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방문자 : 
    565
  • 어제방문자 : 
    1,156
  • 전체방문자 : 
    1,191,076
조회 수 1429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설교자 손재호
성경본문 막 3:1-6
성경본문내용 (1)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2)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거늘(3)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 일어서라 하시고(4)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5)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6)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니라
강설날짜 2015-11-15

2015년 마가복음 공부


한편 손 마른 자를 고치신 예수님


말씀:마가복음 3:1-6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한편 손 마른 자를 고쳐 주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공생 중에 안식일 논쟁은 모두 일곱 번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의 공생애 2년 초 가버나움 회당에서 있었던 일로 인식일에 귀신들린 자를 고치신 일로 인해서 안식일 논쟁이 벌어졌습니다(막 1:23-28, 눅 4:33-37). 두 번째는, 예수님의 공생애 2년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가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는 행각에 누워있던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일로 인해서 안식일 논쟁이 벌어졌습니다(요 5:1-18). 세 번째는,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말씀으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제자들과 밀밭 사이로 지나가시는 중에 제자들이 시장하므로 밀 이삭을 잘라 먹은 일로 인해서 안식일 논쟁이 벌어졌습니다(마 12:1-8; 막2:23-28; 눅 6:1-5). 네 번째는,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말씀으로 안식일에 한편 손 마른 자를 고쳐주신 일로 인해서 안식일 논쟁이 벌어졌습니다(막 3:1-6). 다섯 번째는, 예수님의 공생애 3년에 있었던 일인데 예수님께서 초막절을 맞이하여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가(요 7:10) 안식일에 노상에서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시고 고쳐주신 일로 인해서 안식일 논쟁이 벌어졌습니다(요 9:1-41). 여섯 번째는, 공생애 마지막 기간에 있었던 일로 안식일에 어떤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계시다가 18년 동안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던 한 여자를 고쳐주신 일로 인해서 안식일 논쟁이 벌어졌습니다(눅 13:10-17). 일곱 번째는, 역시 공생애 마지막 기간에 있었던 일로 어느 안식일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식사에 초청한 자리에서 있었던 일인데 그 자리에 고창 병든 사람이 있는 것을 보시고 고쳐주신 일로 인해서 안식일 논쟁이 벌어졌습니다(눅 14:1-6).

 

우리가 오늘 살펴볼 말씀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예수님의 공생애 네 번째 있었던 안식일 논쟁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한편 손 마른 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모의 하였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이 사건을 통해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계시가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1-2절을 보면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장하여 밀 이삭을 잘라 먹으므로 안식일 논쟁이 있은 후인 또 다른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병행구절인 누가복음 6:6절에 보면 누가는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었다”라고 좀 더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회당 안에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자리를 같이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송사할 구실을 찾으려고 예수님이 안식일에 그 사람의 병을 고쳐 주는가 엿보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병행구절인 마태복음 12:10절에 보면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고 예수님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하고 물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송사할 구실을 만들어 내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꼬투리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의 악한 생각을 이미 다 알고 계셨습니다. 누가복음 6:8절에 보면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 가운데 서라 하시니. 저가 일어나 서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냥 손 마른 사람에게 “한 가운데 일어서라”고만 하셨습니다. 그런데 병행구절인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자신을 잡아 죽일 꼬투리를 잡고자 하는 것을 다 아시고 한 손 마른 자에게 “일어나 한 가운데 서라”고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악한 마음을 다 아시고도 한편 손 마른 자에게 “일어나 한 가운데 서라”고 하시며 그들에게 도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편 손 마른 사람을 한 가운데 세우시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4절을 보면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병행구절인 마태복음 12:11절에서는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라고 반문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반문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실 것을 이미 잘 아시고서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양이 구덩이에 빠진 날이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그 양을 구해 낼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실제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일을 한다고 해서 누구도 탓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는 안식일관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동시에 안식일이 어떤 날로서 존재하고 있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2:12절을 보면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고 하셨습니다. 한갖 미물인 짐승이라 할지라도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다고 하면 건져 내어 살려 주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에 대한 문제는 더 이상 논할 것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짐승에게도 구덩이에서 건져내어 살리는 자비가 베풀어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렇게 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신 본의가 무엇입니까? 사단에게 매여 있던 아브라함의 자손을 풀어주는데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3:16절을 보면 “그러면 십 팔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공생애 여섯 번째 안식일 논쟁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18년 동안 귀신에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펴지 못하는 한 여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때 회당장이 안식일에 병을 고쳤다고 비난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그들에게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시면서 너희가 안식일에 소나 나귀를 마구에서 풀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않으냐고 하면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목적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사단의 매임에서 풀어서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 곧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게 하시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바로 이 일에 있었고, 예수님 자신 또한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여 그 일을 이루어 나가셨습니다. 그래서 참 안식 속에 들어온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공경하게 하십니다(요 5:23). 그러므로 마가복음 2:2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키려고 하는 일이 사람을 올무에 가두는 일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안식일이라고 해서 짐승이든 사람이든 간에 마땅히 주어야 할 먹을 것을 안 준다든지, 구덩이에서 건져내야 할 것을 안 건져 준다든지 하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구덩이에 빠진 짐승을 건져냄으로써 안식일의 본의 곧 안식일의 바른 정신을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오늘 본문 4b절을 보면 “…저희가 잠잠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이 왜 잠잠했을까요? 이들이 어느 것이 옳은지 몰라서 대답하지 못했을까요? 아닙니다. 어린아이조차 대답할 수 있는 사실을 그들이 모를 리가 없습니다. 저희가 잠잠한 까닭은 그동안 자기들이 만들고 지켜오고자 했고, 가르쳐왔던 안식일 규정을 근본적으로 손질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자부심인 안식일 준수와 관련해서 그들이 근본적으로 오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시인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이 예수님의 질문에 잠잠한 것은 그들이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었음을 스스로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진리보다 기존의 전통과 규례를 고수하는 일이 더 중요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낡은 가죽 부대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듣고도 인정하지 않는 이러한 태도를 ‘마음의 완악함’으로 규정하셨습니다. 5a절을 보면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 보시고…”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완악하다는 것은 단지 고집스러운 기질을 뜻하지 않습니다. 어떤 유혹이나 위험 속에서도 진리를 고집하는 태도는 우리 주님이 으뜸입니다. 무지함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라면 완악함은 깨달은 진리조차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지금까지 쌓아온 자신의 명예가 무너질 것에 대한 염려, 지금까지의 노력이 무가치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 익숙했던 관행을 포기해야 하는 것에 대한 귀찮음, 딱히 꼬집어 이유를 댈 수 없는 지난 삶에 대한 미련 등이 작용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작용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말씀을 통해서 마음에 분명하게 찔림을 받고서도 이전의 삶을 계속 살아가는 것이 완악한 태도입니다. 완악한 태도는 우리 주님을 근심케 했을 뿐만 아니라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게 했습니다.

 

밀밭 논쟁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을 변호 해 주셨습니다. 비록 제자들의 허물이 클지라도 대적들의 비난과 정죄를 막아주셨습니다. 반면 오늘 본문에서는 당신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자들에게 진노하셨습니다. 여기에 하나님 나라의 양면성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우리 주님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태도를 보이지 않습니다. 무조건 갈등을 피해 평화를 추구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임함이 그분을 따르는 백성들에게는 완벽한 보호를 제공했지만 그분을 거부하는 대적들에게는 진노를 나타내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비록 안식일에 회당에 있을지라도 즉 예배하는 시간에 예배하는 공간에 있을지라도 우리 주님의 진노에 직면할 수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자입니까? 완악함으로 주님의 진노를 부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들을 돌아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어긴다고 비판하는 것을 개의치 않으시고 치유를 행하셨습니다. 5b절을 보면 한편 손 마른 자에게 “네 손을 내밀라”고 하셨습니다. 저가 내밀자 곧 그 손이 회복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함으로써 안식일을 더욱 안식일 되게 하셨습니다. 안식일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사람들에게 더욱 분명하게 알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하기에 안식일이라고 해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제한시킬 수는 없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마 12:12). 이 말씀은 단지 한편 손 마른 자를 고쳐주는 그와 같은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라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곧 선행을 계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에 한편 손 마른 자를 고쳐 주시는 일을 하시는 것을 통해서 인간에게 질병이 주어진 부패의 원인이 되고 있는 죄로부터 그래서 그를 지배하고 있던 사단의 세력, 곧 죄의 궁극적인 결말인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여 그에게 진정한 안식을 누리게 하는 일을 하시는 것이 안식일의 본의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안식일을 내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그 일을 하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계시적 증거로서 예수님은 한편 손 마른 자를 고쳐주시는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편 손 마른 자를 무리들 한 가운데 세우시고 네 손을 내밀라고 하셔서 그의 손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모인 모든 사람에게 이 사실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한편 손 마른 자를 고쳐주신 것을 본 그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6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한편 손 마른 자를 고쳐 주신 것을 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회당 밖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들은 분기가 가득하여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죽일까 의논했습니다. 여기서 이들의 악함을 볼 수 있습니다. 헤롯당은 정치 집단입니다. 이들은 갈릴리를 다스린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를 중심으로 헤롯 가문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보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로마의 식민 통치를 긍정해야 했습니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유대 민족에 대한 자긍심이 강한 민족주의자들 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서로 상극인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함께 손을 잡았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서 진노하실 때 마땅히 회개 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진노 앞에서 그들은 분노하며 원수와 손을 잡고 대적을 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바리새인들을 중심으로 한 유대주의는 점점 더 굳어져갔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주님의 교훈을 듣지 못해서도 아니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진리를 깨달을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진실하다는 증거가 부족한 탓도 아닙니다. 그들의 완악함 때문이었습니다. 옛 형식을 고집하며 악을 행하고 생명을 죽이는 일도 정당화해버리는 바리새인들로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담아 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은 어떤 분이시며, 그 백성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그들을 통해서는 도무지 드러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공동체를 품을 수 없었습니다. 옛 형식에 집착하는 그들의 완고함이 너무 견고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그들은 헤롯당과 손잡고 예수님을 죽이고자 모의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옛 형식에 집착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과연 그들이 악을 행하고 생명을 죽이는 자라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경건한 겉모습 속에 감추어져 있었던 불경건함이 속속히 드러났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하나님 앞에 있다는 의식이 없는 신앙이었고, 참된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신앙이었습니다. 예배 공동체에 속한 자에 대한 사랑이 없다는 사실도 드러났습니다. 그들에게는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존경을 받는 것이 중요했고, 지금까지 누려왔던 명예와 권세를 지키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기능이 다했음에도 옛 형식을 끈질기게 붙들고 놓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명령하고 있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예수님께서 그들을 완악한 자로 평가하셨다면 성도의 평가도 그러해야 합니다. 주님을 바르게 따르려는 마음가짐은 있으나 허물이 큰 사람은 오래 참고 변호해주고 격려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진리를 알고서도 복종하지 않는 태도는 대적자의 마음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분이 사랑하는 자라면 나도 사랑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분이 대적하는 자라면 나도 대적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진정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물리적인 힘으로 대적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진리의 말씀을 담대하게 선언하며, 진리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활동을 통해서 대적해야 합니다. 그래도 완악한 반응을 보인다면 이전에 존경했던 자라 할지라도 돌아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시작부터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1:15).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실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사역의 시작과 함께 권세 있는 교훈과 능력으로 백성을 모으시고 실제로 당신의 나라를 이 땅에서부터 통치하셨습니다. 이때에 그분의 권세를 인정하고 순복하는 자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이나 헤롯당처럼 주님의 권세에 복종하지 않는 자는 적대적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말씀에 복종하면서 주님께 신뢰와 소망과 사랑을 둡니다. 하지만 적대적인 자들은 점점 진리를 부담스러워하고 주님에게서 멀어지며 대적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권세에 복종하든지 아니면 거부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반드시 선택해야 합니다. 그 중간 지대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습니다. 복종 아니면 거부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오늘날도 안식일 준수와 관련하여 그 이해가 달라 교회가 서로 대립하는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주일은 안식일의 지속으로서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매매는 물론이고 오락, 운동, 출근, 대인접촉…등 모든 분야에 걸쳐서 중단하고 오직 예배와 및 그와 관련된 일만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전혀 반대의 견해를 갖고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신약 시대는 복음 시대이지 율법 시대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런 율법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모두는 둘 다 문제가 있습니다. 안식일 준수를 법 제도와 의식 준수 여부에서 따지기 때문입니다. 경건성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안식일 준수는 그런데 있지 않습니다. 교회로 연합하며 예배하고 있는 내<우리>가 그 안에서 얼마나 주님과 함께 하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으며, 그래서 구원을 이루어 가고 있는가? 하나님의 나라의 의, 하나님의 성품을,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에서 나타내고 있는가? 그래서 안식일을 제정하여 주신 그 법의 참된 의미가 얼마나 잘 이루어져 나가고 있는가?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하여서 고민하고, 또한 애쓰는 날이어야 합니다. 삼가 주의하여서 경계할 것은 경계하고, 함께 일할 것은 일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은 가운데서의 안식일 준수는 율법주의가 되든지, 아니면 반율법주의가 되고 맙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우리로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알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 알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은 완악한 마음을 회개하고 주님 앞에 겸손히 나아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신 우리 주님 앞에 믿음으로 나아 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주님 안에서 죄사함을 받고, 주님이 주시는 참된 안식을 누리는 복된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TAG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강설날짜 조회 수
629 [마가복음 7장] 장로의 유전을 쫓는 것을 책망하신 예수 file 막 7:1-23 손재호 2016-03-06 1825
628 [마가복음 6장] 물 위로 걸어서 오신 예수님 file 막 6:45-56 손재호 2016-02-28 1383
627 [마가복음 6장]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 file 막 6:30-44 손재호 2016-02-21 1435
626 [마가복음 6장] 열두 제자를 전도여행 보내신 예수님 file 막 6:7-29 손재호 2016-02-14 1556
625 [마가복음 6장] 고향에서 배척 받으신 예수님 file 막 6:1-6 손재호 2016-02-07 1492
624 [마가복음 5장]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예수님 file 막 5:35-43 손재호 2016-01-31 1943
623 [마가복음 5장] 혈루증 앓는 여인을 고치신 예수님 file 막 5:21-34 손재호 2016-01-24 1484
622 [마가복음 5장] 거라사 광인을 고치신 예수님 file 막 5:1-20 손재호 2016-01-17 2294
621 [마가복음 4장] 풍랑을 잔잔케 하신 예수님 file 막 4:35-41 손재호 2016-01-10 1896
620 [마가복음 4장] 겨자씨 비유 file 막 4:30-34 손재호 2016-01-03 1515
619 [마가복음 4장] 스스로 자라나는 씨 비유 file 막 4:26-29 손재호 2015-12-27 1473
618 [마가복음 4장] 등불 비유 file 막 4:21-25 손재호 2015-12-20 2155
617 [마가복음 4장] 씨 뿌리는 자의 비유 file 막 4:1-20 손재호 2015-12-13 2057
616 [마가복음 3장]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가 형재요 자매 file 막 3:20-35 손재호 2015-12-06 1738
615 [마가복음 3장] 열 두 제자를 사도로 세우신 예수님 file 막 3:13-19 손재호 2015-11-29 1437
614 [마가복음 3장] 많은 사람을 고치신 예수님 file 막 3:7-12 손재호 2015-11-22 1116
» [마가복음 3장] 한편 손 마른 자를 고치신 예수님 file 막 3:1-6 손재호 2015-11-15 1429
612 [마가복음 2장]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file 막 2:23-28 손재호 2015-11-08 1104
611 [마가복음 2장]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file 막 2:18-22 손재호 2015-11-01 1944
610 [마가복음 2장] 세리 레위를 부르신 예수님 file 막 2:13-17 손재호 2015-10-25 1475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 39 Next
/ 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