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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성경본문 히 12:4-13
성경본문내용 (4)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5)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6)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7)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8)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9)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10)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11)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12)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13)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강설날짜 2013-02-10

2013년 2월 10일 한결교회 주일예배강설

히브리서 제35강


징계를 참으라


말씀 : 히 12:4-13


우리가 우리 앞에 주어진 이 신앙의 경주를 경주해가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 히브리서 저자는 세 가지를 말했습니다. 첫째는 우리에게 구름과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된다는 것과 두 번째로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는 죄를 벗어버리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면서, 안으로는 내 안에 있는 죄의 정욕과 게으름과 나태함과 투쟁하면서 또 밖으로는 핍박과 박해와 어려움들을 정면으로 뚫고 전진해 나아가면서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것이 땅 집고 헤엄치기라면 히브리서 저자가 인내로서 경주하자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장거리 마라톤 경주처럼 지치기 쉽고, 때로는 포기하고 싶을 만큼 고통스런 상황을 직면하게 하는 경주인 것입니다.

 

그래서 지치고 낙심이 될 때, 우리는 죄인들이 당신을 거스려 말한 모든 부당한 것들을 참으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기까지 고난을 감내하신 예수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이 세상에서 극심한 환란을 당하고 고난을 당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을 때는 하나님의 위로가 있고, 힘을 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은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수치스럽고 고통스럽게 십자가에 매달리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도 철저히 버림받아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 부어지는 저주의 죽음을 죽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 하는 것이 너무 힘들고 지치고, 그래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 십자가에서 피 흘리기까지 인내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1) 죄와 피흘리기까지 싸우라

 

더욱이 히브리서 저자는 수신자들을 향해서 말합니다. 예수님은 피 흘리시기까지 그렇게 싸우셨지만, 너희들은 피 흘리기까지 싸우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4)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이 구절은 두 가지로 해석됩니다. 첫 번째 해석은 이 피 흘리는 것을 순교로 보는 것입니다. 너희가 아직 신앙을 지키기 위해 피를 흘려야 하는 (순교를 당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깐 여기 죄와 싸운다고 했는데, 여기서 의미하는 죄는 핍박과 박해 앞에서 뒷걸음질 치며 신앙을 포기하고 배도하는 죄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피를 흘릴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 아직 오지 않았지만, 곧 올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좋은 해석은 이 죄가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다시 언급하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즉 핍박과 박해 앞에서 뒷걸음질 치며 신앙을 포기하고 배도하는 죄를 포함해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행하는 모든 죄를 말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신앙의 경주를 해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와 더불어 싸워야만 한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주 힘든 것이고, 어려운 것인데, 그것이 없이는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수신자들이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삶이 없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병적인 유아상태에 오래도록 머물러 있으면서 죄에 굴복하고 죄에 얽매이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신앙의 경주를 가로막는 가장 커다란 대적은 죄입니다. 밖에서 오는 핍박이나 박해, 고난, 질병, 경재적인 어려움, 이런 것들은 물론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어서 믿음을 포기하게 하는 요인이 되기는 하지만, 그러나 믿음의 불을 꺼트리고 믿음을 꺾는 근본적인 요인이 될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사람들은 톱으로 켬을 당하고 돌로 침을 당하는 그러한 극심한 환란과 핍박 앞에서도 믿음의 불이 꺼트려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믿음이 찬란하게 빛났습니다.

 

마음속에 굳은 믿음이 있으면, 밖에서 아무리 극심한 환란과 핍박이 와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은 그런 상황 속에서 더욱 그 믿음의 불이 활활 타오릅니다. 고난과 핍박의 때에 교회는 더욱 뜨거운 신앙을 가졌고, 더욱 순결했습니다. 그러나 죄는 다릅니다. 죄 바깥에서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 안에서부터 역사하여 우리의 믿음 자체를 흔들고 꺾어놓는 것입니다. 우리가 배웠듯이 우리가 죄를 지으면,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선한 것들을 몰아내고 우리를 사로잡아 우리로 마음에서부터 하나님을 미워하여 대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반드시 벗어버리는 삶이 없이는 이 경주에서 승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죄와 “싸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싸우다”라고 하는 말이 “안타고니조마이”라는 단어인데, 특별히 “피 흘리며”라는 말과 같이 사용되어서 이것이 단순한 싸움이 아니라, 1세기 로마 당시 원형경기장에서 서로 칼을 들고 싸우는 ‘글레디에이터’를 연상케 합니다. 오직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 상대를 죽여야만 하는 싸움인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혼신을 쏟아 부어서 싸워야 하는 싸움을 말합니다. 오늘날 격투기는 심판이 있어서 중간에 한쪽이 일방적으로 얻어맞아서 목숨이 위태롭겠다 싶으면 경기를 끝내서 그 사람을 살리지만, 옛날에 글레디에이터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무슨 하얀 수건을 던져서 항복하는 것이 없고, 한 사람이 피를 흘리고 죽어야만 끝이 나는 싸움입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양보, 휴전, 타협, 합의... 이런 것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고 하는 절체절명의 정신을 가지고 혼신의 힘을 다해서 싸우고, 완전히 상대방을 죽이기 전까지는 결코 안심하지 않는 그런 싸움을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죄와의 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피는 생명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목표로 신앙의 경주를 해나가기 위해서는 생명을 걸고 죄와 싸우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 식으로 말하면, 날마다 영으로서 죄를 죽이는 삶,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손에 칼을 쥐고서 우리 죄에 대해서 단호하게 물리치면서 싸우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많은 경우 우리의 영혼에 은혜가 없고, 영적으로 메마르고 핍절한 삶을 살고, 영적 침체 속에서, 성화의 진전이 없는 그런 삶을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를 인식하고 싸우기는 싸우는데, 피 흘리면서까지 싸울 생각을 안 하는 것입니다. 죄를 잘라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심정으로 “반드시 싸워서 이겨야 되겠다. 그래서 영혼의 자유를 얻어야겠다.” 그런 단호한 결의가 우리 가운데 없으니깐, 그냥 조금 싸우고 갈등하다가 결국 거기에 넘어지고, 다시 하나님이 은혜 주셔서 겨우 벗어나면, 또 다시 죄와 갈등하다가 넘어지고, 그것을 계속 반복하는 것입니다. 성화의 진전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단호한 결의로 힘을 다해 싸운다고 해서 죄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죄와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와 더불어 자기 생명을 걸고 싸우고자 하는 자들만이 이 하나님께 매달려 부르짖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결국 싸워야 되겠다는 결의가 부족한 것은 우리의 영적인 부주의에서 옵니다. 여러분, 지금 사방에서 폭탄이 터지고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죽어나고 있는 전쟁터에서 여유롭게 고스톱이나 치며 웃고 떠드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전쟁터에 있는 사람은 오직 적을 무찔러서 내가 사는 것 외에는 더 절박한 가치는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오직 거기에만 혼신을 기울여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으로 부주의함에 빠지면, 자신이 그러한 상황에 자신이 처해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안일과 나태함에 빠져서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지 않고, 결국 죄에 굴복하게 되어 은밀하게 죄를 즐기면서 죄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의 길에서 이탈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가장 절박한 사안이 무엇입니까? 돈 문제입니까? 건강 문제입니까? 직장문제입니까? 결혼문제입니까? 아닙니다. 죄와 싸워 이길 것이냐 아니면 져서 죄에 잡아먹힐 것이냐, 그래서 신앙의 길을 벗어나 멸망의 길로 갈 것이냐, 거기에 우리의 영혼의 모든 운명과 사활이 걸려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고, 정신을 차리고서 이 죄를 대적하여 싸우되, 자기 생사를 걸고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영적전투를 힘써 해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5절부터는 하나님의 징계하심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갑자기 뜬금없이 하나님의 징계에 대한 말씀이 나오는 것 같지만, 자연스러운 수순입니다. 지금 히브리서 수신자들은 영적인 탈진에 빠져서 신앙의 경주를 멈추고 뒷걸음질 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계속적으로 “너희가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고 있지 않다”고 하면서 꾸짖고, 또 “그렇게 뒷걸음질 치면 다시 회개할 수 없는 타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고 계속해서 통렬한 경고를 해왔습니다. 그것은 히브리서 저자의 꾸짖음과 경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꾸짖음과 경고입니다. 그리고 꾸짖기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 가운데 사는 삶을 고집할 때에는 하나님이 그 인생을 간섭하셔서 때리심으로써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리를 고치셔서 신앙의 경주를 계속 해나갈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대우하시고 사랑으로 징계하신다는 것을 깊이 알아야지만, 그러한 하나님의 경고와 책망과 징계를 통해서 신앙이 회복되고 성장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실 때에 두 가지로 나아가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5)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2) 징계를 경히 여김


첫 번째는 경히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책망하시고 꾸짖으시고 징계하실 때에, 그것으로 인해서 정신을 차리고, 그 징계를 무겁게 받아들이고, 깊이 진지하게 생각하여서, 죄에서 돌이키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① 하나님이 징계하시는데도, 그것이 하나님의 징계임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


하나님의 징계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환경을 간섭하시고 섭리하심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물질을 치시거나 혹은 질병에 들게 하시거나 혹은 의지하고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덜 의지하게 만들던 그런 자기 자신의 의지하는 사람들을 데려가시거나, 관계가 깨트려지게 하시거나...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치십니다. 그렇게 치시는데, “그것이 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냥 여차여차해서 이렇게 일이 잘못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일을 만든 사람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이것이 징계를 가볍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우리가 배우기를 우리에게 무슨 잘못이 생기거나 안 좋은 일이 생길 때 그것이 내 죄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고 배웠기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람직한 자세가 아닙니다. 우리의 바람직한 자세는 무슨 일이 잘못되거나,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우리는 제일 먼저 그것이 나의 죄에 대한 징계가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인과응보적으로 우리의 죄에 대해서 복수하시는 분도 아니시고, 또 모든 고난이 죄 때문에 오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세 가지의 종류로 찾아옵니다. 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이든지, 아니면 죄와 상관없이 우리를 성숙시키시기 위해 주시는 고난이든지, 주와 복음을 위해서 받는 고난이든지 셋 중의 하나입니다. 세 번째 것은 논외로 하고, 앞에 두 가지는 결국 우리의 성화와 관련된 것입니다. 죄를 고집할 때 당연히 하나님이 때리시지만, 우리가 죄를 적극적으로 짓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의 성화와 성숙을 위해서 고난을 주십니다. 예를 들어서 바울이 병에 걸렸을 때, 그것이 그가 범죄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자고하지 않도록 주신 사단의 가시였습니다. 즉 바울의 성화와 유익을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욥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욥이 그렇게 극심한 고난과 환란을 당한 것이 그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욥을 칭찬하시기를 “그같이 악을 떠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순전한 자는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단의 시험으로 말미암아 애매히 고난 받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고난의 긴 터널 끝에서 욥이 회개하고, 그의 신앙이 “귀로만 듣던 신앙”에서 “눈으로 보는 신앙”으로 성숙되어졌다는 것입니다. 역시 성숙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나 욥의 경우는 엄밀히 말해서 죄에 대한 징계라기보다는 성숙을 위한 훈련인 것입니다. 물론 이 경우도 엄밀히 말하면 우리의 죄와 전적으로 상관이 없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미성숙은 죄를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징계”라고 하는 단어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미성숙한 우리를 성숙시키시기 위한 훈련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생애 가운데 갑자기 안 좋은 일이 생겼을 때, 그 모든 것이 우연의 일치로 어쩌다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우리의 성숙과 유익을 위해 계획된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을 알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회개할 죄가 없는지, 그리고 고쳐져야 할 미성숙한 모습이 없는지 우리는 우리 자신을 깊이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과응보적으로 복수하시는 분은 아니시지만, 인과응보적으로 징계하시고 훈련하시는 분이심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② 징계인 것을 알면서도 죄를 고집하는 경우


두 번째로 징계를 가볍게 여기는 경우는 본인이 하나님이 징계하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죄를 고집하는 것입니다. 자녀들도 보면, 딱 버티고 앉아서 “패라, 니 자식이 죽지, 내 새끼가 죽냐?...” 그러고서 버티는 아이들은 많이 맞습니다. 그러나 한 대만 때려도 잘못했다고 싹싹 비는 아이들은 덜 맞습니다. 지혜로운 것은 하나님이 딱 때리셔서 “뭔가 아니다” 하는 생각이 들면 정신 차리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갈 때까지 가보자” 그러고서 버티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미련한 것입니다. 계속 맞는 것입니다. 이사야 1장에 보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하도 얻어맞아서 성한 데가 없는 것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어려움이 임할 때에 그것이 하나님의 징계라는 확신이 들면, 그 징계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무겁게 받아들여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3) 낙심하지 말아야 함


그리고 두 번째로 우리가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이 낙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책망과 징계를 너무 지나치게 무겁게 받아들인 나머지, 그것 때문에 오히려 뒤로 물러가 낙심해서, “하나님이 나를 노여워하시고 미워하시고 복수하시는가보다”, 그렇게 절망에 빠져서 스스로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상태로 떨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그렇게 연약합니다. 교회 목사님의 책망만 들어도, 딱 드는 느낌이 “목사님이 나를 미워하시는가보다...” 딱 그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징계와 책망이라는 것 자체가 화난 얼굴로 사납게 몰아붙이고 때려서 고통을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분노와 노여움의 표정을 보고 “아... 이 사람이 나를 공격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지, 그 이면에 있는 사랑을 깨닫고 “아... 이 사람이 나를 정말 사랑하구나”하고 생각할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더욱이 우리가 뒤로 물러가고 불순종하고 살면서 많은 죄를 짓게 되면, 우리 내면에서부터 수많은 송사가 있게 됩니다. 그렇게 죄짓고 살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자 할 때 우리의 양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단 마귀가 송사하고, 율법도 우리 마음을 송사하는 것입니다. “봐라~! 네가 그렇게 살았으니 하나님이 너를 이렇게 치셨다. 하나님이 너를 미워하여 버리셨다. 그런데 무슨 낯짝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냐? 너는 이제 희망이 없다.” 그러한 절망적인 생각을 심는 것입니다. 그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그런 고통을 겪게 될 때,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두 가지가 있는데,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자포자기의 마음으로 더 죄를 향해 달려가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전자보다 후자를 선택하기가 쉽습니다. 왜냐하면 죄의 낙이 그러한 번민과 고통을 잠시 잊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죄로 인해 절망에 빠진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더 깊은 죄의 수렁에 빠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징계를 가볍게 여기나, 너무 무겁게 받아들여서 낙심하나, 결과는 똑같습니다. 죄 가운데 거하는 삶을 지속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야단을 맞을 때, 즉시로 자기 죄를 깨닫고, 그 죄를 눈물로 참회하면서, 매를 맞은 아이가 울면서 아빠 품에 안기듯, 다시 하나님의 품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늘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바로 징계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4) 징계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


징계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입니다.


(6)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7)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8)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우리들이 자녀들을 길러보면 알지만, 아이들을 징계 없이 기른다고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 아이가 아주 어린 아이라고 할지라도 이미 그 아이의 마음속에는 자기 멋대로 자라려고 하는 그런 악한 본성이 남아있기 때문에 만약에 그 아이를 제멋대로 자라도록 내버려두면 아주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나무도 보면 같은 종이라 하더라도 그 굵기가 똑같고 키가 같아도 그 모양새에 따라서 가격이 천차만별입니다. 똑같은 소나무라도 산속에 쳐 박혀서 제멋대로 자란 나무는 그 모양새가 사납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사람이 돌보든지 해서, 예쁘게 자란 나무는 값이 보통 비싼 게 아닙니다. 아무렇게나 자란 나무는 잘라서 땔감이나 쓰지만, 잘 자란 나무는 정원에 심겨져서 드나드는 수천수만 명의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돼지를 징계하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까? 밥시간이 되어서 사료를 갖다 주면, 그것을 서로 먹겠다고 제일 먼저 달려온 힘 쌘 놈이 다른 놈들 못 들어오게 발을 돼지 밥통에 집어넣고 혼자서 막 퍼먹습니다. 그렇게 해도 주인이 그 돼지를 불러다가 “야! 네가 진짜 돼지로서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냐? 그런 이기적인 삶을 살면서 과연 네가 내 돼지라고 할 수 있느냐?” 그러면서 막 볼기를 때리고, 그래서 두 손 들고 무릎 꿇고 있는 돼지를 본적이 있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인이 가지고 있는 계획과 관련이 있습니다. 주인이 가지고 있는 계획은 근수 채워서 빨리 삼겹살집에 팔아버리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돼지를 향한 계획은 인물을 예쁘게 만든다든지, 교양 있는 돼지를 만든다든지... 그것이 아니라, 그냥 근수 채워서 삼겹살집에 보내는 것이 계획의 전부입니다.

 

그러나 부모에게 자식은 다릅니다. 부모는 자식을 자구 때리고 징계합니다. 왜냐하면 자녀를 키우는 목적이 근수 채워서 팔아먹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사람으로 잘 키워서 이 험한 세상을 잘 해쳐나가고, 이 사회와 나라에 유익을 줄 수 있는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키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제멋대로 하도록 놔두어서는 안 되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근실히 징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자녀로 낳으신 것에는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격을 성숙시키셔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로 세우사 이 땅에서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고, 또 장차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잇게 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대한 목적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근실히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징계는 내가 하나님 앞에 짐승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임을 나타내주는 증거입니다. 징계가 없다면 우리가 친자식이 아니요, 사생자라는 것이고, 더 나아가 하나님 앞에서 짐승인 것입니다.

 

아삽의 시편(시 73편)을 보면, 아삽이 처음에는 아주 불평을 합니다. 악인들이 너무 형통한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거기 보면 그들은 건강하고, 살면서 어떤 재난도 없고, 부하고,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이 평안하게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며 산다고 하는 자기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징책은 벌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아삽이 그로 인해서 거의 실족할 뻔 했는데, 그 결말을 보고서 이 아삽이 크게 깨닫습니다. 아삽은 그들의 마지막을 보고서 깨닫기를, “그들을 참으로 미끄러운 가운데 두셨구나...” 하는 것입니다. 도살하기 전까지 사육사가 돼지한테 얼마나 잘해줍니까? 풍족하게 먹을 것을 주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내버려둡니다. 그것이 정말 돼지를 사랑해서, 돼지를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살할 때를 위해서 살찌우시는 것입니다. 죄인들의 형통함이 바로 그와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자녀로서 사랑하시고, 또 그들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결코 돼지와 같이 내버려두실 수 없습니다. 우리를 향해 가지신 그 원대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근실히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아삽이 그것을 깨닫고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진 꿈이 무엇입니까? 혹시 이 세상에서 어찌하든지 험한 꼴 안 보고, 평생 건강하게, 부족함 없이, ‘웰빙’하면서, 자식들 낳고 알콩달콩 행복하게 사는 것이 우리의 꿈입니까? 이 세상에서 사업 잘하고, 돈 많이 벌어서 자기 꿈을 이루는 것이 인생의 목표로 삼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이 말하자면 이 세상에서 돼지로 살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우리 안에 다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자녀인 까닭에 우리를 그렇게 살게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애초에 그런 꿈을 버려야 합니다. 주님을 믿고 신앙인으로 삶을 시작한 것 자체가 고생 시작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신앙이 제대로 서 있어서 믿음으로 살아도 주와 복음 때문에 고난 받고, 신앙이 없어서 방황하면서 죄 지으며 살아도 하나님이 때리셔서 고난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살아도 고난, 저렇게 살아도 고난 받는 운명으로 부름 받은 것이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차피 고난 받는 삶으로 부름 받았기 때문에 자기 죄 때문에 고난 받기보다도 주와 복음을 위해 고난 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볼 때, 그리스도인은 참으로 불쌍한 존재인 것입니다. 주와 복음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핍박을 받고, 자기 죄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도 맞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부활이 없으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고 죽음 이후에 부활은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잠시잠간이요, 고난도 잠시잠간이지만, 그러나 그 이후에는 영원한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눈으로도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한 그런 놀라운 영광을 우리를 위해 예비해두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누릴 영광을 소망하면서 우리가 이 땅에서 고난 받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9)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10)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육신의 아버지는 자기 뜻대로(판단대로, 마음대로) 징계합니다. 학교에서 야단을 맞을 때, 가장 서러울 때가 언제냐 하면, 다른 사람이 잘못했는데 내가 대신 두들겨 맞을 때, 그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부모가 우리를 징계할 때도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불공평한 경우도 참 많습니다. 어떤 날은 뭘 잘못했는데 반 죽여 놓더니, 어떤 때는 부모가 기분이 좋아서, 동생이 똑같은 짓을 했는데, “그럴 수도 있지...” 그러면서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자신이 받은 징계가 부당하다고 생각하고 부모를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일관성이 없는 모습이 우리 육신의 부모의 징계입니다.

 

뿐만 아니라, 육신의 부모의 징계에는 어느 정도 보복과 폭력이 섞여 있습니다. “아이들 잘되라고 때린다” 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솔직히 말하십시다. 사실 때리는 그 순간에는 보복하는 마음이 내안에 없다고 말할 부모가 누가 있습니까? “나를 괴롭히고 속 썩였지. 한번 맞아봐라” 그러고 때리는 것입니다. 부모의 징계는 어느 정도 복수의 개념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부모이신 하나님 아버지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우리의 유익을 위해 복수가 아닌 오직 사랑으로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기 뜻대로 징계하는 부모에 대해서도 우리가 달게 벌을 받고 부모를 공경하여 순종하는데, 하물며 우리가 더욱 하나님께 복종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11)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징계라고 하는 것은 앞서 말했듯이 노여움과 화를 품고 사납게 몰아붙이면서 고통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징계를 당하는 그 순간에는 아주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그것은 맞는 사람도 힘들지만, 징계하는 부모도 힘듭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통스러운 상황을 잘 참으면, 오히려 그 징계가 양약이 되어서 결국 우리 삶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징계가 없으면, 당장에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은 없지만, 나중에 비참한 처지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제멋대로 자라도록 내버려두면, 당장에는 편하지만, 결국 그 아이의 인생을 망치는 것입니다. 아이가 해달라는 대로 부모가 다 해주고, 집안의 모든 어른들이 도토리 같은 꼬마를 받들어서 키우면, 그 아이의 어린 시절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왕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아이를 위해서는 너무나 불행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기른 아이는 나중에 커서 결혼하면 이혼합니다. 회사 취직하면, 집어치우고, 남에게 폐만 끼치는 아주 쓸모없는 인간이 됩니다.

 

그래서 가만히 보면 신앙을 떠나서도 어려운 가정에서 맏이로 태어나서 동생들한테 치이고, 그렇게 양보도 많이 해보고,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하고 싶은 것을 절제도 해보고...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 사회생활도 조화롭게 잘합니다. 결핍도 배우고, 부족한데서 그것을 참는 것도 배우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도 배우고,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짐을 지는 것도 배우고, 잘못했을 때는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호되게 혼나서 용서를 비는 것도 배우고... 이런 것을 경험하면서 자란 아이들이 그 당시에는 고통스러운 것 같고, 그래서 때로는 부모를 원망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인생에 양약이 되어 원만한 대인관계를 이루면서 사회생활을 잘 해나갈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부모들이 우리 자녀들을 근실히 징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징계할 때, 징계 받는 자도 고통스럽고, 징계하는 부모의 마음도 힘들지만, 그럴지라도 지금 힘든 것 때문에 징계를 미루면, 나중에 더 큰 고통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우리를 때리실 때 우리도 고통스럽고, 때리시는 하나님의 마음도 아프시지만, 그러나 그 고통스러운 징계가 양약이 되어 결국 우리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도록 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바라보시면서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징계와 훈련을 통해서 우리의 인격으로 예수를 닮게 하시고, 우리의 믿음을 키우시고, 성숙시키시는 것입니다.


(11)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연달하다”는 말은 “훈련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훈련과 연단을 통해서 의로운 열매를 맺습니다. 의로운 삶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평강이 넘칩니다. 육신은 비록 고난으로 말미암아 수척해지고 겉사람은 날마다 후패하지만, 그 마음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평강이 넘치는 것입니다.


“(1)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2)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귀하게 쓰시기 전에 먼저 고난의 풀무를 통과하게 하셔서 훈련하시고 연단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룩하고 의로운 열매를 맺도록 하시기위해서, 우리가 바른 길을 벗어나 죄된 삶을 고집할 때 때리셔서 돌이키게 하시고, 또 적극적으로 죄를 짓지 않았다 하더라도 미성숙한 우리를 성숙시키시기 위해서 고난으로 훈련하시고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12)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13)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그러므로 힘이 없고 무기력하고 나른해진 손과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신앙의 똑바른 길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어그러져서 저는 다리를 고침 받아야” 합니다. 어그러졌다는 것은 탈골된 뼈를 말합니다. 그렇게 되어서는 경주를 제대로 해나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고쳐주셔야 합니다. 우리가 징계를 통해서 그러한 주님의 고치시는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래서 고난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누리는 최고의 특권인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시고 연단하실 때, 우리는 그 징계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또 반대로 낙심하지 말고, 그 징계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그 고통스러운 순간을 달게 인내하면서, 말씀 앞에서 자기 자신을 깊이 돌아보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늘 기억하면서 징계를 참는 우리 모든 한결지체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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