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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손재호
성경본문 출 20:22-26
성경본문내용 (22)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라 내가 하늘에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가 친히 보았으니(23)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24)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25)네가 내게 돌로 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26)너는 층계로 내 단에 오르지 말라 네 하체가 그 위에서 드러날까 함이니라
강설날짜 2015-02-15

2015년 출애굽기 공부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말씀:출애굽기 20:22-26

 

오늘 말씀은 우상숭배와 제단에 관한 규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상숭배에 관한 규례(22-23)는 하나님의 일반적인 염려를 전달하고 있으며, 표현 방식이 단수가 아닌 복수를 취하고 있습니다. 즉 이 규례는 온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선포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반면 제단에 관한 규례(24-26)는 단수로 취급함으로써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상황에 관한 규례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2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라. 내가 하늘에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가 친히 보았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는 친히 음성으로 말씀을 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어떠했을까요? 모세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그 음성을 들었을까요? 22b절을 보면 “내가 하늘에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가 친히 보았으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좀 이상합니다.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고 해야 하는데 보았다고 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표현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하늘로부터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듣고 체험하였는지를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에서 하늘로부터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히 음성으로만 들은 것이 아니라 시각적으로 체험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모세는 여호와의 말씀이 음성으로 들리는데 백성들은 어떻게 들리고 보였겠습니까? 18절을 보면 “뭇 백성이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의 장면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시내산에서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그들은 우레와 번개와 나팔소리가 나는 것을 보고 들었습니다. 산에 연기가 자욱한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하나님의 임재 장면을 보고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듣는 것은 모세입니다.

 

신약에서도 이런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사울이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올 수 있는 공문을 받아들고 다메섹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대낮에 햇빛보다 더 밝은 빛이 하늘로부터 비친 것입니다. 사울과 그 일행이 다 땅에 엎드려졌습니다. 그때 하늘로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고 했습니다(행 9:4-7). 그런데 이 말씀에 보면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상세하게 들었는데 같이 가던 무리들은 빛과 소리만 들었습니다. 사도행전 22:9절에 보면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같이 가던 사람들은 빛만 보고 소리는 듣지 못했다고 합니다. 사울과 같이 가던 사람들이 빛만 보고 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것은 주님의 음성을 사울과 같이 구체적으로 알아 듣지 못했던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 26:13-14절에 보면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사울에게 히브리 방언으로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왕이여 때가 정오나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뒤발질 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기초해서 볼 때 바울과 함께 가던 사람들은 바울과 같이 빛을 보고 무슨 소리는 들었는데 바울과 같이 그 음성을 구체적으로는 알아듣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바울만 히브리 방언으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비슷한 경험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늘로서 말씀하시는 분을 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임재 앞에 두려워 떨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신보다 크신 분이십니다(대하 2:5-6). 이런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감히 은이나 금으로 신상을 만들 수가 있겠습니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하나님을 용납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전을 지어드리며,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 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신상을 만들고 싶어 하는 이유는 신을 자기의 이용물로 소유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상을 만들고 신전을 만드는 것은 결국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2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만든다고 하는 모든 신상은 다 우상입니다.

 

그런데 2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위하여 단을 쌓을 때 토단을 쌓으라고 하십니다.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24). 흙으로 쌓은 단은 비와 바람에 금방 허물어집니다. 그러므로 한번 쌓았다가 제물을 드리고 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러므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기 위하여 단을 쌓기는 하지만 그 단을 쌓은 것으로 인간의 솜씨를 뽐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단을 쌓고 싶다고 해서 아무데서나 단을 쌓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 쌓아야 합니다. 24절을 다시 보면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하신 것을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다 자기들의 이름을 위하여 삽니다. 자기들의 이름을 남기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산천을 보면 멋있는 바위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놓았습니다. 곳곳에 정자를 짓고 비석을 세워 놓았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에 나와서도 자기의 이름을 높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의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 단을 쌓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단이 쌓아지는 곳은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 기념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 토단을 쌓으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이름을 기념하기 위한 단을 쌓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솜씨를 제단에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25절을 보면 “네가 내게 돌로 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돌로 된 단으로 제단을 쌓아도 정으로 다듬지 말라고 합니다. 자연석 그대로 단을 쌓으라고 합니다. 정으로 돌을 다듬으면 그것이 부정하게 된다고 합니다. 돌을 정으로 다듬으면 제단도 보기가 좋을 텐데 왜 다듬지 말라고 하십니까? 그것은 사람의 솜씨가 제단에 들어가면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솜씨 발휘를 부정하게 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단은 왜 쌓게 하십니까? 그것은 24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여호와의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번제는 불로 태워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하나님 앞에 소나 양을 잡아서 불로 태워드리는 것이 번제입니다. 이 때 이 소와 양이란 사람이 준비하여 드립니다. 그러면 왜 이런 제물이 불에 살라져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불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로 태워버리는 것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런 심판이 있어야 그다음에 화목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기 위하여 제단을 쌓게 하시고 그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게 하시는 곳에 임하여 복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24).

 

그러면 복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흙이나 돌로 제단을 쌓아야 하고 소나 양을 번제로 바쳐야 하는 것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까? 물론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단을 쌓고 제물을 바치면서 불에 살라지는 것을 보면서 무엇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까? 사람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 불에 살라지는 것을 봄으로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단지 하나님의 자기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번제와 화목제로 인하여 용납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자기 솜씨를 발휘하려고 한다면 이것은 결코 용납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도 우리의 솜씨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예배해야 하는 것입니다.

 

26절을 보면 “너는 층계로 내 단에 오르지 말라. 네 하체가 그 위에서 드러날까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단을 쌓을 때 층계로 계단에 오르지 말라고 합니다. 층계로 계단을 만든다면 제단이 아주 높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층계를 높이 만들어서 올라가면 제물을 드리는 자의 하체가 그 위에 드러날까 한다고 합니다. 하체란 생식기의 완곡한 표현입니다. 그러면 왜 하체가 들어나면 안 되는 것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가서 살아야 할 가나안의 원주민들이 신을 섬기는 것은 음행과 연결이 되기에 성적인 것을 금하는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단을 쌓는 곳에서 인간의 하체가 들어나게 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은 인간의 전부를 부정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식 능력 자체도 부정한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이가 태어나면 축하를 합니다. 백일잔치도 하고 돌잔치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인간이 태어나는 것도 부정하다고 합니다. 레위기에서 여인이 임신하여 아이를 낳으면 부정하기에 정결하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12:1-8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여인이 잉태하여 남자를 낳으면 그는 칠일 동안 부정하리니 곧 경도할 때와 같이 부정할 것이며, 제 팔일에는 그 아이의 양피를 벨 것이요, 그 여인은 오히려 삼십 삼일을 지나야 산혈이 깨끗하리니 정결케 되는 기한이 차기 전에는 성물을 만지지도 말며 성소에 들어가지도 말 것이며, 여자를 낳으면 그는 이 칠일 동안 부정하리니 경도할 때와 같을 것이며 산혈이 깨끗하게 됨은 육십 륙일을 지나야 하리라. 자녀간 정결케 되는 기한이 차거든 그 여인은 번제를 위하여 일년 된 어린 양을 취하고 속죄제를 위하여 집비둘기 새끼나 산비둘기를 취하여 회막문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여호와 앞에 드려서 여인을 위하여 속죄할찌니 그리하면 산혈이 깨끗하리라. 이는 자녀간 생산한 여인에게 대한 규례니라. 그 여인의 힘이 어린 양에 미치지 못하거든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새끼 둘을 가져다가 하나는 번제물로, 하나는 속죄 제물로 삼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속할찌니 그가 정결하리라”고 했습니다. 여인이 남자를 낳으면 이레 동안 부정한데 월경 할 때와 같이 부정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덟째 날에 그 아이에게 할례를 행하게 합니다. 그렇게 하고도 여자가 33일이 지나야 산혈이 깨끗하여 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자를 낳으면 남자의 두 배로 정결 기간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아이가 태어나는 것도 부정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담과 하와의 범죄 때문입니다. 사람이 죄악 중에 잉태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자녀를 주실 때에 할례 이후에 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식 능력으로 태어나는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약속의 자녀로 태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21-31절을 보면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 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 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 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 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이 율법이 무엇인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율법과 복음을 아브라함의 두 아들을 비유로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에게서 두 언약을 다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과 복음인데 율법은 이스마엘이며, 복음은 이삭입니다. 이스마엘은 여종의 자식입니다. 여종에게서 난 자는 육체를 따라 태어난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이 사라의 말을 듣고 하갈을 취해 낳은 것입니다. 이것이 시내산이라고 합니다. 지금의 예루살렘 즉 땅의 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삭은 약속을 따라 태어납니다. 사라의 생리가 끊어지고 나서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사라의 능력으로 태어날 수가 없는 아이가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할례를 행하고 나서 태어나는 것이 이삭입니다. 이렇게 약속을 따라 태어나는 자를 위에 있는 예루살렘 곧 우리 어머니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종이냐, 아들이냐의 문제입니다. 종이란 계속하여 자기 솜씨를 발휘하여 주인에게 잘 보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아들은 아무런 솜씨를 보이지 않아도 사랑을 받습니다. 이것이 싫어서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합니다. 지금도 그러합니다. 육체를 따라 난 자들이 성령으로 따라 난 자들을 핍박합니다. 육체를 따라 난 자들은 계속하여 사람들의 솜씨 발휘를 요구합니다. 전도의 솜씨를 발휘하라고 합니다. 성전을 아름답게 짓자고 합니다. 세계선교를 우리가 담당하자고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온갖 인간의 노력과 기술과 땀과 희생을 요구합니다. 그런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합니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심으로 세상에서도 성공하고 죽어서도 하늘나라에서 상급이 많다고 합니다. 이것이 종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아들은 어떻습니까?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어느 부자 집에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합니다. 불효막심한 자식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에게 유산을 다 줍니다. 아들은 허랑방탕하며 창기와 어울려 재산을 다 말아먹어 버립니다. 마침 그곳에 기근이 일어나서 취직할 곳도 없습니다. 돼지 치는 곳에 취직하여 돼지가 먹는 음식을 먹으려고 해도 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때 이 아들이 자신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어서 아들의 자격이 없지만 자기 아버지 집의 종들도 배부르게 먹는데 그저 종의 하나로라도 여겨달라고 하려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합니다. 잃었다가 찾은 자라고 합니다. 죽었다가 살아온 자라고 하면서 목욕시키고 좋은 옷으로 갈아입히고 아들의 반지를 끼워줍니다. 그러자 누가 삐칩니까? 큰 아들입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순종하고 법을 지키고 종일 일하고 왔던 큰 아들이 아버지의 이런 소식을 듣고서 집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이 아들이 오히려 종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이렇게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허랑방탕하여야 아들이 된다는 말이냐’고 항의 합니다. 그런 분들에게 질문합니다. ‘당신이 언제 그렇게 살지 않은 적이 한번이라도 있습니까?’ 사람이 자기 외에 다른 사람이나 신을 자기보다 더 사랑하는 일이 가능한 일입니까?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자기를 위하여 하지 않습니까?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하는 것도 다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할 사람이 있습니까? 나는 나를 위하여 하지 않고 이웃을 위하여 무명으로 헌금을 많이 한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자기 자신이 얼마나 대견해 보이며, 보람된 기분을 느낍니까? 해 본 사람은 알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그런 일에 몰입을 합니다. 그런데 이것도 자기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이든 종이든 다들 똑 같습니다.

 

그런데 아들과 종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아들은 자기 솜씨를 발휘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종은 부지런히 자기 솜씨를 발휘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자기 솜씨를 발휘하여도 이스마엘처럼 쫓겨납니다.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고 능력을 행하여도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른다고 쫓겨나가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마 7:21-23). 아들도 아니면서 아들 행세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은 무엇을 믿습니까? 자신은 아들이라 대접받을 자격이 없음을 압니다. 솜씨 발휘는커녕 자신이 행한 것이 죄 뿐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를 하나님은 아들로 받아주십니다. 이것을 복이라고 합니다. 무엇 때문에 이런 복이 주어집니까? 24절을 다시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의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사람의 솜씨 발휘가 없는 제단에서 번제와 화목제로 인하여 복이 임한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예수님께서 주의 이름으로 오셔서 번제와 화목제물로 자신을 십자가에 드리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복이 주어짐을 알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이 은혜에 기초하여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단을 쌓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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