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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손재호
성경본문 빌 1:22-30
강설날짜 2017-07-30

2017년 빌립보서 공부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한 생활

말씀:빌립보서 1:22-30

 

우리는 지난 시간에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바울 사도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자기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20). 바울은 이를 위하여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하였습니다(21).

 

오늘 말씀은 지난 시간에 계속되는 말씀으로 바울 사도가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할 것을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이 말씀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교회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22절을 보면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육신으로 사는 것이 자기 일의 열매라고 합니다. 여기서 ‘육신으로 사는 것’은 지상생활의 존재 방식을 말합니다. 곧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러면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열매’(karpov" 칼포스)라는 말은 어떤 일의 결과로 맺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즉 어떤 일의 결과로서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바울은 자기가 사는 것을 자기 일의 자연스러운 대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먼저 살고 그 다음에 일을 생각합니다. 즉 존재가 먼저이고 그 다음에 사역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정반대로 생각했습니다. 먼저 그의 사역이 있고, 그 결과로 자신의 존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삶이 오직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는 사명 때문에 살며, 사명을 위해서 살며, 사명이 없으면 삶의 의미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만일 그가 살아 숨 쉰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위해서 일한 것에 대한 대가로 자연히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살지 않고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살아 존재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처럼 바울 사도는 그의 삶을 그의 일에 대한 열매로 생각했습니다. 즉 그에게는 먼저 일 곧 사역이 있고 그 결과로 그의 삶이 주어진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22b절을 보면 바울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 땅에 사는 것과 죽어서 주님께 가는 것 이 둘 중에 어느 것을 택하여야 할지 알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둘 다 좋기 때문에 어느 편을 선택해야 할지 선뜻 결정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처지를 마치 두 사이에 낀 모습과 같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23-24절을 보면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두 사이에 끼였다’는 말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 속에 있는 두 가지 욕망이 무엇입니까? 하나는,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것이고, 또 하나는, 육신에 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이라고 했을 때 ‘떠난다’라는 단어가 ‘ajnaluvσαι’(아날루시아)인데 원래 항해하기 위해서 배의 닻을 풀거나 길을 떠나기 위해서 천막을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죽는 것에 대한 완곡한 어법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말은 천국에 계신 그리스도와 더불어 교제를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지금 천국 곧 낙원에 계십니다(참조. 눅 23:43). 물론 바울은 지금 땅에서도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교제를 누리고 있지만 천국에서는 그와 함께 직접적이고 충만한 교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12절에 보면 바울은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와 이러한 충만한 교제는 죽음 후에 즉시로 누리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자신만 생각한다면 이 세상을 떠나서 낙원에 계신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좋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하나의 욕망은 육신에 거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4절을 다시 보면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죽어 그리스도와 함께 충만한 교제를 누릴 욕망이 있지만 죽지 않고 살아서 이 세상에 머무는 것은 너희들 곧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인하여 더욱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곧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이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는 더 유익하고 요긴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죽어 그리스도와 함께 충만한 교제를 누릴 욕망과 살아 있어서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신앙을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이 두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어느 편을 택합니까? 25-26절을 보면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생사를 두고 고민한 끝에 마침내 강한 확신에 도달합니다.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25). 여기서 ‘내가 확실히 안다’라는 말은 바울이 무슨 계시를 받았거나 환상을 보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기 마음을 비우고 기도하는 가운데 곧 하나님 편에 서서 어느 것이 하나님 나라에 더 유익한가를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때 신비적인 것이거나 특별한 방법에 의지하면 안 됩니다. 자기 생각을 비우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는 가운데 어느 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유익한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곧 이기적인 자기 생각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나라만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뜻이 우리 마음에 분명히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확신한 것이 무엇입니까? 25절을 다시 보면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내가 살 것’(mevnw 메노)이란 것은 원문을 그대로 직역하면 ‘내가 거할 것’ 또는 ‘내가 머물 것’이 됩니다. 이것은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것”이라는 말로 보충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바울 사도는 자신의 유익을 택하지 아니하고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유익이 되는 편을 선택하였습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주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의 이러한 선택은 ‘사랑의 원리’를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고전 13:5),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것(고전 10:24)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자신이 죽지 않고 살고 빌립보교회 성도들과 함께 거하는 목적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25절을 다시 보면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라는 이 말은 바울이 죽지 않고 이 땅에 머물게 되면 그것은 곧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한 것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26절을 다시 보면 이것은 궁극적으로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자랑’이라는 말은 ‘kauvchma’(카우케마)라는 말인데 이것은 ‘자랑하는 행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랑의 대상, 자랑거리’를 말합니다. 바울 사도가 죽지 않고 빌립보교회 성도들과 함께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자신을 인하여 더욱 풍성해 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 사도를 통해서 참 목자 상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 개인의 입장에서는 빨리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풍성한 은혜를 누리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믿음과 기쁨을 위하여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하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성도들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의 이 삶을 우리가 본받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울과 같이 성도들의 믿음과 기쁨을 위해서 헌신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교회 가운데 복음의 진보의 역사가 있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27-28절을 보면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고 합니다. 이제 바울 사도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 말합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합니다. 여기서 ‘생활하라’라는 단어는 ‘politeuvomai’(플리튜오마이)인데 원래는 ‘자유로운 시민으로서 살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빌립보 사람들은 로마 시민이었습니다. 그러나 빌립보교회 성도들은 로마 시민이기 이전에 하나님 나라의 천국 시민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은 천국 시민으로서 그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빌립보교회 성도들은 천국 시민으로서 서로 협력하며 아무 일에든지 대적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의 시민이기 이전에 천국 시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그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서로 협력하며 두려움이 없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행동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에 있어서 얼마나 오래 사는가, 언제 죽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며 사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오래 살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 기울입니다. 바르게 살려고 하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번 새정부 인사청문회를 보면서 이와 같은 모습을 우리가 볼 수 있었습니다. 공직자로서 흠이 없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오래 살고 짧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렸습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 사도가 이렇게 권면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27-28절을 다시 보면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바울 사도가 빌립보교회 성도들로부터 듣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일심으로 서서 한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일심으로’라는 말은 원어상으로 ‘한 영으로’ 또는 ‘한 영 안에서’라는 말입니다. ‘한 영 안에 있다’는 말은 우리가 다 똑같은 성령을 받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2:13절에 보면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 한 성령 안에서 행해야 합니다. 곧 우리가 한 마음, 한 뜻으로 복음 신앙을 위하여 협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한 영 안에 있다는 것의 구체적인 모습은 어떠합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한뜻으로 복음 신앙을 위해서 협력하는 것입니다(27). 27절을 다시 보면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협력한다’라는 말은 원어에 보면 ‘sunaqlevw’(쉬나들레오)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원래 ‘함께 달려가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혼자서 달려가는 자들이 아니라 함께 달려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한 성령을 받은 자들로서 한 성령 안에서 복음 신앙을 위하여 한 마음, 한 뜻으로 함께 협력하며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보기를 원하였습니다. 이것은 당시 빌립보교회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당시 빌립보교회 가운데는 하나 되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곧 그들 가운데 다툼과 분열이 있었습니다. 빌립보서 4:2절에 보면 바울 사도는 유오디아와 순두게 두 사람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면서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어라”고 아주 강력하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교회가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한 성령 안에서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협력하는 이와 같은 아름다운 소식을 듣기를 원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성령 안에서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협력하지 않을 때 복음의 진보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교회 가운데도 한 성령 안에서 한 마음, 한 뜻으로 협력하는 이름다운 역사가 있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복음의 큰 진보의 역사가 있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또한 한 영안에 서 있는 또다른 모습은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을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28절을 다시 보면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대적하는 자들’이란 원어상 ‘반대 편에 누워 있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이것에서 ‘반대자들’, ‘대적자들’이라는 뜻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에도 복음의 대적자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대적자들은 오늘날에도 많이 있습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어디든지 대적자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원수 사탄 마귀가 활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휴가도 없고 휴식도 없습니다. 잠간 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다음에 공격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의 대적자들이 많다고 해서 두려워하지 말고 이상히 여기지도 말아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3:13절에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28절에서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흔들리지 않고 견고히 서 있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대적자들로 인해서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굳게 서서 흔들림 없이 복음을 증거 하는 자들로 서 있는 모습을 보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 신앙을 위하여 한 마음, 한 뜻으로 협력하며, 대적자들로 인해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서 복음의 증인으로 사는 것이 한 영 안에 서 있는 모습입니다. 이런 은혜의 역사가 우리교회 가운데 있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라고 합니다. 28절을 다시 보면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빙거’라는 말은 ‘보여 주는 것, 증거’를 의미합니다. 곧 아무 일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에 굳게 서 있는 것이 대적자들에게는 ‘멸망의 증거’가 되고, 구원 얻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믿음에 굳게 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에 믿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계속해서 믿음에 굳게 서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고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이날까지 많은 대적자들 가운데서도 흔들림 없이 믿음 가운데 굳게 서 있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 위에 굳게 서서 복음을 위하여 서로 협력하며, 담대히 복음의 증인으로 살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교회 가운데 복음의 큰 진보의 역사가 있게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이 높이 드러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 29-30절을 보겠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어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셨다’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은혜를 주신 목적은 두 가지라고 합니다. 첫째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십자가의 은혜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을 믿고 싶어도 하나님을 믿을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 곧 성령을 선물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2:12-1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12-1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또 다른 목적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신앙생활에는 고난이 따르기 마련입니다(참조. 딤후 3:12; 골 1:24). 아무런 고난이 없이 신앙생활을 하면 좋겠다 싶지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사탄이 역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악한 마귀 사탄의 역사는 세상의 종말이 와야 끝이 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난 받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깨닫고 우리의 신앙을 성숙하게 연단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깊이 이해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참조. 벧전 2:21-24).

 

바울 사도는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 30절을 다시 보면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보면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다”라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와 같은 영적인 싸움을 싸우는 자들입니다. 이 싸움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로 부르셨습니다(딤후 2:3). 따라서 우리는 이 싸움을 계속해서 싸워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싸움은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고 합니다(30). 바울은 이런 싸움을 싸웠으며, 지금도 계속해서 이런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디모데후서 4:7-8절을 보면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오늘날 우리도 바울과 같이 복음의 대적자들로 인해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 감당해 가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믿음의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우리가 달려 갈 길을 다 간 후에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의의 면류관을 받아쓰는 복된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에게 있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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