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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성경본문 히 12:1-3
성경본문내용 (1)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2)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3)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강설날짜 2013-02-03

2013년 2월 3일 한결교회 주일예배강설
히브리서 제34강

 

신앙의 경주

 

말씀 : 히 12:1-3

 

12장 1절은 “이러므로”로 시작합니다. 앞에 11장에서 믿음의 영웅들을 열거한 것을 토대로 청중들에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권면합니까? 여러 가지 권면하는 것 같은데, 결국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바로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자”라는 것입니다. 1-3절에서 여러 개의 동사가 나오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동사는 바로 “경주하자”라는 동사입니다. 이것이 주동사이고, 나머지는 분사형으로 이 동사를 꾸며주고 있고, 3절의 동사는 2절의 부연설명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의 신앙의 여정을 그 당시 원형경기장에서 벌어지던 달리기 경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배웠듯이, 구름과 같이 둘러싼 허다한 구약의 믿음의 증인들이 자기에게 맡겨진 경주를 다 잘 마쳤고, 이제 바통을 이어받은 신약 백성들인 우리가 마지막 주자로서 달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달리기 경주로 비유하는 것은 사실 히브리서에서 일관되게 나타났던 것이고 또한 사도바울도 자주 그런 비유를 말했습니다.

 

(24)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25)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26)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27)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4-27)

 

오늘 본문과 거의 동일한 맥락의 말씀입니다. 결국 히브리서 저자가 신앙생활을 달리기 경주로 비유함을 통해 궁극적으로 드러내고자 한 것은 바로 긴장감입니다. 달리기 경주는 누가 더 빠르나 경쟁하는 경기입니다. 선수가 자신의 최선을 다하지 않을 경우 그 경기에서 이길 수 없기 때문에, 팽팽한 긴장감을 가지고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야 하듯이 우리의 신앙생활도 바로 그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여정에는 얼마나 많은 어려움들과 장애물들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런 어려움과 장애물들 때문에 경주를 포기하고 완주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긴장감을 가지고서, 그리고 어찌하든지 상을 얻기 위해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끈기’와 아무리 힘들어도 참아내는 ‘인내’를 가지고서 오직 목표점을 향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자”라고 했습니다. 이 ‘인내’라는 단어가 히브리서 12장의 핵심단어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길을 경주해 감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은 인내입니다.


이것은 이 달리기 경주가 마라톤과 같은 장거리 달리기임을 말해줍니다. 단거리 경주에서는 순간적으로 힘을 폭발시키는 순발력이 중요하지만, 마라톤에서는 순발력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끈기와 인내가 중요한 것입니다. 보통 마라톤을 하면 후반부로 갈수록 힘들지만, 특별히 마의 구간이라고 하는 30km 전후와 그리고 40km 전후에 이르게 되면, 몸이 한계에 이르면서 더 뛰다가는 죽을 것만 같고, 그래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된다고 말합니다. 그때 그 고통을 참아내는 것이 마라톤을 완주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생활도 그러한 인내와 끈기가 필요한 장거리 마라톤과 같습니다. 그래서 3절에서 말하기를 “(3)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경주를 하다보면 힘들기 때문에 지치고 피곤하여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백성들은 아직 약속의 성취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분이 오실 것을 바라보면서,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다면, 우리는 그분을 소유하고 있고,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했지만, 그것이 눈에 보이게끔 소유하고 도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도리어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은 어려가지 어려움과 고난과 박해와 죄의 유혹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구약백성들처럼 믿음으로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면서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이러한 어려움들을 끝까지 참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신앙의 경주를 끝까지 해나갈 것입니까? 3가지의 분사가 설명해줍니다. 첫째로 우리가 소유하고 있습니다. 한글성경에는 그냥 “있다”고 표현하고 있지만, 원어로 보면 ‘소유하다’라는 단어입니다. 히브리서의 반복되는 중요한 표현중 하나가 바로 “우리가 소유하고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다.”라는 표현입니다. 앞에서는 “이러한 대제사장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라고 하여 히브리서 수신자들을 격려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우리가 “구름과 같이 우리를 둘러싼 믿음의 증인들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구름 같다”라는 말은 “허다하게 많다”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인용된 아벨서부터 해서 아브라함, 모세, 무명의 믿음의 인물들까지, 수많은 구약의 믿음의 증인들이 자신들의 신앙의 경주를 완주하고 이제 우리를 둘러싸서 우리를 응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경주를 하면서 우리 앞서 믿음의 길을 걸어간 수많은 영웅들을 생각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천로역정에 보면, 크리스찬이 홀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 앞이 캄캄하고, 주위에서 귀신소리가 나고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나서 너무나 무서워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영적 암흑기로서 그리스도인이라면 다 경험하는 것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고,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고, 질병이 오고, 재정적으로 어려움이 임하고, 친구들도 떠나고, 나 혼자인 것만 같은 생각이 들고, 이 고난이 끝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때 마귀가 와서 크리스찬에게 역사합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주고, 하나님이 도우시지 아니하신다는 생각을 주고, 하나님이 버리셨다는 생각을 주고,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생각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서 소리가 들리는데, 한 성도가 앞서가면서 찬송을 부르는 소리를 듣습니다. 여기서 그가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나 혼자 이 어려움을 당하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가 주는 위로입니다. 우리 옆에는 함께 이 길을 걸어가는 동역자들이 있고, 또 이미 그 길을 걸어갔던 수많은 믿음의 영웅들이, 구름과 같이 허다한 믿음의 사람들이 이 길을 이미 통과하였고, 결국 승리하여 지금 하늘에서 우리를 지켜보며 응원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될 때에, 우리는 위로와 더불어 도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구름과 같이 허다한 믿음의 선조들은 바로 이 길이 승리와 영광을 향하는 틀림없는 길임을 우리에게 증거하는 증인들이 되어 우리의 믿음을 독려하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난을 뚫고 나아간 구름과 같이 허다한 증인들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늘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벗어 버려야 합니다. 무엇을 벗어버려야 하느냐 하면,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달리기를 하는 선수라면 달리기에 간편한 복장을 갖추어야 합니다. 간편한 정도가 아니라, 요즘에는 스포츠는 과학이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로, 공기마찰을 최소화하는 최첨단 기능성 옷을 개발해서 입고, 신발도 가장 빨리 달릴 수 있게 그 선수에 최적화된 신발을 만들어 신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이 신앙의 경주를 하는데 모든 것이 최적화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데 우리의 삶의 모든 것들을 최적화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경주를 하는데 모든 것들이 최적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경주에 도움 되는 것들은 백방으로 강화하고, 방해하는 모든 것들은 다 벗어버려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려야 합니다. 여기서 모든 무거운 것은 아마도 뒤에 얽매이기 쉬운 죄를 또 다르게 표현한 것 같습니다.


곧 죄는 무거운 것이고, 또한 얽어매는 것입니다. 여기서 “얽매이다”라는 단어는 원어로 보면, “괴롭히고 방해하다. 끝까지 달라붙어서 못 가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무겁고 얽어매는 죄란 비유하자면 운동선수의 발에 채워져 있는 무거운 쇠사슬을 생각하면 됩니다. 그렇게 되어서는 제대로 경기해 나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는 바로 우리의 성화의 길에서 그런 것입니다. 죄의 속성에 대해서 우리가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죄는 무거운 것이고 얽어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롬 7:23)라고 말했던 것처럼, 죄의 목적은 우리를 사로잡아 지배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쇠사슬로 묶어 얽어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우리를 지배해서 결국 얻고자 하는 최종적 목표는 바로 사망입니다.

 

(15)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13)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3)

 

우리로 신앙의 길을 포기하게 하고, 사망에 이르도록 하는데 죄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신자의 마음을 지배하기까지 과정이 있습니다. 단번에 어떻게 우리를 지배하고 얽어맬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떤 과정을 통해 신자가 죄에 빠지게 되고, 죄에 빠지게 되면, 결국 어떻게 되는지, 그래서 왜 죄에 얽매이게 되는지, 그 과정을 생각해야 합니다.


먼저 죄는 속임과 유혹으로 다가옵니다. 죄에 있는 쾌락을 강조하고,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나 공의의 심판에 대해서는 무감각하게 해서, 죄를 가벼이 여기게 합니다. 그리고 복음과 은혜의 교리를 오용하게 만듭니다. 죄를 지어도 다시 회개하면 된다고 속삭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지성이 속아서 죄가 우리 마음에 조금이라도 발 디딜 틈을 주게 되면, 죄는 얼른 들어와서 자리 잡고, 발 디디는 정도로 만족하지 않고, 계속 성장합니다. 죄가 잉태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착상되어서, 우리 안에 있는 정욕으로부터 영양분을 계속 공급받아 점차로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 전체가 죄의 구조로 구축되도록 합니다.


우리 안에 모든 선한 마음을 몰아내고, 은혜의 구조를 아주 약화시킵니다. 뻐꾸기는 알을 낳고 키울 때 자기가 키우는 것이 아니라, 남의 새둥지에 몰래 알을 낳고 갑니다. 그러면, 이 알이 제일먼저 깨고 나와서, 본능적으로 옆에 있는 그 어미새의 알들을 다 둥지 밖으로 발로 차서 떨어뜨리고, 자기 혼자 그 어미새로부터 음식을 받아먹고 자랍니다. 완전히 기생충 같은 생존방식입니다. 그리고 다 크면 미련 없이 떠나는 것이죠. 죄는 우리 영혼에 그러한 일을 합니다. 죄는 들어와서 우리의 영혼을 약화시키고, 영혼의 위로와 평강을 앗아가는 일을 합니다. 그전에 가지고 있었던 영혼의 모든 활력을 들이 삼켜 버리고 성령을 소멸하며, 영혼을 약하게 만들어 신앙의 의무들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영적인 눈이 어둡게 만들어서 부주의하게 만들고, 또 영적인 게으름에 빠지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서 몰아내고, 하나님께 싫증을 내게 하며, 세상의 다른 것을 사랑하게 합니다. 그래서 세상일에 몰두하게 하고, 육욕적인 방탕함과 허영과 미움과 시기 질투와 음란한 마음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는 하늘 위의 먹구름과 같습니다. 죄는 영혼의 얼굴 위를 뒤덮는 두꺼운 구름이 되어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의 모든 광선을 차단합니다. 구원의 확신이나, 구원의 기쁨이 사라지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의식을 앗아가 버립니다. 죄는 잡초와 같습니다. 날마다 이 죄의 잡초를 뿌리 뽑지 않으면, 계속 자라서, 온 밭을 가득 메워 결국에는 은혜의 나무가 자랄 여유가 없게 만들고 결국에는 열매 맺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죄가 우리 마음에 은혜를 몰아내고, 서서히 장악하기 시작하면, 그다음부터는 강압합니다. 강제로 잡고 이끌어갑니다. 적극적으로 유혹하여 죄를 범하도록 충동질합니다. 그래서 정욕을 자극해서 범죄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범죄가 반복되면, 죄책감이나, 죄에 대해 항거하고자 하는 모든 생각들을 내려놓게 되고, 유혹하는 즉시로 넘어가고, 완전히 목 잡혀서 죄가 오라고 하면 오고, 가라고 하면 가고 하는 차원으로 타락하게 됩니다. 이것이 죄의 지배하에 있게 되는 상태입니다. 죄에 이렇게 사로잡히게 되면, 결과적으로 죄에 대한 광기어린 열망을 갖게 되고, 발정 난 암소처럼 자신의 육체의 정욕을 채우기 위해 헐떡거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데로 적극적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런 상태가 되면 거의 죄와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죄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3:13에서는 강퍅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13)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히 3:13)

 

죄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 하루라도 죄를 가만히 놔두면 우리를 그렇게 얽어매어서 매우 절망적이고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를 얽어매어서 신앙의 길을 가던 길을 멈추게 하고, 아니 멈추는 정도가 아니라, 사망의 길로 적극적으로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신앙의 경주를 끝까지 해나가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 안에 죄를 없애버려야 합니다.

 

(11)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5)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돈에 대한 사랑, 세상에서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집착, 세상의 즐거움들과 세상의 죄의 유혹들을 날마다 벗어버려야 합니다. 우리 힘으로 죽일 수 없습니다. 성령의 은혜로 죽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이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고서 세 번째로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2)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여기서 ‘바라보다’라는 단어는 ‘아포론테스’인데, “다른 것을 보고 있는 상태인데, 거기서 돌이켜서 무언가를 바라보고 주의 깊게 생각하다.”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이 세상을 보던 데서 돌이켜서 눈을 들어 하늘에 계신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선수가 경주할 때, 시선은 항상 코스의 종착지를 향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경주의 종착점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시선을 고정시켜야 할 그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이십니다. 이 구절이 또한 난해구절입니다. 여기서 “주”는 일반적인 ‘Lord’ 또는 ‘Master’를 의미하는 ‘퀴리오스’라는 단어가 아니라, ‘아르케고스’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에 대해서 이미 2:10에서 배웠습니다.

 

(10)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히 2:10)

 

이 단어는 사실 네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 통치자, 지도자, 왕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주된 뜻은 “선구자, 개척자”라는 뜻입니다. “앞서 나아가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서, 세 번째로, 단순히 앞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앞서 나가서 대신 싸워서 뒤에 있는 무리들을 구원하는 챔피언을 뜻합니다. 이것을 우리가 전에 배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중요한 뜻이 있는데, 그것은 “근원, 기원, 시작, 창조자, 창시자”를 의미합니다. 2장에서는 문맥 자체가 워낙 사단 마귀와의 전쟁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는 맥락이었으므로 챔피언이라고 확실하게 해석할 수 있지만, 오늘 12장 2절에서는 어떻게 보아야 할지 상당히 까다롭습니다. 어느 학자의 견해도 일치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적용도 완전히 달라집니다.


일단 이 단어와 함께 사용된, “온전케 하시는 이(텔레이오테스)”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마지막의 의미가 보다 타당해 보입니다.

 

(14)우리가 시작할(아르켄)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텔루스)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히 3:14)
(3)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아르켄)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텔로스)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히 7:3)

 

이 구절들에서 ‘시작’과 ‘끝’은 12:2의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 라는 단어의 어근에 해당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믿음의 시작(근원)이요 끝이 되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알파요 오메가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1세기 당시에 제우스신에 대한 묘사 중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똑같은 단어를 사용해서 “제우스 신은 만물의 기원자요 최종자이다.” 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바로 우리 안에 믿음을 만들어내시는 믿음의 창시자요 근원이시고, 또한 우리가 믿음을 완성하고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또한 다르게 볼 수 있는 해석이 있습니다. 보다 많은 학자들이 취하는 견해인데, “예수님은 믿음의 선구자(개척자)요 믿음의 완성자(완전자)”라는 뜻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 믿음을 일으키시고 완성하신다는 개념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우리 앞서 믿음이 무엇인지를 친히 모범을 보여주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신구약 백성들 앞서서 믿음의 길을 걸어가셨고, 또한 홀로 진정한 믿음의 사람으로 사셨습니다. 그래서 완전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이 입장이 타당한 이유는 오늘 본문 문맥 자체가 그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이 바로 그 앞에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시고 인내로 신앙의 경주를 믿음으로 달려감으로써 결국 하늘 보좌 우편에 이르는 승리를 이루신 분으로서 우리의 믿음의 최상의 모범이요 모델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입장이 맞는 것 같습니까? 둘 다 맞는 것 같습니다. 존 오웬 목사님께서 아주 적절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단순한 모범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의 여정에서 성공하리라는 모든 소망과 신뢰와 확신을 그리스도께 두어야 함을 말한다. 그를 신뢰하는 이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그의 모범으로 말미암아 아무런 은혜도 받지 못할 것이다.”

 

즉 예수님을 모범으로만 보면, 그의 모범은 또 하나의 도덕주의가 되고, 또 하나의 율법이 되어 우리를 절망가운데로 몰아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되, 두 가지 차원에서 동시에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셔서 모든 은혜의 공로를 마련하시고, 또 성령을 우리 안에 부어주셔서, 그 성령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주님을 믿게 하시고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음을 시작하게 하신 분이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사 반드시 우리의 믿음을 온전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주권적인 손 안에 있음을 믿고, 주님께 모든 소망을 두고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연약하고 부족한 내 자신만 보면 도대체 소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불안불안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바라보면, 우리는 확신 가운데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 사랑 안에 거하라 그리하면 열매를 많이 맺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랑 안에 거할 때 우리가 이 신앙의 경주를 완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앞에 박해와 고난과 어려움을 보지 말고, 우리의 최고의 모범으로서 우리 앞서 믿음의 길을 걸어가신 그분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분이 무엇을 바라보시면서 어떤 고난을 헤쳐 나가셨고, 결국 어떻게 되셨는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눈앞에 있는 즐거움을 바라보시고 십자가 고난을 참아내셨습니다. 이 눈앞에 있는 즐거움은 일차적으로는 보좌에 앉게 될 상급을 말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궁극적으로 주님이 즐거워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런 보좌 우편에 앉는 상급 자체를 기뻐하실 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워낙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보좌 우편에 앉게 될 상급을 즐거워하신 이유는 자신이 구속을 완성하시고 승귀하여 보좌 우편에 앉으심으로써 자기와 하나로 묶은 자기 교회를 구속하시고 그들을 하나님 나라의 황태자들로 삼으실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것을 즐거워하셨고, 우리 교회를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참아내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를 하늘보다 높이시고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셔서 그를 높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 허락한 이 모든 상급을 그분과 연합한 교회에게도 주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17)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18)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7-18)

 

더욱이 우리는 주님과 같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이어받을 자로만 부르신 것이 아니라, 또한 주님 가신 고난의 길을 따라가는 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눈앞에 보이는 세상의 유혹과 즐거움을 바라보지 말고, 주와 복음을 위해 살 때 당하는 어려움과 박해와 고난을 바라보지 말고, 오직 우리 앞서 가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3절에...

 

(3)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 때때로 피곤하고 낙심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자기를 거역한 일을 참으신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서 자기를 거역한 죄인들은 아마도 유대인들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왕이신 예수님을 거역하여 십자가에 못 박았고, 예수님은 그 박해를 참아내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생각해야 하는데, 여기서 ‘생각하다’라는 단어는 앞에서 ‘생각하다’라는 단어와 다른 단어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도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에 나온 ‘생각하다’라는 단어와 어근이 같은 단어입니다. 역시 ‘계산하다’라는 기본적인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계산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계산을 통해서 “예수님은 나를 죄와 심판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그 십자가의 참혹한 고통과 수치도 마다하지 않고 참으셨는데, 나는 주님을 위해서 이 조그만 어려움도 당하기 싫어하고, 주와 복음을 위해 수치당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구나...” 그렇게 우리의 불신앙과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를 알아서, “주님이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으니, 이제는 내가 주님을 위해서 죽을 차례다.” 그렇게 일사각오로 신앙의 경주를 해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구름과 같이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을 보고 도전받게 하시고, 그래서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면서 신앙의 경주를 인내로써 감당할 수 있게 하여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 주와 복음으로 인해 당하는 고난과 부끄러움을 참고 살아감으로써 하나님 나라가 극치에 이를 때에 승리의 영광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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