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8장] 세상의 빛 예수!

by 손재호 posted Mar 21,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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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손재호
성경본문 요 8:12-20
성경본문내용 (12)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13)바리새인들이 가로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거하니 네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도다(14)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어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15)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16)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나와 함께 계심이라(17)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기록하였으니(18)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19)이에 저희가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20)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연보 궤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강설날짜 2010-03-21

2010년 3월 21일 설교


세상의 빛 예수


말씀:요한복음 8:12-20

우리는 지난 시간에 7:53-8:11절 말씀을 통해 간음한 여인에게 죄사함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위대한 선언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삽입된 이야기로 본다면 12절의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라는 말로 시작되는 오늘 본문은 우리가 지난번에 살펴본 7:37-38절 말씀 곧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초청하시는 말씀에 이어지는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초막절 절기 중 아침 제사 때 시행되었던 헌수 예식 곧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길어 성전 제단에 붓는 의식과 관련하여 예수님 자신이 생수의 근원이 되심을 밝히신 것에 이어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는 역시 초막절 절기 중 저녁 시간대에 거행되었던 빛의 예식과 관련하여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초막절 기간 동안에는 연보궤 앞 곧 여인의 뜰에는 황금 등대들이 있었습니다. 이 등대들에는 각각 4개의 황금 주발들이 놓여 있었고, 그곳에 불을 환하게 밝혀 두었습니다. 그런데 초막절 마지막 날에는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등 소위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종교지도자들이 무리들 앞에서 손에 횃불을 들고 춤을 추었으며, 그들 앞에서 노래와 찬양을 불렀습니다. 초막절에 행하여졌던 이와 같은 빛의 행사를 통해 유대인들은 조상들의 광야 생활을 이끌어 주었던 불기둥을 재현하고자 하였습니다. 더군다나 이 절기가 추분과 겹쳐 있어서 이 때를 정점으로 기울어가는 여름과 가을 빛을 아쉬워하며 붙잡고자 하였습니다. 이런 배경 하에서 예수님께서는 횃불의 빛이 환하게 밝혀진 연보궤 앞에 서서 자신이 세상의 빛이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를 통해 어두움 가운데 있는 인생들로 하여금 빛 되신 자신에게로 나아오도록 초청하신 것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12).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밝히신 것은 사람들이 진정으로 갈망해야 할 빛이 단순히 황금 주발에 기름을 채워 밤을 밝히는 한 축제일의 빛이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 가운데 오신 살아있는 인격인 자신이 진정 인생들에게 참 빛이심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과거 광야생활 때 장막 위에 임하였던 그 영광의 빛을 사모하고 있다면, 더 이상 하나님의 빛은 그런 방식으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장막이나 성전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성육신 하신 아들 위에 그 빛이 임하고 우리는 그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앞에 나아갈 수 있음을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다른 시점도 아닌 초막절 절기에 횃불을 밝혀두는 행사에 맞추어 선포되고 있다는 것이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빛에 대한 사람들의 갈망이 최고조에 이른 자리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선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유대인들의 기대만을 만족시키는 제한된 빛이 아니라, 온 세상을 밝히는 ‘세상의 빛’으로 자신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7장에서 ‘생수’에 대해서 말씀하셨던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예수님 자신이 ‘세상의 빛’이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라는 선포는 요한복음 저자의 독특한 기술 양식입니다. 우리가 요한복음 개요에서 공부한 것처럼 ‘에고 이에미’용법입니다. 곧 ‘나는~이다’라는 용법입니다. 요한복음 저자는 이와 같은 용법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초막절에 언약궤 앞에 밝혀 놓은 횃불 앞에서 자신이 바로 세상의 빛이심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빛이라는 진리는 요한복음 서두에서부터 강조되었던 내용입니다. 1:4-5절을 보면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했고, 1:9절에서는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각 사람에게 비취는 ‘참 빛’으로 소개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자신이 세상의 참 빛이 되심을 선포하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오늘 본문 12b절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세상에 오셔서 각 사람에게 비취시는 빛 되신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선포하시는 것은 이 세상이 어두움 가운데 있다는 것을 이미 전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세상을 볼 때 캄캄한 어두움으로 보입니까? 아니면 어두움도 있지만 그래도 밝은 빛이 많다고 보십니까? 사람들은 캄캄하다고 보면 ‘부정적이다, 비관적이다, 허무적이다’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긍정적으로 세상을 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긍정의 힘’이라는 책이 베스트셀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긍정의 힘을 강조합니다. 한국에서 유명하다는 목사들마다 앞다퉈 긍정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 긍정의 힘을 바탕으로 어느 유명한 목사는 4차원 영성을 펼칩니다. 하여튼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어두운 부분도 있지만 밝은 부분도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므로 긍정의 힘을 가지고 열심히 살면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이 세상은 근본적으로 어두움 가운데 있기 때문에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성경은 무엇이라고 증거 합니까? 온 세상이 캄캄한 어두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곧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 이 세상이 캄캄한 줄 모르고 불편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직도 어두움이 무엇인지, 빛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동시에 어두움의 일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요한복음 1:5절에 보면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에 빛을 싫어하여 추방해 버린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이것은 유대인의 율법 선생인 니고데모나,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 치운 사마리아 여인이나 꼭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못 알아본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어두움에 속한 증거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는 간음한 여인을 현장에서 붙잡아 와서는 율법의 공의를 실현하고자 함이 아니라, 율법을 가지고 오히려 예수님을 고소하여 제거하고자 하는 악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율법을 제정하신 분 앞에 율법을 가지고 고소거리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긴다는 유대인들조차 어두움 아래 있다는 것이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이신 예수님 앞에서 율법을 말하는 자들이 모두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율법을 가지고 바르게 시행한다는 자들이 예수님 앞에서는 어두움의 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이 이렇다면 이방인들이야 말해 무엇을 하겠습니까? 당연히 어두움 안에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자신들이 어두움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것이 어두움인줄 모르는 것입니다.

이사야 1:3절에 보면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도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것이니 이 세상의 사람들이 자기를 지으신 분을 모르고 자기 자신들이 주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두움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소나 나귀보다 못하다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세상의 주인이 되어 있으니 참된 주인이 빛으로 오셨건만 사람들이 주인을 알아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주인을 아에 죽여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어두움에 속하여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세상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빛되신 주님께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빛되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제 빛을 알았으니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자’라고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하니 사람들이 자꾸만 윤리 도덕적인 면에서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사람들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 말씀의 의미에 대해서는 9장의 한 예를 통해서 그 의미를 생생하게 계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시고 고쳐주셨습니다.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했습니다. 이에 그 사람이 가서 씻었는데 눈을 뜨고 밝은 눈으로 왔습니다. 그는 주님의 은혜로 눈을 떠서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육신의 눈을 뜨게 된 것만이 아니라, 차츰 믿음의 눈을 뜨고 하늘로부터 오신 ‘인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눈을 뜬 소경에게 예수님을 죄인으로 부인하도록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소경은 자신의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9:32-33절에 보면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일로 인해 그는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9:35절에 보면 예수님은 그가 쫓겨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 사람을 찾아가셔서 “네가 인자를 믿고자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그가 누구냐고 자신이 믿고자 한다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너와 말하는 자가 그니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9:38절에 보면 그 사람은 “주여 내가 믿나이다”하고 절을 하였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자는 예수님으로 인해 눈을 뜨고 예수님 안에서 새 세계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진정으로 바라보는 자가 되었습니다.

빛이 있을 때만 우리는 세상의 비밀을 바르게 볼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이 빛이심으로 그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의 세계를 환하게 보게 됩니다. 빛을 통해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단순히 우리 자신 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자는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예수님이 인자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구원자가 되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는 구원함을 받고 새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어두움의 권세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을 얻고 빛 가운데서 새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하신 이 말씀은 세상의 빛되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진리를 보고 영생을 얻는 것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다는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빛과 소금이란 어떤 것이겠습니까? 전에는 어두움을 몰랐는데 이제는 어두움인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라는 탄식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탄식은 전에는 나오지 않은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조금만 더 애를 쓰면, 노력하면 좋은 세상 만들 수 있어 하든지, 유대인 식으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으니 이 율법을 따라 살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모두가 어두움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상태를 빛이신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모르는 것입니다. 아직도 사람들은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것입니다. 잘난 사람 잘난 대로 살고, 못난 사람 못난 대로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빛 되신 예수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제 자기의 못남을 알고 사는 것입니다. 빛이 비추이기 전에는 자기 잘난 맛에 살았는데 이제 빛이신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보니 잘난 것은 하나도 없이 못난 것뿐임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의 고백이 무엇이겠습니까? ‘주여! 나를 살려주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이렇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빛과 소금의 역할입니다. 곧 세상과 구별됨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세상의 구별됨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란 결국 인간이 얼마나 죄인인가를 확인시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8-14절을 보면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빛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두움의 일을 빛 가운데서 책망을 받는 것입니다. 책망을 받는 것은 빛으로 나타나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빛을 비추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빛 앞에 나타나는 것은 자신의 죄와 어두움이 더욱 밝혀지는 것입니다.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죄악까지 빛 앞에 노출되어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세밀하게 빛 가운데서 자기의 죄가 드러남으로 더욱 주님만 의지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죄인임을 깨닫고 겸손히 주님만을 의지해서 사는 것이 바로 빛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13-1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이다”고 하자 바리새인들과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13절에 보면 “네가 너를 위하여 증거 하니 그 증거가 참되지 아니하도다”고 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두 사람 이상이 증거해야 효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14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어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증거가 옳은 이유는 자신이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를 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곧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 자신이 스스로 증거를 하니 참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5:31절 말씀 곧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라고 하신 말씀을 들어서 예수님의 증거가 스스로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증거가 참되지 않다고 꼬투리를 잡는 것입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형식적인 법적인 절차에 관심을 가지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인격적인 본질을 나타내시는데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15-18절에 보면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기록하였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육체를 따라 판단하지만 예수님의 판단은 그를 보내신 자에 따른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육신을 따라 예수님이 목수 요셉의 아들이요, 갈릴리 촌놈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증거가 참되지 않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스스로 판단하여도 그 판단이 참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율법에서도 두 사람이 증거하면 그 증거가 참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스스로 증거하여도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증거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증거가 참된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벌이는 논쟁은 7장에서 벌이는 논쟁과 유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7:27-30절에 보면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가라사대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로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니라 하신대. 저희가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보면 예수님의 기원과 그의 보내신 자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논쟁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도 똑같이 되풀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을 위하여 증거하여도 참되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함께 하셔서 증거하시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19a절에 보면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19b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인자이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아이러니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잘 알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 되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그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어두움 가운데 있는 우리 인생들을 초청하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예수님의 초청의 음성을 듣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생명의 빛을 얻고 빛 가운데 사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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