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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성경본문 히 6:1-8
성경본문내용 (1)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2)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지니라(3)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4)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5)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6)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7)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8)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강설날짜 2012-09-16

2012년 9월 16일 한결교회 주일예배강설

히브리서 제15강


완전한 데로 나아가지십시다


말씀 : 히 6:1-8


오늘 읽은 본문은 히브리서뿐만 아니라 성경전체에서 손꼽히는 난해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지금도 학자들마다 치열하게 논쟁이 되고 있는 본문이고, 또 해석이 어렵기 때문에, 이 본문 말씀의 본의가 무엇인지 파악하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특히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내세의 능력과 선하신 말씀을 경험하고 타락한 자는 다시 회개케 할 수 없다” 라고 하는 말씀은 우리에게 매우 두려운 말씀임과 동시에 혼란을 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았어도 이후에 타락하게 되면, 참된 신자라도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는 말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미니안주의자들은 바로 이런 구절들을 근거로 참된 신자도 잘못 살면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전체의 말씀을 통해서 이미 알고 있습니다. 성도의 견인교리는 확실한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타락하면 다시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는 것과 성도의 견인 교리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요? 어렵습니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타락한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될지도 난해합니다. 실제 있었던 일인데, 어떤 성도가 이 타락한다는 것을 일반적인 자범죄까지 확대 적용해서, 자신이 반복적으로 죄를 범하는 것을 보면서 스스로 타락했다고 생각하고 회개할 기회가 없다는 말에 절망에 빠져서 그만 자살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말씀을 잘못 해석하여 적용한 것이 이런 끔찍한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 본문을 잘못 이해하면 최소한 자살은 아니더라도, 이 말씀 때문에 절망과 좌절에 빠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타락하다’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분명한 것은 여기의 ‘타락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자범죄는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님은 그 죄가 얼마나 크든지, 얼마나 많은 죄들을 지었든지 상관없이 진실로 참회하며 회개하는 자에게 용서의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자비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타락한다는 것을 일반적인 자범죄로 보는 것은 매우 잘못 해석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타락한다는 것을 어떻게 하는 것을 말합니까? 여기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용서받지 못하는 죄로서 성령훼방죄를 말하는 것이라는 견해에서부터 시작해서, 도덕적으로 완전히 타락해서 양심에 화인 맞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 채, 완전히 죄에 사로잡힌바 되어서 이성 없는 짐승처럼 육체의 더러운 정욕을 따라 부끄러움 없이 공개적으로 그리고 수시로 죄를 범하는, 그야말로 탐욕에 연단된 자들을 말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단순히 신앙을 포기하고 기독교를 부정하면서 아예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 오늘날 가장 많은 학자들이 주장하는 견해가 악심을 가지고서 하는 공개적인 배교라는 견해인데, 특별히 히브리서 수신자들의 정황에서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고 유대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견해입니다. 여러 가지 견해들이 있는데,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결정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논쟁이 되고 어려운 부분이 있기 때문에, 특별히 오늘 본문을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서 읽어야 하고, 또 본문을 해석할 때 성경전체의 문맥과 히브리서 전체 문맥을 생각하면서, 그리고 수신자들의 상황과 배경을 고려하면서 풀어가야 이런 난해한 부분들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대한 성경적으로 풀어가려고 노력하겠지만, 저의 해석이 틀릴 수도 있으니, “목사님이 말씀하시니깐 무조건 맞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과연 그러한가?” 물음표를 가지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본문을 한 구절씩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지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릴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이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는 앞에 5장 12절에서 “(12)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라고 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지금 히브리서 수신자들은 오랜 시간 신앙생활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선생이 되기는커녕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를 다시 가르침 받아야 할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를 (또는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다시 가르침 받아야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말하려고 한 것이라기보다는, 다시 초보적인 가르침을 받아야 할 만큼 그들의 상태가 아주 미성숙한 상태라는 것을 강조해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리어 히브리서 저자가 진정으로 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오늘 본문 1절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그러한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즉 젖을 끊고, 딱딱한 음식, 곧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깊은 복음의 진리 가운데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절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버린다’는 말은 폐기를 의미한다기보다는 일단 옆으로 제쳐두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고등학생이 되었는데 아직까지도 초등학교 수학 교과서를 읽고 배우고 있으면, 옆에 있는 사람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야! 그거는 이제 갖다 버리고 ‘수학의 정석’이나 사서 그거나 공부해라”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초등학교 때 배운 지식은 잘못된 것이고 쓸모없는 것이니 다 잊어버리라는 말이 아니라, 그것은 이미 알고 있으니깐, 그 공부는 그만하고, 수준에 맞는 공부를 하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라는 말은 폐기하라는 말이 아니라 일단 옆에 제쳐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2절에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라”는 말로 다시 표현이 되고 있습니다. 이미 닦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초보적인 수준의 교리를 배우는데서 벗어나서 깊은 복음의 진리로 나아가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버려야 할(또는 제쳐두어야 할)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본문은 6가지를 말하는데, ①죽은 행실을 회개함, ②하나님께 대한 신앙, ③세례들, ④안수, ⑤죽은 자의 부활, ⑥영원한 심판입니다. 이 6가지가 무엇이냐에 대해서도 논쟁이 되고 있지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 6가지는 바로 구약의 가르침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핵심적인 교리들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왜 그런지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로 죽은 행실을 회개한다는 것은 사람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악행을 회개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4)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 9:14)


이 구절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죽은 행실이란 깨끗하게 함을 받아야 할 사람의 더럽고 죄악된 행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살인, 간음, 음란, 탐욕, 미움, 거짓, 포학 등과 같은 죄들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바로 이러한 죄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고 그를 죽음으로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은 행실인데, 그것을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 성경이 증거 하는 매우 중요하고 기본적이 교리인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 대한 신앙 역시 회개와 함께 구약성경이 매우 중요하게 가르치는 교리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라고 표현한 것을 주목해보십시오. 즉 이것은 이 6가지가 구약의 핵심 교리라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세 번째로 ‘세례들’이라고 했는데, 복수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서 받는 ‘세례’는 항상 단수로 사용되는데, 복수로 사용되었다는 말은 여기서 말하는 것이 그러한 기독교 세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하면, 이와 똑같은 단어가 9:10에서는 ‘씻는 정결 의식’으로 번역되고 있는데, 바로 여기서도 의미하는 바가 이것일 것입니다. 네 번째로 ‘안수’도 구약성경의 의식적인 전통으로서, 동물들의 머리에 안수하여 희생을 잡는 의식과 사람을 안수하여 직분자로 세우는 의식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도 모두 구약의 핵심적인 가르침입니다. 이 6가지는 모든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약성경을 통해서 믿고 고백했던 바이고, 이방인들이 유대교에 들어가기 위해서 반드시 고백해야 했던 유대교 입문 교리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유대교 교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 교리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유대교의 도의 초보’라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학자들이 이 6가지를 가지고서 “유대교 입문교리냐? 기독교 복음 교리의 초보냐?”라고 논쟁을 하는데, 아주 무의미한 논쟁입니다. 이것은 구약은 유대교이고, 신약은 기독교라는 잘못된 인식에서 오는 것인데, 과연 구약은 유대교이고, 신약은 기독교입니까? 아닙니다. 신구약 성경 모두가 바로 기독교입니다. 다만 그 당시에는 초대교회에서는 신약성경이 아직 없었고, 그들에게는 이 구약의 가르침 밖에 없었는데,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구약의 핵심적인 가르침인 이 6가지를 믿고 고백했던 것이고, 바로 그러한 구약에 대한 기본적인 신앙의 바탕 위에서 바로 하나님이 친히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과거에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었듯이 그렇게 구약의 이러한 핵심적인 가르침들만 고백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믿는 신앙만 하나 얹어놓은 식의 신앙생활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히브리서 저자의 히브리서 수신자들을 향한 외침인 것입니다.

 

즉 히브리서 수신자들은 이러한 구약의 가르침들의 근간만 이해하고 있을 뿐, 그 모든 구약의 가르침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그림자와 모형에 불과한 것이고, 그 구약의 모든 가르침들이 결국 그리스도 예수를 향하여 어떻게 연결되어져서 발전되며, 또 어떻게 궁극적인 성취가 되는지,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자신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구원의 효력으로 다가오는 것인지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구속사적인 흐름을 인식하지 못하고, 구약의 중심교리들을 고백하면서 거기에 단순히 예수님을 믿는 신앙만 하나 더 얹어진 상태로 신앙 생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뿌리가 없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얼마든지 우리가 이런 식으로 예수님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에 대한 여러 가지 단편적인 지식만을 알고, 그 구약이 신약으로 어떻게 놀랍게 이어지고 연결되어 있는 지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는 상태로 그냥 예수님을 믿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게 예수님을 믿으면, (물론 거듭나서 구원은 받겠지만), 그러나 결국 복음에 대한 이해가 얕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이해로는 그 신앙이 장성한 자로 성장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 악하고 음란한 세상에서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는 경건의 능력 있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해나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배운 것처럼 병적인 유아상태와 영적 미성숙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고, 그 상태로 가만히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인 후퇴와 뒷걸음질 속에서 결국 비참한 결말에 이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신구약성경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 쌓는 것에 그치는 성경공부에서 벗어나서 언약적 구속사의 관점에서 성경 전체가 어떻게 연결되고 모든 구약의 가르침들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향해있는지에 대해서 깊이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소위 성경이 뚫린다고 하죠? 구슬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는데, 성경을 통해서 수많은 복음의 진리의 진주들을 그저 파편적이고 산발적으로 깨달아서는 아무 의미가 없고, 그 모든 귀한 진주들이 다 그리스도라고 하는 실에 의해서 꿰어져서, 신구약의 모든 말씀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묶여진 통일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경험되어 져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이 히브리서 저자가 7장 이후부터 수신자들에게 확인시키고자 하는 핵심 내용인 것인데, 히브리서 저자는 그러한 복음 진리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통해서만 바로 영적인 미성숙에서 벗어나서 장성한 분량에까지 신앙이 자랄 수가 있다고 지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는 말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는 것은 깊은 복음 진리를 깨달아서 지각을 사용하여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장성한 자의 자리로 나아가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나아갈지니라’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를 원어로 보면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직역을 하면, ‘나아가지십시다’ ‘(누군가에 의해서) 나아가지십시다’입니다. 누군가에 의해서이죠?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곧 우리가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것이 우리 힘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도우심 없이는 목회자가 이러한 깊이 있는 복음을 가르칠 수도 없고, 또 설사 깊은 복음의 진리가 선포된다 하더라도 성령님의 깨닫게 하시는 은혜가 없이는 우리는 그것을 들어도 그 말씀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의 말씀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성령님을 힘입어서 완전한 데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3절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이 말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실지, 아니면 허락하기를 원치 아니하실지 의심스럽다는 말이 아니라, 그렇게 나아감에 있어서 하나님을 의존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목회자들이 언약적인 구속사 관점에서 말씀의 본의를 드러내는 설교를 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고, 그 말씀을 통해 우리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는 통일된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하여 우리의 영혼과 삶이 변화될 수 있기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그런 장성한 자의 자리로 나아가게 허락해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 외에는 다른 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결교회에 이러한 은혜를 허락해 주셔서 우리가 복음 진리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진수를 깨닫고 그 복음으로 말미암아 변화되어 신령한 그리스도인의 자리에 이르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6절을 보십시오. 4-6절은 이렇게 성숙을 향해 나아가지 않았을 때 발생하는 극단적인 결과를 진술하고 있습니다. 4절은 한글 성경에는 보이지 않지만 원어로 보면 ‘왜냐하면’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하나님을 힘입어서 완전한 데로 나아갑시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완전한 데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 왜냐하면 완전한데로 나아가지 않을 때는 타락하여서 다시 회개케 함을 얻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즉 다시 회개함을 받을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 이를 수 있음을 언급함으로써 히브리서 저자는 완전한 데로 나아가는 것이 성도의 취사선택의 사항이 아니라 필수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4-6절을 보면 다시 회개케 함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 어떤 자인지에 대해서 5개의 분사로 표현되고 있는데, ① (한번) 비췸을 얻고, ②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③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④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⑤ 타락한 자입니다.


1) 한번 비췸을 얻었다

여기서 ‘한번’은 그들이 딱 한번만 그것을 경험했다라고 하는 횟수를 의미한다기보다는 질적으로 그들이 확실히 그것을 경험을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번 비췸을 받았는데, 이 비췸을 받는다는 것은 성령의 조명하시는 빛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32)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히 10:32)


그리스도께서 마음속에 진리의 밝은 빛으로 조명하셔서 그들로 깨닫게 하시고, 진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실제적으로 마음과 삶이 새롭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2) 하늘의 은사를 맛보다

맛보았다는 표현이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과 관련해서도 표현되는데, 이 표현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이 타락한 자들이 그러한 하늘의 신령한 은사나 선한 말씀이나 내세의 능력을, 진정으로 내면을 파고들어 역사해서 거듭나고 변화를 받는 식으로 경험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피상적으로 경험했다고 주장합니다. 즉 본문이 묘사하는 자들은 참된 그리스도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맛만 보고, 뭔가 냄새만 맡고, 껍데기만 맛보고 곁자리에 있다가 나중에 시험을 받아 떠나는 가짜 신자들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그러나 맛본다는 것을 단지 그렇게만 이해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이 단어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서도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9)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 2:9)


즉 이 ‘맛본다’는 단어는 피상적으로 맛만 보았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그것이 진정한 체험을 의미할 수도 있음을 우리는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맛본다는 의미를 해석할 때는 문맥을 보고 해석해야 하는데, 본문의 문맥은 모든 교회를 나오는 신자들을 향해서 이렇게 타락할 수 있음을 진지하게 경고하고 있기 때문에, 이 맛본다는 의미는 후자의 의미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하늘의 은사는 성령의 은사일수도 있지만, 더 폭넓게 하늘로부터 오는 모든 은혜의 선물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늘로부터 오는 수많은 은혜의 혜택들을 경험한 것입니다.


3) 성령에 참예한바 되다

‘참예하다’는 말은 ‘공유하다, 나누다’는 의미입니다.


(14)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히 3:14)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분이 얻으신 모든 것을 우리도 함께 얻게 될 것이라는 의미를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에 참예한바 된다’라는 것은 성령님이 그 안에 계셔서 그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은혜를 받고, 또 놀라운 체험들을 한 것을 의미합니다.


4)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했는데, 그냥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선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선하다는 것은 그 말씀이 약속한대로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신실한 말씀이라는 것이고, 또한 그것이 우리에게 구원과 축복을 가져다주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런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리고 내세란 장차 올 세상을 말합니다. 지금 이 세상은 현세로서 죄와 사망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세상 끝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면 이 세상은 끝나고 주님이 친히 통치하시는 완성된 하나님 나라 곧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것입니다. 그것이 내세인데,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이미 이 내세가 우리 가운데 임한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세상 끝, 종말에 살고 있고, 이미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세에 살면서도 내세의 능력을 맛보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들도 바로 이미 임하여 온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체험한 것입니다.


5) 타락하다

이러한 4가지 체험을 했음에도 타락하는 자는 다시 회개케 함을 받을 수 없는데, 여기서 이 타락한다는 말은 우리가 삶 속에서 범하는 산발적인 죄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이고 고의적인 배교를 말합니다. 특히 이 말씀은 10:26과 함께 살펴보아야 하는데...


(26)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히 10:26)


여기서도 두 번째 회개의 불가능성에 대해서 말씀하는데, 여기서는 이 죄를 짐짓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짐짓 죄를 범한다는 것은 고의적으로 짓는 죄를 말합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동일하게 모든 죄를 사함 받을 수 있지만, 단 하나 사함 받지 못하는 죄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고의적으로 짓는 죄입니다.


(30)본토 소생이든지 타국인이든지 무릇 짐짓 무엇을 행하면 여호와를 훼방하는 자니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라(민 15:30)

(16)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라 외국인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죽일지니라(레 24:16)


대표적인 예가 고라 자손이 모세를 대적하고 훼방했을 때입니다.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를 다 보고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모세를 공개적으로 대적하며 나섰던 것입니다. 그런 경우는 본인이 회개하려고 하지도 않았지만, 다시 회개할 기회 없이 땅이 그들을 삼켜서 그들을 진멸하였던 것입니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놀라운 기적의 역사와 그분의 선하신 말씀을 친히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성령의 역사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악한 마음을 따라 그것을 귀신의 역사라고 하면서 고의적으로 예수님을 대적하고 훼방하였습니다. 이러한 고의적인 범죄는 결코 사함을 받지 못하는 성령훼방죄인 것입니다.

 

물론 죄란 그 본질적인 속성상 그 어떠한 사소한 죄든지 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고의적인 배반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고의적인 죄라는 말은 그런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죄를 범하고, 그 죄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면서 후회하는 마음이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악한 마음을 따라 그리고 공개적으로 지속적으로 범죄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의 6절에서 그들이 왜 다시 회개케 함을 받을 수 없는가에 대한 이유로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였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는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던 유대인의 입장으로 돌아갔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칭 메시아이고, 그분의 역사는 다 귀신의 사역이며, 나사렛의 이단으로 잘 죽었다고 생각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완전히 포기하고 유대교로 돌아서는 것이 바로 용서받지 못할 성령훼방죄를 지은 것입니다. 특히 여기서 ‘못박았다’, ‘현저히 욕을 보였다’는 말은 현재형으로 되어 있어서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예수님을 대적하고 수치를 드러내는 삶을 살아감을 말합니다. 이것은 그들은 회개하고 싶은데, 하나님께서 허락지 아니하신다는 말이 아니라, 그들이 회개를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강퍅해져서 회개케 함을 받을 수 없는 상태에 있게 되는 것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타락은 공개적으로 악심을 가지고서 배교하는 것을 말합니다. 베드로처럼 연약해서 예수님을 공적으로 부인한 것과 같은 배교를 말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타락이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오늘날 우리가 유대교로 다시 돌아갈 리 없고, 예수님 믿으면 죽인다는 핍박이 있어서 공개적으로 배교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타락이라는 것이 없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본문 자체에서 이 타락이 의미하는 바는 일차적으로 유대교로의 회귀를 통해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짓는 것을 말하지만, 그 타락의 중요한 특징들을 우리도 행한다면, 우리가 설사 유대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타락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타락의 중요한 특징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고도 고의적이고 악한 마음을 가지고 부끄러움을 모르고 적극적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훼방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 바로 타락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영적 체험을 하고 신앙을 가졌다가 도덕적으로 완전히 타락해서 양심에 화인 맞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 채, 완전히 죄에 사로잡힌바 되어서 이성 없는 짐승처럼 육체의 더러운 정욕을 따라 부끄러움 없이 담대하게 그리고 공개적으로 그리고 수시로 죄를 범하는, 그야말로 탐욕에 연단된 자가 되는 것도 이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고, 어떤 영적 체험을 한 뒤에 신앙을 가졌다가 어떤 계기로 그 신앙을 완전히 버리고 그 다음부터는 적극적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교회를 훼방하는 삶을 사는 것도 바로 타락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지만, 연약함과 불신앙 가운데 교회를 잠시 안 나오는 것은 타락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담대하게 그리고 고의적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며 죄를 짓는 데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타락하는 것인데, 이렇게 타락하면 그 사람에게는 다시 회개할 기회가 없는 것이고, 회개할 마음조차 그 마음에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남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병적인 유아상태에 계속해서 거하면서 영적으로 게으르고 안일한 삶을 살면, 처음에는 은밀하게 죄를 범하지만, 갈수록 마음이 강퍅해져서 나중에는 그렇게 아예 대놓고 공개적으로 죄를 범하면서 하나님과 교회를 대적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이 타락에 대해서 전혀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 타락을 산발적인 자범죄로 확대해서 적용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오류에 많이 빠지는데, 죄를 범하고 나서 내가 혹시 타락한 것이 아닐까 이제 회개의 기회가 없는 것을 아닐까 하면서 절망에 빠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나 만일 죄를 범하고 나서 내가 혹시 타락한 것은 아닌지, 두려운 마음이 들고, 양심의 가책이 느껴진다면, 그래서 회개의 심정이 든다면, 그것은 연약함으로 범죄한 것이지 고의적인 타락이 아니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것임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면서 타락의 의미를 조심스럽게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질문은 이 4가지의 경험을 하고도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인데, 그러면 이 4가지 경험을 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참된 신자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가짜 신자에 대한 묘사입니까? 알미니안들은 이 4가지 묘사가 바로 참된 신자의 표지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알미니안은 참된 신자라도 타락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칼빈주의자들은 이 사람들이 진짜처럼 보인 가짜 신자라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참된 신자는 타락할 수 없기 때문이죠.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맞는 말이라고 저도 생각합니다만, 그러나 그것이 본문에 대한 정확한 이해인지는 조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4가지 체험을 한 자들의 정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반드시 7-8절의 두 밭의 비유와 9절의 히브리서의 저자의 권면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른 해석을 위한 결정적인 실마리입니다. 이 두 구절을 제대로 이해하면 이 4가지 체험을 한 자가 어떤 자인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두 밭의 비유를 생각해보십시다.


(7)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8)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밭의 책임입니다. 우리는 이 두 밭의 비유와 예수님의 4가지 밭의 비유를 혼돈하지 말아야 하는데, 예수님의 밭의 비유는 밭의 종류가 다 다르고, 그 상이한 결과들이 바로 그 다른 출발점에 기인한다는 분명한 논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오늘 히브리서 본문의 밭의 비유는 모든 출발점이 같고 땅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것도 같고, 밭을 가꾸는 농부의 손길을 받는 것도 똑같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거기서 결과적으로 산출되는 작물이 무엇이냐 하는 것뿐입니다.

 

결국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바로 본문이 말하는 4가지 체험은 진짜 신자이든지 진짜인척 하는 가짜 신자이든지 상관없이 모든 (은혜의 수단 아래 있는) 교회 나오는 사람들에게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비라는 것입니다. 이 4가지 체험을 하고도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은 이 4가지 체험이 중생여부를 증명해주는 신자의 표지가 아님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참된 신자든 가짜신자든지 교회의 은혜의 수단 아래서 누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비인 것입니다. 두 번째로 본문의 초점은 이 4가지 체험을 한 자들이 진짜 신자인지 가짜 신자인지를 구별하고 밝히는데 관심이 없습니다. 진짜 신자이기 때문에 타락하지 않고 도리어 열매 맺는 삶을 살았고, 가짜신자이기 때문에 타락했다라고 하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밝히는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4가지 체험을 한 우리 모두가 완전한 데로 나아가지 않으면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우리가 완전한 데로 나아가서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우리 모두의 책임을 강조하는데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본문을 접근할 때, 이 4가지 체험을 한 자를 진짜냐 아니면 진짜인 척하는 가짜냐 하는 이분법적인 관점으로 접근하기보다도, 일차적으로 이 말씀이 우리 모두를 향한 진지한 경고의 말씀임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완전한 데로 나아가지 않으면 이런 타락이라는 비참한 상황에까지 떨어질 수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 정말 자신의 영혼의 위험한 상황을 알아서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완전한 데로 나아가기 위해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고 제대로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9절을 또한 살펴보아야 하는데, 9절을 보시면...


(9)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여기서 구원에 가깝다고 했는데, 원문을 보면, “구원을 소유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히브리서 저자는 그들의 구원을 확신하면서 그들에게 안심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1-3절의 ‘우리’라는 1인칭 표현이 4-6절에서 ‘그들’이라는 3인칭으로 전환된다는 점에 주의를 해야 하는데, 이것은 히브리서 저자가 이 본문에 묘사된 자들을 신자들과 직접적으로 연결하기를 꺼려했다는 것을 암시해줍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히브리서 저자가 그들에게 심각하게 경고할 의도는 있었지만, 그러나 그들에게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는 고착화된 교리를 알려주기 위한 의도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시사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알미니안적인 해석은 이러한 저자의 의도와 뉘앙스를 무시하고 지나치게 본문에서 교리적인 결론을 도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코 이 본문을 그렇게 이해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히브리서 저자는 수신자들의 구원을 확신하면서 이 타락의 교리가 참된 신자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면 앞에서는 누구도 타락 할 수 있을 것처럼 경고해놓고서는 또 뒤에 가서는 우리의 구원을 확신한다고 말하는 것이 앞뒤가 안 맞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앞뒤가 안 맞는 것이 아니라 이 두 가지가 모두가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즉 경고의 말씀 앞에서는 우리의 헛된 안전감과 그릇된 구원의 확신이 무너져야 하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않았거나 혹은 병적인 유아상태에 머물러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앞에서 언급된 그런 영적체험도 했고, 교회 잘나오고 있으니 나의 영적 상태는 건강해. 구원받는 데는 문제 없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는 그러한 헛된 안전감과 그릇된 구원의 확신이 이 통렬한 경고 앞에서 다 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고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면서 “아! 내가 병적 유아상태에 머물러 있었구나. 이렇게 계속해서 살면 결국 타락해서 비참한 처지에 이르겠구나.” 그렇게 자신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죄 된 삶에서 돌이키고자 하고, 성숙과 완전한 데로 나아가고자 힘써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의 길이 만만한 길입니까? 쉬운 길입니까? 그 길은 고난의 길이요 수많은 죄악의 유혹의 낭떠러지가 곳곳에 있는 곳이고, 이 경고의 말씀대로 우리가 까딱 잘못하면 결국 타락해서 멸망당하고 마는 그런 수많은 위험이 존재하는 길인 것입니다. 그러니 연약하고 허물진 나 자신을 생각할 때, 도저히 그 길을 걸어갈 용기가 나지 않는 것입니다. 늘 두려움과 불안함 속에서 헤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지 않게 하시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게 하시고 그분만을 의지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 주님이 영원 전에 나를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셨고, 십자가의 공로로 나를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으니, 내가 내 자신을 바라보면 아무 소망이 없지만, 그러나 그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아무리 이 믿음의 길이 험하고 위험해도 주님께서 나를 붙잡고 계시고 나를 끝까지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에, 내가 안전하구나.” 그렇게 참된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고, 그 확신을 가지고서 더욱더 주님만을 믿고 의지하면서 그 길을 힘써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걸어간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이 두 가지 일이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헛된 안전감과 그릇된 구원의 확신이 자꾸 깨어져야 하는 것이고, 그래서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성숙을 향해 열심히 힘쓰도록 하는 동기가 되어져야 하고, 또한 우리의 심령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십자가 복음을 깊이 깨닫고 또 말씀 위에 굳게 세워져서 참된 구원의 확신을 갖고, 믿음의 확신 가운데 힘차게 믿음의 길을 걸어 나아가는 일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마음(멸망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구원의 확신)이 늘 공존하는 것이 역설이지만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완전한 데로 나아가지 아니하면, 결국 타락 하고 말 것이라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말씀을 통해 깊은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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