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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성경본문 갈 5:1-6
성경본문내용 (1)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2)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3)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4)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5)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6)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
강설날짜 2011-11-23

2011년 11월 23일 한결교회 수요강설

갈라디아서 제25강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말씀 : 갈 5:1-6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은 거짓교사들의 미혹에 넘어가서 할례를 받고자 하는 자들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2)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갈 5:2)


여기서 ‘나 바울은’이라는 말은 바울 자신의 사도의 권위를 강하게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사도로서 지금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해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만일 거짓교사들의 미혹에 넘어가서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게 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부터 아무 유익을 얻지 못한다는 말은 그리스도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쉽게 말해서 “구원이 없다”라는 말입니다.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바울이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까지 하면서 매우 격렬하게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을 좇는 것은 단순히 어떤 실수나 허물이나 죄를 범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부정하는 것으로서, 배교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3)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갈 5:3)


바울의 강경한 어조는 3절에서도 계속되는데, 할례 받는 것이 왜 배교인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할례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의식이 아니라, 그것은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 구약의 시내산 언약, 곧 옛 언약으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배웠던 것처럼 율법의 역할이란, 옛 언약 아래서는, 곧 율법 아래서는 살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서,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몰아가는 것이 율법의 몽학선생의 역할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할례를 받으려는 자는 바로 이러한 유일한 살 길인 그리스도를 외면하고 다시금 소망 없는 옛 언약으로 회귀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의 당연한 결과가 무엇이겠습니까?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4)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4)


다른 복음을 좇는 것은 곧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지는 결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끊어졌다는 것, 떨어졌다는 것은 배교와 타락 또는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때때로 범하는 자범죄와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때때로 죄를 범하고 넘어질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실수나 죄 때문에 그리스도부터 떨어져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넘어진 것이고,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회개하고 일어서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문제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써 그리스도로부터 끊어져 떨어져 나가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는 항상 문제가 있고 트러블이 있습니다. 자식이 자주 말썽을 일으키고 잘못을 행합니다. 때로는 큰 잘못을 저질러서 부모로부터 심하게 매를 맞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하고, 아예 집을 가출해버리는 것하고는 다른 문제인 것입니다. 이 비교가 이해가 되십니까? 다른 복음을 좇는 것은 바로 아예 집을 나가버리는 차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다른 복음을 좇아 살아간다는 것은, 단순한 실수나 허물이 아니라, 집을 나가는 행위요, 그리스도를 거부하여 스스로를 그리스도로부터 단절시키는 심각한 배교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결정적으로 구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가톨릭에는 구원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로교회에 다녀도 오직 은혜의 복음을 믿지 아니하고, 로마가톨릭이 말하는 구원관을 가지고서 신앙생활하면, 그리고 끝까지 그렇게 살다 죽으면 그 사람은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가 구원받느냐 못 받느냐 하는 신앙의 본질적인 문제임을 우리는 깊이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질문이, 참된 신앙인이라도 다른복음을 좇아 살아가게 되면 결국 구원이 취소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만 보더라도 실제적으로 은혜를 잊어버리고 다른복음을 좇아서 율법주의적으로 신앙생활 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구원받지 못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견인교리를 믿는 우리로서는 이런 질문은 매우 어려운 질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도의 견인교리와 이 구절이 어떻게 조화되는가 하는 것보다도, 이 구절 앞에서 그렇게 신앙생활하는 것이 얼마나 큰 배도의 행위인지 깨닫고, 자신을 돌아보아 혹시 자신이 그러한 삶을 살고 있다면, 자신의 위태로운 상황을 깨닫고 긴급히 회개하여 돌이키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믿음이 정말 성경이 말하는 믿음인지, 내가 정말 오직 은혜의 복음을 믿는 자인지 혹시 내가 다른 복음을 좇아 살고 있지 않는지, 심각하게 자신을 점검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무엇이고, 참된 은혜의 복음이 무엇입니까? 이를 위해서 우리는 먼저 다른 복음이 무엇이고, 그것이 왜 심각한 배교의 행위가 되는지 바울이 왜 이렇게까지 격렬하게 반대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다른 복음을 좇아가는 것이 왜 심각한 배교의 행위가 됩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살시키기고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모독하는 가증한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거짓교사들은 예수님의 은혜를 한 번도 부정한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강조해서 말했을 것입니다. 다만 그들은 여기에 덧붙여서 할례도 받고 모세 율법도 지켜야만 진정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 것뿐입니다. 즉 그들은 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구원에 있어서 전부로서 말하지 않고, 부분으로서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미 배웠듯이 그리스도의 은혜 전체를 말살시키는 행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은혜는 전부가 아니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6)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롬 11:6)


만일 은혜에 행위가 첨가된다면, 그것은 은혜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은혜와 행위는 함께 공존할 수 없는 상호배타적인 것입니다. 로마가톨릭처럼 “우리가 구원받으려면,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시고, 내 편에서는 열심히 그 은혜에 협력해서 신실하게 끝까지 내 믿음을 지키면서 신앙생활 해야 된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열심히 신앙생활 해야 하고, 경건하게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하고, “구원받기 위해서 그렇게 해야 된다”라고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인 것입니다. 구원은 결코 그런 식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전적인 은혜인 것이고, 거기에는 내 행위나 조건이나 자격이 전혀 고려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구원을 말할 때 항상 우리의 시선을 어디로 향하도록 합니까? 창세전에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셨다는 사실과  2000년 전의 십자가 사건으로 계속해서 우리의 시선을 거기로 향하도록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만큼 구원의 은혜 됨을 잘 보여주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6)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7)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 1:4-7)


내가 하나님을 찾았고, 내가 하나님을 믿기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구하기도 전에, 내가 존재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나를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으로 예정하셨고, 내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이심으로써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셨고, 우리를 부르셨고, 그 피로 의롭다 하시고 자녀삼아 주신 것입니다. 내가 붙잡은 예수가 아니라, 나를 붙잡으신 예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문제이고, 택하심을 따라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인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은 무엇입니까? “사람이 믿어야 구원받는다”라고 했는데, 그 말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이러한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를 믿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피조물의 반응일 뿐입니다. 그것은 불가항력적인 은혜 앞에서 피조물의 자연스러운 반응인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깨달은 자는 그 은혜 앞에서 감동하고 감격하여 그 은혜를 믿는 마음으로 그리고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반응이 바로 믿음이고, 이렇게 믿은 자가 이제는 날마다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이 은혜만을 의지해서 사는 것이 바로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나는 믿었고, 너는 안 믿었다. 나는 믿음이 있고, 너는 믿음이 없다”라는 식의 자랑이 될 수가 없습니다. 정말 믿으면 자랑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는 아무 공로도 없고, 나는 그저 죄인일 뿐이다” 라고 하는 겸손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찾아본 에베소서 말씀의 6절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거저주시는 바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구원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로 거저주시는 바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감사와 찬양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실질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까? 물론 이 점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싶지만, 정말로 그렇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 천사들이 어떻게 노래했습니까?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의 평화로다”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하시기 위해서 성육신하신 것이 하나님께는 영광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 배웠던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은 무슨 영광이었습니까? 십자가의 영광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두고서 말씀하시기를 “(23)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요 12: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가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왜요? 이 십자가가 죄와 심판 아래 있는 많은 자기 백성들을 구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냐 하면, 바로 한 사람 한 사람 구원하시고 구속하시는 일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를 구원하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과 긍휼과 은혜의 영광이 가장 절정으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이 십자가의 은혜의 영광을 알고 믿음으로 그 은혜를 받아들이고, 누리고 의지하고 살면서, 날마다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가장 영화롭게 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사람이 구원에다가 이 은혜 외에 자신의 행위의 공로를 덧붙이려 하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이 드러납니까? 사람의 공로가 자랑이 됩니까? 사람의 행위가 자랑이 됩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가로채어서 자기 자신에게로 돌리려는 것이고, 무엇보다도 우리를 구속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별 쓸모없는 것으로 취급하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한없는 은혜를 멸시하고 모독하는 가증한 행위인 것입니다. 구약으로 말하면 이것은 일종의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구약 이사야서에 보면 “(8)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2:8)라고 했습니다. 우상숭배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타협할 수 없는 것으로서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은 온통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와 심판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신약에 오면 어떻습니까? 우상숭배에 대한 얘기가 쏙 사라집니다. 대신에 무엇이 등장하느냐 하면 은혜에 행위를 덧붙이려는 죄에 대한 비판과 경고와 심판이 거듭 나타납니다. 우리가 살펴본 바로는 이 구약의 우상숭배와 신약의 다른 복음이 사실 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다른복음이야말로 우상숭배 중에서도 가장 가증한 우상숭배라고 이미 배운 바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이 왜 이렇게까지 격렬하고 강력하게 표현하고 있는지 충분히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진실로 다른 복음을 좇으면 그리스도로부터 아무런 유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져서 결국 심판을 받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는 배교의 행위요 우상숭배의 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바울의 경고의 말씀 앞에서 다른 복음을 좇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이지를 깊이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은혜의 복음에 사로잡혀서 믿음으로 살지 않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모독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멸시하는 것인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혹시 우리 자신이 그런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우리자신을 심각하게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우리는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선물임을 깨달아 알고, 믿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은혜만을 의지해서 사십니까? 그 은혜의 영광을 감사하고 찬미하는 삶으로 나타나는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 은혜에 대해 무덤덤하십니까? 여전히 행위와 책임이라는 인과관계를 따라서, 곧 내가 잘하면 하나님께 칭찬받고 사랑과 은혜를 받지만, 내가 못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실 것이라는 식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깊이 돌아보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후자의 경우라면 우리의 믿음이 가짜 믿음이든지, 아니면 거듭났지만 여전히 불신앙가운데 빠져 있는 것이든지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 어느 쪽이든지 우리는 이 죄의 심각성을 알고 거기서 속히 돌이켜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진정으로 깨달아서 오직 은혜의 복음만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신앙인의 삶으로 회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오직 은혜의 복음을 깊이 깨닫게 하시고, 그 은혜 아래서 그 은혜를 누리고 그 은혜만을 감사 찬양하는 자가 되게 하여주시기를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그러면 계속해서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5)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갈 5:5)


바울은 의의 소망을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이 의의 소망은 아마도 주님의 재림의 때에 이루어질 일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즉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공적으로 의롭다고 선포되고, 또 완전히 의롭게 되어져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있게 될 그 의의 소망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을 기다리는 것이 이 땅에서의 신자의 삶이다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은 신자는 장래의 의의 소망을 간절히 기다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기다리고 사느냐 하면, 바로 성령으로 살아야 하고,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 5-6장 전체의 주제인데, 이 구절에서 미리 간단하게 언급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결론이 6절에 “(6)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갈 5:6)”라고 했습니다. 그냥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라고 말하면 될텐데 그렇게 표현하지 않고 일부러 믿음을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렇게 표현함으로써 바울은 아마도 율법 없는 오직 은혜의 복음이 결코 사람을 방종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원하여 사랑을 실천하는 자유의 삶을 살도록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바울이 다른 복음을 격렬하게 비판하고 은혜의 복음을 줄기차게 역설하면서 결국 우리를 궁극적으로 이끌어가고자 하는 곳은 바로 이 사랑입니다. 율법은 자기를 자랑하고 남을 정죄하는 것밖에 낼 수 없지만, 은혜의 복음은 사랑과 겸손을 내는 것입니다. 사랑은 철저하게 은혜의 복음을 믿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만이 맺을 수 있는 열매입니다.


특히 우리는 여기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라는 표현해 주목해야 합니다. 이 말은 믿음은 사랑하는 것으로 발현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활동, 역사, 일은 단순히 교회 안 빠지고 잘 나오고 “내가 예수님을 믿습니다” 하는 말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마치 믿음이라는 어머니가 사랑이라는 아이를 잉태하여 낳은 것처럼, 또는 믿음이라는 가지에서 사랑이라는 열매가 맺히는 것처럼 참된 믿음은 사랑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필연적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이란 곧 자기 자신이 얼마만큼 큰 죄인이며, 소망 없는 자인 줄 알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사모하면서 그 은혜만을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믿는 신자는 겸손해질 수밖에 없고, 나보다 뒤떨어진 신자에 대해서 결코 정죄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또 누구를 위하여 기도할 때도, 나를 보듯이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이 자리에 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 라고 하는 것을 떼어놓고 누구를 위해서 기도하면 그것은 사실은 진정한 기도가 되지 못합니다. 나를 이 자리에 있게 하신 하나님께서 그 은혜를 저 영혼에게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것이 말하자면 중보기도입니다.


나를 힘들게 하고 나에게 상처를 주고, 피해를 주는 사람이 있으면 신자는 자신이 과거에 하나님을 핍박하고 대적했던 죄악들을 떠올립니다. 나도 저렇게 하나님을 대적하고 핍박하였는데, 주님께서는 이런 나를 벌하시지 아니하시고 길이 참으시고, 용서하시고, 위하여 십자가에 대신 죽어주시기까지 섬겨주신 것을 생각하면서, 나도 저 사람을 참고 용서하고 섬겨주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의 말씀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계명의 말씀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바로 신자의 마음 판에 새겨져 있기 때문에 신자는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신자의 마음 안에는 여전히 죄악된 본성과 이기적인 마음이 남아 있어서 고통을 당하지만, 그러나 은혜의 말씀을 통해 신자의 믿음이 점점 자라가면서 신자의 마음속에서는 은혜와 성령이 점점 강해져서 결국 우리의 정과 욕심을 죽이고 성령의 열매인 사랑을 맺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을 좇아 성령으로 의의 소망을 기다리며 살아갈 때에 우리의 삶 속에는 자연스럽게 사랑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삶 속에서 믿음이 사랑으로써 역사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점검해야 합니다.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일 나의 삶 속에 사랑이 없다고 한다면, “내가 좀 더 분발해서 사랑을 실천하도록 노력해야겠구나” 할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면서, 주님으로부터 이 믿음이라는 선물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미 믿는 자라면 은혜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주님의 은혜를 깊이 깨달아가고, 그 은혜 아래서 주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그 은혜를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사랑이 나타날 것입니다.


물론 사랑하는 것이 결코 율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한다’는 말을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지만, 또 얼마든지 율법으로 쓸 수 있습니다. 로마가톨릭은 이 구절을 그런 식으로 해석합니다. 사랑과 믿음을 끝까지 실천해야만 최종적인 의의 소망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갈라디아서를 가지고서 또 다른 행위구원론을 만들뿐인 것입니다.


참된 신자라도, 신앙이 어릴수록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믿는다고 당장에 천사가 되고, 성자가 되고, 예수님이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 그 은혜의 진리와 복음의 모든 깊이를 단숨에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징계와 훈련을 통해서 성장의 과정 속에서 점차로 깊이 깨달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달아가는 만큼 우리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믿음이 말씀을 통해서 자라가고, 그 은혜와 사랑의 깊이를 알아서 점점 내 삶 속에서 사랑의 열매가 맺혀져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만이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충만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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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7 [레위기 11장] 음식법 file 레 11:1-23 최상범 2015-10-07 2499
496 [고린도후서 6장]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file 고후 6:3-10 손재호 2014-06-04 2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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