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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성경본문 히 1:1-4
성경본문내용 (1)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2)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3)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4)저가 천사보다 얼마큼 뛰어남은 저희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강설날짜 2012-06-03

2012년 6월 3일 창원한결교회 주일예배강설

히브리서 제1강

 

그리스도의 신성

 

말씀 : 히 1:1-4

 

오늘부터 히브리서를 배워보고자 합니다. 히브리서는 읽어보신 분들을 아시겠지만 좀 이해하기가 어려운 책입니다. 우선 구약을 많이 인용하고 구약의 내용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구약에 익숙하지 않으면 히브리서의 내용을 선뜻 이해가 잘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논증들이 많이 나옵니다. 천사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라는 주제라든지, 멜기세덱 이야기라든지, 다윗의 글을 인용하면서 히브리서 수신자들에게 적용하는 안식 개념이라든지, 여러 가지 생소한 주제들이 연거푸 이어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곳곳에 통렬한 경고들이 나오기 때문에 읽기가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강단에서 이 히브리서가 많이 냉대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히브리서를 꼭 공부하고 배워야만 하는 이유는 이 히브리서가 다른 어떤 신약성경보다도 풍부한 기독론을 담고 있고, 예수님이 대제사장이 되신다 라고 하는 (감동적이고 은혜로운) 깊은 복음의 진리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당시 히브리서 수신자들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너무나 꼭 필요한 말씀들입니다. 우리가 이 히브리서 공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 진리를 깊이 깨닫고 그 복음 진리 위에 굳게 서는 은혜가 우리 가운데 충만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간단하게 이 히브리서의 배경을 먼저 말씀드리면, 이 히브리서가 옛 언약의 열등함과 무능력함을 강조하고, 또 그리스도 안에서 허락된 새 언약의 탁월함과 우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아마도 이 편지는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진 편지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제가 옛 언약, 새 언약 이렇게 말씀드리니깐 말이 굉장히 어렵게 느껴지는데, 전혀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죠? 구약과 신약입니다. 구약(舊約)이 바로 옛 언약이고, 신약(新約)이 새 언약입니다. 그런데 이 둘의 관계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구약의 모든 내용은 다 예수 그리스도를 초점으로 하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이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손가락질하여 가리키는 그림자요 모형인 것입니다. 그래서 비유적으로 말씀드리면, 사랑하는 애인이 문을 열고 들어올 때, 먼저 그림자가 보입니다. 그러면 사랑하는 사람은 그 그림자만 보아도 가슴이 설렙니다. “아~! 그이가 왔구나...” 그런데 문을 활짝 열고 그 애인이 들어왔으면, 이제 그림자는 그만 쳐다보고 애인을 쳐다보아야 하는데, 이 유대인들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애인은 갖다 내동댕이 쳐버리고 그림자에다가 막 뽀뽀를 하고 부둥켜안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구속사역을 완성하시고 구약을 다 성취하셨으면, 이제 옛 언약은 잊어버리고 새 언약을 붙잡고, 새 언약 아래에서 살아야 하는데, 많은 유대인들이 이 옛 언약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모세와 율법에 대한 충성심과 자부심이 너무 대단했기 때문에 옛 언약이 새 언약으로 대체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이 아니라 모세와 율법에 대한 쓸데없는 맹신인 것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기독교를 저주받을 이단으로 정죄하면서, 모세 율법에 절대적으로 충성합니다. 오늘날에도 안식일을 지키고 유월절을 지키고 동물의 희생 제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이런 사람들을 유대교라고 부르는데, 유대교는 명백하게 이단입니다. 같은 구약을 믿고, 같은 여호와 하나님을 부른다고 “기독교의 형제다, 기독교의 뿌리이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유대교는 이방종교와 다를 바 없는 우상이고 멸망 받을 이단입니다. 왜요? 구약의 모든 것의 목표요 성취이시고 실체이신 예수님을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수신자들이 바로 이런 문제에 흔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환영하며 믿어 영접했는데, 영적으로 게을러서 말씀공부에 힘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게 허락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그분이 자신들에게 허락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크고 충족한 구원이며, 구약에 비해서 얼마나 탁월하고 우월한 특권과 지위를 누리게 되었는지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런 복음의 진리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밖으로는 고난과 핍박이 몰려오고, 안으로는 은혜 없는 메마른 신앙생활이 지속되고, 또 약속된 주님의 재림은 계속해서 지연되고, 아니 아예 다시 오실 징조도 보이지도 않고... 그렇게 큰 결심을 하고 바꾼 기독교가 현실 속에서 아무런 힘과 위로가 되지 못하니깐, “이게 아닌가? 내가 잠시 뭔가에 홀렸나? 정말 예수님을 믿은 것이 잘한 것인가?” 그런 식으로 그들의 믿음이 뿌리에서부터 흔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히브리서에는 몇 차례에 걸쳐서 배교에 대한 통렬한 경고를 하는데, 이것을 볼 때, 히브리서 수신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아예 기독교 복음을 포기하고 유대교로 돌아가려고 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겠지요. 그러나 배교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대부분 수신자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에 대한 의심과 불신앙, 그리고 절망과 낙심, 그리고 영적 미성숙에 머물면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고난을 향해 담대히 전진해 나아가지 못하고 주저하고 머뭇거리고 자기 살길을 찾기 위해 세상을 타협하는 영적인 방황과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확인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그들에게 히브리서 저자는 그들에게 허락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시고, 그분을 소유한 신약백성들의 더 나은 특권들과 지위들이 무엇인지를 이 히브리서 편지를 통해 다시금 재확인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복음 진리를 굳게 붙잡고 소망 가운데 고난과 핍박을 인내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히브리서 메시지는 동일하게 오늘날 우리들도 너무나 필요한 말씀입니다. 우리도 우리에게 허락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이 없고, 우리에게 이미 허락된 특권과 지위를 모르면, 우리도 얼마든지 히브리서 수신자들과 똑같이 우리에게 주어진 큰 구원을 등한시하면서, 불신앙과 영적 미성숙의 상태에 머물면서 현실과 타협하고 육체의 정욕을 따라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히브리서 메시지는 초대교회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너무나 중요한 말씀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히브리서 말씀 공부를 통해서 이러한 복음의 진리를 다시금 깨닫고 재확인하고 그 진리위에 굳게 서는 은혜가 우리 가운데 충만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다. 오늘 본문은 편지의 시작부분인데도 불구하고 저자나 수신자에 대한 소개나, 또는 인사말이나 축복기도 없이 곧바로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장엄하고 웅장한 문장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1)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2)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3)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은 구약의 선지자보다 비교할 수 없이 우월하시고 탁월하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소유하고 그분 안에 있는 우리가 구약의 선지자들을 소유한 구약의 백성들보다 얼마나 더 놀라운 특권과 지위를 누리고 있는가 하는 것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을 이렇게 평가하셨습니다. “여인이 나은 자중에 세례요한이 가장 크니라” 우리는 사실 이 평가에 그렇게 주목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주로 구약의 위대한 인물을 들라 하면 또는 가장 닮고 싶은 구약의 인물을 말하라고 하면, 세례요한을 얘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대부분 모세, 아브라함, 다윗, 사무엘, 다니엘... 그렇게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람의 훌륭함을 얘기할 때에, 그 사람이 주로 무엇을 했느냐로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치면 세례요한은 별로 한 것이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편에서의 평가기준인 것이고, 예수님의 기준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믿었느냐로 그 사람의 훌륭함을 평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보실 때 세례요한이 가장 위대한 인물인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고, 홍해를 가르고,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킨 모세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시인 다윗도 이 세례요한보다 위대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보았고 예수님을 믿은 자였기 때문입니다. 본 것과 보지 않은 것은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을 우리는 우리가 잘 아는 코끼리 만진 장님 이야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다리 만진 장님하고, 코 만진 장님하고 귀 만진 장님하고 따로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데, 구약의 모든 훌륭한 인물들과 모든 선지자들이 꼭 이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둥이시라, 하나님은 붓이시라, 하나님은 평상이시라” 그들은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부분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보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바로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본 자이기 때문에 여인이 나은 자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뒤 이어 하시는 더 놀라운 말씀은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세례요한보다 크다는 것입니다. 신약의 성도들 가운데 나는 정말 연약하고 부족하고 믿음은 있지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어서 신약성도들 중에서 가장 비천하고 낮은 자이고, 나는 예수님의 신자라고 부름을 받는 것조차 부끄러워하는 소자라 하더라도 그 사람은 세례요한보다 위대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례요한은 그의 태어나심과 그의 존재는 보았지만, 그의 수난도 그의 부활도 그의 승귀도 보지 못하고 갔던 것입니다. 그래도 본 것만으로도 대단한데, 그러나 신약성도인 우리는 본 정도가 아니라 만지고 대화하고 그분과 교제 나누고 그분의 인도함을 받는 자로 서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성도와 신약성도의 현격한 차이입니다. 우리는 바로 신약성도로서 이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신약성도로서의 놀라운 특권과 지위에 대한 자부심과 자랑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이 왜 구약의 선지자들보다 우월하고 탁월할 수박에 없느냐 하면, 바로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 아들이 어떤 분이시냐 하는 것에 대해서 오늘 본문은 7가지를 말합니다.

 

1)만유의 후사 / 2)모든 세계를 지으심 / 3)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 4)그 본체의 형상 / 5)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 6)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 7)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다.

 

이것은 두 가지를 가르쳐 줍니다. 첫 번째는 그분의 신성을 가르쳐줍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다른 종교의 어떤 석가모니나 공자처럼 훌륭한 스승이나 뛰어난 인물정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분은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제가 자주 드는 예이지만, 개의 새끼는 개고, 고양이 새끼는 고양이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말할 때 그것은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라는 고백과 동일한 것입니다. 오늘 히브리서 본문도 이 예수님이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다시 2절과 3절을 보시면...

 

(2)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3)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러니깐 그분은 모든 피조물을 존재케 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보존하시고 유지하시고 섭리하시는 주권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인물로부터 시작을 해서 발아래 밟혀 죽는 하찮은 벌레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체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이 온 세상을 자신의 뜻대로 통치하시고 계시는 만유의 주요 왕이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본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의 임재를 표현할 때 “하나님이 임재하셨다” 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셨다”라고 표현합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 자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광채라는 말은 광원으로부터 나오는 찬란한 빛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은 보이지 아니하는 것인데,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영광의 광채가 되셔서 찬란하게 하나님의 영광의 어떠함을 우리에게 비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보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목도한 것이고 그것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본체의 형상이라는 말도 동일한 의미입니다. 이 본체라는 말은 “휘포스타시스”라는 말인데, 우리가 삼위일체를 공부할 때 한번쯤은 들어보았던 말입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본질, 본체라는 뜻으로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의미입니다. 그리고 형상이라는 단어는 도장을 찍는다는 말입니다. 도장을 찍으면 도장에 새겨진 문양과 찍혀서 나타난 형상은 완전히 일치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성을, 하나님의 모든 속성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하나도 빠짐없이 그대로 완벽하게 드러내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본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본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고 받아들인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신성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두 번째로 그분의 그리스도로서 중보사역에 대해서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중보자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간에 서셔서 그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죄의 담을 무너뜨리시고 그 둘을 화목하게 하시는 일을 하시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인 것입니다. 바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 중보의 일을 하시기 위해 하늘 영광 다 버리시고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작은 아이로 태어나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어떤 중보의 사역을 하시느냐 하면 우리의 “죄를 정결케 하시는 사역”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히브리서 중간부분부터 주된 논증이 되는 예수님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사역을 미리 간단하게 언급한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시고, 또 친히 제물이 되셔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정결케 하시는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영원히 온전케 하시고 거룩케 하셔서 우리와 하나님을 화목케 하시는 중보자의 사역을 감당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위해 그렇게 비참하게 죽임 당하신 것으로 끝이냐...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하나님은 이 죽은 예수를 삼일 만에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 높이 올리셔서 하늘 보좌 우편에 앉히시고 만유를 유업으로 그에게 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만유의 후사가 되셨다는 것은 (만유는 온 우주를 말하고, 후사는 기업을 이을 자를 말하는데) 바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만유를 아버지로부터 유업으로 물려받으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명실 공히 만유의 주권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지막 항목인 높은 곳의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높은 곳의 위엄”은 온 세상을 주관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왕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 보좌의 우편에 예수님께서 앉으셨다는 것은 그러한 하나님의 통치에 예수님께서도 동참하게 되셨음을 의미합니다. 바야흐로 예수님께서 온 세상의 왕으로 등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그렇게 아주 높이셨습니다. 이 땅에 계셨을 때는 사람들이 무시하고 깔보고 함부로 행하며 죽이기까지 했지만, 이제는 누구도 그분을 그렇게 대할 수 없습니다. 그분은 아주 영광스럽고 높이 되셔서, 두려움과 위엄과 엄위의 주님이 되셨기 때문에 그분 앞에 모든 무릎이 꿇을 수밖에 없고, 그분의 뜻대로 온 세상이 움직이게 되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의미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라고 하셨고, 요한계시록에서는 “내가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워낙 중보자로서 얻으신 것입니다. 그분이 하나님으로서는 워낙 만유의 주권자이시고 왕이시기 때문에, 따로 하늘과 땅의 권세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하늘의 모든 영광을 다 버리고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를 위해 중보자가 되셨기 때문에, 바로 그 중보자로서 이 모든 권세와 유업을 획득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부활과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과 만유를 유업으로 받으신 것은 모두 다 중보자로서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단순히 그분이 얼마나 높이 되신 분이시냐 얼마나 높으신 분이시냐 하는 것만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어질 때에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나느냐 하면,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게 하시고 하나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죄사함 받고 구원받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리시고 받으시고 얻으신 그 모든 것들을 우리도 그 안에서 누리고 받고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만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품꾼이라도 일컬음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인데,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권세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온 세상과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주어 만유의 주권자를 삼으셨는데, 그러한 유업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도 허락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주님이 재림하시고 하나님 나라가 극치에 이를 때에, 그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유업으로 주셔서 우리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토록 왕노릇하며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그분을 소유했다라고 하는 것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은혜요 특권이며 축복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9)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10)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골 2:9-10)

 

예수 안에는 아버지 하나님의 모든 충만이 있습니다. 모세 안에는 하나님의 충만한 것이 들어갈 수도 없고, 그것을 전달할 수도 없습니다. 어느 구약의 영혼도, 어떤 사람도 그것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갖는 것인데, 그 뒤에 놀라운 선언이 뒤따라 나옵니다. “우리도 그 안에서 충만해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정말 자신이 충만해졌다라고 느끼시고 확신하십니까? 아니죠. 이 말에 대해서 우리는 얼른 수긍이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요?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도 아직도 안팎으로 불만족스럽고 결핍을 느끼는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좀 더 건강했으면, 좀 더 능력이 있고, 좀 더 좋은 조건과 환경과 지위와 권세가 있었으면... 그렇게 바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넌센스’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말하는 충만은 신령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여러분의 신령한 문제 이외에 대해서는 사실은 일차적인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어떤 지위를 갖느냐, 건강이나 물질에 있어서 어떤 결핍한 부분이 있느냐 하는 것들은 모두가 여러분의 신령한 유익을 위한 하나님의 배려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즉 여러분에게 세상적인 어떤 결핍과 부족함이 있고, 우리를 평생 고통스럽게 하는 운명적인 인생문제가 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여러분에게 약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신령한 문제의 충만에 대하여 여러분은 누구도 누구에 비하여 뛰어날 수도 모자랄 수도 없이, 공평하게 다 충만하도록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하나님은 그 모든 지혜와 능력과 사랑과 신실하심으로 우리의 편이 되어주셔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의 모든 일에 간섭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은혜를 아는 자들은 어떤 고백을 할 수밖에 없습니까? 다윗이 시편에 고백한 바와 같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아무리 가난해도, 세상적으로 많은 결핍이 있고, 나를 괴롭게 하는 운명적인 인생문제가 있어도, 예수님을 소유했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부럽지 않고, 도리어 그리스도 안에서 신령한 은혜의 충만을 누리면서 늘 감사하고 찬양하며, 그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은혜를 모르면 어떻게 될까요? 히브리서 수신자들처럼 될 수밖에 없습니다. 히브리서 수신자들의 상황을 하나의 그림처럼 잘 묘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36)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37)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38)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39)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40)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41)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막 4:36-38)

 

이 얼마나 우리의 현실에 대한 성경의 정확한 지적입니까?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모신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허락되었고, 늘 우리 안에서 놀라운 충만의 은혜로 함께 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시는 이 예수님은 보지 못하고 인생의 여러 가지 광풍 앞에서 늘 동요하고 의심하고 갈등하고 두려워하고 낙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꼭 외적인 고난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의 십자가 공로로 우리를 온전히 구원하셨는데도 우리는 너무나도 자주,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구원의 확신을 잃어 버리고 절망과 좌절 속에서 그리고 “하나님이 혹시 나를 버리신 것은 아닐까?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실까?”라고 의심을 하면서 은혜를 받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은 다 예수님이 계신데도 불구하고 광풍 앞에서 두려워했던 제자들의 모습과 동일한 것입니다.


결국 광풍 앞에서 두려워하고 낙심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확인시키십니까? 자신이 바다도 잠잠케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확인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을 통해 히브리서 저자가 히브리서 수신자들로 하여금 확인하기를 바라는 것이었고, 동일하게 우리도 확인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영적인 침체와 영적인 문제는 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흐릿한 시선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의 신성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이 없으면, 우리는 세상의 광풍 앞에 넘어질 수밖에 없고,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고 죄에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그의 인도하심과 보호 속에 있다는 것이 이 세상에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온전하고 충분한 우리의 힘이요 약속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힘과 자랑으로 여기고 담대함으로 이 세상을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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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8 [히브리서 12장] 징계를 참으라 히 12:4-13 최상범 2013-02-10 5262
797 [이사야 1장] 삶의 예배 사 1:10-17 최상범 2009-11-22 4851
796 [고린도전서 15장] 부활의 산 소망 고전 15:12-34 최상범 2010-04-04 5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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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8 [히브리서 3장] 강퍅케 됨을 면하라 히 3:7-19 최상범 2012-07-22 4887
787 [히브리서 4장]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 히 4:1-11 최상범 2012-07-29 6163
786 [히브리서 4장] 말씀과 성령의 조명하심 히 4:12-13 최상범 2012-08-12 4937
785 [히브리서 4장] 은혜의 보좌 히 4:14-16 최상범 2012-08-19 4596
784 [히브리서 5장] 고난으로 온전하게 되었은즉 히 5:1-10 최상범 2012-08-26 4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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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2 [히브리서 5장] 병적인 유아상태(2)-의의말씀 히 5:11-14 최상범 2012-09-09 4387
781 [히브리서 6장] 완전한 데로 나아가지십시다 히 6:1-8 최상범 2012-09-16 6964
780 [히브리서 6장]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히 6:9-20 최상범 2012-09-23 5311
779 [히브리서 7장] 멜기세덱과 예수 히 7:1-25 최상범 2012-09-30 58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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