경고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계속해서 우리 교회에 주어지는 말씀을 생각해보십시오. 베드로전후서나 히브리서나 계속해서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늘에 소망을 두고 이 세상에서 나그네의 삶, 고난의 삶을 가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저하고 머뭇거리고 세상과 타협하면, 결국 구원의 은혜에서 떨어져서 멸망에 처해지고 말 것이라는 말씀이 계속해서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에 얼마나 귀 기울이고, 얼마나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까? 우리가 혹시 이스라엘처럼 부주의하여 눈앞에 있는 일들만 보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깊이 돌아보고, 정말 정신을 차리고 이 경고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먼 미래를 내다보고, 장차 있을 일을 내다보면서 일을 해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일 자체에 매몰되지 아니하고,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그 일을 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긴 것 같아도, 잠간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고, 결국 죽음은 생각지도 못한 때에 나를 찾아올 것이고, 결국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 모든 것에 대해서 재판을 받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이것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받을 길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것 외에는 없다는 것을 알고, 이 주님의 은혜를 날마다 믿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의지하면서, 그 은혜를 감사 찬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 안에 있는 죄의 정욕과 싸우고, 하루하루를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거룩한 두려움은 오직 미래를 내다보는 선견지명에 의해서만 주어집니다. 늘 미래를 내다보면서 살아가십시다. 늘 우리의 마음이 초상집을 향해 있도록 하십시다. 그것이 영적으로 깨어있다는 것의 의미이고, 그것이 주의를 기울이는 신앙의 모습입니다.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고 영적으로 주의를 기울여서 반복되는 죄의 길에서 벗어나서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헌신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으로 다시 돌아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영적으로 느슨해지고 부주의함으로 말미암아 과거의 죄를 반복하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 대하여 노하시고 그들을 다시 징계하십니다.


(12)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므로 여호와께서 모압 왕 에글론을 강성케 하사 그들을 대적하게 하시매(13)에글론이 암몬과 아말렉 자손들을 모아가지고 와서 이스라엘을 쳐서 종려나무 성읍을 점령한지라(14)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왕 에글론을 십 팔년을 섬기니라(삿 3:12-14)


이 말씀을 보면 구산 리사다임에게 팔렸을 때보다 더 큰 징계가 내려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압왕 에글론을 강성케 하사”라고 했습니다. 첫 번째 범죄 했을 때 팔렸던 구산 리사다임은 메소포타미아 왕이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는 이스라엘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래도 여유가 있었는데, 이제는 바로 옆에 있는 모압 왕이 쳐들어온 것입니다. 그리고 혼자 쳐들어온 것이 아니라 암몬과 아멜렉 자손까지 합세해서 쳐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이전보다 더 훨씬 더 어렵고 고통스러운 상황이 찾아온 것입니다.

 

특히 종려나무 성읍을 점령당했다고 했습니다. 여리고 성읍인 것 같은데, 샘물이 있는 오아시스와 같은 땅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 처음 점령한 땅으로서 매우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곳인데, 그곳을 빼앗겼습니다. 구산 리사다임에게 팔렸을 때는 무언가를 빼앗겼다는 말은 없었는데, 여기서는 이것저것 다 빼앗기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14절에 18년을 섬겼다고 했습니다. 구산 리사다임에게는 8년을 섬겼는데, 년수도 늘어났습니다. 즉 하나님 앞에 용서함을 받고 다시 범죄 했을 때는, 하나님께서 징계하실 때 전 징계보다 한 단계 높아져서 중징계를 내리시는 것입니다.

 

요 5장에서 이 원리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에 38년된 병자가 있었는데, 누가 넣어주는 사람도 없고, 심각한 병에 걸렸기 때문에 전혀 소망이 없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친히 오셔서 그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성전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14)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요 5:14)


다시는 더 심각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즉 이 38년 된 병자의 병이 죄로 인한 질병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이 또 범죄 하여서 38년 동안 고생했던 그 병보다 더 심각한 것이 그에게 있지 않기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주 심각하고 두려운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함을 받고도, 은혜를 받고도, 이러한 하나님의 용서함에 대하여 오히려 남용을 하고, 계속해서 범죄하고 또 범죄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시지는 않겠지만, 그러나 더 큰 인생의 환란과 고난으로 징계하시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왜 쓸데없이 고생할 것입니까? 우리는 더 큰 매를 맞기 전에 미리 자진납세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와 복음 때문에 고난 받아야지 내 죄 때문에 징계 받는 것은 하나도 아름답지 않습니다.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징계를 안 받을 수는 없는데, 그러나 징계를 받았을 때는 즉시로 회개하고 돌이켜서, 그래서 더 큰 징계를 초래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어쨌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반복되는 죄로 인하여서 하나님으로부터 중징계를 당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중징계 하신 것은 죽이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다시금 살리고자 하시는 은혜인 것을 깨달을 수 있는데, 15절에 하나님의 은혜로운 모습 속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5)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우셨으니 그는 곧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를 의탁하여 모압 왕 에글론에게 공물을 바칠 때에


우리라면, 계속 잘못을 반복하는 사람이 계속하여서 용서를 구하며 올 때, 그들을 계속해서 용서하기가 어렵습니다. 누구든지 break point가 있습니다. 인내의 한계점이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용납해도 이 선 넘어오면 용서하지 않겠다” 하는 것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베드로에게도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사람이 잘못했을 때 몇 번이나 용서하리이까? 일곱 번 용서하리이까?” 그렇게 말했습니다. 보통 당대의 선한 사람은 세 번까지 용서해주곤 했는데, 베드로는 자신의 아량이 보통 사람보다 넓다는 것을 뽐내기 위해서 “일곱 번이나 용서해줄까요?”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베드로를 매우 부끄럽게 하는 대답이었습니다.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주라” 딱 정확하게 490번 용서해라는 말이 아니라, 무한히 용서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아량이고, 하나님의 아량의 넓이입니다. 무한한 용서의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같으면 이런 죄를 반복하는 이스라엘을 볼 것 같으면 당장에 때려치워버리고 다시 다른 민족을 택하겠지만,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기에, 끝까지 이스라엘을 포기치 아니하시고 그들이 부르짖을 때 그들을 또 용서하시고 (구원해주어도 그 이후에 다시 범죄할 것을 미리 알면서도) 그래도 그들을 불쌍히 여겨 구원해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과 긍휼이 얼마나 큽니까? 우리가 바로 이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때때로 연약하여서 다시 육신이 올라와서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 앞에 때로는 서먹서먹하고, 죄송스럽고, 면목이 없어서, 나올 용기가 나지 않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지만, 그럴지라도 하나님 앞에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용기를 가지고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무거운 짐을 나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구원해 줄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


이 죄악에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 건져주실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아량은 무한히 넓습니다. “내가 너무 많은 죄를 지었고, 너무 멀리 왔는데, 이런 내가 어떻게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수 있겠는가? 내가 용서를 구한들 주님께서 나를 용서해주시겠는가?” 그렇게 생각이 들어도 그럴지라도 주님께 가야 합니다. 우리가 진실로 참회하며 나아가면 우리의 죄가 아무리 주홍과 같이 붉다 해도 은혜로 용서해주시고 맞아주시는 것입니다. 배은망덕하게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받아서 먼 나라에서 탕진한 탕자가 돌아왔을 때도, 이 탕자는 용기가 없어서 ‘품꾼의 하나로 봐달라고’ 그런 마음으로 돌아갔지만, 그러나 아버지가 어떻게 하십니까? 상거가 먼데도 달려와서 보자마자 입 맞추고 안고 울면서 그 옷을 갈아입히고 반지를 끼우고 곧바로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켜주시고 잔치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양심이 죄 때문에 고통을 당할 때, 사탄이 즐겨 사용하는 방법은, 고통 받는 영혼에게 그리스도를 보여 주되 아주 정의로 무장하고 우리를 억압하는 가장 엄한 재판장의 모습으로 보여줍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그런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낙심과 절망에 빠져서 주님께 나아가지 못하도록 사단 마귀가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교정해야 됩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은 자비가 무한하시고, 사랑이 무한하셔서 무한히 죄를 사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믿고 이 주님의 긍휼만을 바라보면서 믿음으로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서 죄용서와 은혜를 덧입는 믿음의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제 에훗의 이야기를 들어보십시다. 이 이야기는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고 섭리하셔서 에훗으로 하여금 모압왕 에글론과 그 대적들을 물리쳐서 구원을 이루게 하신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에훗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베냐민 사람 왼손잡이” 라고 하고 있습니다. 베냐민은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뜻인데, 이 베냐민 사람은 왼손잡이입니다. 아이러니인데, 왼손잡이의 특징은 모든 사회는 오른손 중심의 사회이기 때문에 왼손만 주로 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왼손잡이는 대부분 양손잡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에훗도 양손잡이였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그러면 정상적인 오른손잡이를 택하지 않고, 특별한 왼손잡이를 세우셨을까요? 이야기 가운데 이 왼손에 능한 능력이 아주 요긴하게 쓰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단검을 오른발 안쪽 허벅지에 숨깁니다. 그러면 왼손으로 그 칼을 뽑아들기 쉽고, 동시에 보초들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쪽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이야기의 발단은 이스라엘이 에글론에게 조공을 바치는데 에훗에게 그 일을 맡깁니다. 에훗은 조공을 바치면서 에글론을 암살할 계획을 갖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에글론에게 찾아가서 계획대로 조공을 바치는데, 에글론 왕에 대한 묘사가 재미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17)공물을 모압 왕 에글론에게 바쳤는데 에글론은 심히 비둔한 자이었더라


‘심히 비둔하다’는 말은 아주 살이 통통하게 차올라서 포동포동한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단어가 가축에 사용될 때는 아주 살이 찌고 육즙에서 기름이 좔좔 흐르는 양질의 고기나 제물을 의미할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지금 이 에글론이 곧 희생제물이 될 터인데, 아주 살이 포동포동 찐 최상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이 쳐 올랐으니 얼마나 움직임이 둔했겠습니까? 훨씬 암살하기에 쉬운 조건입니다. 그러면 문제는 이 왕과 독대를 해야 암살을 할 수 있는데 어떻게 이 왕과 독대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18)에훗이 공물 바치기를 마친 후에 공물을 메고 온 자들을 보내고(19)자기는 길갈 근처 돌 뜨는 곳에서부터 돌아와서 가로되 왕이여 내가 은밀한 일을 왕에게 고하려 하나이다 왕이 명하여 종용케 하라 하매 모셔 선 자들이 다 물러간지라(삿 3:18-19)


먼저 에훗은 에글론에게 조공을 바친 뒤에 함께 한 자를 다 돌려보냅니다. 에훗의 일군들을 돌려보내고, 자신은 왕을 떠나 길갈로 갑니다. 그리고 길갈에서 다시 급히 에글론에게 나아 옵니다. 이 길갈은 모압 사람들이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역이고, 이방 사람들의 우상숭배의 중심지입니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 이방인들과 선지자들이 신접해서 계시를 받곤 했습니다. 바로 에훗은 마치 자신이 거기서 계시를 받고 온 것인 양 그렇게 속이기 위해서 일부러 길갈까지 다녀온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에글론에게 나아왔습니다. 그러면서 “은밀한 일을 왕에게 고하려 합니다” 그렇게 말합니다. 여기서 은밀한 일은 비밀스러운 계시, 비밀스러운 신의 말씀 이런 뜻입니다. 에글론은 거기에 관심이 아주 많습니다. 이런 비밀스러운 계시는 1:1의 자리에서만 나눌 수 있었습니다. 에훗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충분히 이용하는 것이죠. 그래서 에글론은 종자들을 다 물러가게 하고 에훗과 다락방에 같이 있게 되었습니다. 에훗이 원하는 상황이 만들어졌습니다.


(20)에훗이 왕의 앞으로 나아가니 왕은 서늘한 다락방에 홀로 앉아 있는 중이라 에훗이 가로되 내가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왕에게 고할 일이 있나이다 하매 왕이 그 좌석에서 일어나니


포동포동하고 동작이 둔한 돼지 왕과 양손을 자유자재로 쓰는 에훗이 칼을 숨긴채 독대를 하게 되었으니 완벽한 상황입니다. 에훗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왕에게 고할 일이 있나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아마 에글론은 당황했을 것입니다. 바알이나 아스다롯과 같은 이방 신의 이름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거론되었으니 매우 당황해서 일어났습니다. 그때 에훗이 급히 달려와서 칼을 그 배에 찔렀습니다.


(21)에훗이 왼손으로 우편 다리에서 칼을 빼어 왕의 몸을 찌르매(22)칼자루도 날을 따라 들어가서 그 끝이 등뒤까지 나갔고 그가 칼을 그 몸에서 빼어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기름이 칼날에 엉기었더라


칼자루도 날을 따라 들어갔습니다. 아주 깊숙이 푹 찌른 것이죠. 에글론은 꼼짝없이 그 자리에 즉사했습니다. “그 몸에서 기름이 칼날에 엉기었더라...” 동물로 치면 아주 기름이 좔좔 흐르는 육즙을 말합니다. 얼마나 살이 포동포동했으면 그러했을까요?


(23)에훗이 현관에 나와서 다락문들을 닫아 잠그니라


그리고 다락문들을 닫아 잠그고, 살며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 궁전을 빠져나왔습니다. 보초들은 “아~ 할 이야기를 다 끝내고 이제 가는가 보구나.” 그렇게 생각하고서는 에훗을 평안히 가도록 내버려둡니다. 그리고 확인 차 다락문을 열려고 하니깐 문이 잠겨 있었고, 똥냄새가 올라오니깐 필연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계시는구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24)에훗이 나간 후에 왕의 신하들이 와서 다락문이 잠겼음을 보고 가로되 왕이 필연 다락방에서 발을 가리우신다 하고


왜 똥냄새가 나느냐 하면, 칼에 찔려서 거기서 기름도 나오고 내장 안에 있는 똥물도 같이 나오는 것입니다. 똥 냄새가 온 방에 진동한 것입니다. 보초들도 혀를 내두르면서 코를 막고 그 자리에서 물러갔을 것입니다. 한글 성경은 잘 드러나지 않지만, 굉장히 익살스럽게 묘사합니다. 완전 조롱조로 에글론과 그 신하들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영화로 만들면 장르가 스릴러 액션 코미디입니다. 어떻게 보면 왕을 암살하는 것 자체가 매우 위험하고 목숨 걸고 해야 하는, 손에 땀을 지게 하는 스릴러물입니다. 그런데 왕은 아주 포동포동하고 움직임도 둔하고, 칼에 찔렸는데, 똥물이 흘러나오고, 보초들은 똥 싸는 줄 알고, 물러가서 기다리고 있으니, 코미디물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모압 왕이 하필 움직임이 둔한 뚱뚱한 왕이었겠습니까? 칼을 찔렀더니 하필 기름과 똥으로 냄새가 진동하였겠습니까? 하나님이 다 그렇게 섭리하시고, 에훗으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게 도와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대적의 우루머리가 죽으니깐 이제 대적들은 공황상태에 빠지고 조직이 와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에훗은 나팔을 불어 군대를 소집하고, 적군을 향해 공격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완전히 멸절시킵니다. 머리가 박살났으니, 나머지 잔당들 소탕하는 것은 문제도 아닌 것이죠.

 

그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범죄 했을 때는 그렇게 대적들에 의해 비참한 고통을 당했지만, 다시금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대적들이 아무리 강해도 완전히 그 상황을 180도 역전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압 왕으로 이스라엘을 징계하셨지만,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부르짖을 때에 에훗으로 하여금 모압 왕을 완전히 비참하게 모욕적으로 치욕적으로 박살을 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주 유쾌상쾌통쾌한 승리를 주시고, 대적들은 아주 치욕적이고 모욕적이고 굴욕적인 패배를 맞이하는 것입니다. 반항 한번 못해보고, 완전히 한방에 넋다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는 여인의 후손 언약이 그대로 성취되는 것을 봅니다. 뱀은 여인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지만, 여인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박살내는 것입니다. 에글론은 이스라엘을 18년 괴롭혔을 뿐이지만, 이스라엘은 에글론을 한순간에 완전히 멸절시켰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원수를 확실히 갚아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요 은혜입니다.

 

그리고 이 원리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께서는 동일하게 이 구원의 승리를 이미 우리에게 주셨고 장차 궁극적으로 주실 것입니다.


(19)너희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인하여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20)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롬 16:19-20)


지금은 사단의 시험과 유혹과 핍박에 노출되어 어려움을 당하지만, 그러나 그날에는 그 사단과 모든 대적자들이 우리의 밞 아래 밟혀 치욕과 굴욕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원수를 갚아 우리를 신원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주님께서 승리를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늘 기억하면서 선한 데는 지혜롭고 악한 데는 미련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령으로 육체를 제어하면서 영적으로 주의를 기울이고 영적전투하고 주와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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