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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성경본문 히 2:5-18
성경본문내용 (5)하나님이 우리의 말한바 장차 오는 세상을 천사들에게는 복종케 하심이 아니라(6)오직 누가 어디 증거하여 가로되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7)저를 잠간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8)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저에게 복종케 하셨은즉 복종치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9)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10)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11)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12)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13)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14)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15)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16)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17)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18)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강설날짜 2012-07-08

2012년 7월 8일 한결교회 주일예배강설
히브리서 제6강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

 

말씀 : 히 2:5-18

 

오늘본문은 앞서 흘러 떠내려 갈 것에 대해 경고하는 권면에 이어서, 다시금 1장의 ‘천사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라는 주제를 계속해서 이어가면서 그분이 천사보다 잠간 못하게 함을 입은 것에 대해서, 즉 그분의 성육신과 고난에 보다 집중하는 본문입니다.


5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우리의 말한 바 장차 오는 세상을 천사들에게는 복종케 하심이 아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장차 오는 세상’은 줄여서 ‘내세(來世)’입니다. 우리는 ‘내세’하면 자꾸 주님의 재림의 때를 생각하는데, 지금이 이미 ‘내세’입니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주님의 재림의 때에 내세가 임하겠지만, 이미 예수님께서 초림하여 오심으로 내세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6장 5절에 보면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내세의 능력을 맛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내세’는 천사들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복종합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천사들의 지위가 아무리 뛰어나도 만물을 다스리실 자격이 있으신 분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십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시편 8편 말씀을 인용하여 증거합니다.

 

(6)오직 누가 어디 증거하여 가로되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7)저를 잠간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8)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히 2:6-8)

 

이 시편 8편 말씀은 다윗이 창세기 1:28 말씀, 곧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 온 세상 만물을 다스리게 되었다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지은 시인데, 이 시를 통해서 다윗은 보잘 것 없는 사람을 이처럼 놀라운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사실 앞에 경이감을 느끼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저자는 이 시편 말씀을 그리스도께 적용하고 있습니다. 즉 이 시편 말씀이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이라는 것인데, 여기에는 아담의 범죄와 인류의 타락이 전제가 되어 있습니다. 즉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서 온 세상을 다스리는 사명을 받았지만, 결국 범죄하여 타락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불구자가 되어 그 사명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께서는 아담이 실패한 그 사명을 온전히 이루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참된 형상으로서 만물을 다스리는 주권자가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8절에 보면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저에게 복종케 하셨은즉 복종치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구속사역을 완성하심으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셔서 명실 공히 만유의 주권자가 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아직도 사단 마귀가 주님을 대적하여 역사하고 있고, 주님을 불순종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깐 눈으로 보면 아직 모든 피조물이 예수님께 복종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보면 사단마귀도, 그리고 예수님을 대적하는 수많은 사람들조차도 여전히 주님의 손 안에 있음을 알 수 있지만, 그러나 모든 피조물들이 다 눈에 보이게끔 그분 앞에 무릎 꿇게 되는 것은 주님의 재림의 때에나 이루어질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보는 것은 9절 말씀처럼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는 것입니다. 그분이 천사보다 잠간 못하게 하심을 입었다는 것은 그분이 사람이 되셔서 고난의 죽음을 당하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셨다는 것은 그분이 십자가 죽음 이후에 삼일 만에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시고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만유의 주권자가 되신 예수님의 승귀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천사보다 잠간 못하심을 입으시고 죽음의 고난을 받으신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죽음을 맛보려 하신 것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10)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히 2:10)

 

여기서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자”는 확실히 성부 하나님을 말합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기 위해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온전케 하셨는데, 그것이 매우 합당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대단히 중요한 복음의 진리를 담고 있는데, 첫 번째로, 우리를 구속하시는 목적이 나옵니다. 우리를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기 위해서 구속하신 것입니다. 이 영광은 시편 8편에서 영광과 존귀로 관 쓰는 영광을 의미하며, 아담이 잃어버렸던 영광이며,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다시 얻으신 그 영광을 말합니다. 거기에 우리도 참여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구속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자격 없지만 주님의 은혜와 공로로 값없이 선물로 이 큰 영광을 주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이 일을 위해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셔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구원의 주’에서 ‘주’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주님할 때 쓰는 ‘주(Lord)’가 아니라, ‘용사’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즉 앞서 가서 적을 무찔러서 뒤에 있는 무리들을 구원해 내는 강한 용사(챔피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원수요 우리의 대적이 누구입니까? 바로 사단 마귀입니다. 이 사단 마귀가 공중권세 잡은 자로서 온 세상 사람들을 다 노예로 만들어서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다 태어날 때부터 사단 마귀의 노예로 태어납니다. 그리고 사단마귀는 우리를 멸망과 죽음으로 이끕니다. 어느 인간도 이 사단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없고, 그들과 싸워 이길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용감한 한 용사가 나타났습니다. 구원의 챔피언이요, 구원의 용사이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이 용감하게 앞서나가시더니 그 사단 마귀를 제압하시고 격파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싸워 이기셨습니까? 힘으로 싸워 이기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죽음의 고난으로 이기셨습니다.

 

(14)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15)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히 2:14-15)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없이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힘으로 사단을 제압하셔서 이기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대적자들에 의해 힘없이 죽임 당하신 그 십자가 죽음으로 승리하셨다 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십자가 죽음이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주신 것하고, 사단의 노예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주신 것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단이 우리를 어떻게 노예삼아 지배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사단은 바로 우리의 죄를 가지고서 우리를 노예 삼습니다. 뼛속까지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의 죄성을 이용해서 우리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율법과 사망을 가지고서 우리를 강제하고 멸망으로 이끕니다.

 

(56)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 15:56)

 

이 죄와 율법과 사망이 다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데, 즉 율법으로 우리를 죄인으로 정죄하고, 하나님께 송사합니다. “이 죄인을 하나님이 벌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송사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율법의 형벌로 이끌어 갑니다. 그리고 결국 율법이 명하는 형벌은 사망인데, 이 사망의 세력으로 모든 인생들을 사로잡습니다. 죽음만큼 인간을 강제하고 강압하는 강력한 세력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떤 조폭이 사람을 협박할 때, “너 이거 안하면 돈 100만원 벌금 낼 줄 알아...” 그렇게 말하면, 돈 많은 사람 같으면 그 협박이 제대로 먹히지가 않습니다. “돈 많은데, 까짓것 100만원 주지” 그럽니다. 그러나 “너 이거 안하면 나한테 죽을 줄 알아” 또는 “네 가족 중에 누가 죽을 줄 알아” 그렇게 협박하면, 뭐라고 합니까? “목숨만 살려주시면 뭐든지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그럽니다. 그래서 사람 목숨만 딱 쥐고 있으면, 완전히 노예로 만들어 뭐든지 시키는 대로 하게 만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단 마귀는 바로 이 죽음의 공포를 가지고서 사람들을 노예로 사로잡아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죄 가운데 계속해서 살아가도록 그렇게 강제하고 강압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하면 고난과 핍박과 희생과 심지어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잃을 것까지도 각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단마귀는 사망의 세력으로 두려움을 주어서 그렇게 가지 못하도록 막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일생 죽기를 무서워하면서 사망에 종노릇하고 사단에게 종노릇하다가 결국은 사망에 이르러 죽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단의 노예된 인간의 비참한 현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 문제를 다 해결해주신 것입니다. 내 죄를 대신하여 율법의 저주를 받아주셔서 우리의 죄 값을 다 치러주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러면 필연적으로 율법도, 사망도 연쇄적으로 그 세력이 무력화되는 것입니다. 율법도 사망도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죄라고 하는 것은 사단에게 생명줄과 같은 것이고, 이거 없으면 사단은 그야말로 종이호랑이에 불과하고,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는 것인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으로 바로 사단의 생명줄을 잘라버리신 것입니다. 즉 사단을 완전히 무력화시키고 무장해제 시키고 결박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1장 21-22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21)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22)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저의 재물을 나누느니라(눅 11:21-22)

 

사단 마귀가 무장을 한 강한 자인데, 더 강한 자,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사단 마귀를 완전히 제압하시고 결박하셔서, 그들의 노예로 있던 우리를 구출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의 구원의 용사이시고 챔피언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으로 사단 마귀를 제압하셨느냐 하면 바로 십자가 죽음의 고난으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10절에서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으로 사단을 이기시고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이 구원의 용사이신 예수님을 믿어 영접하고 그 주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의 주’에서 이 ‘주’라는 단어는 단순히 용사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선구자, 개척자라는 뜻도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단어를 사용하면서 바로 이러한 의미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즉 그분은 앞서 가셔서 미리 길을 닦아놓으신 선구자요 개척자로서 이제 그분이 열어놓으신 그 길을 우리도 따라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길은 고난을 통해서 영광에 이르는 길입니다.

 

(1)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2)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1-2)

 

여기서 2절의 ‘믿음의 주’에서 ‘주’ 역시 ‘주님’할 때 ‘주(Lord)’가 아니라 히 2:10의 ‘구원의 주’ 할 때 ‘주’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문맥상 이 단어는 용사가 아닌 선구자를 의미합니다. 다시 2절을 번역하면, “믿음의 길을 먼저 걸어가신 선구자시오, 믿음의 온전함을 보여주신, 참된 믿음의 모범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라는 것입니다. 즉 주님께서 가신 그 고난의 길을 우리도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가 주님의 영광에 참예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1장을 보면 두 증인의 환상이 나옵니다.

 

(7)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8)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이니라(9)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10)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11)삼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가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12)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 오라 함을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계 11:7-12)

 

11장은 두 증인에 대한 환상이 나오는데, 이 두 증인은 교회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교회가 복음을 증거함으로 말미암아 무저갱에서 올라온 짐승에 의해서 죽임을 당합니다. 그런데 그 죽임을 당한 장소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바로 그 장소입니다. 그리고 이 두 증인이 예수님처럼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구름을 타시고 하늘로 올라가신 것처럼 이 두 증인도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갑니다. 이 계시록 환상은 바로 교회가 가야 할 길이 어떠한 길인지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목사들이 예수님 믿고 이 세상에서 잘되고 성공하고 건강하고 사업 잘되고... 하는 말은 다 거짓말입니다. 그렇게 가르치는 목사는 다 교회 숫자 늘리기 위해서 거짓말하는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하늘의 영광은 오직 이 땅에서 주와 복음 때문에 고난 받은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앞서 가신 주님만을 믿고 의지하여 주님 가신 그 고난의 길, 죽음의 길, 순교의 길을 그대로 따라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느 길로 가고 있습니까? 주와 복음 때문에 고난의 길로 가고 있습니까? 순교까지는 아니더라도(오늘날 한국사회는 순교의 정황이 아닙니다), 주와 복음에 충성하느라 많이 희생하고, 또 손해를 보고, 행복하고 안정된 삶을 포기하고, 또 사람들로부터 핍박과 조롱을 받는 그런 삶을 살고 있습니까? 솔직히 우리가 다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은 아는데, 그렇게 살고자 할 때 치러야 할 대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주저하고 머뭇거릴 때가 많지 않습니까? 저 역시도 이렇게 살 때가 많음을 고백치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저자가 히브리서 수신자들에게 뭐라고 권면하는지 우리도 귀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히브리서 수신자들도 바로 우리와 동일한 영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고난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신앙의 길을 주저하고 머뭇거리고 있었고, 심지어는 포기할 모양새까지 보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3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11절을 보시면...

 

(11)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그분은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은혜로 거룩함을 입은 자입니다. 같은 사람이라도 본질적으로 하늘과 땅이라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고, 우리가 범접하지 못할 높은 곳에 계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낱 죄인인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 둘이 다 하나에서 났다고 했습니다. 그분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높으신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사람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헌신의 표현인데, 히브리서 저자는 두 구약성경 구절을 인용하여 이를 증거합니다. 첫 번째 인용구인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는 말씀은 시 22:22을 인용한 것이고, 13절의 연속적으로 인용되는 구절은 사 8:17-18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 구절은 각각 다윗과 이사야가 한 말씀이지만, 그러나 성취의 빛에서 보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교회에 대하여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교회와 자신을 동일시 하셨고, 그 교회 가운데 거하시면서 주의 이름을 선포하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셨던 것입니다. 특히 마지막 인용구는 놀라운 선언인데,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자녀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형제도 되시지만, 우리의 아버지도 되시는 것입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와 동일한 사람 되신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셨습니다. 우리를 같은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셨습니다. 더욱이 그분은 우리 대신 기꺼이 수치와 조롱을 당하시고 죽음의 길로 가셨습니다. 히 12:2에서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그 당시 반역자나 극악무도한 죄인을 죽일 때에 사용된 아주 잔인한 사형집행 도구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잔인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매우 수치를 주는 사형집행도구인 것입니다. 온갖 사람들의 멸시와 조롱을 받으면서 십자가를 지고 사형집행 장소로 가야하고, 벌거벗긴 채로 군중들이 보는 가운데 벌레처럼 매달려 죽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은 참으로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죽음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내어주시기 까지 헌신하셨고, 우리를 부끄러워 아니하셨는데, 우리는 주님을 위해 얼마나 헌신하며, 주님을 부끄러워 아니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주님을 부끄러워하는 삶의 대표적인 예가 무엇이냐 하면,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식사기도 하기가 꺼려지거나, 또는 부끄러움을 당할까봐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밝히는 것을 꺼려하거나, 사람들로부터 싫은 소리 들을까봐, 또는 조롱을 받을까봐 힘써 전도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주님을 부끄러워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혹시 이렇게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은 수치와 조롱을 무릅쓰고 주위 사람들에게 주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노력합니까? 무슨 핑계를 대든지 전도하는 삶을 살지 않는 자는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자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막 8:38)

 

우리가 참으로 연약하여서 복음을 부끄러워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참으로 우리의 배은망덕한 모습을 회개하고 우리를 부끄러워 아니하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주님의 헌신과 사랑을 마음에 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우리도 주님을 위해 기꺼이 수치와 조롱을 무릅쓰고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헌신할 각오로 충성하는 주의 백성들이 되게 하여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생각해야 하는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죽음의 의미를 바꾸셨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지만, 그분이 우리 대신 저주의 죽음을 죽으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의 죽음은 더 이상 죄로 말미암은 저주의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영광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관문이며, 최종적으로 우리를 성화시키는 성화의 도구이며, 영광스러운 몸으로 갈아입기 위해 썩어질 몸을 벗는 과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축복이지 전혀 무서워해야 할 것이 아닌 것입니다. 죽음은 피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도리어 간절히 사모하고 바라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죽을 때 육체의 큰 고통이 있지만, 그러나 주님이 우리의 영혼을 안전하게 보존해 주실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죽음 이후에 영원한 영광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잠간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 시간 각자 자신에게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지금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총을 겨누면서 신앙을 부정하라고 말한다면, 기꺼이 신앙을 고백하고 용감하게 죽을 자신이 있습니까? 여기에 우리가 확신할 수 없다면, 여전히 우리는 사망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고,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사단의 종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러하다면, 우리는 속히 거기서 벗어나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의 죽음의 의미가 바뀌었음을 깊이 깨닫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라도 주님을 위해 죽을 각오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아니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합니다. 죽음을 두려워 아니한다면, 이 세상에 그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주님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데, 주님 때문에 가난해지고, 매 맞고, 병 걸리고, 수치와 조롱을 당하는 것을 무서워하겠습니까? 그럴 수가 없습니다.

 

(5)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6)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5)

 

히브리서 수신자들은 지금 신앙의 위기 가운데 연약하여져서 주님 때문에 손해보고 핍박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바로 그들에게 그들과 함께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를 반드시 도와주시는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 설사 가난이 와도, 어려움이 와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어떠한 가난과 어려움과 환란이 닥친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에게 어찌하겠습니까? 우리의 영혼은 안전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고 나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헌신하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 생각해야 할 것은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시고 도우시는 대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17)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18)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 2:17-18)

 

예수님은 전적으로 범사에 우리와 같이 되셨습니다. 우리 인생들이 살면서 겪는 모든 문제와 모든 아픔들과 모든 고통들을 친히 다 경험하셨습니다. 죄 빼고 다 경험하셨습니다.

 

(7)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8)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9)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 5:7-9)

 

예수님은 하나님이니깐 눈 하나 깜짝 안하고 그냥 담대하게 십자가로 나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죽음의 공포 앞에서 고뇌하고 두려워하셨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늘 담대하고 완벽한 예수님만을 생각하던 우리에게 실망스러운 모습일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예수님이 당하시는 죽음이 그냥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가 쏟아 내려지는 죽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예수님에게 큰 시험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께 부르짖으셨고, 하나님이 응답하셔서 예수님으로 온전히 순종하실 수 있도록 도와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죽음의 공포라는 시험을 예수님도 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동일하게 죽음과 고난이라는 시험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고 머뭇거리고 주저하는 우리의 연약함을 주님은 능히 동정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린 고아가 있는데, 부모가 있는 사람이 암만 고아를 위로하고 격려해도 그것이 큰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릴 때 고아로 자란 사람이 “나도 고아로 자랐단다...” 그러면서 위로해주고 격려해주면, 그것이 그렇게 큰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도 시험을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시는 분이 아닌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 연약함을 아십니다. 연약하여 넘어질 때, “너 왜 그렇게 못해?” 그렇게 정죄하고 윽박지르시는 분이 아니라, 주님은 우리 힘으로는 그것을 이겨낼 수 없다는 것을 아시기에, 우리를 위로하시고 도와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긍휼의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고난으로 온전케 되신 이 대제사장 예수님을 믿고 바라보며 의지함으로써 고난을 두려워 아니하고 믿음으로 주님 가신 길을 따라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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