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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손재호
성경본문 요일 1:1-4
성경본문내용 (1)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2)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3)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4)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강설날짜 2007-11-25

2007년 11월 25일 예배


생명의 말씀


말씀:요한일서 1:1-4

요한이 이 서신을 쓰게 된 이유는 5:13절에 보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기독교 공동체 안에 분파가 생겼습니다(요일 2:19). 그들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부인했습니다(2:22; 5:1,5). 또한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했습니다(4:2; 요이 1:7). 요한은 이런 그들에게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육체 가운데 임하셨고, 그분은 참 하나님이시며, 영생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공부를 통해 생명의 말씀이 어떻게 나타났고, 지금도 우리에게 어떻게 역사하고 있는지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를 통해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안에서 진정한 사귐을 이루어 가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있는 것은 이미 타락한 것이기에 그 어떤 것도 영원한 것이 없고 생명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것으로는 만족이 없고, 모두 다 허무한 것에 굴복하고 맙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생명이 있습니다. 1절에 보면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태초에 있는 생명의 말씀 이런 것에 눈이 번쩍 뛰어야 합니다. 어떻게 태초에 있는 말씀이 생명의 말씀이 되는가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요한1서 2:15-17절을 보면 요한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무엇을 하고 살아왔습니까? 세상을 사랑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은 다 무엇입니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좇아왔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집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요한1서 5:11-13절을 보면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생명이 있는가, 없는 가의 준거를 무엇으로 삼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있는가, 없는가 입니다. 곧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모든 것을 갖췄다 해도 아들이 없으면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가난하고 부족하더라도 예수를 믿는 자는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평가와 전혀 다릅니다. 아들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영생이 있고 없고가 달려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아들이 영생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5:13절에 보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가지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들만이 이 세상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늘의 영광을 본 자들은 이 세상을 속히 떠나기를 바랬습니다. 바울도 삼층 천을 경험한 후에 속히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로 가기를 바랬습니다(빌 1:23).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말씀에 접촉될 때 이런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이런 고백이 없다면 그것을 잘 못된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생명의 말씀되신 예수님께 접촉된 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는 한 세상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완벽하게 끊어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질 때만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늘의 영광을 볼 때 자연스럽게 세상의 것들에게 소망을 끊게 되는 것입니다.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말씀에 접촉된 자들의 공통된 고백입니다.  

1:1절을 다시 보면 “태초로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고 합니다. 태초로부터 계신 생명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태초라고 하면 성경에서 무엇이 떠오릅니까? 창세기 1:1-3절에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면 그 말씀자체가 창조의 능력이 있기에 빛이 생겼습니다. 이 창조의 능력이 되시는 말씀이 바로 생명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대하여 요한복음 1:1-4절은 이렇게 증거 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태초에 말씀이 천지를 창조했는데 그 말씀이 하나님이시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은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어떻게 드러내셨습니까? 말씀으로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시고,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잔잔케 하셨습니다. 이것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말씀이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니 예수님이 생명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로 모이는 자들의 관심이 어디로 가야 합니까? 영생의 말씀이신 예수님에게로 가야 합니다. 우리의 관심이 예수님에게로 가지 않으면 그것은 잘 못된 것입니다. 다른데 관심이 가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시자 이 세상은 두 편으로 나누어졌습니다. 빛과 어두움이 나누어지듯이 예수님을 믿는 자와 믿지 아니하는 자로 나뉘는 것입니다. 이로서 생명에 속한 사람인지 사망에 속한 사람인지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거라사 지역에 가셨을 때는 귀신에 들렸던 자들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정상이라고 생각했던 자들은 예수님을 좇아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손해 보니까,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인해 자신들의 어둠이 드러나니까 쫓아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시니까 자신들이 어둠을 더 사랑하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세상에 빛이 왔으나 세상이 어둠을 더 사랑함으로 빛을 거절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가장 잘 드러낸 사건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건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어둠을 더 사랑했기 때문에 빛 되신 예수님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생명의 말씀을 증거 하면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생명에 속한 사람은 생명의 말씀을 좋아하게 됩니다. 베드로 사도도 그렇게 증거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1-5절을 보면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사람에게는 버린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고 했습니다. 1절에 ‘그러므로’라는 말씀은 이미 1장에서 거듭난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금이나 은이나 없어질 보배로 구속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항상 살아있는 말씀으로 된 것인데 바로 복음이라고 합니다. 이 복음을 듣고 믿어 거듭난 사람은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오늘 본문의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마음이 끌립니까? 그러면 그 말씀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고, 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 태초의 말씀에 대하여 요한과 사도들은 들었고, 눈으로 보았고, 주목하여 손으로 만져보았다고 합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 중에도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있었던 제자입니다. 사도요한은 가장 먼저 예수님을 좇은 제자이고, 마지막 만찬에 예수님의 품에 기대어 있었던 사람이며, 예수님이 재판받는 자리까지 함께 간 사람입니다. 물론 제사장과 잘 아는 사이라서 그런 것이지만 십자가의 현장까지 함께 가서 예수님으로부터 모친 마리아를 돌볼 것을 부탁받습니다(요 19장). 그리고 베드로보다 앞질러 빈 무덤까지 달려갔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요 20장). 그러므로 이 분이 바로 태초부터 생명의 말씀인 것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보았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가 기록될 때 이단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가현설을 주장하는 자들, 영지주의자들 등 그래서 요한은 만져 보았다는 것입니다.

2절을 보면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고 했습니다. 태초부터 있던 생명의 말씀이 나타났습니다. 이 생명은 그냥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영원한 생명을 보았고 증거하여 전한다고 합니다. 이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되었다고 합니다. 에덴동산에 보면 범죄 한 인간을 위해 생명나무에게로 가지 못하도록 화염검을 두어 지키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이 나타난 생명의 말씀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들이 왜 이 생명의 말씀,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사도들과의 사귐을 통하여 아버지와 아들과의 사귐이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우리는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늘날 직통 계시다 뭐다하는 말 들어서는 안 됩니다. 사도들이 보고 들은 바를 전하는 이유는 사도들과 사귐이 있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도들과의 사귐이란 사도들이 증거 한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 됩니다. 여기서 사귄다는 말이 헬라어로 ‘코이노니아’입니다. 이 말은 인간관계 속에서 가장 깊은 결혼 관계를 묘사할 때 즐겨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귐이란 세상의 그 어떤 사귐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천하를 주고도 얻을 수 없는 생명을 받아 누리는 사귐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귐,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 아무에게나 일어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 이유는 모든 인간이 처음 사람 아담의 후손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서 단절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은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차단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인간도 스스로의 능력이나 힘으로 생명나무로 나아갈 수가 없도록 천사들이 화염검을 들고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하나님 편에서 오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 영원한 생명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이 영접하지 아니하고 싫다고 배척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사람들이 이미 죄와 사망에 사로잡혀 있다는 증거이며, 생명이 그 안에 없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알고 나아와서 믿는 자들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요한복음 1:12-13절에서 영접하는 자 곧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받아 아버지와 아들의 사귐 속에 합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허물과 죄로 죽어있기에 스스로 영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라고 합니다(요 1:12-13). 그러므로 누가 하나님께로 난 자들인가 하면 복음을 듣고 받아들인 자들이 하나님께로 난 자들인데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분이시며, 그 영광이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함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듣고 사귐이 있게 되는 내용들입니다.

사도가 왜 이 사귐을 갖고자 하는 것입니까? 4절에 보면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고 했습니다. 주님과의 사귐은 기쁨입니다. 사도들의 기쁨만이 아니라 그 복음을 받은 자들의 기쁨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쁨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진 기쁨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기쁨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과 세상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듣고서 주님과 사귐이 일어난 사람들의 기쁨은 세상 사람들이 알 수도, 빼앗을 수도 없는 기쁨입니다. 요한복음 16:20-22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리니 세상이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떠나실 것을 말씀하시자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시면 너희의 마음이 기쁠 것이며, 그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후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 성령이 임하게 되자 이제 본격적인 아버지와 아들의 사귐 속에 합류가 된 것입니다. 이 사귐이 너무 좋아서 그 어떤 세상의 유혹이나 핍박도 빼앗아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핍박 가운데서도 기뻐하였던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받았기에, 그 생명의 사귐이 있기에, 죽는 것도 두렵지 않는 것입니다. 이 기쁨을 맛보고 싶지 않습니까? 세상의 염려에서 해방되는 정도가 아니라 죽음조차도 끊어낼 수 없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 생명의 말씀과의 사귐으로 우리도 이 기쁨을 함께 맛보기를 소원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안에서 참된 사귐을 이루어가게 하여 주시길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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