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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성경본문 히 5:11-14
성경본문내용 (11)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12)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13)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14)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강설날짜 2012-09-09

2012년 9월 9일 한결교회 주일예배강설

히브리서 제14강


병적인 유아상태(2) - 의의말씀


말씀 : 히 5:11-14


지난주 우리는 병적인 유아상태에 머물러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병적인 유아상태란 성장하는 신앙의 단계에서 당연히 거쳐야 하는 과도기적인 어린아이의 상태가 아니라, 병적으로 오래도록 어린아이에 상태가 지속되는 그런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을 의미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특징은 유아기가 병적으로 길다는 것이고, 또 죄에 대해서 거듭거듭 실패하며, 영적으로 부주의하고 게으르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특징이 말씀의 맛을 모른다는 것과 말씀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나서 진정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신앙생활 하는 모든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될 것이고, 이 세상에서 사는 날 동안에 좋은 날 보기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며, 결국 비참한 결말을 맞게 될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이 병적인 유아기에서 벗어나서 신령한 그리스도인의 영역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신령한 그리스도인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까?


(11)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12)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13)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14)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히 5:11-14)


히브리서 저자는 그들이 듣는데 둔하여서 멜기세덱에 관한 복음 진리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다시금 “그들이 젖이나 먹고 단단한 음식을 못 먹을 자가 되었다”고 은유적으로 표현합니다. 즉 멜기세덱에 관한 말씀을 단단한 식물(음식)에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13절에서 그들이 경험하지 못한 ‘의의 말씀’으로 표현됩니다. 병적인 유아상태에 머물러 있는 신자는 바로 이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대로 병적인 유아상태의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하면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바로 젖을 끊고 단단한 식물을 먹음으로써, 즉 의의 말씀을 경험함으로써 변화를 받아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의의 말씀을 경험한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우선 말씀을 경험하다는 것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고, 그 다음에 그 말씀이 의의 말씀이라는 점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 말씀을 경험함.


첫째로 말씀을 경험해야 합니다. 보통 우리는 말씀을 ‘깨닫는다’라고 표현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말씀과 관련하여 ‘경험하다’라고 하는 아주 독특한 단어를 사용합니다. “경험하다”라는 말은 “페이라('아페이로스'의 원형)”라는 단어로서 “시험하여 증명하다”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24k 순금이라고 적혀있는 황금열쇠를 구입한다고 생각해보십시다. 눈앞에 지금 황금열쇠가 있습니다. 금색이고, 24k 순금이라고 새겨져있는 황금열쇠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 상태로 바로 돈을 지불하고 그것을 살 의향이 있습니까? 없죠. 무엇이 필요합니까? 증명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진짜 24k 금인지, 아니면 혹시 18k 금은 아닌지 아니면 금색을 입힌 가짜 황금열쇠는 아닌지 확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황금열쇠의 무게를 달아보고, 부피를 재고, 깨물어보기도 하고, 필요하면 현미경으로 관찰하기도 하고, 그렇게 시험을 거쳐서 신뢰할 수 있는 전문가가 “이것은 틀림없는 24k 황금열쇠입니다.”라고 하는 보증이 있을 때, 우리는 기꺼이 거금을 내어놓고 그 황금열쇠를 구입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험을 통해 증명하는” 것으로서 “경험하다(페이라)”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듣고 지식을 많이 쌓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은 우리가 말씀을 깨닫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입니다. 귀로 듣고 머리로 이해하지 않고서 어떻게 우리가 그 하나님의 말씀에 접근하며 그 말씀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슴은 차갑고 머리만 굵어지는 것을 반대하면서 지식을 쌓는 것 자체를 아예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전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어찌하든지 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듣고 기독교 복음 교리를 배워서 머리로 이해하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배워서 성경에 대한 지식들을 우리 머릿속에 많이 쌓아야 합니다. 이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필요합니까? 그 말씀이 참으로 나에게 그렇다라고 하는 “경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즉 그 말씀이 머리에만 맴도는 것이 아니라, 깔때기를 타고 마음에 내려와서 마음에서 그 말씀이 경험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즉 말씀이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내면을 찔러 쪼개는 살아있는 말씀이 되어서, 그 말씀을 이해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그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분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그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것이 바로 말씀을 경험한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예전에 어느 TV의 프로에서 한 연예인이 자기 친정어머니로부터 온 편지를 읽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 것이 방영이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옆에 있던 패널들도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 촬영장이 온통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편지를 잃고 눈물을 흘리는 것은 단지 편지의 내용을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해할 때에 자기를 사랑하고 염려하는 어머니의 그 마음이, 눈물짓는 마음이 그 속에서 전수되었기 때문에 우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은 구구절절이 하나님의 사랑이 담긴 우리를 향해 쓰신 장문의 편지입니다. 그런데 그 편지를 갖다가 우리가 무슨 학교에서 국사나 세계사 공부하듯이 배워서 성경고사를 치면 정확하게 틀리지 않고 답할 수 있는 그런 지식을 갖추는 것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편지에 대한 바른 읽기가 아닌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참으로 읽는다고 하는 것은 그 편지의 내용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서, 마음으로 그 편지를 경험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에 전해져 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의 역사를 통한 말씀의 경험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 경험을 통해서 이 하나님의 말씀이 참으로 진리라는 것이 증명되고 확증될 때에 이 말씀이 비로소 우리를 변화시키는 능력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마치 24k 황금이라는 것이 시험을 통해 증명되어야지만 기꺼이 자기 돈을 지불 할 수 있었듯이, 그렇게 말씀이 내 안에서 참된 진리로 경험되어야지만 확신 가운데 그 말씀을 의지하여 자신의 인생을 주님께 내어맡길 수가 있는 것이고, 그래야지만 그 가운데서 우리의 인격이 변화되어지고, 우리의 삶이 변화되어지고, 그리하여 신령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선악을 분별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이런 말씀을 경험함이 없이는, 암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많이 알고, 하나님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고 있다 할지라도, 설사 성경박사가 되고 신학교 교수가 되었다 할지라도, 그 말씀이 실질적으로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말씀이 되고, 그 말씀이 내 지성에는 영향을 미칠지 모르겠으나, 내 감정과 내 의지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어떠한 감사하는 마음이나, 찬양하는 마음이나, 하늘의 신령한 평안과 기쁨 같은 것을 느낄 수가 없고, 그 삶에 거룩한 순종이라는 것은 눈 씻고 찾아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저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고 교회 문화에 익숙해지면서 여러 가지 교회 일로 북적북적하지만, 실질적인 삶은 하나님 없이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서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병적인 유아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병적인 유아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성경지식을 많이 쌓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세 가지가 전제 되어야 합니다. 첫째는 먼저 목회자들을 통해서 말씀의 본의가 드러나고 순수한 복음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죄인이고, 죄가 무엇이고, 거기에는 어떤 형벌이 있고, 예수님이 이런 우리를 위해 어떻게 하셨고... 하는 복음의 진리가 선명하게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믿고 행복해지세요.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십일조하고 교회에 충성봉사하면 하나님이 복주시고 자녀가 잘 됩니다. 긍정의 힘을 믿으세요.” 그런 식의 복음이 선포되면, 거기에는 말씀을 경험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본의가 선포되는 교회에 붙어있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목회자는 먹고 싶은 것을 해서 갖다가 바치는 요리사가 아니라, 영혼의 의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엑스레이를 찍어서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지적하고, 여러분을 사랑하지만, 때로는 여러분에게 칼을 들이대면서 배를 갈라야 할 때도 있습니다. 목회자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순수한 복음, 성경 자체의 내용을 잘 풀어서 설명해서,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말씀 자체를 잘 드러내면, 거기에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셉 얼라인이라는 청교도 학자는 말하기를 회심하지 못한 죄인들에게 있어서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의 말씀이 정직하고 강력하게 선포되는 현장에서 그것을 듣는 것 말고는 희망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를 변화시켜서 그를 병적인 유아상태에서 신령한 세계로 옮기시는 분이 성령님이신데, 성령님은 통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시되 특별히 목회자의 설교를 주된 방도로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을 통해서 순수한 복음의 진리가 명확하게 선포되는 것이 일차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듣는 자가 그 말씀을 진지하게 귀 기울여 듣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그 진리의 말씀 속으로 이해하며 들어가려고 하는 의지적이고 지성적인 노력이 없이는, 결단코 여러분들이 병적인 유아상태에서 벗어나 신령한 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선포된 그 말씀을 이해한 신자의 머릿속에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그 말씀을 가슴으로 경험하게 하는 성령의 조명하시는 역사가 결정적으로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성령님의 주권적인 역사인데, 그러한 역사는 간절히 사모하고 구하는 이에게 허락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역사를 간절히 사모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참되고 순수한 복음을 정직하게 선포하지 않은 책임은 제가 질 것입니다. 그러나 귀를 기울여 들으려고 하지 않은 책임은 여러분들이 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수많은 은혜의 기회들을 낭비한 책임에 대해서 그 누구도 핑계를 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 앞에서 자신의 영혼의 상태의 위험함을 알고, 진정으로 변화받기를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면서, 그리고 성령의 조명하시는 역사를 간절히 구하면서, 교회의 공적인 가르침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그렇게 설교를 간절한 마음으로 귀 기울여 들을 때에 비로소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말씀을 경험하는 놀라운 은혜가 우리 가운데 임할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받아서 신령한 세계로 들어가지시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의의 말씀.


둘째로 이렇게 말씀을 경험해야 하는데, 그러면 무슨 말씀을 경험해야 되느냐 하면, ‘의의 말씀’을 경험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의의 말씀’은 결국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진리를 말하는 것인데, 히브리서 저자는 그 복음의 내용을 단 한마디 ‘의’라는 단어로 압축해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이 복음진리를 ‘의의 말씀’이라고 한 것에 대해서 학자들마다 여러 가지를 말하고 있지만,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됩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가 되시기 때문에, 이 복음을 의의 말씀이라고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이 말씀이 우리를 의롭게 살아가도록 하기 때문에 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두 가지는 다른 것이 아닌데, 후자에 대해서는 다음에 살펴보기로 하고, 오늘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가 되신다는 점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의의 말씀이란 곧 ‘의’이신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을 의미합니다. 병적인 유아상태에서 신령한 상태로 올라가는 비결은 우리의 ‘의’가 되시는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나와 있는 ‘의’가 어떻게 그리스도가 됩니까? 이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전체의 의에 관한 사상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의’ 또는 ‘공의’라는 단어를 성경전체에서 수없이 들었을 것입니다. 성경 전체에 모래처럼 흩어져 있는 것이 바로 ‘의’라고 하는 개념입니다. 아주 풍성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데, 자세한 논의는 오후강설 때 잠언의 주제별 특강 때에 살펴보기로 하고, 오늘은 구원과 관련하여 의에 대한 큰 흐름만 생각해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의’ 또는 ‘의인’을 생각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법을 잘 지키고, 악을 행하지 않고, 착하고 선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떠올립니다. 물론 성경의 ‘의’에 대한 사상도 어느 정도 그런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의’ 사상을 그런 차원에서만 이해하면 곤란한데,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의’ 사상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맺게 되는 언약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언약 중에서도 특별히 시내산 언약과 많은 관련이 있고 그 시내산 언약법인 율법과 많은 관련이 있는 것이 바로 성경의 의 사상의 핵심입니다. 물론 시내산 언약 이전에도 이 의라는 말이 자주 나오지만, 그러나 본격적으로 성경에서 이 ‘의’에 대한 이야기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것은 모세 이후의 시대부터 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모세시대 때에 특별한 언약을 맺으시는데, 그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에 약속을 맺고 양자가 서로 의무를 다하기로 한 언약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하여서 하신 약속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는 약속입니다. 그러나 이 약속은 거저 주시는 약속이 아니라, 거기에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면,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셔서 그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여기시며 은총을 베푸시며 축복하시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영광스러운 민족으로 보호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책임과 의무를 하나님이 스스로 지신 것이고, 또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기로 약속한 것입니다. 이 언약의 맹세는 피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은 양자 중에 누구든지 그 약속을 어기면 죽을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이시므로 죽으실 수 없으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조건으로 걸고 언약하신 것은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전존재를 걸고서 그들이 순종하기만 하면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겠다고 하시는 의지를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기까지 이를지라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서 그에 순종하는 백성이 되겠습니다. 그렇지 못할 때에는 죽음의 저주가 임할지라도 우리가 개의치 않겠습니다.” 그렇게 맹세의 언약을 맺고 모세가 백성들에게 피를 뿌림으로 언약식을 거행한 것입니다.

 

여기서 ‘의’의 개념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의’란 언약을 맺은 두 당사자가 이 언약의 관계가 요구하는 것을 지키는 것이 바로 ‘의’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만 하시면 의로우신 분이 되십니까? 약속대로 그들이 순종했을 때, 그들을 자신의 친 백성으로 여기시고 그들을 축복하시고 보호하시고 강성케 하시면 그것이 하나님의 ‘의’인 것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의’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언약법인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 율법의 모든 것의 요체는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고,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동기를 가지고서 613개조에 달하는 율법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의롭게 되는 길인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은 그것을 지키셨는데, 인간이 적극적으로 죄를 짓고 불순종함으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하였던 것입니다.

 

율법을 받고 언약을 맺은 직후부터 그들은 계속적으로 불순종함으로 언약을 파기하였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대적하며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면서 율법을 깨트리고 언약을 파기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다윗과 솔로몬 때 반짝 순종하기도 하였고, 또 한줄기 별빛처럼 참된 신앙을 가진 몇몇 소수의 성도들과 선지자들이 일어나곤 했지만, 그러나 항상 하나님을 거스르고 범죄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언약적인 저주를 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그 율법을 지키지 아니함으로 당신에게 도전하여 반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율법에 정한대로 모두 죽이시고 형벌하신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의로우신 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온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진노 아래 놓여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려고 하니깐, 하나님에게는 의로우신 성품 말고 또 한 성품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의 성품이었습니다. ‘의’는 잘하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지만, 범죄한 사람들에게는 형벌을 가하는 공정한 판결이 바로 의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어주고 불쌍히 여기는 것이 사랑의 본질입니다.

 

여기서 이제 하나님의 성품의 이 두 가지 사이에 조화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사랑의 성품과 의로운 성품이 충돌을 일으키지 않고 하나님의 의는 의대로 만족하고,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대로 만족할 수 있는 또 다른 방안을 필요로 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언약의 재수립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깨진 언약을 내버려두셔도 되는데, 그렇게 되면 인간에게는 비참한 죽음과 멸망, 그리고 하나님과의 영원한 단절밖에는 그들에게 남는 것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이 그들에게 다시 새로운 기회를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새언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지은 모든 죄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리스도 예수 한분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모두 푸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셨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아주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한다면, 그것은 자기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나무 위에 엎어놓고, 도끼를 가지고서 그 온몸을 내려찍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의 자녀를 나무위에 엎어놓고 도끼로 내리 찍어야 된다고 한다면, 그 것을 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손에 쥐어진 도끼를 가지고서 그 사랑하는 자식을 향해 무참히 내려찍을 수 있습니까?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외아들이신 예수님을 무한히 사랑하셨지만, 그러나 십자가에 매달려 있으신 동안에는 그냥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세상 죄를 지신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아들일지라도 죄에 대한 무서운 진노의 잔을 부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통을 깊이 생각해보신적이 있습니까? 십자가의 형벌의 잔혹성에 대해서 여러분이 깊이 생각하거나 들어본 적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를 징벌하시는 방법으로 인류 역사상 사람들이 고안해낸 죽음에 이르는 형벌 가운데 가장 악랄한 방법인 십자가의 형벌을 채택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영적인 고통을 너무 강조하다보니깐 십자가의 육체적 고통을 간과하기 쉬운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영적으로도 최고의 고통의 형벌을 당하셨고, 육적으로도 최고의 고통의 형벌을 당하신 것이고, 그것을 나누어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 결국 십자가에서 영육단일체인 인간으로서 지옥의 고통을 맛보신 것입니다. 만일 그 당시에 이 십자가보다도 더 잔인한 사형집행도구가 있었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형벌의 도구로 삼으셨을 것입니다.

 

십자가 형벌은 나무에 매달아서 말려서 죽이는 형벌인데, 양손과 발을 나무에 못 박아 고정시키고, 그 십자가를 구덩이 속에 집어넣어 세우면, 온 체중이 못 박힌 양손에 쏠리게 되면서, 온 몸이 찢어지는 듯한 엄청난 고통을 맛보게 되는데, 이 십자가의 형벌의 잔혹성은 생명이 붙어있는 한 끝까지 이 고통을 계속적으로 맛보게 하고 결국은 그 고통 속에서 최후를 맞이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벌거벗긴 채로 나무에 매달려서 인간으로서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수치와 모욕을 경험하고, 낮에는 뜨거운 열기 아래서 몸이 녹아내리고, 밤에는 혹독한 추위 속에서 고통하면서 물과 피를 다 쏟아내고 나서 결국은 말라서 죽는 것입니다. 그렇게 십자가에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비참하게 죽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 바리새인들과 유대인과 로마병정들이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도구에 불과했고, 실상은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이 그 아들을 나무 위에 엎어놓고, 도끼를 내려찍는 가혹한 형벌을 가하심으로써,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담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죄는 우리가 지었는데, 형벌은 그가 대신 당하심으로 이제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거두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볼 때에는 항상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 이전에 하나님의 진노가 있었다는 사실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우리 인간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살이 찢기시고 물과 피를 다 흘리시면서 비참하게 저주받은 광경을 보면서, 사랑하는 아들일지라도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을 때는 그 죄에 대한 분노를 차마 이기지 못해서 십자가에 못 박으시는 하나님, 곧 죄에 대하여 부들부들 떨며 도끼로 그에게 내리 찍듯이 그 아들에게 진노를 퍼부으시는 그 하나님의 무서운 공의의 위엄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진노하시는지를 십자가에서 절정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진실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 거듭나지 않은 채 교회에 참석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런 부들부들 떠시는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다만 그 심판이 연기되고 있을 뿐입니다. 하루하루가 평온하다가 절대로 안심하지 마십시오. 죽음은 여러분들이 생각지 못한 때에 갑자기 여러분에게 찾아올 것이고, 그때는 더 이상의 회개의 기회가 없으며, 제가 말씀드린 이 형벌이 거짓이 아니고, 지어낸 이야기도 아니고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처절하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때 가서 몸서리치며 후회하겠지만 소용없을 것이고, 그대로 영원히 영육간에 이러한 무서운 진노의 형벌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나지 않은 모든 사람들의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교회 나오니깐 구원을 당연히 받을꺼야,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정말 자신이 거듭난 자인지 돌아보고, 자신이 거듭난 자라는 확신이 없거든, 오늘이라고 하는 날 동안에 이 예수님을 믿어 영접해야 합니다. 그것 말고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서 그 죄를 담당하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에서 할 일을 다 하지 못한 이 ‘의’의 결핍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대속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이를 통해 우리가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가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네 아버지냐? 너는 죄 가운데 산 사람이고, 죄 가운데 태어났고, 네 위에는 죄가 있고, 그 죄 위에는 나의 진노가 머물러 있거늘, 네가 어떻게 지금 내 앞에 나와서 감히 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느냐?”

 

그때에 우리들이 하나님께 내놓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맞습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크게 어긴 죄인이고 단 하나도 지키지 않았으며 지금도 여전히 모든 악으로 향하는 성향이 나에게 있다고 나의 양심이 고발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범한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고 형벌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불의하지만, 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때문에 값없이 죄사함 받고 의롭다함을 얻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우리의 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받아주셔야 합니다” 그렇게 요구까지도 할 수 있는 담대함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가 되신다는 것의 참된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들이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형벌을 받으시고 죄값을 다 치루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는 않고, 이 대속의 사건이 우리에게 적용되기 위해서 두 가지 조건이 요구됩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와 믿음입니다. 먼저 회개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면서 마음 아파하며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참회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결코 하나님 앞에 내가 범죄한 죄의 목록들을 나열하면서 그것을 삭제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도 하는 후회나 반성에 불과한 것입니다. 참된 회개란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그분 자신이 형벌을 받아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지만, 그러나 내가 지은 죄 때문에 예수님께서 저렇게 비참하게 고난을 당하고 죽으셔야 했다는 사실 때문에 깊이 아파하고, 다시는 예수님을 저렇게 십자가에 못 박게 한 나의 죄를 반복하지 않겠노라고 결단하는 그것이 바로 참된 회개입니다. 이러한 참된 회개 없이는 결코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흉내는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또 하나 요구되고 있는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비록 내가 하나님 앞에서 멸망받아 마땅한 죄인이지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공로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함 받았고, 값없이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것을 믿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 죄에 대한 회개와 십자가 은혜에 대한 믿음, 이 두 가지를 구원의 조건으로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 회개와 믿음을 한 마디로 회심이라고 하는데, 바로 이 회심의 경험이 의의 말씀을 경험한다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인 것입니다. 즉 우리가 병적인 유아상태에서 벗어나서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의의 말씀을 경험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의의 말씀, 곧 십자가 복음을 성령의 조명하시는 역사로 말미암아 깊이 깨달음으로 그 앞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의 은혜를 믿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의의 말씀을 경험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인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십자가 복음을 성령님의 은혜로 깊이 깨달아서 회심하게 되어질 때에 우리는 비로소 병적인 유아상태를 끝내고 신령한 그리스도인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대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병적인 유아상태에 오래도록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이런 의의말씀에 대한 경험이 없는 사람들로서 곧 십자가 사건에 대한 체험이 없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병적인 유아상태에 머물러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십자가에 대한 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십자가에 대해 묵상할 때마다 감사와 찬양이 마음속에서 솟구쳐 오릅니까? 아니면 십자가를 생각해도 아무런 감정이 없고, 냉냉합니까? 만일 후자의 경우라면 우리는 지금 병적인 유아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 앞에서 자신이 진실로 영적으로 위태로운 상황에 있다는 것을 알고, 그동안 십자가에 대한 감격 없이, 그리고 감사함이 없이 배은망덕한 삶을 지속해오면서 자신의 욕심대로 살아온 것을 깊이 뉘우치고, 이제는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의 복음에 귀를 기울이겠노라 라는 결단을 내리면서, 말씀과 기도에 착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날마다 이 십자가를 새롭게 경험해야 합니다.


(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여기서 “못박혔다”는 것은 과거완료입니다. ‘be crucified’가 아니라 ‘have been crucified’입니다. 과거에 단회적으로 일어난 사건이지만, 그러나 그 효력이 현재에도 지속적으로 역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채로 하루하루를 살아갔던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복음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불태우면서,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었던 원동력이 바로 이 십자가를 매일의 삶 속에서 반복적으로 경험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날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체험 없이는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증인으로 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에 대한 숙명적인 매임이 없이는 우리는 복음의 증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날마다 이 의의 말씀 곧 십자가 복음을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참으로 경험하게 되어지기를 진정으로 사모하면서 말씀과 기도에 착념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이러한 십자가의 복음을 깊이 우리 안에 허락해주셔서 그 의의 말씀을 경험함을 통해, 믿음과 회개를 통해서, 우리의 병적인 유아상태가 종식되고, 신령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는 놀라운 은혜를 허락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바울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힌 채 주와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주의 종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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