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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손재호
성경본문 창 12:10-20
성경본문내용 (10)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11)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에 그 아내 사래더러 말하되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12)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13)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하니라(14)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의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15)바로의 대신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취하여 들인지라(16)이에 바로가 그를 인하여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 수 나귀와 약대를 얻었더라(17)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18)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대접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느냐(19)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20)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 아내와 그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강설날짜 2008-08-31

2008년 8월 31일 설교


애굽으로 내려간 아브람


말씀:창세기 12:10-20

우리는 지난 시간에 아브람을 본토 친척 아비 집에서 복의 근원으로 불러내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12:1-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를 복의 근원이 될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본토 친척 아비 집에서 불러내시고 그와 언약을 맺어 주셨습니다. 그 언약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크게 세 가지 요소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자손언약, 땅 언약, 복 언약입니다. 결국 아브람 언약 속에 나타난 세 가지 요소들이 총체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아브람을 조상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형성시켜 이들을 가나안 땅으로 이주시키는 가운데, 그곳에 명실상부한 신정왕국을 건설하는데 집중이 됩니다. 이런 결과 열국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제사장 나라의 직분을 수행케 할 것을 가리킵니다. 결과적으로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의 본질 속에 계시된 하나님 나라 사상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계시의 도구로 삼아 당신의 뜻을 집행하시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의 표명인 사실을 간파하게 됩니다. 이후 아브람 언약은 구속사의 점진적인 진행과 관련해 각각의 언약적 요소들이 자손언약, 땅 언약, 열국의 복 언약의 성취라는 순서를 밟아 차질 없이 전개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불러내시고 그와 세운 언약을 어떻게 이루어 가십니까? 오늘은 아브람이 가나안을 떠나서 애굽으로 내려가서 당한 일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2: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아브람의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러나 당시 아브람의 형편이 어떠하였습니까? 아직 아브람에게는 자식 하나 없었습니다. 아브람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나이가 75세였습니다. 사래는 이때까지 임신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손 하나 없는 아브람에게 이 약속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가나안 땅은 이미 원주민들이 다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눈에 보이는 약속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허언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은 어떤 상황과 형편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주실 것을 믿고 그 땅에 거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점점 남방으로 내려갔습니다. 7b-9절에 보면 “그가 자신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 곳에 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더라”고 했습니다. 아브람은 자신에게 나타나 자손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여 단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거기 장막을 치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단을 쌓았습니다. 이것은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가나안 땅에 거하였음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세월이 흘러가면서 점점 살기 좋은 땅을 찾아 남방으로 옮겨갔습니다. 그러다가 가나안 땅에 큰 기근이 들었습니다. 기근이 심하여 그곳에서 더 이상 살기 힘들었습니다. 그리하여 10절에 보면 아브람은 어쩔 수 없이 애굽에 우거하려고 애굽으로 내려 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보고 아브람이 믿음이 없어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머물지 아니하고 애굽으로 내려갔다고 욕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룻기 1:1-5절을 보면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우거하였는데,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에 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유하더니.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 두 아들이 남았으며,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아내를 취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거기 거한지 십년 즈음에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 뒤에 남았더라”고 했습니다. 베들레헴에 살던 엘리멜렉이 기근이 들어서 이방인의 땅 모압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그와 두 아들이 다 거기서 죽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엘리멜렉과 두 아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이방 땅 모압에 가서 살았기 때문에 벌을 받아 다 죽은 것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약속의 땅에 붙어 있어야 합니까? 그런 식으로만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미 베들레헴이 사사들이 다스리던 때에는 사람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기에 베들레헴이나 이방이나 별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방 여인 룻을 구원하시고 룻을 통하여 다윗의 족보를 이어가게 하심으로 기존의 베들레헴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단순히 윤리 도덕적인 교훈을 끄집어내어서 ‘가나안 땅을 떠나니 벌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자기가 섬기는 교회를 떠나지 말고 잘 섬기자. 그러면 복을 받는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힘들고 어려우면 약속의 땅을 떠나도 되고, 교회를 마음대로 옮겨도 된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끝까지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기계적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건을 통해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뜻을 봐야 합니다. 룻기의 이 말씀도 하나님께서 이방 여인 룻을 택하셔서 당신의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룻기나 창세기에 보면 직접 아브람과 나오미의 가정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수준이 그 정도가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람처럼, 나오미 가정처럼 우리들도 기근이 오면 살길을 찾아 나서는 그렇고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브람 그러면 ‘부름을 받자 말자 갈 바를 모르고 다 버리고 떠났고, 아들 바치라니까 단번에 아내와 의논도 없이 아들 갖다 바쳤다, 그런데 우리는 예배당 건축을 위하여 집하나 못 팔아 바치느냐’ 이런 식으로 말하면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그렇게 밀어붙이는 식으로 나가게 되면 어떤 식이 되느냐 하면 ‘믿음은 불가능이 없다. 지금 눈에 보이지 않아도 큰 꿈을 가지고 그것을 위하여 믿음으로 이루어 냅시다’ 이런 식이 되어 버립니다. 성경은 이런 것을 믿음이라 하지 않고 바벨탑의 정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불굴의 의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아브람을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의 약속하신 대로 만들어 가시고 자신의 언약을 이루어 내시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그 땅에 기근이 들자 부족들을 살리기 위해 애굽으로 내려 간 것입니다. 애굽 땅에 가까이 이를 때에 아브람이 자기 아내 사래를 보고 뭐라고 합니까? 11-13절에 보면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들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컨데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고 했습니다. 자매님들! 남편에게서 이 말을 듣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말을 볼 때 아브람은 약한 사람이요,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요, 겁쟁이입니다. 또한 아브람의 가족은 다른 나라에 비하여 보면 아직 작은 부족으로 짐승을 끌고 이러 저리 옮겨 다니는 조그마한 유목민의 한 무리에 불과 합니다. 당시 아브람은 왕들 앞에서 자기 목숨 부지하기 위하여 벌벌 떠는 졸장부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이 자기 살기 위해서 아내에게 내 누이라고 해 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의 말에 대한 사래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사래는 아브람의 그 말에 그대로 순종을 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단순히 한 남편의 아내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래는 남편의 말에 순종합니다. 말도 안 되는 일 같은데 그녀는 아무 토를 안 달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이것이 순종할 일입니까? 인간적으로 보면 힘 있는 왕이 지참금을 주고 자기 아내를 사가지고 가는데 멀뚱멀뚱 보고만 있는 바보 같은 남편입니다. 자기 살기 위해서 아내를 팔아먹은 사람입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래는 이 남편의 말에 순종을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눈으로 볼 때는 아브람보다 사래가 훨씬 더 나은 사람 같아 보입니다. 자기 몸을 바쳐 남편을 살려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났다, 아니다 하는 윤리 도덕적인 기준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통하여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아브람의 이런 모습이 옳다거나 정당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사래에 대하여 뭐라고 합니까? 베드로전서 3:6절에 보면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 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라가 아브람을 순종하였듯이 아내들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딸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남편이 자기보다 믿음이 없어 보여도 그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남편을 주님처럼 대하십시오. 사래는 아브람의 그 엉터리 같은 요구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아브람과의 약속을 이루어 내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브람을 축복하면 복을 받고 아브람을 저주하면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12:3).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복으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복으로 부르셨기 때문에 아브람이 하나님의 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14-15절에 보면 사래의 아름다움을 보고 바로 왕의 대신들이 바로 왕에게 ‘아브람이라는 유목민이 왔는데 그 여동생이 너무나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보고 하였습니다. 15b-16절에 보면 바로 왕은 사래를 궁으로 취하여 드리고 아브람을 후대하였습니다. 아브람은 바로 왕으로부터 많은 양과 소와 노비와 나귀와 약대를 얻었습니다. 아브람은 마누라 팔아서 큰 부자 된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건이 다음에 일어납니다. 1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 왕과 그 집안에 큰 재앙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 재앙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여튼 하나님께서는 바로 왕에게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궁으로 취하여 드린 일 때문에 큰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이에 18절에 보면 바로 왕이 놀라서는 아브람에게 그 아내를 내어 주며,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대접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고 하면서 데려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20절에 보면 아브람은 그 아내와 그 모든 소유를 데리고 애굽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누가 잘못하였습니까? 바로 왕이 잘 못하였습니까? 아브람이 잘 못하였습니까? 아브람이 잘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재앙은 누가 받았습니까? 바로 왕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바로 왕은 사래를 강제로 빼앗아 온 것도 아니고 정당하게 여동생이라고 하기에 지참금을 후히 주고서 데려왔는데 하나님이 바로 왕의 집안에 재앙을 내린 것입니다. 바로 왕 같은 큰 나라의 왕이 얼마나 큰 재앙을 만났으면 혼이 나서 사래를 돌려주었겠습니까? 아마 사래에게 손도 못 대고 혼이 났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세상의 질서로는 풀리지 않는 면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면, 이런 질문이 됩니다. ‘하나님이 사랑이라면서 구약에 보면 어떻게 그렇게 잔인하게 전쟁을 하느냐, 어린 아이까지 진멸하라고 그러느냐’고 하면 우리는 무어라고 대답하십니까? 그 사람들의 죄가 너무 많아서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또 다른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이 공의의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저렇게 나쁜 놈이 떵떵거리며 잘 사는데 벌도 안 받는가?’ 그러면 하나님이 사랑이 많으셔서 오래 참는다고 그렇게 대답합니다. 이게 말이 되는 대답입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그렇게 말하고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나 옳습니다하고서 보는 우리의 시각입니다. 하나님이 팥으로 메주를 쑨다하여도 아멘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편을 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논리적으로 이해를 다해서가 아닙니다. 좀 더 생각해 보면 이 세상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기에 세상의 기준을 하나님이 무시하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숨겨준 여인입니다. 기생입니다.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족보에 올랐습니다. 이 세상의 입장에서 보면 매국노이고 더러운 여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충성한 것입니다. 세상의 질서를 보시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어려운 부분입니다만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 믿는다는 것을 단지 이 세상의 윤리 도덕적으로 조금 나은 삶을 사는 것을 예수 믿는 것으로 착각하고 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별 소용이 없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사건을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아브람이 아내를 팔았고 바로왕은 정당하게 그 지참금 주고서 사래를 취하려다 재앙을 만난 것이 왜 일어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이 아브람과 약속하신 그 약속 때문입니다. 아브람 언약의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첫째가,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마엘이 아니라 사래에게서 나오는 아이여야 하는 것입니다. 아이를 못 낳는 여인에게서 아이가 나오게 하심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계획을 아브람이나 바로 왕이 망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람의 편이 되셔서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아브람의 이름을 창대케 하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제 아브람의 이름은 점점 창대하여지는 것입니다. 무력이나 재물에 의한 힘이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권력을 가진 자. 돈을 많이 가진 자가 힘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무엇이 힘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힘인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의 힘이 아브람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이 애굽으로 내려간 일에서 바로 왕이 재앙을 만나서 아브람이 함부로 손대면 안 되는 사람인줄 알고 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왕 보다 더 놀란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아브람 자신입니다. 아브람은 자기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약속이고 무엇이고 간에 자기 살기에 급급하였는데, 그래서 약속의 땅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갔는데, 당시 세계 최대의 강대국인 애굽의 왕 바로 앞에서 벌벌 떨었는데, 도리어 하나님께서는 바로 왕이 아브람 앞에 떠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오면서 아브람이 무어라 말하였을까요?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실력이 대단하다 그랬을 것입니다. 애굽 하면 얼마나 크고 강한 나라인지 아직도 애굽의 피라밋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 거대한 돌들을 날라다 사막에서 세우려면 어느 정도의 세력이 있어야 하는지 짐작이 되시지요? 그러한 왕이 아무 것도 아닌 아브람 그냥 죽여 버려도 누구 한 사람 가타부타 말할 자가 없는 그런 아브람인데, 바로 왕에게서 살아 나왔으니 그것도 재물도 얻고 아내도 찾고, 얼마나 아브람이 하나님의 실력과 솜씨에 놀랐겠습니까? 이런 일들을 통하여 아브람의 이름이란 결국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그러한 창대한 이름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아브람을 복의 근원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복의 사람으로 부르셨기에 아브람을 선대하면 복을 받고 알든 모르든 아브람을 해치면 해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윤리 도덕적인 기준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죽음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말을 합니다. 그 말이 그들에게는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맞는 말 하면서 지옥 가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러므로 사람들에게 어렵고 닫혀 있는 것입니다. 오직 주의 은혜를 입은 자만이 성경이 보이고 자신의 죄가 보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에 아멘 하는 것이 세상의 학문을 잘 배우고 익힌 사람들에게 이해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믿는 것이 기적인 것입니다. 더 단순히 말씀드리면 하나님이 무어라고 말씀하시든지 우리는 예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흰 것을 검다 하면 예, 검은 것을 희다 하면 예, 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맹종이 아니냐구요? 사람의 가르침에 ‘예’하는 것은 맹종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시편 105:12-15절을 보면 “때에 저희 인수가 적어 매우 영성하며 그 땅에 객이 되어 이 족속에게서 저 족속에게로 이 나라에서 다른 민족에게로 유리 하였도다. 사람이 그들을 해하기를 용납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연고로 열 왕을 꾸짖어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 하셨도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많은 목사들이 자기들의 전유물처럼 사용하는데 아브람을 말하고, 다윗을 말하고,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약속하여 세우신 사람이기에 어떤 누구도 해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지키시는 것입니다. 비록 아브람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나가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브람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셨다면 아브람처럼 인도하심을 믿으시고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신 그 하나님께서 오늘날도 열심으로 우리를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고 계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시고, 이 하나님의 사랑에 항복하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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