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6장]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by 손재호 posted Feb 21,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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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손재호
성경본문 요 6:60-71
성경본문내용 (60)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61)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62)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6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64)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65)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66)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67)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68)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69)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70)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71)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 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강설날짜 2010-02-21

2010년 2월 21일 설교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말씀:요한복음 6:60-71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 표적 사건 이튿날 가버나움 회당에서 오병이어의 영적인 의미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53-59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 회당에서 모인 자들에게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는 마지막 날 곧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그를 다시 살리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자신의 살은 참된 양식이요, 자신의 피는 참된 음료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살을 먹고 예수님의 피를 마시는 자는 자신 안에 거하고 자신도 그 사람 안에 거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살아계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은 성부 하나님으로 인하여 사는 것처럼 자신을 먹는 그 사람도 자신을 인하여 산다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조상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지만 하늘로서 내려온 떡 곧 생명의 떡을 먹으면 영원히 산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이 사실을 가르쳐 주셨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하였습니까? 60절을 보면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늘로서 내려온 떡 곧 생명의 떡이시요, 영생의 양식이 자신의 살과 피라는 말의 의미를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고 하면서 수군거린 것입니다. 여기서 못 알아듣는 제자들은 자기들이 스스로 자원하여 예수님을 따라 나선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라 나선 자들 중에 그냥 대중의 무리가 있고 또 가까이 따라 나선 많은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택하여 세우신 열두 제자들과는 구별이 됩니다. 이처럼 당시 예수님 주위에는 열두 제자들 뿐 아니라 많은 제자들과 무리들이 따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이러한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는 것은 사람들의 다양한 욕구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양한 욕구를 가지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떡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따라나선 사람, 병 고침을 받기 위해 따라 나선 사람 등등. 그런데 많은 제자들과 무리들이 예수님 자신이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요,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생명이 없다고 하자 어렵다고 하며 다 떠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통해 자신들의 요구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어떻게 하는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들이 왜 다 예수님을 떠나간 것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걸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61-62절에 보면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수군거림을 아시고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 말이 너희로 실족케 하느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쳐 주신 말씀이 많은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걸림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실족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이 사람들로 하여금 걸림돌이 되고 실족케 하는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택하심을 받지 않고 자기들의 욕망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 실족케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자신들이 원하는 욕망을 체워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도 예수님의 사역의 내용이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1:2-3절에 보면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이러니 다른 사람들이야 어떠하겠습니까? 걸림돌이 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얼마나 걸림돌이 되고 눈에 가시와 같았으면 걸림돌 자체를 없애 버렸겠습니까?

오늘날 우리에게도 복음이란 걸림돌입니다. 우리의 모든 노력과 열성, 종교적인 업적들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에 복음이 기쁜 소식이기 이전에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걸림돌로서 다 무너지고 부셔지고 깨져야만 복음의 가치를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란 언제나 걸림돌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전도가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이기에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자기의 생존과 장래를 위해 디딤돌 곧 성공의 발판을 원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자기의 성장과 발전의 디딤돌로 삼을 뿐 아니라 신을 자기의 디딤돌로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신의 비위를 맞추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신이 돼지머리를 좋아하면 돼지머리를 바치고, 돈을 좋아하면 돼지 입에 돈을 넣는 것입니다. 정성을 원하면 겨울이라도 찬물로 몸을 씻고 정성을 바치겠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은 자기의 디딤돌로서의 신을 찾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이 얼마나 사람들로 하여금 이를 갈게 만들고 안색을 변하게 하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복음 전하는 자들을 돌로 쳐 죽이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7:51-60절에 보면 스테반이 복음을 전하자 유대인들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어 돌로 치는 것입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고 했습니다.

선교단체에서 교회로 전환한 후 저의 설교와 가르침을 들으면서 헷갈리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아니 헷갈린다기보다는 저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해 반발하고 힘든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전도를 하라는 말인지, 하지 말라는 말인지. 열심을 내라는 말인지, 말라는 말인지 헷갈리시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을 바르게 믿으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주님의 은혜로만 되는 것입니다만 적어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기에 예수 믿으라는 말이 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라는 말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려도 ‘그렇게 하지 말고 할 일을 정하여 달라. 할 일을 제시하시고 나를 따르라하면 따르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이 지금 요한복음 6장에서 ‘우리가 말씀만 하시면, 표적만 보여 주시면 우리가 믿겠습니다’고 하는 유대인들과 같이 자기들이 믿음의 주체를 가진 것처럼 말하는 것과 꼭 같은 것입니다.

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까요? 이것은 사람들이 은혜를 모르고 자기들의 행함만 알고 자기들의 행할 수 있는 능력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란 이러한 행함의 체계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 외에 한 다른 법이 왔으니 곧 믿음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3:21-22절에 보면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된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행함으로 구원이 오는 것이 아님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에 속하였다는 것은 단순히 살과 뼈를 가지고 있다는 표현이 아니라 우리의 행함의 능력을 의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63절을 보면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다’는 말씀에서 육이라는 것이 바로 사람의 행함의 능력입니다. 유대인들이 영생의 양식을 위하여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십일조를 했습니다. 구제를 하고, 전도도 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무엇이 더 부족합니까? 무엇이든지 할게요. 말씀만 하옵소서.’ 그런데 이것이 다 육에 속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나를 믿어라. 그것이 사는 길이고 영생의 길이다. 나의 말이 영생이고, 영이다’하니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어렵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쉽게 생각합니다. ‘믿으면 될 텐데 그것을 못 믿는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역시 육의 일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믿을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육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자에게 자신의 살을 주셔야만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곧 가룟 유다입니다. 열둘 중에서도 하나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닌 자를 택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는 긍휼의 그릇으로, 하나는 진노의 그릇으로 택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65절에서 말합니다.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시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오게 하시지 않은 자는 병 고침을 받았든지 먹고 배불렀든지 간에 모두가 떠나는 것입니다. 66절을 보면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고 했습니다. 육적 욕구를 따라 나선 자들은 결국 다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은 무익한 것입니다. 그러니 살리시는 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육의 일이 아니라 영의 일을 말씀하시자 다 물러갑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종교적인 열심이 우리를 영생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고 하니 그 동안의 종교적인 열심조차 다 내어 버렸지 않습니까? 종교적인 열심이 빠져나가서 교회가 유지가 안 되더라도 영생을 받는 길은 오직 주님의 일하심 만이라는 것을 증거하여야 합니다. 우리를 살리시는 것은 오직 주님의 살과 피가 우리를 살리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67절에 보면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고 하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68-69절에 보면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제자들을 대표해서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제자들은 영생의 말씀이 계시기 때문에 아무 데로 안 간다는 것입니다. 곧 영생의 말씀이 되시는 예수님을 떠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심을 믿고 알았다고 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70-71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 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둘 중에 한 사람은 마귀라고 했습니다. 곧 열둘 중에 하나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는 자신을 팔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였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열둘을 택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또한 그 중에 하나 곧 가룟 유다는 마귀라고 합니다. 유다는 열둘 중에 하나로 자신을 팔자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택하셨으면 구원을 받아야 할 텐데 왜 가룟 유다는 마귀의 자식이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는 장본인이 되는 것입니까? 왜 이런 자를 열둘 중에 하나로 택하신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통해 무엇을 말해주고자 하시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거룩한 구속 사역을 위해 열두 사람을 제자로 삼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 중에 한 사람 곧 가룟 유다는 자신을 믿지 않고 배반할 것임을 알고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제자 삼으신 개념을 우리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을 말합니다. 곧 예수님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아들이심을 믿고 주로 섬기는 믿음에 있는 것이며, 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과 부활의 생명을 전하는 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의 제자에는 그런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을 배반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는 일에 공헌을 하는 가룟 유다도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러니까 가룟 유다는 선지자가 전한 예언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나무에 달려 죽음을 당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데 쓰여질 자로서 제자의 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룟 유다는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실 그 이 일에 쓰여지기 위해서 택함을 입었습니다. 이렇게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온 세상에 예수님을 전하는 데 쓰여지는 일을 위해서 택함을 받으며, 또 어떤 사람은 제자로서 예수님을 배반하는데 쓰여지는 일을 위해서 택함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은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도 예수님이 하시는 하나님의 일과 관련해서 있습니다. 예수님이 열두 사람을 제자로 부르시고 또한 그들을 사도로 삼으십니다만 그들 모두가 다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요, 그래서 항상 예수님을 따르며 그 곁에 있었고 앞으로 사도의 일을 할 사람인데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제자로 부르시고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실 일을 하셔야 할 것인데 여기에 가룟 유다를 쓰고자 해서 그를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는 예수님을 배반하여 악한 무리들에게 예수님을 넘겨주는 일을 하는 것에서 예수님을 떠납니다. 그는 제자의 한 사람으로 택함을 입었으나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을 뻔했던(마 26:24), 결국은 예수님을 떠났던 그 택함의 무리 속에 있는 자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 밖에 영원한 이방인으로 있는 멸망 받을 택함에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고 하셨는데 하나님께서 미워하신 에서에게 속한 택함에 있었던 것입니다(말 1:2-3, 롬 9:23).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7장 대제사장적 기도에서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12). 이 말씀에 보면 멸망의 자식이 있고 결코 멸망하지 않을 자식이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예언대로 되어지는 것인데 곧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택함이 있고, 하나님의 미움을 받는 택함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영생의 말씀이 있음을 알고 남은 자는 자기들이 잘 알아보고서 남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예수님께로 보내신 자들입니다. 곧 자기 실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남은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당에 왜 나옵니까? 영생의 말씀을 받았기에 나오는 것입니다. 육은 무익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는 말씀입니다. 내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셔서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심으로 우리를 살려내신 것입니다. 이 영생을 주시는 일을 요한복음 7:39절에 보면 예수님을 믿는 자가 받을 성령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의 성령이 임하심으로 우리가 생명을 받았고 이제는 떡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아니라 영생을 주신 분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영생을 받은 자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것입니다. 이미 나의 것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인데 무엇을 주님께 드리고 말고 할 것이 있습니까? 모든 것이 은혜로 주어진 것이기에 우리가 모든 것을 내어 놓아도 그것은 우리의 공로나 자랑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은혜일뿐 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할 때에도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자기 은사대로 하는 것입니다. 쓰레기가 보이면 보는 분이 청소하면 됩니다. 헌상도, 섬김도,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이 시간 우리에게도 물으십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는 고백을 허락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우리를 택하여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로 말미암았음을 알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 고백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늘 찬양하며, 오직 영생의 말씀이 되신 주님을 좇아 살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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