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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성경본문 히 7:1-25
성경본문내용 (1)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2)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3)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4)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5)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가졌으나(6)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그 약속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7)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8)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9)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10)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11)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12)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13)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다른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14)우리 주께서 유다로 좇아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15)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16)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17)증거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18)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19)(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20)또 예수께서 제사장 된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21)(저희는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자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22)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23)저희 제사장 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24)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25)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강설날짜 2012-09-30

2012년 9월 29일 한결교회 주일예배강설

히브리서 제17강


멜기세덱과 예수


말씀 : 히 7:1-25


히브리서는 예수를 믿어 유대교에서 개종한 유대인 신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쓰여진 서신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 신자들은 같은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아우 극심한 핍박과 혹독한 박해를 당했는데, 그 이유는 유대인 신자들이 예수를 믿은 후로 구약의 율법을 무시하는 경향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같은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으면서, 그리고 그 핍박이 장기화되면서 유대인 신자들은 혹시 예수를 믿는 것이 구약 내내 지켜왔던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던 것이고, 어떤 이들은 아예 기독교 복음을 포기하고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움직임까지 보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그들을 향해서 히브리서 저자는 모세와 율법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모형이요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율법과 제사제도가 상징하고 예표했던 것의 실체라는 것을 강력하게 논증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바로 이러한 맥락 속에서 구약의 멜기세덱이라는 인물을 통해 레위지파 계열의 대제사장 직분과 제사제도의 한계와 열등함을 제시하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된 대제사장이 되심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아론 대제사장과 그의 모든 사역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을 예표하는 좋은 모형이고 그림자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아론 대제사장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놀라운 섭리 가운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을 먼저 아브라함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멜기세덱이 제사장으로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그를 축복하고 그에게 십일조를 받은 사건을 통해서 아론 대제사장이라는 모형이 다 표현할 수 없는 중요한 몇 가지를 예표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점에서 멜기세덱이 훌륭한 모형입니까?


1) 왕이면서 제사장이다


첫 번째는 그가 왕이면서 제사장이라는 점입니다. 레위지파의 아론 계열의 대제사장은 그냥 대제사장입니다. 대제사장이면서 결코 왕일 수는 없습니다. 율법은 이 두 직분을 칼같이 나누어놓았습니다. 왕이 대제사장 직분을 행한다든지, 대제사장이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 된다든지 하면, 하나님께 큰 벌을 받는 대죄였습니다.

 

그런데 멜기세덱은 왕이면서 대제사장인 것입니다. 1절에 보면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라고 했습니다. 살렘 지역의 왕이라는 것인데, 이 살렘이 어디냐 하는 것에 대해서 논란이 많지만, 그러나 여러 연구를 통해서 요즘은 살렘이 예루살렘을 의미한다는 것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 견해가 맞다면, 멜기세덱은 예루살렘의 왕인 것입니다. 그가 소돔 왕도 아니고, 그가 벧엘 왕도 아니고, 다른 여러 지역의 왕도 아니고 왜 하필 예루살렘 왕이겠습니까? 우연의 일치가 아니죠. 예루살렘은 신약의 성취의 빛에서 보면 하나님의 백성의 총회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왕은 하나님 나라의 왕의 위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의 번역이 놀랍습니다. 2절에 보면...


(2)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그 이름을 번역한즉 의의 왕이라고 했습니다. 멜기세덱은 두 단어로 구성되어 있는데, ‘멜기’라는 단어와 ‘쩨덱’이라는 단어입니다. ‘멜기(멜렉)’는 왕을 의미하고, ‘쩨덱’은 ‘의’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깐 멜기세덱은 단어만 놓고 보면 ‘의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멜기세덱이 살렘 왕이라고 했는데, 살렘은 ‘샬롬’의 변형으로서 ‘평화’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살렘 왕은 ‘평화의 왕’입니다. 이렇게 멜기세덱이 예루살렘의 왕이요, 의의 왕이요, 평화의 왕으로 호칭되는 것이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바로 이 모든 것들은 바로 그 원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을 아주 훌륭하게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대제사장이실 뿐만 아니라, 구약에서 약속된 의의 왕이시오, 평화의 왕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분의 대제사장직을 논하면서 그분이 왕이라는 사실을 굳이 언급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아무리 우리를 동정하시고 사랑하시고 구원하여 돕고자 하셔도 힘과 권세가 없으면 실질적인 도움을 주실 수가 없고, 그저 동정하는 차원에서 끝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만유를 떡 주무르듯이 자기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그런 높은 지위에 계신 만유의 주권자로서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이 되셨기 때문에, 우리를 긍휼히 여기실 뿐 아니라, 능히 사단마귀와 싸워 이기셔서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또한 이 험악한 세상에서 우리를 보호하여 반드시 구원의 완성의 자리까지 우리를 능히 인도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그냥 대제사장이신 것이 아니라, 왕이시면서 대제사장이시란 사실이 매우 중요한 것이고, 우리에게 든든한 반석과 같이 말할 수 없는 위로를 주는 것입니다.


2) 영원하다


두 번째로 멜기세덱이라는 인물이 갖는 중요한 의미는 바로 그가 영원한 대제사장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인물 가운데 멜기세덱에 대해서 매우 관심이 많습니다. 우리가 이 인물에 대해서 의문이 많고 관심을 많이 가지는 이유는, 이 멜기세덱에 대해서 성경이 많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12장부터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쭉 진행되는데, 14장에 갑자기 혜성처럼 등장해서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축복해주고, 또 아브라함으로부터 십일조를 받습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퇴장해서 성경의 역사 속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춰버립니다. 창세기 저자인 모세는 이 사람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소개하는데, 이러한 놀라운 직분의 위인이면,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 되었는지, 그의 부모는 누구이고, 그의 조상은 어떤 사람인지, 또 살렘 왕으로서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 등등에 대해서 어떤 설명이라든지, 추가적인 이야기를 해야 될 것 같은데,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성경의 의도적인 ‘침묵’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침묵’이 히브리서 저자에게는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3절의 내용입니다.


(3)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정말 멜기세덱은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이 없는 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 멜기세덱은 살렘 왕으로서 역사적인 실존 인물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멜기세덱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너무 과도한 주장입니다. 멜기세덱은 예수님을 예표하는 역사적인 한 인물이지, 그가 결코 예수님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그가 사람이라면, 아비도 있고, 어미도 있을 것이고, 분명히 족보도 있을 것이고, 태어난 날도 있을 것이고 죽은 날도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멜기세덱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었느냐 없었느냐 하는 것에 히브리서 저자의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성경이 거기에 대해서 철저히 침묵했다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멜기세덱을 신비롭게 출현해서 놀라운 일을 하고서는 곧바로 신비롭게 사라지는 인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고 십일조 받은 것 외에는 앞도 없고 뒤도 없는 사람입니다. 멜기세덱의 컨셉은 “신비주의”입니다. 이러한 신비한 모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대제사장이 되시는지에 대한 하나의 전조(前兆), 또는 훌륭한 예표가 되는 것입니다.

 

즉 앞뒤가 없는 멜기세덱의 신비성이라고 하는 상징이 바로 시작도 없으시고 생명의 끝도 없으시고 영원히 대제사장으로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훌륭하게 예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비가 있습니까? 어미가 있습니까? 시작한 날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어? 요셉과 마리아가 그의 부모가 아니었던가요? 예, 맞습니다. 그러나 지금 제가 하는 이야기는 그런 육적인 차원의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이 어느 한순간에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서 인간의 육체를 취하시어 한 아기로 태어나긴 하셨지만, 그러나 그때 비로소 존재하시게 된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분은 영원 전부터 존재하셨습니다. 그분의 존재는 시작도 없으시고 생명의 끝도 없으신 것입니다.

 

우리와는 존재 자체가 다르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시작한 날이 있고 끝날 날이 있습니다. 태어난 날이 있으면 또 죽을 날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중학교를 입학한 날이 있으면, 3년 후에는 졸업하는 날이 있습니다. 취직했으면 반드시 퇴직할 날이 있습니다. 차를 샀으면, 그 차를 폐기할 날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시작과 끝이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모든 만물은 다 시작과 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직 한분 예수님은 시작과 끝이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우리의 시작과 끝을 정하시고 만드시고 마무리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알파와 오메가가 되신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알파(영어 알파벳 ‘a’에 해당) 앞에 단어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첫 시작입니다. 그리고 오메가(영어 알파벳 ‘z’에 해당) 뒤에 단어가 없습니다. 그것은 끝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시작과 끝, 원인과 결과, 이 모든 테두리 밖에 계셔서 모든 만물을 시작하신 근원이 되실 뿐만 아니라, 친히 모든 만물을 끝을 내셔서 마무리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창조주 하나님이시오, 영존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분의 존재만 영원하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직분도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대제사장이 아니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영원히 대제사장으로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모습을 멜기세덱이 꼭 닮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멜기세덱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고 했습니다. 방불하다는 말은 원어로 보면 “유사하게 만들어졌다(비슷하게 만들어졌다)”로서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누군가에 의해서 멜기세덱이 하나님의 아들과 유사하게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누구겠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과 아주 비슷하게 멜기세덱을 만드셔서 그로 훌륭한 모형의 역할을 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깐 멜기세덱은 하나의 좋은 모형일뿐이지 결코 예수님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이 점을 확실히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그리스도의 영원성이 바로 그분이 레위지파의 아론계열의 대제사장보다 얼마나 탁월하실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23)저희 제사장 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24)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히 7:23-24)


즉 레위지파의 아론계열의 대제사장은 영원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첫 대제사장인 아론이 죽었을 때, 그 옷을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혀서 대제사장직을 물려받게 하였고, 엘르아살이 죽었을 때는 그 아들 비느하스가 물려받게 하였습니다. 그런 식으로 쭉 가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해서 (성경과 여러 가지 역사적 자료들을 근거로) 성전파괴 전까지 약 83명의 대제사장이 직무를 수행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그분은 시작도 없으시고 끝도 없으시기 때문에 영원히 대제사장으로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 그분이 레위 대제사장보다 얼마나 탁월하고 우월하실 수밖에 없겠습니까? 이 점은 차후에 계속해서 논증이 될 것입니다.


3) 레위지파의 대제사장보다 훨씬 우월한 대제사장


그런데 본문은 영원하기 때문에 우월할 뿐만 아니라, 또한 멜기세덱이 레위 대제사장보다 뛰어난 이유는 바로 아브라함이 그에게 십일조를 바쳤고, 그에게 복 빎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레위지파는 다른 지파들로부터 십일조를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레위지파는 기업으로 받은 땅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기업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농사 대신에 성막을 섬기며 제사하고 예배하는 일을 하게 하셨고, 그 대신 다른 12지파들로부터 십일조를 받아서 그것으로 생활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레위지파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발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는 레위지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받은 십일조의 십일조를 제사장들에게 주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제사장들로 생활하게 하셨는데, 왜냐하면 제사장들은 레위지파들 가운데 특별히 선택받은 자로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에서 중재하는 사역을 하도록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같은 이스라엘이라도 급이 다르고 신분이 다르고 격이 달랐습니다. 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그들 가운데 특별히 레위지파는 하나님께 택함 받은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였고, 일반 백성들보다 더 거룩하고 높은 지위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레위인들 가운데서 제사장들은 더욱 거룩하였고, 일반 레위인들보다 더 높은 지위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거룩하고 높은 지위를 얻은 사람은 바로 대제사장입니다. 그는 온 백성들의 중보자로서 일 년 한차례 씩 지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뵙고, 백성들을 중재하는 사역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습니다. 가장 거룩하고 높은 지위인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레위지파와 제사장들이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을 때에, 그리고 율법조차 주어지지 않은 때에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고,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을 축복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바친 십일조는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승리한 전리품 가운데 십분의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십일조를 바친다는 것은 이 전쟁의 승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고, 바로 이 십일조를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를 중재하는 대제사장이 받아야 하는데, 그 사람이 바로 멜기세덱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합니다.


(7)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히 7:7)


이 말은 논란의 여지도 없이 언제나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에게 축복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우리 신약시대의 성도 간에는 높고 낮은 구별이 없습니다. 목사에게 축복권이 있다고 하는데,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목사가 주로 축복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목사도 여러분들의 기도를 먹고 살고, 여러분들의 축복을 먹고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왕 같은 제사장이기에 모두에게 축복권이 있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에는 직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지위의 높낮음은 결코 없습니다. 그러나 구약시대는 다릅니다. 지위의 높낮음이 분명히 있었고, 하나님과 관련하여 가장 높은 지위는 왕도 아니고 바로 대제사장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이 백성들을 중재하고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고 축복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백성들에게 가서는 “날 위해 좀 기도해주시오. 주님께서 내 죄를 용서해주시고 축복해달라고 당신이 좀 기도해주시오.” 결코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으로부터 축복을 받았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없이, 아브라함보다 멜기세덱이 더 높은 지위의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큰 충격을 줍니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 차지하는 위치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장차 이스라엘 민족을 통하여 이루시는 특별한 구속사역의 시작으로서 첫 번째 중요한 언약의 당사자였고, 또한 믿음의 조상으로 부름을 받았으며,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이 아브라함보다 중요한 인물은 없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반역하고 범죄했어도, 하나님께서는 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끝까지 포기치 아니하시고 언약에 신실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에서 이 아브라함의 위치는 가히 절대적입니다. 그 당시 시대에 아브라함은 구속사의 주인공이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증시하는 이를테면 제사장이요, 나라였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아브라함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하나님을 알 수 없었고, 하나님의 언약의 혜택을 누릴 수가 없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섬기려거든 아브라함에게 와서 배워야 했고, 언약의 혜택을 누리려면 아브라함 밑에 들어가서 할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창 14장에서 갑자기 혜성처럼 등장해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칭해지면서 아브라함에게 십일조를 받고 축복하는 광경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등장할 때와 같이 퇴장할 때도 갑자기 사라집니다. 이 신비스러운 인물은 아브라함 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를 중재하는 사역을 하였습니다. 이 광경 앞에서 우리가 받는 충격은 이런 것입니다. “아니, 이 신비로운 사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 당시에 아브라함보다 더 높은 지위의 대제사장이 있었단 말인가? 이렇게 중요한 인물에 대해서 창세기 저자인 모세는 왜 그렇게 침묵으로 일관하는가?” 하는 놀람과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건을 통해서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론 대제사장보다 얼마나 높고 탁월하시고 우월하실 수밖에 없는가 하는 것을 결정적으로 드러내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레위 지파의 아론 대제사장이 아무리 대단하고 높은 지위라 하더라도 그들도 바로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고, 또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멜기세덱의 축복을 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높고 우월한 정도가 아니라, 율법을 따라 세움받은 아론계열의 대제사장들도 별다른 대제사장을 통해 중재를 받아야만 하는 자들임을 말해 것입니다. 즉 자신들이 대제사장이라는 칭호를 받지만, 사실상 아무런 효혐을 내지 못하고, 그저 모형과 그림자일 뿐이며, 따라서 율법을 따른 대제사장이 아닌 별다른 대제사장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1)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12)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13)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다른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14)우리 주께서 유다로 좇아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15)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16)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17)증거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18)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19)(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히 7:11-19)


시간 관계상 이 구절들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해드릴 수는 없지만, 그 의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멜기세덱을 율법도 있기 전에 아브라함에게 보내셔서 그를 중재하게 하신 사건을 통해서 율법과 율법의 제사제도의 근본 한계를 처음부터 드러내셨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이고, 모형과 그림자로서 실체가 오면 반드시 변혁되어야 할 것임을 히브리서 저자는 못 박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저자가 오늘 본문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22)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히 7:22)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역이 진짜배기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과 제사법은 다 모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하찮게 생각한 나머지 기독교 복음 진리를 포기하고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미친 짓을 그만 두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허락된 구원과 모든 은혜 언약의 혜택들은 구약과는 비교할 수 없이 탁월하고 풍성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깊이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기독교 복음 진리를 하찮게 여기고 유대교로 돌아갈 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으로 얼마든지 돌아갈 수 있습니다. 유대교나 세상이냐 돌아가는 장소만 다른 것이지, 돌아가는 이유는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진짜배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이 큰 구원을 우리가 등한시 여기게 될 때, 우리는 세상을 돌아가든지, 아니면, 최소한 교회는 나오지만, 실질적으로는 세상을 섬기는 삶을 살든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우리가 그런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리고 히브리서 전체의 메시지를 통해서 바로 우리에게 허락된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시고, 또 그분의 사역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큰 은혜를 얻게 되었는지를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이 세상을 향해 흘러 떠내려가지 않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 깨달아야 하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어서 우리를 위해 중보사역을 감당하신다는 것입니다.


(25)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 7:25)


주님은 당신의 십자가 구속으로 우리를 온전히 구원하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완전히 사하시고, 영원히 의롭다 하셨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으로 우리를 변화시켜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구원은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신분의 변화의 구원을 시작으로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다운 거룩한 삶으로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수준의 차원에서의 구원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화되는 차원에서의 구원은 우리의 신분의 구원처럼 어느 한 순간에 확 되는 일이 아닙니다. 신앙생활 하다가 어느 한순간에 모든 것을 깨닫고 득도하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우리의 신분을 변화시키는 것은 한 사건이지만, 그러나 우리의 수준을 변화시키는 일은 결코 한 사건일 수 없습니다. 사람이 자란다고 하는 것은 초등학교 나오고, 중학교 나오고, 고등학교 나오고, 대학 나오고 해야 되는 것처럼, 우리의 성화도 죽을 때까지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의 영원성이 강조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신다는 말은 그분이 우리를 영원히 포기치 아니하시겠다는 것이고, 또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은혜를 베푸시기를 영원히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보증인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인 것입니다. 히브리서가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을 통해서 이 아버지의 사랑을 충분히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속된 말로 부부간에는 맘에 안 들면 이혼하면 됩니다. 부부가 아무리 같이 살을 붙이고 살아도 헤어지면 결국은 서로 남남이 됩니다. 형제간에도 아무리 물보다 피가 진하다고 해도, 유산문제 한번 걸리면 서로 원수 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그러나 부모 자식 간에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자식이 부모 속을 아무리 썩여도 부모는 그 자식과의 인연을 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을 그 어느 것으로도 나눌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 대하여 갖고 계시는 사랑과 우리를 향한 구원이 바로 이것이라는 것입니다. 잘하면 상주고 못하면 벌주십니다만, 그것은 남남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법, 윤리 이런 차원이 아닌, 부모 자식 간에 혈육의 관계로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못하면 아프게 때리시지만, 그 책망하시고 때리시는 것은 원한과 정죄가 아니라, 뉘우치라는 것입니다.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정신차리고 돌아와라”는 것이지, “너 한번만 더 그러면 널 내치겠다.” 이런 말 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강권적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그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궁극적으로는 구원의 완성의 자리로까지 이르게 하실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그에게 영원한 왕권을 주시고, 온 우주 만물의 주권자가 되게 하시고, 그리고 영원토록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를 위해 중보의 일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분의 사역은 절대로 실패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아직까지도 주님이 날 위해서 죽으셔서 온전히 구원하신 것으로 이제 주님이 하실 일은 끝난 것이고 이제 내가 보답해드릴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주님은 신분상 구원해놓고, 성화는 우리의 책임과 우리의 몫으로 남겨두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착각하면 안 됩니다. 내가 예수님을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붙잡고 계십니다. 내가 주님을 놓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오늘도 교회에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지금도 붙들어주셨기 때문에 그 결과로 우리가 여기 나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믿음이 잃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 기도하시기 때문에, 그리고 영원히 끝까지 일하실 것이기 때문 우리의 구원의 소망은 흔들림 없이 굳건 한 반석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바로 이 구원의 은혜의 복음 위에 먼저 굳게 서야 합니다. 우리가 게으르지 아니하고 부지런을 내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이러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그 하나님의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그 하나님을 믿는 것이 먼저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거룩한 삶으로 나아가게 하셔서 우리로 믿음과 오래참음으로 말미암아 그 인생을 꽃피우도록 인도해 가실 것입니다. 우리가 말을 안 듣고 고집을 피우면 두들겨 패서라도 여러분들을 이끌고 가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고집을 버리고 우리가 주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내 의와 열심으로 성화를 이루겠다는 교만을 버리고 겸손히 이 주님의 은혜의 통치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영원한 자비로 우리를 향해 문 열고 기다리시는 주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가 은혜의 복음 위에 굳게 서서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참음으로 열매 맺는 인생을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반드시 그렇게 우리를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의 저와 여러분들에게 충만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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