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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성경본문 히 3:7-19
성경본문내용 (7)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8)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9)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10)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11)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12)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13)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14)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15)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16)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17)또 하나님이 사십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18)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19)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강설날짜 2012-07-22

2012년 7월 22일 한결교회 주일예배강설
히브리서 제8강

 

강퍅케 됨을 면하라

 

말씀 : 히 3:7-19

 

지난주에 배운 히브리서 3장 앞부분은 예수님의 충성스러우심에 대한 말씀이고, 오늘 우리가 살펴볼 3장 후반부는 이스라엘의 불충성과 그 치명적인 결과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표면적으로 이 3장 전체는 바로 예수님의 충성스러우심과 이스라엘의 불충함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한글성경에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원어로 보면 이 대조가 한 단어의 반복적인 사용을 통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3장 12절(그리고 19절)에서 “믿지 아니한다”라는 말과 “예수님이 충성하셨다” 라고 할 때의 “충성”이 서로 같은 어근의 단어입니다. 즉 둘 다 “피스티스”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이 “피스티스”라는 단어는 “믿음”이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바울이 우리가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할 때 ‘믿음’이 바로 이 단어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헬라어 단어의 독특한 특징은 이 단어가 때때로 ‘믿음’이 아닌 ‘충성’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믿음이라는 단어가 따로 있고, 충성이라는 단어가 따로 있는데, 헬라어는 이 ‘피스티스’라는 한 단어가 두 가지 모두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맥에 따라 이 단어가 믿음을 의미하는지, 충성을 의미하는지 결정을 해야 하는데, 히브리서 3장 앞부분에서는 이 단어를 충성으로 번역하였고, 후반부는 이 똑같은 단어를 믿음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문맥을 볼 때 매우 잘 번역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우리는 이 본문을 대할 때, 이 두 단어가 같은 단어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이 본문에 접근해야 하고, 또한 그렇기 때문에 믿음과 충성이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믿음은 정신적인 신뢰를 말하고, 충성은 순종의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는 명확하게 구분선을 여기서는 긋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바울서신은 그 구분이 뚜렷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서에서는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 물어볼까요?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안식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합니까? 불신앙 때문입니까? 불순종(불충성)때문입니까? 애매모호합니다.


그들이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8절에서는 마음의 강퍅함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마음이 단단해지는 것, 완고한 것을 말합니다. 믿지 아니하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10절에서는 이 강퍅함을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여기서 미혹된다는 말은 의역된 것이고, 원어를 그대로 직역하면 가던 길에서 이탈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길이 있는데, 그 길에서 이탈해서 자꾸 그릇된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범죄하고 불순종하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범죄하고 불순종한 삶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4장 2절에 보면, 그들이 들은 말씀을 믿음으로 화합지 아니했기 때문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믿지 못했기 때문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4장 6절에 보면,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히 4:6)라고 하고 있습니다. 또 여기서는 순종하지 아니했기 때문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깐 믿음과 충성스러운 삶의 구분이 히브리서에서는 그 경계선이 흐릿한 것입니다. 즉 이것은 바울서신과는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믿음에는 반드시 참된 행함이 따라올 수밖에 없다는 기독교 복음진리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즉 바울서신은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어디 있느냐 믿음이냐 행위냐 하는 점에 포커스가 맞추어진 반면, 히브리서는 이미 구원받은 신자의 마땅한 삶이 무엇이냐 하는 점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기독교 복음진리를 다른 측면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에 접근하기에 앞서서 가져야 할 중요한 전제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믿음과 행함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참된 믿음은 참된 행함을 나타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서 오늘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7절부터 11절까지 시편 95편을 인용하면서 한 가지 사건을 염두에 두고 있는데, 그것은 가데스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의 불순종 사건입니다.

 

(34)여호와께서 너희의 말소리를 들으시고 노하사 맹세하여 가라사대(35)이 악한 세대 사람들 중에는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주기로 맹세한 좋은 땅을 볼 자가 하나도 없으리라(36)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를 순종하였은즉 그는 그것을 볼 것이요 그가 밟은 땅을 내가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 하시고(신 1:34-36)

 

즉 이것이 지금 무슨 사건이냐 하면, 가데스 광야에서 이제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에 앞서 먼저 정탐꾼들을 보냅니다. 각지파별로 한명씩 뽑아서 보냅니다. 그런데 10명의 정탐꾼들은 보고하기를 “그 땅의 사람들이 장대하고 강성하여서 우리는 그들 보기에 메뚜기와 같다, 우리는 거기 가면 죽는다”라고 보고했습니다.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진실을 말하면서, “그들이 힘센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반드시 승리하고 그 땅을 얻을 수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 명의 진실한 보고에는 영향을 받지 않고, 10명의 비관적인 보고에 영향을 받으면서,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으니 결국 광야에서 죽게 생겼구나.” 그러면서 방성대곡하면서 통곡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보실 때 불신앙이었습니다. 단순한 불신앙이 아니라, 매우 악한 불신앙이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그 어떤 범죄나 우상숭배의 죄악보다도 훨씬 비교할 수 없이 더 큰 죄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앙에 대해 진노하시고, 맹세하사 결단코 가나안 땅을 보지 못하고 다 광야에서 죽게 될 것이라고 벌을 내리셨습니다. 여러분 다른 범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벌하신 적이 있었습니까? 물론 마실 물이 없고, 먹을 음식이 없어서 원망 불평한 것도 큰 죄이고, 간음을 행한 것은 더 큰 죄이고, 또 금송아지를 숭배한 것은 그보다 더 큰 죄악이었지만, 그러나 그런 죄악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벌하시기는 하셨지만, 그것 때문에 가나안 땅을 안 주시겠다고는 말씀하신 적은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우상숭배 할 때, 다 진멸하겠다고 하셨지만, 모세의 중보로 다시 회개할 기회를 얻었고, 그래서 여전히 가나안 땅의 약속이 유효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는 더 이상의 회개할 기회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맹세로 못 박으셨습니다. 이후에 백성들이 뉘우치고 가나안 땅을 향해 도전하겠다고 아우성을 쳤지만, 하나님은 맹세로 못 박으셨기 때문에 결단코 그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신 것입니다. 즉 그들은 단 한 번의 불신앙으로 영원히 가나안 땅의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인생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니 한번 좀 불신했다고 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평생을 광야에서 살다가 죽게 하신 것이 좀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니었나?” 그런 생각이 들 수 있겠지만, 그러나 여러분! 언약의 측면에서 볼 때, 이 불신앙은 용서받지 못할 중죄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그 큰 기적을 보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이끌어내실 때에, 그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430년이나 살았던 애굽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그리고 담대하게 가보지도 않은 땅을 향해서 떠날 수 있었던 것을 무엇을 믿었기 때문입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예비하신 땅이 있고, 그 땅을 기업으로 주리라고 하는 것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애굽을 떠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지금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그 불신앙의 정탐꾼들의 비관적인 보고를 들으면서 깊이 절망하고 낙심한 것은 결국은 무엇을 못 믿는 것이냐 하면, 새로운 땅을 주실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못 믿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복음을 믿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 가나안 땅은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을 누리며 하나님과 사귀며 사는 것처럼, 결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약시대 백성들이 안식을 누리며 주님과 함께 살 것에 대한 그림자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 안식이 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된 안식의 땅 가나안의 성취이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않은 것도 이해가 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한 것에 대하여 성경은 모세가 혈기를 부려서 못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번 혈기를 부렸다고 가나안에 못 들어갔다라고 한다면, 모세가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충성한 삶에 비추어본다면 너무 가혹한 형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만큼 리더는 작은 죄에 대해서 큰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큰 섭리적인 측면에서 보면, 또 다른 이유를 발견하는데, 바로 모세의 사명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을 바라보도록 거기까지만 데려가는 것이 모세에 부여된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해준 장본인이었고, 모세는 율법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결국 우리를 어디까지 데려가느냐 하면, 구원받기 직전까지 우리를 데려갈 수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몽학선생의 역할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구원과 안식을 줄 수 없지만, 우리를 그리스도 앞의 요단강 앞까지 데려다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어 영접하고 구원을 받고 요단강을 건너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가나안 땅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이고, 율법을 상징하는 모세는 그러한 섭리적인 의미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어쨌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한 것은 곧 복음을 믿지 못하는 죄였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영원한 영혼의 축복의 안식을 주실 것이라고 하는 것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이었기 때문에 이것은 용서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쁜 짓을 한 것은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안 믿는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나쁜 짓해도 나중에 회개하면 됩니다. 그렇다고 미리 회개를 염두에 두고 죄를 지어서는 안 되겠지만, 그래도 그것은 기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용서받지 못하는 유일한 죄입니다. 그래서 이 구원받지 못할 죄에 대한 예표가 바로 이스라엘이 불신앙하여 가나안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한 사건인 것입니다.


그런데 갈렙은 이 가나안 땅에 들어감을 얻었습니다. 갈렙이 어떻게 그러한 은혜를 받게 되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신 1:36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를 순종하였은즉” 여기서 “여호와를 온전히 순종하였다”는 말을 원어 그대로 직역하면,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마음으로 그 마음이 꽉 차 있었다.”는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순종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신뢰와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갈렙이 영성이 뛰어나고, 아주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았고,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할지라도, 이 세상에 결점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한계가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예수님 한분 밖에 없습니다. 갈렙도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히 순종하지 못한 사람이었고, 우리와 성정이 같은 허물과 죄악으로 물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오직 하나가 모두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주실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향한 확실한 믿음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과 통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바로 그의 모든 약점들을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하나님을 거슬러 죄악된 삶을 살았고, 방황하고, 방탕한 삶을 살아서, 자신의 죄가 진홍빛같이 붉다 할지라도, 정말 말씀 앞에서 참회하면서, 예수님께서 내 죄를 위해 대신 죽으심으로 나의 죄를 사해주셨고, 나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셨다는 사실을 믿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바로 그 믿음이 우리 안에 숫한 불순종의 죄악들을 다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를 우리 멀리 옮기셔서 우리의 죄를 하나도 기억지 아니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주님 안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복음인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이 복음을 믿어 확신해야 합니다. 주님이 정말 나를 위해 대신 죽어주셨고, 내 죄를 하나도 빠짐없이 다 사해주셨다는 것을 믿고 확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장차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영광스러운 안식을 누리게 하실 것도 믿어 확신해야 합니다. 그렇게 확신하고 믿는 것이 구원받는 믿음이고, 이런 믿음 안에서 사는 자가 구원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갈렙과 같이 온전히 예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이 갈렙의 믿음이 갈렙으로 하여금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하게 했습니까? 가나안 땅을 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갈렙의 확고한 믿음은 갈렙으로 하여금 장대하고 강성한 가나안 족속들을 향하여 “그들은 우리의 밥에 불과하다”라고 말하게 하였습니다. 여러분 밥 먹는 것이 힘든 일입니까? 밥을 해먹는 것은 힘들지만, 누가 차려만 주면, 그거 먹는 거야 일도 아닌 것입니다. 이처럼 가나안 정복 전쟁이라고 하는 것이 믿음이 있는 자에게는 땅 집고 헤엄치기인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 이 정복전쟁은 자살행위인 것이고,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전쟁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서 월요일에도 신나고 화요일도 행복하고 수요일도 수수하게 신나는 그런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넜을 때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고기와 떡과 잔치가 아니라 전쟁이 기다리고 있었듯이, 이제 예수님을 믿으면, 동일하게 치열한 영적인 전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나와 더불어 싸워야 되는지도 몰랐고, 나는 언제나 내 편이었는데, 그런데 예수를 믿고 보니깐 내가 내 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즉 주님을 거스르려고 하고 옛날의 죄 된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단 마귀는 끊임없이 죄의 정욕으로 우리를 유혹해서 넘어뜨리고자 하고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내 안에 죄의 정욕과 더불어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나와의 싸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는 사단 마귀가 주는 여러 가지 시험과 핍박이 있습니다. 시부모와의 갈등, 가족과 친척들과의 갈등, 물질적인 손해, 직장에서 학교에서 소외당하고 조롱당하고 여러 가지 부끄러움을 당하고, 또 핍박을 받고 심지어는 목숨까지 잃어버려야 하는 고난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영적전쟁의 삶과 고난을 견디는 삶을 사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으면, 그것이 땅 집고 헤엄치기라는 것입니다. 쉽다는 말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고통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고생은 고생이고, 그것은 싫은 것입니다. 예수님 믿는 신자라고 고통을 즐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이 고통을 받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을 위한 것이고, 이 고통 후에는 이 고난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 내게 주어질 것이라는 것을 믿는 확신이 있으면, 그 고통을 믿음으로 인내하고 견딜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자는 믿음의 길을 담대하게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주 말씀드린 비유처럼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자신의 전 재산 파는 것을 아까워합니까? 조롱과 핍박을 받는 것 때문에 주저하고 머뭇거립니까? 아니잖아요? 아주 담대하게 기꺼이 즐거움으로 재산을 팔고 고난을 당합니다. 그러나 밭에 보화가 지금도 여전히 있는지 의심이 되고, 누가 혹시 나 몰래 파내가지는 않았을까 하는 염려가 있으면, 그 사람은 전 재산을 쉽게 팔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머뭇거리고 주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깐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으면, 예수님 가신 그 길을 따라 예수님처럼 충성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지만,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없으면, 그것은 죽었다 깨어나도 순종 못하는 것입니다. 암만 옆에서 누가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라고 가르치고 권면하고 책망해도 그렇게 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낼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으면 결국 어떻게 할 수밖에 없냐 하면, 이 세상과 적당히 타협해서 이 세상에서의 안정되고 편안한 삶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절대로 복음을 위해 자신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을 포기하거나, 또는 편안하고 안정된 삶을 포기하고 목숨을 건 위험한 모험을 감행하거나, 그런 삶을 절대로 살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신앙의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따라 사는 것이고, 마음의 강퍅함을 따라 불충성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하고 항상 그릇된 길로 이탈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사는 근본원인은 내가 의지가 약하다든지, 성경지식이 부족하다든지,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믿음에 관한 문제라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왜 예수님께서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라고 묻는 제자들에게 “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라고 말씀하셨는지 그 이유를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요 6:28-29). 예수님께서 왜 말씀 읽고 기도하고 전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것은 믿으면, 믿음 안에 있으면 결국 그 일을 진정으로 하게 되겠지만, 믿지 않으면, 아무리 전도 많이 하고 기도 많이 하고 심지어 방언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능력을 많이 행한다 해도 그것이 다 주님 앞에서 쓸데없는 일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결국 모든 신앙의 문제들은 다 믿음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삶 속에 순종의 삶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복음 전하면서 여러 가지 고난을 당했던 바울처럼 주와 복음 때문에 손해를 당하고 고난을 받는 그런 삶을 살고 있습니까? 주와 복음을 위해 여러분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을 포기할 수 있습니까? 주와 복음을 위해 여러분의 시간과 재능, 여러분의 꿈까지 내어놓을 수 있습니까? 목숨까지 버릴 각오가 있습니까? 만일 우리 가운데 이러한 삶이 없고 각오가 없다면, 우리는 나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근본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에이~ 저야 예수님 당연히 믿고 있죠...” 아니요. 안 믿는 것일 수 있습니다. 정말 내가 예수님을 믿는 자인지 점검해야 합니다. 암만 예수님에 대해서 많이 알고, 종교활동을 오랫동안 해왔어도, 예수님 안 믿을 수 있습니다. 집사도, 장로도, 목사도 예수님 안 믿고도 얼마든지 그 직분을 충성스럽게 섬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내가 정말 갈렙처럼 예수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하고 의지하는 마음이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이것이 아주 심각한 얘기입니다. 이것은 내가 구원받느냐 못 받느냐와 관련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히브리서 저자가 얼마나 통렬하게 경고하고 있는지 보십시오.

 

(12)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하나님에게서 떨어지는 것은 구원의 은혜에서 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구원받지 못하는 비참한 결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불신앙과 불순종은 무서운 것입니다. 그 삶을 지속한다는 것은 너무나 위태롭고 위험한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수많은 불순종의 사람들이 나오는데 그 사람들이 결국 모두 어떤 비참한 결말에 처해졌습니까? 성경 어디에 불순종한 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좋은 것들을 누리고 복을 받은 경우가 있었습니까? 없습니다. 아담이 타락한 이래로 성경은 불순종에 대해서 숫한 경고의 말씀을 하여왔고, 불순종하는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끊임없는 심판이 계속되어 왔으며, 하나님 앞에 심판받아 무자비하게 진멸당한 그 수많은 피의 역사들은 하나님께서 불순종을 얼마나 무섭게 징벌하시는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소위를 돌아보아서 나의 믿음이 진짜 믿음인지, 내가 혹시 불순종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진지하게 고민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말씀 앞에 두렵고 떨림을 설 수밖에 없는데,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이라고 하는 날 동안에 정말 정신을 차리고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고, 죄의 유혹과 싸워서 죄의 유혹으로 인하여 강퍅케 됨을 면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강퍅케 됨을 면할 수 있습니까? 12절을 보시면...

 

(12)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여기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라고 말하는데, 원어로 보면, “보라! 형제들이여!” 라고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히브리서 수신자들에게 계속해서 복음에 헌신하지 아니할 때에 그들이 처하게 될 위태로운 상황을 주의하여 보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임박한 위험에 처해 있는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게 지금 멸망이 임박한 것을 보라고 하면서 큰 소리로 애타게 부르짖는 어떤 사람처럼 그렇게 불신앙의 위태로운 결말을 주의하여 보라고 수신자들을 향해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고, 주님 가라고 하신 길을 가지 아니할 때 결국 결과 되어지는 비참한 결말을 주의하여 보면서 혹시 내가 그런 길로 가고 있다면, 거기서 속히 돌이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서로 피차 권면해야 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13)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서로 무엇으로 권면합니까? 말씀으로 권면하는 것입니다. 서로서로 말씀의 권면을 계속해서 주고받으라는 것입니다. 특히 교회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게 서로 권면하고 말씀의 가르침을 받아서, 말씀 위에 굳게 서라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믿음과 회개를 지속해야 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14)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히브리서를 읽어보시면 이 “끝까지”, 견고히” 라는 단어가 자주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히브리서의 핵심단어입니다. 즉 믿음은 한 번 믿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참된 믿음은 끝까지 믿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0년 전에 믿음과 회개는 그 10년 전의 나를 구원했고, 오늘의 나는 오늘의 믿음과 회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옛날에 믿었다고 지금 내가 당연히 믿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씨 뿌린 비유에서 돌밭도, 가시떨기 밭도 처음에는 다 믿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돌밭은 말씀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해서 결국 고난과 환란이 왔을 때 이겨내지 못하고 신앙을 포기해버렸습니다. 그리고 가시떨기 밭은 처음에 기쁨으로 복음을 믿어 영접했을 뿐만 아니라, 뿌리도 내리고 가지도 잎도 많이 내었습니다. 그러나 재리의 유혹과 세상의 염려의 가시 때문에 그 기운이 막혀서 결국 열매 맺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돌밭도 가시떨기 밭도 처음에는 믿어 영접했지만, 그러나 그 믿음이 가짜 믿음이라는 것이 결국 열매 맺지 못한 삶의 결말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날에 얼마나 놀라운 체험을 했든, 믿음이 뜨거웠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을 끝까지 지속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이듯이, 끝까지 믿고 끝까지 회개하는 삶이 진짜 구원받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믿어야 합니까? 본문 말씀에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확실한 것’은 ‘휘포스타시스’라는 단어입니다. 많이 들어보셨죠? 앞에 1:3에서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시라 라고 할 때에 본체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즉 이 단어는 본질, 본체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즉 우리가 처음 믿을 때 믿고 깨달았던 그 본질과 본체를 붙잡으라는 말인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더럽고 추한 죄인인 나를 위해 주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심으로 내 죄를 다 용서해주셨다는 것, 그래서 구원 영생을 얻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다는 것, 그리고 장차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영광스러운 안식을 누리게 하실 것이라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처음 예수님 믿을 때 믿고 깨달았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끝까지 굳게 붙잡고 믿고 확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이 복음을 늘 깊이 묵상하고, 주님의 구원의 은혜를 늘 기억하면서 감사 찬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날마다 십자가 복음을 굳게 믿고 붙잡을 때, 바로 우리는 소망의 자랑과 담대함을 가지고서, 이 세상에서 그 무엇도 두려울 것이 없는,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들이 되어서, 믿음으로 용기 있게 주님 가신 고난의 길을 걸어가는 충성스러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 모든 지체들에게 충만히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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