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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손재호
성경본문 요 16:16-24
성경본문내용 (16)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신대(17)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뇨 하고(18)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한 말씀이 무슨 말씀이뇨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19)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20)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21)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22)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23)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24)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강설날짜 2010-10-10

2010년 10월 10일 설교


근심이 기쁨으로


말씀:요한복음 16:16-24

 

우리는 지금 요한복음 16장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지난 두 주 동안 우리는 ‘보혜사 성령님이 오시면’(1-11)이라는 제목과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12-15)이라는 제목으로 공부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십자가에 죽으시고 말씀하신 대로 삼일 만에 부활하사 하나님께로 가십니다. 예수님께서 떠나가신다고 하자 제자들은 그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자신이 떠나가신 후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보혜사 성령님께서 오셔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시고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보혜사에 대해서 말씀해 주신 후 근심이 기쁨으로 변할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오늘 본문 1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나를 보지 못하리라’는 말씀으로 인해 근심에 사로잡혔습니다. 근심이 너무 컸기 때문에 그들은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는 말씀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고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는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신앙고백 이후 자신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그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는 말씀을 듣고 근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깨닫는 것은 결국 성령이 오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야 한다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1-15절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보혜사 성령님이 오셔서 하실 일에 대해서 미리 증거하신 것입니다.

 

2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조금 있으면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세상은 기뻐하리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제자들이 곡하고 애통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을 인하여 애통해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보고 세상은 오히려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곡하고 애통하지만 그러한 것이 어떻게 된다고 하십니까? 기쁨으로 바뀌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리니 세상이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20). 마치 여자가 아이를 낳을 때가 되면 그 출산의 두려움으로 인해 근심하지만 아이를 낳고 나면 아이를 낳은 기쁨으로 인해 고통을 다 잊어버리게 됩니다. 이와 같이 제자들의 근심이 오히려 기쁨이 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기쁨은 일차적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성취되었습니다. 요한복음 20:19-20절을 보면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워 모인 곳의 문을 걸고 있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안이 있으라고 하시면서 상처 난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자 제자들이 기뻐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성취는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이뤄집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쁨은 오늘 본문 22절에 보면 빼앗을 자가 없는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22). 그리고 23절에 보면 더 나아가 이러한 기쁨이 있도록 구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성령이 임하여 구하게 되는 것들이 자신들의 욕심이나 세상의 것들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였기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아버지께 구하신 것들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나누신 그 기쁨,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구하고 받으신 그 기쁨이 제자들에게도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4절을 보면 “지금까지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무엇이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기만 하면 받게 되고 그러면 우리가 기쁘게 될 것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여 제자들이 구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구한 것은 오직 아버지의 뜻을 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뜻대로 구하고 응답을 받으니 그 기쁨이 충만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정도로 기쁨이 충만하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복음을 전하다가 얻어맞고 감옥에 갇히고 고난을 당하면서도 기뻐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감옥에 갇혀있으면서 기록한 편지들이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입니다. 이 네 서신을 우리는 일명 옥중서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다가 매 맞고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4절에 보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쁨이 무슨 기쁨입니까? 세상으로부터 오는 기쁨이 결코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9절을 보면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약함, 핍박, 고난 중에서도 오히려 기뻐합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 자신들에게 물어보도록 합시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기쁨이 있습니까? 주님 주시는 기쁨이 있습니까? 전셋집에 살고, 직장도 시원찮고, 거기다가 자식들은 애를 먹이고, 하박국 선지자 식으로 말하면 무화과와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밭에 식물이 없고, 우리에 양과 소가 없을지라도 정말 구원의 하나님만으로 인해 기뻐하실 수가 있습니까? 없다고요.

 

그러면 예수님의 이 약속의 말씀이 잘못된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잘못된 것입니까? 우리가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와 꼭 같은 혈과 육을 가진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그 기쁨을 맛보며 살았는데 우리는 왜 그러한 기쁨이 없는 것입니까? 이것은 우리가 아직도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그 기쁨을 맛보지 못하였기 때문이거나 그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어 버렸습니까? 그 이유는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말씀 맡은 자들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 된 자들이 책망을 더 많이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귀에 좋은 말만 쫒아 다닌 사람들도 그 책임을 면하기는 어렵습니다. 자기의 사사로운 욕심에 이끌려 진리의 말씀을 사모하지 않고 그저 세상의 기쁨을 구하면서 이러한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자 살아온 자들도 그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다시 근심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성경이 약속하고 있는 그러한 기쁨이 없음을 인하여 근심하고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우리의 근심과 고민거리가 무엇입니까? 주님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한 안타까움, 주님의 말씀에 순종치 못하는 근심이 과연 우리에게 있기나 한 것입니까? 지금 이 시간에도 무엇이 제일 걱정이 되십니까? 자식의 공부 문제 입니까? 자신의 장래 문제 입니까? 건강 문제입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마태복음 6:24-34절에 보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제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돈이 떨어졌을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굶어 죽었습니까? 제가 이렇게 말하면 ‘목사님! 사람이 먹고 사는 문제만 있습니까? 다른 집 아이들 과외 시키는데 우리 아이도 과외 시켜야지요? 노후 대책도 세워야지요? 그러니 어찌 걱정이 안 됩니까?’ 이렇게 말하실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신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적어도 믿음의 사람이라면 세상 사람들과 같지 않아야 합니다. 요즘 아이들 보면 너무나 불쌍합니다. 왜냐하면 부모들의 과도한 공부에 대한 염려 때문입니다. 요즈음 아이들은 밤늦도록 학교와 학원에 붙들려 있습니다. 부모들은 오직 좋은 성적, 좋은 대학교를 요구합니다. 그러니 아이들이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사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세상에서 믿음의 부모들이라도 신앙교육을 제대로 감당하고, 분명한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살도록 도와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우리들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말로는 신앙이 제일이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공부가 제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말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하지만 세상의 욕심을 좇아 살도록 하지 않습니까? 부모의 이러한 이중적인 행동을 아이들은 다 압니다. 그래서 속으로 반발합니다. 아이들이 겉으로 반발하지 않는다고 안심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부모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아이들은 병들어 가고 반발심이 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과 행위가 다른 것을 성경은 무어라고 합니까? 디도서 1:16절에 보면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입으로는 예수님을 제일이라고 하고, 하나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세상의 영광을 좇아 행하는 것은 가증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근심의 내용이 바뀌어야 합니다. 세상에 대한 염려는 우리로 하여금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고린도후서 7:8-11절을 보면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하여 바울이 책망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들에게 근심이 되었으나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오히려 회개 하게하고 그들이 열심히 주를 섬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근심하고 있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근심과 염려와 걱정은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 앞에서 우리의 근심이 세상의 근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근심이 변하여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저나 여러분이 과연 무엇을 위한 근심을 하고 있습니까? 지금의 근심이 나중에 기쁨이 되는 근심입니까? 아니면 지금의 근심이 나중에 사망에 이르는 근심입니까?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성경 두 곳을 통해 무엇으로 근심하고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에스겔서 9:1-11절을 보면 “그가 또 큰 소리로 내 귀에 외쳐 가라사대 이 성읍을 관할하는 자들로 각기 살륙하는 기계를 손에 들고 나아오게 하라 하시더라. 내가 본즉 여섯 사람이 북향한 윗문 길로 좇아오는데 각 사람의 손에 살륙하는 기계를 잡았고 그 중에 한 사람은 가는 베옷을 입고 허리에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찼더라. 그들이 들어 와서 놋 제단 곁에 서더라. 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올라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하시고 나의 듣는데 또 그 남은 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그 뒤를 좇아 성읍 중에 순행하며 아껴 보지도 말며 긍휼을 베풀지도 말고 쳐서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 아이와 부녀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찌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 그가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성전을 더럽혀 시체로 모든 뜰에 채우라. 너희는 나가라 하시매 그들이 나가서 성읍 중에서 치더라. 그들이 칠 때에 내가 홀로 있는지라 엎드리어 부르짖어 가로되 오호라. 주 여호와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분노를 쏟으시오니. 이스라엘 남은 자를 모두 멸하려 하시나이까.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의 죄악이 심히 중하여 그 땅에 피가 가득하며 그 성읍에 불법이 찼나니. 이는 그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땅을 버리셨으며 보지 아니하신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아껴 보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고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갚으리라 하시더라. 가는 베옷을 입고 허리에 먹 그릇을 찬 사람이 복명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게 명하신대로 내가 준행하였나이다 하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어떻게 시행됩니까? 먼저 예루살렘 성읍 안에 일어나는 모든 가증한 일을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마에 표를 하고서는 심판이 시행되는 것입니다. 이마에 표가 없는 사람, 즉 예루살렘 성읍에 일어나는 가증한 일에 대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만 제외하고 나머지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심판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심판이 어디서부터 시작이 됩니까? 성전에서부터입니다. 누구로부터입니까? 장로로부터입니다.

 

베드로후서 2:6-8절을 보면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고 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성에 비록 롯이 살았지만 그 성읍에서 일어나는 일로 인하여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하였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에스겔 시대와 소돔과 고모라의 시대와 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무슨 근심이 있습니까? 더 소돔과 고모라의 풍요를 누리지 못하는 근심이 있다면 이것은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모두 소돔과 고모라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주는 것이란 이 세상의 풍요와 쾌락들 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사람이 살기에 좋은 곳이었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동산과 같았습니다(창 13:10). 그러나 아브라함이 살았던 땅은 소돔과 고모라에 비하면 너무나 척박한 땅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 성 한 가운데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일어나는 가증한 일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일들, 하나님보다 세상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더 사랑하는 이 세상을 보면서, 아니 나 자신을 보면서 탄식하며, 애통해 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오히려 이러한 세상에서 더 가지지 못하여 애통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셔야 우리로 하여금 죄가 무엇인지, 의가 무엇인지, 심판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령님이 임하여 예수님을 믿는다면서도 다른 염려, 다른 걱정이 앞선 것은 사탄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말씀 앞에서 세상 것에 목을 매고 있는 죄악 된 모습을 보면서 통회하며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가까이 하지 못함이 악이요, 고통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멀어져도 상관없이 살았던 우리의 모습을 인해 근심하며 애통해 하는 자들에게 주님께서는 분명히 세상이 알 수 없는 기쁨을 주실 것입니다. 저 천국에서의 기쁨만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케 하리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기쁨이 충만함으로 세상의 것들이 이러한 기쁨을 빼앗아 가지 못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이러한 기쁨을 맛보아 가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오직 주님만으로 만족하며 기뻐하는 자들이 되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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