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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성경본문 고전 15:12-34
성경본문내용 (12)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13)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14)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15)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16)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17)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18)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19)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20)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21)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22)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23)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24)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25)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 노릇 하시리니(26)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27)만물을 저의 발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의 아래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28)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29)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30)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31)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32)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33)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34)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강설날짜 2010-04-04

2010년 4월 4일 주일설교


부활의 산 소망


말씀 : 고전 15:12-34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의 교회에 부활신앙이 없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성도들이 초대교회 때처럼 주와 복음에 목숨을 걸고 살아가는 그런 생동감 있고, 역동적인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일리 있는 지적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점점 세속화되어지고, 경건의 능력을 상실해가고 있습니다. 신앙이 점점 냉냉 해져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임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 속에 부활신앙이 점점 자리를 잃어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고수해야 할 부활신앙이 무엇일까요? 부활의 산 소망가운데 살아간다는 말이 어떻게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매우 익숙한 주제이고 늘 이야기 하고, 또 그것이 자신에게 주는 의미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주제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는 사도들이 부활을 자주 언급했던 것처럼 그렇게 많이 말해지지도 않고, 그것이 또한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고 사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는 많이 묵상하고 생각하지만, 그분의 부활에 대해서는 좀처럼 묵상하거나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에 뭔가 문제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의 부활과 자기 자신이 어떤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부활신앙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함께 묵상하면서 이 물음의 해답에 얻고 부활신앙을 덧입는 시간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15장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부활과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하면서 부활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12절을 보시면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바울은 1-11절까지 해서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복음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한 뒤, 본격적으로 부활에 관한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 지적합니다. 그것은 고린도 교회의 일부 사람들의 주장으로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는 가르침입니다. 헬라철학의 영향을 받은 자들 같은데 이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주장을 했는지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러나 어느 견해를 택하든지 간에 분명한 것은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 곧 몸의 부활을 부정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의 부활까지도 부인했다면 이건 복음 자체를 무너뜨리는 심각한 문제가 돼 버리기 때문에, 바울이 이 문제를 그의 서신 후반부에 다룰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 갈라디아서처럼 초반부터 맹렬하게 이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서 꾸짖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후반부에 이 내용이 실려 있고, 또 바울의 어조가 그렇게 강하지 않은 것을 볼 때, 그렇게 복음의 본질까지 부정하는 그런 심각한 잘못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정하는데, 다만 죽은 자의 부활은 부정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을 펼치는 무리들에 대해서 바울은 부정적인 접근으로 논박해 갑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하는 잘못된 전제를 깔고서 그 결과가 어떠한지를 보여줌으로써 역으로 죽은 자의 부활이 진리임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만일’이라는 단어를 6번 사용하고 있는데, 그래서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는 주장이 진리라면 거기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결과들을 차례차례로 나열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선 죽은 자의 부활을 부정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고 단언합니다. 13절에 보니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이것은 바울의 논지의 핵심이 되는 내용인데요. 죽은 자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을 때, 그 논리적 귀결이 무엇이냐...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까지도 부정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을 부정했던 자들이 이 얘기를 들었을 것 같으면 아마 까무러칠 것입니다. “아니...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부정한 적이 없고, 다만 죽은 자의 부활만을 부정한 것이다”라며 설레발을 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볼 때는 그들이 비록 입으로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고백할지는 몰라도, 결국 논리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고백하는데, 논리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부정하는 경우는 그 당시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도 그럴 수가 있습니다. 우리도 입으로는 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음을 시인합니다. 우리가 죽으면 나중에 다시 부활할 것이라고 매주 사도신경을 통해 고백합니다. 그런데 실천적으로 정말 자신이 나중에 죽어서 부활할 자처럼 살아가고 있는가? 장차 이 세상이 불타 없어질 것과 그 후에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있을 것을 믿기 때문에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매일의 삶 속에서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실천적으로는 그렇게 안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은 우리의 부활신앙의 고백의 진정성은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연히 책을 읽다가 재미있는 설교를 발견했는데, 조나단 에드워드의 설교입니다. 제목이 흥미롭습니다. ‘심판 날 다시 만날, 분쟁하는 목사와 교인들’입니다. 이 설교는 목사와 성도들 사이에 있는 어떤 다툼이나 불신, 분쟁의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요, 만일 정말 자신이 부활할 것이고 모두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믿는다면 서로 다투고 불신할 수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마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인데,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인데, 같은 하나님의 형제 자매로서 서로 용서하고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목회자뿐만 아니라 옆의 형제를 향하여 다툼이 일어나고 미움과 원망의 마음이 일어난다고 한다면 그것은 엄밀히 말하면 부활을 안 믿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고백할지는 몰라도 엄밀하게 말하면 자신의 부활도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도 안 믿는 것입니다.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부활신앙이 없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마치 전부인 양 그렇게 코를 묻고 이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일에 매여서 마치 세상의 일이 전부인양 그것에 울고 웃는 삶을 사는 것도 마찬가지이구요. 만일 우리가 이런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도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 똑같이 실천적으로는 죽은 자의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이고 또 그것의 필연적인 결과인 그리스도의 부활도 믿지 않는 자들인 것입니다. 언제고 우리가 어떤 진리를 안다고 할 때는, 그것을 믿는다고 할 때는 이렇게 실천적인 앎, 실천적인 지식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짜 믿는 것입니다. 입으로만 하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안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예수님의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죽어서 부활할 것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믿는다면 정말 믿는 자답게 살아가는 일이 있어야 하는 것이죠.


계속해서 본문을 보시면요. 바울은 이어서 그러면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또 어떤 필연적인 결과가 나타나는지를 열거합니다. 첫 번째는 사도들의 전한 복음이 거짓말이 된다는 것입니다. 14-15절에 “(14)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15)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는 전제가 진리라면 그리스도의 부활도 없고, 또 그것을 증언한 사도들 역시 거짓증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거짓증인은 실제로 듣지도 보지도 않은 것을 보고 들었다고 꾸며 말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더욱이 이 경우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속인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독한 큰 죄인으로 드러날 것이라는 겁니다. 바울이 이렇게 조금 극단적인 표현을 쓰는 이유는 고린도 성도들이 바울을 참된 사도로 생각하고 그의 가르침을 믿고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그 토대 위에서 지금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을 사도로 인정하는 것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는 자들의 가르침을 용인하는 것이 얼마나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상황인지를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 되고 여전히 죄 가운데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17절에 “(17)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라고 하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의 부활이 없으면 믿음이 헛것이 되고 죄용서가 없게 되는 것일까요? 일반적으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되고 구원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그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죄용서와 구원은 그리스도의 죽으심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 용서와 구원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이죠. 로마서 4:25에서 바울은 “(25)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죄 용서함 받고 의롭다함을 얻고 구원받는 것의 근거가 죽으심만이 아니라 바로 죽으시고 또한 부활하셨다고 하는 이 전체 구속 사역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진정한 의미가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부활절 때에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축하하고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려드리고 그것을 기념해서 이렇게 부활절도 지키고 계란도 삶아먹고 하는데, 그 예수님의 부활이 그러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나의 죄 때문에 죽으신 대속사건으로 받아들이지만,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러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일어난 사건인 것처럼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 역시 바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곧 자기 백성의 유익을 위하여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점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만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 그를 따랐던 많은 유대인들은 그를 이스라엘의 구속자로 바랐지만 결국에는 운명적인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 실패자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며 성령을 교회에 부어주심으로써 자신의 십자가 죽음이 운명적인 죽음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대속적 죽음임을 친히 나타내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이 자기 죄 때문에 죽은 것인지, 아니면 우리 죄를 위해 죽은 것인지 확신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살리심으로써 예수님이 죄 없으신 의로운 자이심을 드러내시고 그분의 죽음이 바로 우리의 죄를 대신하는 대속적 죽음임을 명확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셔야만 바로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있는 우리를 구원하실 구세주가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구원과 죄 사함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바울의 사상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생각할 때 핵심적인 전제를 고려해야 하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행하신 모든 구속 사역이 그의 백성들과 연합한 대표자로서 행하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로마서에 보면 “(4)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 6:4)고 했고, 골로새서에서는 “(12)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 2:12)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홀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셨다가 3일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이 아니라, 교회와 연합한 교회의 머리로서 우리의 대표자로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고, 또 예수님과 함께 장사지낸바 되었으며, 또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 우리도 함께 부활했고, 예수님과 함께 승천했으며(골 3:3), 예수님과 함께 우리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혀진 것입니다(엡 2:6). 이렇게 예수님의 사역은 예수님 자신의 홀로의 사역이 아니라 그분의 백성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 속에서 행하신 그리스도로서의 중보사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모두 다 성도의 구원과 영생과 유익을 주는 사역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만 우리를 구원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서의 모든 사역 전체가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되고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고 이끌어주는 동인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활과 관련해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것을 짚고 넘어가야 하는데,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실 때 그분과 연합하여 이미 부활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의 부활이 그분만의 부활이 아니라 바로 나의 부활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부활이라고 할 때는 우리가 죽고 나서 새로운 몸을 덧입는 것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부활의 새 생명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우리가 중생될 때, 그분과 연합하여 새롭게 거듭날 때, 이미 부활의 능력이 우리의 삶 속에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재림의 때에 몸의 부활로 그것의 절정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먼 미래의 일도 아니고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인 일도 아닙니다.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지금 우리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체험되어지고 나타나지는 부활의 새생명 가운데 행하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사는 것인지는 조금 있다가 살펴보도록 하구요. 어쨌든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곧 신자의 중생과 구원, 그리고 신자의 부활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음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바울은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간의 연합적인 구속이라는 큰 그림을 그리면서 지금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믿음도 헛것이고, 죄 용서도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신자가 당하는 많은 고난과 어려움들, 그리고 그들이 주와 복음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삶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18절에 보면 “(18)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라고 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한 것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잠잔다는 말은 예수님께서도 몇 번 사용하신 말인데, 성도의 죽음을 일컬을 때 신약성경이 즐겨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신자의 죽음을 잠잔다라고 표현한 것은 신자가 다시금 깨어나서 부활할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죠. 잠잔다라는 표현 속에 이미 기독교 부활신앙이 심겨져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자, 곧,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도 망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당하는 많은 희생과 고난과 어려움을 참고 살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죽음 이후에 아무것도 없다면, 그야말로 삶을 잘못 산 것이고 망한 것이라는 겁니다. 이점은 19절에서 더욱 강조됩니다. “(19)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만일 죽음 이후에 부활이 없고, 이 세상에서의 삶이 전부라면 그리스도인은 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가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또한 역으로 생각해보면 신자란 부활의 산 소망 가운데 이 세상에서 여기 표현 그대로 쓰면 소위 ‘불쌍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임을 또한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활신앙을 가진 신자의 삶의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참 불쌍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쌍하게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보고, 혀를 차면서, “참 어리석은 삶을 산다, 참 미련한 삶을 산다, 보고 있으면 참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라는 말을 듣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미련해서 우리가 뭔가 잘못 해서 그런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살기 때문에 당하는 많은 고난과 어려움, 희생과 헌신의 삶 때문에 그런 소리를 듣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고난의 길로 들어선다는 말과 다름이 없습니다. 신자로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주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고자 할 때 우리는 수많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고,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를 향해 세상 사람들은 ‘참 불쌍하다’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부와 안위를 위해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버는 족족 다른 사람들을 위해 다 쓰고, 자신은 가난하고 검소하게 살아갑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을 누리면서, 쾌락을 즐기면서 살아가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주는 기쁨과 즐거움, 쾌락을 다 포기하고 살아갑니다. 오히려 세상의 유혹들, 죄의 쾌락들, 내면의 악한 정욕과 날마다 피 터지는 싸움을 싸우고, 그렇게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를 죽이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명예와 자존심을 최고로 생각하고 높이며 자랑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갈 때는 많은 조롱과 멸시와 미움을 받아서 살아갑니다. 자존심 체면이 어디 있습니까? 자존심 체면 다 내던져버리고 자신을 조롱하고 멸시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을 향해 오히려 용서하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갚으며 사랑으로 섬기고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고 하기 때문에 세상이 자기를 미워한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은 똑같은 이유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혐오하고 미워합니다. 초대교회 때는 황제숭배를 거절한다는 이유 때문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순교의 길을 갔습니다. 초대교회 때 성도들을 핍박하기 위해 사용한 고문 도구들과 사형도구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치를 떨게 합니다. 칼로 죽고 화형당하고, 동물의 먹이가 되는 것은 오히려 점잔케 죽는 것입니다. 몇 가지만 말씀드리면 가시가 박혀 있는 의자에 앉혀서 몸을 꽉 죄여 오는 도구도 있고, 틀에 넣어서 즙을 짜셔 죽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게 신앙의 선조들은 주와 복음을 위해 자신의 재산, 소유, 자신의 모든 건강과 생명까지도 불태워 드리는 삶을 살아갔습니다. 이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서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를 내리겠습니까? 미쳤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불쌍하잖아요. 만일 신자에게 부활이 없다면 세상 사람들의 평가는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다시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할 것을 믿었기 때문에, 더 나은 삶에 대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순교의 길로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의 30절을 보시면 바울은 이점을 바울 자신의 사역과 연결시킵니다. “(30)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31)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32)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바울은 부활이 없었다면, 때마다 위협을 무릅쓰고 복음을 위해 생사의 투쟁을 한 것이 무슨 유익이 있느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맹수와 싸운 일을 거론하는데, 이것은 유대주의자들과 복음의 대적자들의 맹렬한 공격을 비유한 말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주와 복음을 위해서 어떤 고난과 환란을 당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울 서신 어떤 곳에서는 그는 이렇게 말했지요. “(23)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 뻔하였으니(24)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25)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26)여러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27)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28)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 11:23-28)


뿐만 아니라 바울은 거의 죽을 위험에 처해져서 마치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자신을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매일매일의 삶을 죽음의 위협 아래서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날마다 죽노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매일 죽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한다는 것이고, 주님 앞에 목숨 내어놓고 사역하기 때문에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렇게 목숨 바쳐서 생명 걸고 죽을 각오로 복음 증거하는 일에 자신의 전 생애를 불태운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이 모든 수고와 헌신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것입니다. 차라리 내일 죽을 것이니 오늘 먹고 마시자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부름의 상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그 소망을 따라서, 주님과 영원히 함께 있을 그 즐거움을 위해,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았던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이러한 하늘의 더 좋은 소망을 가지고 그것을 소망하며 이 땅에서 주의 말씀을 따라 고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부활신앙이요, 그것이 부활의 산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활신앙이란 죽고 나서 자신이 다시 살 것을 믿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에 될 일에 대한 나의 신조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러한 부활신앙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10)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11)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4:10-17)


사도바울이 말하는 부활신앙이라는 것은 미래적인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 속에서 십자가를 짊어짐으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부활의 새생명이 몸 안에 나타나게 하는 것, 그것이 바울이 말하는 진정한 부활신앙인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시고 죽으심으로 부활에 이르신 것처럼 우리도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죽이는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본받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부활의 산 소망 가운데 살아간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참 이런 것을 볼 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 이것이 쉬운 말이 아님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 편하게 믿는다?, 대충 믿는다? 쉽게 믿는다? 안일하고 편한 신앙생활?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언제나 목숨 걸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주와 복음을 위해서 죽을 각오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35)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씨가 땅에 떨어져서 죽어야 새로운 부활의 생명으로 다시금 태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 자신을 돌아보십시다. 우리에게 자신이 부활할 것에 대한 확신과 소망이 있습니까? 사도바울처럼, 많은 믿음의 선진처럼 용감하게 주와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담대함과 용기가 있습니까? 이 시간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만일 우리 마음에 부활신앙이 없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회개하고 돌이켜야만 합니다. 우리에게 이 부활신앙을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범치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정신을 차려서 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시선을 땅에서 하늘로 옮겨야 합니다. 죽음 너머에 있는 더 좋은 삶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고 이 소망 가운데 이 땅에서 나그네로서 고난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부활신앙을 덧입혀 주셔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고백한 사도바울처럼 우리로 주와 복음을 위해 목숨 걸고 충성하는 저와 여러분 삼아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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