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8장]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by 손재호 posted Oct 26, 2008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Extra Form
설교자 손재호
성경본문 창 18:1-15
성경본문내용 (1)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2)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3)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지나가지 마옵시고(4)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5)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쾌활케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가로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6)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에 들어가 사라에게 이르러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7)아브라함이 또 짐승 떼에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취하여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8)아브라함이 뻐터와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의 앞에 진설하고 나무 아래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9)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10)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11)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12)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13)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14)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15)사라가 두려워서 승인치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가라사대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강설날짜 2008-10-26

2008년 10월 26일 설교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말씀:창세기 18:1-15

창세기 18장 말씀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15절은 하나님께서 나그네의 모습으로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사라에게 아들을 낳을 것을 말씀하시는 사건이고, 16-33절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심판을 예고하시는 사건입니다. 우리는 두 주간에 걸쳐서 18장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사라에게 아들을 낳을 것을 말씀해 주시는 부분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나그네의 모습으로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에 앉았다가 맞은편에 사람 셋이 선 것을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즉시 달려나가 그들을 정중하게 영접하였습니다. 몸을 땅에 굽히며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쾌활케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하나님의 일행은 아브라함의 청을 받아들였습니다. 아마 아브라함은 나그네들을 존귀한 존재로 인식했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지만 한 사람은 여호와께서 사람의 형상을 입고 나타나신 것이고, 나머지 둘은 하나님을 수종드는 천사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그들이 하나님의 현현임을 알아보았는지는 잘 모르지만 한 눈에 그들이 존귀한 자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내주여’라고 부르며 최고의 겸손한 태도로 맞이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에게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짐승 떼에게 달려가서 살찌고 먹음직한 송아지를 골라 하인에게 주며 빨리 요리하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뻐터와 우유와 떡과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나무 아래에 진설하고 그들 곁에 서서 식사 시중을 들었습니다.

9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대접하고 있을 때 그 나그네 중의 한사람이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사라가 장막에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놀라운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10절에 보면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사라가 장막 문에서 들었습니다. 이때 사라의 반응이 어떠하였습니까? 사라가 그 말을 듣고 웃습니다. 12절에 보면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라고 했습니다. 사라는 ‘별 실없는 소리도 다 하신다’고 생각하고 속으로 웃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이미 경수가 끊어졌고 자기 남편도 늙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여도 사라가 속으로 웃는 것은 당연한 웃음을 웃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라가 속으로 웃고 ‘어떻게 아이를 낳겠습니까?’ 하자 여호와께서 무어라고 하십니까? 13-1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왜 웃느냐, 여호와께서 능치 못함이 있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기초해서 볼 때 사라의 웃음은 결국 여호와의 능력을 믿지 못한 웃음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사라가 두려워서 15절에 보면 ‘제가 웃지 않았는데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아니다, 네가 웃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라는 자기의 경수가 끊어지고 아브라함도 늙었기에 아들이 있으리라는 말씀에 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라뿐만 아니라 사실 먼저 웃은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 17:15-19절을 보면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아브라함도 속으로 웃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이 아니라 너와 사라에게서 나올 자녀가 약속의 자녀다고 하시면서 이름을 19절에 보면 ‘이삭’이라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삭’은 하나님이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그 뜻이 무엇입니까? 웃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웃게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사람이 믿을 만한 근거도 없는데서 자기의 약속을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까? 이것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에게 그 어떠한 근거도 다 제거하신 후에 주시는 것이 믿음이란 선물입니다. 창세기 21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가 잉태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 아들을 낳게 됩니다. 이처럼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중에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부를 때 마다 무슨 생각이 났을까요? 자신들의 불신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사라도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웃었다는 사실이 그 아들의 이름 가운데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4:18-22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아브라함이 믿었다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이 상반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을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그러나 이러한 믿음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보면 쉽습니다. 바랄 수 없는 가운데 바라고 믿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능력이 그렇게 만들어 내셨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 로마서를 공부할 때 로마서 4장에서 좀 더 확인을 하고자 합니다만 창세기에서는 분명히 아브라함도, 사라도 속으로 웃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아이를 낳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비웃음이라는 표현은 좀 심하지만 허탈한 농담 또는 말도 안 되는 소리 앞에서 웃는 그런 웃음입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이삭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놀라운 사실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나타날 때는 모든 사람들이 믿을 만한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피식 웃고 말 그런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조롱하듯이 웃고 멸시하는 그런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인물치고 제대로 대접을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물론 나중에는 애굽의 총리도 되고, 바벨론의 총리도 되지만 그러나 처음에 하나님의 약속을 입은 자의 모습은 언제나 비웃음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37장 이하에 보면 요셉이 야곱의 11번째 아들로서 어느 날 하나님의 계시를 받습니다. 우리가 요셉을 이야기할 때 우리도 꿈을 가지자 그런 말을 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요셉의 꿈은 하나님이 주신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이 계시를 받고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자기도 잘 몰랐기 때문에 그냥 형들에게 자랑합니다. ‘형님들의 단이 나의 단에 절하더이다.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그러자 형들이 그를 더욱 미워합니다. 평소에도 아버지에게 고자질 잘 하는 녀석이었는데, 자신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그런 꿈 이야기까지 하니 얼마나 미웠겠습니까? 그 미움이 얼마나 강했던지 나중에 양치는 곳에 아버지 심부름을 왔을 때 ‘그 꿈이 어떻게 되는가 보자’하며 죽여 버리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계시로 인한 비웃음과 멸시를 받는 것입니다. 결국 요셉은 지나가는 상인들에게 팔려 애굽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의 모습이 왜 이런 비웃음의 대상으로 나타날까요? 그 이유는 바로 사람들의 죄를 알게 함으로 나중에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나타나는 가를 보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의 예언대로 형제들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하게 됩니다. 그러나 처음 계시가 떨어지고 그 계시를 받은 자의 모습은 멸시를 당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또한 사무엘서에 보면 다윗이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는 동안의 소년입니다. 그래서 전쟁에 나간 형들에게 면회를 갔다가 요셉과 비슷한 경우를 겪습니다. 다윗이 면회를 갔을 때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조롱하며 고함을 지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은 거룩한 분노가 잃어났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상 17:26절에 보면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 없는 블리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고 전의를 불태웠습니다. 이에 형들이 그 소식을 듣고 다윗을 향하여 무어라고 말합니까? 사무엘상 17:28절을 보면 “장형 엘리압이 다윗의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몇 양을 뉘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다윗에 대한 형들의 태도입니다. ‘교만하다, 완악하다.’ 이러한 대우를 받는 것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자의 모습이 사람들 보기에 초라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경우를 보면 상대방 골리앗의 키는 다윗과 비교가 안 되었습니다. 아직 군대에 갈 나이도 안 된 양이나 돌보고 있어야 할 소년이 장대한 골리앗을 상대로 분노하고 있으니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들이 다윗을 꾸짖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를 통하여 하나님이 구원을 베푸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금 사람들이 무엇을 의지하고 있는지를 고발하는 것입니다. 힘 있는 왕을 원하였는데 다른 사람보다 훨씬 키가 큰 사울이 왕이 되었을 때 좋아하던 자들이 이제 정말 키가 크고 힘이 센 골리앗 앞에서 40일을 꼼짝 못하고 욕만 얻어먹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구원이 사람들이 비웃음을 살만한 아이를 통하여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어린 다윗은 형들로부터 ‘건방지다, 교만하다, 완악하다’고 하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이러한 형들이 다윗의 휘하에 들어가 군인이 되는 것입니다. 역시 요셉아래 들어간 형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니 요셉을 멸시한 형들이나 다윗을 멸시한 형들이 나중에 요셉과 다윗에게 무어라고 하였을까요? 자기 공로를 주장했을까요? 자기들이 형 됨을 인하여 다른 요구를 할 수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조롱하고 멸시했기 때문에 입을 닫을 뿐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둘 다 아들을 주신다는 말씀에 웃었습니다. 이 웃음은 분명히 불신의 웃음이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웃는 웃음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21장에서 드디어 이삭이 출생합니다. 그때 무어라고 하는지를 보겠습니다. 창세기 21:1-7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아브라함이 그에게 태어난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그 아들 이삭이 난지 팔 일만에 그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백 세라.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또 이르되 사라가 자식들을 젖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마는 아브라함의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6절에 보면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고 합니다. 불신과 비웃음의 웃음이 참된 웃음으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이 웃음은 비웃음을 극복하고서 나온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로 말미암은 웃음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사라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믿을 만한 근거를 제거하신 후 자신의 언약을 성취하셨습니다.
  
로마서 4:17-25절을 다시 보면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하나님이 주신 믿음입니다. 이 믿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17에 보면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를 믿은 것’입니다. 이것이 이삭에게서 하나님이 보이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있는 것에서 있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없는데서 있게 하시기에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만 위함이 아니요,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받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믿음을 제공하신 분이 요셉처럼, 다윗처럼 멸시와 천대를 받으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 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이나 다윗 할 것 없이 모든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의 모습이 얼마나 세상의 비웃음거리였으며, 멸시와 천대를 받았는지를 성경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받으신 대우를 보면 더욱 이 말씀들이 분명하여 질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에 삼년기간 동안 당하신 수모를 우리가 알지 않습니까? 얼마나 배척받는 모습으로 사셨는지, 그러나 그 절정은 역시 십자가 앞에서 입니다. 마태복음 27:27-44절을 보면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멸시와 천대, 희롱을 당합니다. 침 뱉음을 당하고 주먹질을 당합니다. '네가 남은 구원하면서 너는 구원 못 하느냐, 십자가에서 한번 내려와 보아라, 그러면 믿어주마'하며 조롱을 당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왜 이런 수모와 멸시를 당하는 것입니까? 사람들이 좋아하는 메시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곧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아들을 이렇게 대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분이 우리를 다시 살려내신 것입니다. 희생당한 자가 희생시킨 자를 살려내신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 앞에 우리가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무엇을 내가 이루어 놓았다고 말하시겠습니까? 우리는 흔히 윤리 도덕적인 차원에서의 죄만 말하다 보니 예수님의 멸시와 천대가 나와는 상관없는 그 시대의 나쁜 놈들이 한 일쯤으로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도 끊임없이 초라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 볼품없이 멸시와 천대를 받으신 예수님을 싫어합니다. 우리는 늘 내가 멋있고 큰 업적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은 없습니다. 오직 아들을 통하여 그 십자가의 고난을 통한 영광만 받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광스러워 지고자 하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얼마나 우리가 속고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업적들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리라 생각하는 그러한 생각과 행동이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도의 가장 큰 싸움이 이러한 싸움입니다. 이삭을 주신다는 그 약속을 받고서 웃었던 그런 웃음을 우리가 받아내는가, 요셉이 형들에게 받았던 그런 대접을 받는가, 다윗처럼 그런 대접을 받고서도 오히려 견뎌낼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러한 방법으로 자기의 택한 백성들을 모집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심판주로 영광의 왕으로 재림하실 그때까지 이와 같은 방법으로 자기 백성들을 부르십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에 세상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르지 아니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쓸데없는 세상의 영광을 따라 경쟁하며 살지 말아야 합니다. 도리어 손해보고 낮아지며 희생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안에서 십자가의 미련한 것이 구원의 능력으로 보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언약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 우리로 웃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허락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어떤 희생과 아픔과 비웃음이 따른다 할지라도 그것을 믿음으로 감당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살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TA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